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된 저작권, 다시 만나는 라벨

‘볼레로’의 모든 신비를 걷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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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2월 18일 9:00 오전

라벨 에디션이 새롭게 출판한 ‘볼레로’

 


아시아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라벨 ‘볼레로’ 자필 악보의 첫 페이지
©reproduced with kind authorization of Robert Lehman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남긴 오케스트라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곡은 단연 ‘볼레로’다. 작곡된 지 90년이 된 ‘볼레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품 가운데 하나이고, 앞으로 더욱 많이 연주될 것 같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2016년부터 ‘볼레로’의 저작권이 소멸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프랑수아 드뤼에 의해서 라벨의 오케스트라 작품을 자필보를 통해 새롭게 출판하는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물인 ‘볼레로’가 최근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행사에서 라벨의 ‘볼레로’가 연주됐다. 라벨은 1차 세계대전과 깊은 관계를 지닌 프랑스 작곡가이다. 그는 1895년 20세의 나이로 군 복무를 마쳤지만,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다시 군입대를 자청했다. 1미터 61센티미터의 작은 키, 그리고 불과 48킬로그램의 체중 때문에 그의 의지는 거부되었다. 라벨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은 운전병으로 가장 지독한 전투가 벌어졌던 베르덩 부근에 소속되어 프랑스를 위해 참전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강렬한 라벨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에 발생한 민족주의적인 발상에는 반대했다. 뱅상 댕디, 카미유 생상스, 알프레드 코르토 등으로 구성된 프랑스 음악 보호 연맹의 음악가들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음악을 프랑스에서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자고 했으나, 라벨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독일음악 연주를 금지하는 것으로 프랑스 음악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독일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음악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라벨의 입장이었다. 역사와 시간은 그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소멸된 저작권

‘볼레로’는 지난 2016년 5월 1일자로 저작권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이제는 누구나 라벨 ‘볼레로’의 새로운 악보를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저작권이나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도 ‘볼레로’를 연주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11월 11일 파리 개선문 아래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행사에서 유럽 공동체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볼레로’를 연주했다. 연주는 생방송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수백만의 시청자들이 보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도 어쩌면 ‘볼레로’의 저작권 소멸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이보다 조금 복잡하다. ‘볼레로’의 저작권을 지니고 있는 뒤랑 출판사는 최소한 미국에서만큼은 2025년까지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볼레로’의 저작권을 되찾으려는 소송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수아 드뤼는 라벨 에디션의 첫 번째 작품으로 ‘볼레로’를 출판했다. 프랑수아 드뤼는 과거 파리 오케스트라, 리옹 국립 오케스트라 등의 단체에서 예술감독·행정감독으로 일했고, 라벨의 작품을 출판한 뒤랑 출판사에서도 일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라벨 에디션의 ‘볼레로’

라벨 에디션에는 지휘자 파스칼 로페, 캉탱 인들레와 음악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이들의 야심은 라벨의 자필보와 가능한 한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볼레로’의 모든 신비를 걷어내고, 작품을 투명하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볼레로’는 자필보를 제외하고 출판되었던 악보를 바탕으로 하면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이다 루빈슈타인의 위촉으로 라벨이 발레를 위해서 작곡한 1928년 버전과 1929년에 발표한 연주회용 버전이다. 첫 번째 버전은 1928년 11월 22일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초연되었다. 이 두 버전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1928년의 발레 버전에서는 ‘볼레로’의 리듬을 두 대의 북이 연주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연주회에서는 대부분 한 사람이 볼레로 리듬을 연주한다. 프랑수아 드뤼의 추측에 의하면, 당시에는 15분가량 이 리듬을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어려워서 두 사람의 북 연주자를 지시해 놓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개연성이 높은 것은 두 대의 북을 오케스트라 좌우에 배치해서 입체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무대 위의 무용수들에게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1928년 발레 버전에는 두 번째 마디의 3번째 박에 첼로가 8분음표 둘이 아니라 4분음표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1929년 연주회 버전에서 8분음표 둘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라벨 자신이 ‘볼레로’를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한 포핸즈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해서 편곡했는데, 이 피아노 편곡 악보에서는 8분음표 두 개로 적어놓았다.

라벨 에디션의 ‘볼레로’는 지휘자와 음악학자는 물론이고 음악애호가들까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대한 자료를 담아 놓았다. 라벨이 ‘볼레로’의 작곡을 착상한 순간에서부터 두 가지 버전의 악보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라벨 에디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볼레로’는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디아길레프와 매우 가까웠던 이다 루빈슈타인은 라벨에게 스페인 색채의 발레 음악을 위촉하였고, 이때 알베니즈가 피아노를 위해 작곡한 ‘이베리아’를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편곡할 것을 라벨에게 제안했다. 라벨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이베리아’를 편곡하거나 오케스트레이션하는 권한이 작곡가 아르보스에게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라벨은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작품을 작곡해야만 했다. ‘볼레로’는 그렇게 태어났다.

라벨의 ‘볼레로’를 연주하지 않는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볼레로’의 관계는 매우 각별하다. 1932년 4월 7일 라벨의 지휘로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볼레로’를 연주했다. 라벨에 의해서 맺어진 이 특별한 인연은 계속 이어졌고,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그 이후에도 매년, 어떤 해에는 몇 번이나 ‘볼레로’를 연주했다. 올해 1월 17일에는 조르주 벤자민의 지휘로 라벨 에디션의 악보를 사용한 ‘볼레로’를 선보이기도 했다.

라벨 에디션의 작업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미 두 번째 작업으로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선정해 준비 중이다.

 

김동준(재불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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