‘그녀에게’

예술, 결핍이 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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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2월 18일 9:00 오전

영화

 

 

음악이나 오페라, 연극 등이 대본이나 악보를 통해 복기가 되는 것과 달리 춤은 쉽게 복기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오롯이 안무가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그 공연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장에 없던 관객은 시간과 함께 사라진 공연을 단순한 영상기록으로는 온전히 다시 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춤을 사랑하는 예술가가, 온전히 안무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경외감을 담아 찍어준다면 평면 화면 속 춤도 관객과 소통하는 대화의 기록이 된다.

 

피나 바우슈가 전하는 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의 시작과 끝은 공연장이다. 공연장에서 만난 베니뇨와 마르코에서 시작해 같은 공연장에서 만난 마르코와 알리샤로 맺는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여는 것은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작품이다. 막이 열리듯 영화가 시작되면 피나 바우슈의 ‘카페 뮐러’ 공연이 진행 중이다. 눈을 감은 두 무용수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한 남자는 여자들이 부딪치지 않게 의자와 탁자를 필사적으로 옮긴다. 피나 바우슈의 이 작품은 주인공 마르코와 베니뇨의 상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엔딩 장면은 피나 바우슈의 ‘마주르카 포고’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작품은 극적인 장치와 연기에 가까운 춤을 통해 삶과 그 생명력을 낙관하는 작품이다. 마르코와 알리샤가 만나는 장면에 배치된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

실제로 피나 바우슈의 열렬한 팬이었던 알모도바르는 앞선 영화를 통해 피나에 대한 경외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 속에 녹여냈다. 당연히 피나 바우슈에 대한 이해와 존경심, 애정을 가지고 그녀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 하는 감성과 열정을 영상에 기록해 낸다. 온전한 공연의 기록은 아니지만 ‘그녀에게’에 등장하는 작품은 영화 속 인물의 상태를 상징하기 위해 세심한 카메라 워크와 내밀한 감정을 담아내는 표정 하나를 놓치지 않고 피나 바우슈가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는 듯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모두가 익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공연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피나 바우슈를 기억하는 방법은 텍스트와 영상, 아카이빙된 글과 그 글로 인해 새롭게 창조된 가치들이며, ‘그녀에게’는 피나 바우슈를 영상으로 기록한 또 다른 예술작품으로 남았다. 더욱이 이 작품이 가치 있는 것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페 뮐러’가 그녀의 은퇴 후, 오직 영화 속 기록을 위해 다시 공연되었다는 것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전하는 말

식물인간이 된 발레리나 알리샤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자 간호사 베니뇨는 평소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와 사랑을 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마르코는 여자 투우사 리디아를 취재하러 갔다가 사랑에 빠지지만, 투우를 하다가 소에게 짓밟혀 리디아는 식물인간이 된다. 사랑하는 여인들이 식물인간이 된 상황에서 만난 베니뇨와 마르코는 기묘한 우정을 나눈다. 사랑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그들의 운명을 엇갈리게 만든다.

‘그녀에게’는 각기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워지는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쓸쓸한 사람들, 상실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 때문에 결국 나란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담은 영화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상대방의 따뜻한 심장이 아니라, 계속 되짚어 가야 하는 나의 상실감이라는 사실은 공허하다.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는 교차로 없이 각자의 길로 떠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사이의 차이는 각각 사랑하는 방법, 사랑을 보내는 방법,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멜로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그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구심점이 되어 되돌아가고야 마는 일상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수단으로 예술이 있다는 것을 서브 텍스트로 깔아둔다.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기억은 편린처럼 공기 속에 떠돌고 예술 작품은 기억과 교감이 되어 쓸쓸하고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예술이 전하는 말

영화 속 알리샤와 리디아는 식물인간이다. 살아있다고 믿으면 산 사람이고, 생명을 잃었다고 포기하면 거의 죽은 사람에 가깝다. 두 여인을 대하는 베니뇨와 마르코의 태도도 각각 다르다. 한 사람은 희망하고, 한 사람은 절망한다. 이들의 태도는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예술을 자신의 정서로 경험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예술을 타인과 만나는 교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 속 마르코는 영화 속에서 피나 바우슈의 공연을 보면서, 리디아의 집에서 뱀을 죽이면서, 브라질 출신의 가수 카에타노 벨로소의 노래 ‘비둘기(Cucurrucucu Paloma)’의 노래를 들으면서 세 번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은 그의 과거, 혹은 과거의 정서와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 예술은 자신의 정서와 만나게 해주는 도구이다. 알리샤를 짝사랑하는 베니뇨는 발레리나였던 알리샤가 식물인간이 된 후, 그녀가 좋아했던 무성영화와 무용작품을 보면서 그녀가 겪었을 감정을 대신 체험하고 알리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고 교감한다. 그에게 예술은 타인의 정서와 만나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

 

예술, 기록으로서의 영화

영상 매체의 발달로 동영상 매체의 기록성을 주목하지만, 영상이라는 평면이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한계는 분명하다. 공연자와 관객과의 분위기, 그때의 시대상, 그리고 그 공연의 시대적 가치와 의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카메라 촬영만으로는 영상에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가치 평가와 기록의 영역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재현된 춤에 주목하고, 그 가치를 되짚어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에게’에 등장한 피나 바우슈의 공연은, 바우슈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예술작품이 되었다. 춤이 영화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메타포로 전이되는 순간, 영화 속 춤은 단순한 장치가 아닌 가치 있는 기록물이 된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득 영화에서 피나 바우슈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하고 벅차지 않은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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