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검열, 심의 속의 순수음악 작곡가들

작곡가들의 정치적 참여와 순수음악 짓기, 다시 생각해보기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4월 15일 9:00 오전

한국 작곡가 열전_4

한국의 근현대 작곡가를 소개하는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많이 받는 질문들이 있다. 첫째, 그들의 음악을 어디서 들을 수 있냐는 것. 둘째, 그 음악은 어떤 형태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작곡가들에 대한 자료는 귀하다.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 그들의 발표가 이어졌지만 당시 빈약한 녹음과 촬영 환경 속에서 그것을 지금의 생각처럼 ‘저장’하고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지점이 한국근현대 작곡가 연구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빈약한 성과물들로 인해 발굴과 연구의 의지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그런데 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이른바 순수음악만 작곡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국내에서 작곡가들에게 상아탑은 그들의 장르적 테두리를 명확하게 하는 ‘순수성’과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장이었다. 그런데 작곡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들이 상아탑 밖으로 나와 자신의 음악적 이념을 대중과 국민에게 관철시킨 때가 있었다. 장르적으로 따지면 가사가 있어 음악에 담긴 뜻을 헤아리기 쉬운 성악 장르가 그러했다. 대표적인 것은 가곡과 그에 관한 보급 운동이다. 여기까지는 ‘순수음악=서양음악(클래식)=가곡’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1960년대 즈음 시작된 국민개창운동 참여다. 오히려 이들이 당시 남긴 ‘작품’은 우리의 삶에 녹아든(?) 음악이었고 ‘누구나 한번쯤 불러 본 노래’였다. 1967년을 전후로는 국민개창운동 성격의 질적 변화도 가져왔다.

 

역사의 이면에서 태어난 작곡가들의 작품

1961년 5·16군사정변과 함께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철통같은 단결’ ‘대동단결’ 등과 같은 국민의 화합을 강조한 정권이었고, 그 공동체주의는 ‘총화(總和)’라는 말로 대변되었다. 이러한 총화 이데올로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등장한 이데올로기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10월 유신은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 대통령의 간선제 시행, 의회 권한 제한, 언론 탄압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1960년대 집권 초부터 국민개창운동이 등장하여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국민개창운동은 해방 전이던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주최)과 조선음악협회(주관)가 행한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 음악정책-예를 들어 노래로 조선의 대중을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와 닮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국민개창운동은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5·16군사정병 이후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하며 ‘사회 정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직속기관인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1년 6월부터 국가재건 범국민운동 등 이른바 ‘신생활 재건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며 생활 영역 곳곳에 실천 요강을 제시했다. 이는 절미, 절전, 절수, 외래사치품 배격, 유흥의 자제, 간소복장 착용 등은 물론 건전한 예술적 취미를 권장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가요 보급과 국민개창운동 전개를 행했다.

1962년 ‘노래의 메아리’ 사업은 국민개창운동의 대표적인 경우다. 목표는 “전 국민이 누구나 10곡 이상의 건전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사업을 위해 10곡이 발표되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라는 가사의 동요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1903~1988)을 비롯하여 서양음악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참여한 이들의 대부분은 상아탑의 음악대학 교수들이자 대중음악 장의 대척점에 있는 이들이었다. 1963년 대통령 문화훈장을 수상한 이흥렬(1909~1980)은 숙명여대 음대에, 김성태(1910~2012)는 서울대 음대에 재직했다. 1967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칸타타 ‘민족의 축원’을 작곡했떤 김동진(1913~2009)과 지휘자 출신의 김대현(1917~1985)은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에 재직 중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서양음악의 기악과 작곡을 공부한 세대이며, 해방 후에도 여기에 매진한 이들이다.

‘노래의 메아리’의 연장선상으로 1967년 ‘다함께 노래 부르기’ 사업을 위한 지정곡(20곡)이 발표됐다. 김희조(1921~2001)는 1961년에 예그린악단에 작·편곡자로 입단한 작곡가였다. 예그린 악단은 북한 피바다가극단의 대형 가무극에 대적할 음악극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 하에 김종필이 주도 하에 1961년에 창단된 종합예술악단. 나운영(1922~1993)은 도쿄제국고등음악학교 본과 유학 후, 여러 대학을 거쳐 1960년대에 연세대 음대에 재직 중인 작곡가였다. 박태현(1907~1993)은 일본동양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1966년, 박태현은 서울시향 여성 단원들을 주축으로 한 서울여성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기도 했다.

국민개창운동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공보부 및 정부 각 기관에 의해 확대·추진되며 국가시책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박정희의 제6대 대통령 당선(1967)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 실시 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추진에 이바지한다”는 목표 아래, 새마을운동(1970)과 유신체제(1972) 이후의 “새마을운동과 10월 유신의 정신 구현”이라는 목표 아래 움직였다.

그렇다면 작곡가들이 정권의 음악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였던 것일까, 아니면 수동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근래의 근현대역사학계의 연구성과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는 정권의 ‘억압’만 존재한 것뿐만 아니라, 대중의 동의-저항-순응을 넘나드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근현대사를 ‘억압’과 ‘저항’이라는 틀로만 파악해온 기존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1960년대 음악계 역시 정치와 음악의 협력과 저항을 통하여 발전과 퇴보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작곡가들의 참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참여는 유행가(=대중음악)에 대한 불편했던 감정들을, 자신들의 ‘순수’음악을 통해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우리 것 찾기, 음악정화, 순수 

대중음악(유행가=퇴폐음악)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드러난 것은 이 시기만의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신가정’지 같은 여성 잡지에는 주요 독자였던 여성(어머니)와 아동(자녀)에게 관철되었던 서양음악(순수)/대중가요(퇴폐)의 ‘이분법’에 대한 논조의 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글을 쓴 이들은 대부분 서양음악에 종사한 성악가나 작곡가들이었다.

이처럼 이분법에 의해 보호받고 누적된 서양음악의 힘은 대중음악을 억압하는 1960년대 정권의 분위기와 맞물리며 상아탑의 작곡가들의 행동주의와 사회참여적 자세에 불을 지켰다. 예를 들어 1962년 한국방송윤리위원회가 설치되자 1965년 가요심의전문위원회를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관영기관에 참여하고 ‘심의’와 ‘검열’을 통해 자신들의 자세와 생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0월 7일 연예협회, 음악계, 방윤 대표 등이 회합하고 최근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방송가요의 정화를 위해 방송가요심의위원회를 조직하고 창립총회를 근일 중에 갖기로 했다. 모였던 인사들은 이혜구, 이흥렬, 김대현, 모기윤, 나운영, 이관옥, 이성삼, 조백봉, 박시춘, 손목인, 유한철 씨 등이다.(경향신문 1965년 10월 11일)’

가요심의에 모인 인사들 중 이혜구(국악학), 이흥렬·김대현·나운영·이성삼(작곡), 이관옥(성악) 모두 순수음악 종사자들이다. 1965년 3월 방송가요심위원회는 작사자 월북이라는 이유로 79곡을 금지했고, 1994년 8월까지 총 130여 차례에 걸쳐 846곡을 방송 금지시켰다. 이후 음악에 ‘정화사업’이라는 말까지 사용되자 작곡가들이 옹호한 순수성은 어떤 공격조의 언어와 생산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추구한 ‘순수’란 무엇이었나? 1960년대 문화예술계에서 통용되던 ‘순수’의 의미를 먼저 짚고 넘어가본다. 1963년에 발간되며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 ‘흙 속의 저 바람 속에’는 문학평론가 이어령(1934~)의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윷놀이, 돌담, 백의(白衣), 한복, 밥상, 한국의 여인, 화투, 춘향 등 한국의 전래·전통문화를 통해 한국적 정서의 심층을 탐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이것은 한국인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한 문화’였고, 가속화된 도시화와 산업화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들이었다. 일례로 1980년에 시작되어 2002년에 종영한 드라마 ‘전원일기’는 잃어버린 고향을 향해 부르는 노스탤지어 연가(戀歌)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흙 속의 저 바람 속에’의 영상적 대중화라 생각한다. 어쨌든 ‘잃어버린 기억’인 전래·전통문화에서 탐구하는 인문적 작업은 1960년대 지식인들이라면 응당 돌봐야 할 지적 작업 중 하나였다. 1967년에 ‘매일경제’는 “한국의 얼을 되찾는 캠페인”이라는 취지하 ‘한국을 찾자’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것 역시 문학·예술·사상·풍속·여성·멋 등 한국 특유의 문화예술을 살펴보는 19회의 연재물이었다.

앞서 말한 ‘정화’란 곧 ‘우리 것 찾기’와 이어졌다. 음악에서는 반공(反共)과 반(反)왜색으로 나타났고 월북예술가들의 음악과 왜색가요는 금지와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두 음악이 남긴 빈자리에는 대중의 귀를 유혹할 수 있는 음악들이 필요했고, 그 자리는 정권의 국민개창운동에 동의하는 음악가들이 설 곳이었다. 그 중 나운영은 남달랐다. 소수의 특정 관객만을 향하던 상아탑의 음악가들과 그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개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기  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질이 낮은 이유의 하나는 음악을 전 공한 실력 있는 사람들이 대중가요계로 많이 진출하지 않 는 때문이 아닐까요?

나운영: 그래요. 국민개창운동 같은 것 혼자하려도 되는 것도 아니 지만 순수음악입네하고 하는 사람들 대중가요나 경음악은  거들떠볼 생각도 안 해요.

기  자: 그분들이 좋은 대중음악을 만들고 보급하는데 기여하면 프 라이드가 깎인단 말인가요?

나운영: 그렇죠. 그러나 순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많은 분들은  졸업장 한 장과 독창회 한두 번 정도를 가지고 실력도 없이  평생을 도도하게 지내거든요. 사실 기악이나 성악계를 보 더라도 소위 순수음악가보다도 기능면에서나 실력으로나  월등하게 뛰어난 분들이 경음악계엔 허다해요. 첫째 그들 은 매일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니까요.

기  자: 나 선생, 한번 용감하게 신년부터 건전한 대중가요 좀  작곡 해보시지 않겠어요?

나운영: 장차하겠습니다. 시인들도 좋은 대중가사 좀 만들어 주었 으면 좋겠어요.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7개월 뒤, 나운영이 동아일보와 나눈 인터뷰(1960년 12월 22일)의 일부다. 이에 이어 그는 같은 해 동아일보(6월 9일)를 통해 “국민개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라”며, “4·19 혁명이 가져온 것 중에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일본유행가의 범람이라고 기회 있는 대로 공언한 바 있으나 본 정권은 그 일본유행가가 순조롭게 보급된 뒤에서야 단속을 시도하였으니 ‘행차 뒤 나팔 격’이다. 생활혁명은 오직 애국가요의 개창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나운영은 ‘선(先) 토착화, 후(後) 현대화’라는 관점을 통해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작곡가이다. 그의 토착화는 그의 작품과 논문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음악론이라는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현대화는 윤이상(1917~1995), 이상근(1922~2000) 등과 함께 여전히 거론되고 있다. 다만 앞서 본 ‘대중화’나 ‘국민화’라는 연구코드로 나운영 읽기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 그가 보여준 위와 같은 모습과의 ‘거리두기’는 사실상 해방 이후 상아탑의 음악을 보존하는 논리이자 원리였다. 따라서 이러한 코드로 앞서 거론한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작곡가들을 해석하고 읽어본다면 한국 작곡가를 둘러싼 담론의 겹과 층은 더욱 두터워지리라 생각한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외면. 자연과 내면에만 몰두한 노래  

‘건전’은 ‘순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60~70년대의 음악은 5·16군사정변의 역사적 의의를 선양하는 바탕 위에 정권의 논리에 ‘건전한’ 내용만이 검열을 통과했고, ‘순수’한 내용의 작품만이 국가의 격려를 받는 모범예술품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회와 정치를 향한 비판이나 풍자조의 작품은 당연히 배제되었고, 사회와 시대에 밀착한 주제들은 작곡가들의 무의식 속에서 배제되었다. 유신헌법과 난무하는 국가적 폭력 속에서도 작곡가들은 비사회적인, 그래서 사변적이고 순수 지상주의로 점철된 작품만을 썼다.

이러한 ‘순수’는 가사로 하여금 내용과 뜻이 뚜렷이 표출되어야 했다. 가사가 없어도 작곡가가 지닌 비판의 어조가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순남은 1948년 ‘예술평론’지에 게재한 ‘나의 음악수업’에서 순수한 예술이 지닌 공격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에 돌아와서 누구보다도 음악의 순수성을 고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시대에 있어서 비교적 창작생활을 순조롭게 이루어진 편이다. 1944년 12월 작품발표회 시에도 기악곡만 발표하였다. 가곡의 작품은 최소한에 그치고, 태반 기악곡을 썼다. 따라서 군가나 국민가요운동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삼선(三仙)초등학교(사립)와 여의전(女醫專)에서 교편을 들고 있는 한편에 작품을 썼으며, 그 작품을 통하여 그 시대의 울분을 하소연하였다. 악인(樂人)으로서는 강장일, 박용구, 이범준 제형들의 동지적인 힘이 크게 나를 북돋아 주었다. 그 후 드디어 해방은 왔다. 여기서 나는 순수에 대하여 반기를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일제시대의 우리들이 가면을 쓰고 소극적으로나마 싸워온 방법은 이미 우리들에게 낡아빠진 과거의 방편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 나는 8월 10일, 드디어 처음으로 대중 속에 발을 힘차게 들여 넣을 역사의 찰나를 가졌다.’

따라서 가곡은 당시 정권이 옹호한 순수성-비공격성, 비사회비판성-을 적확히 담을 수 있는 장르이자 음악적 그릇이었다. 1960년대에 한국음악사에 다시 안 올 창작가곡의 르네상스가 펼쳐졌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그 노래들은 ‘공통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고향을 소재로 한 향토성, 사랑과 이별, 순결함 그리움, 애달픔 등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 일변도의 내용들이었다. 5·16이 일어나던 1961년, 정권을 위한 음악적 정책과 협조를 위해 설립된 한국음악협회는 1966년에 아세아재단의 원조로 김성태, 김동진, 나운영, 김대현, 김순애, 김달성, 이흥렬, 정윤주 등에게 2편의 가곡 작곡을 위촉했다. 김달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먼 후일’,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 김중석의 ‘영(影)’, 박태현의 ‘녹이(綠耳)’, 이상근의 ‘가을 저녁의 시’와 ‘아가(雅歌)’, 한성석의 ‘달과 꽃의 이야기’ 등의 가곡집, 애창하고 애청되던 김달성의 ‘진달래꽃’, 구두회의 ‘사랭이와 씀바퀴’, 오동일의 ‘강이 풀리면’ 등이 자연을 소재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 김성태의 ‘못 잊어’, 조두남의 ‘분수’, 김규환의 ‘님이 오시는지’,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 신귀복의 ‘얼굴’, 이수인의 ‘석굴암’ 등도 그리움, 연애적 감정 등의 곡이었다. 김성태, 김동진, 김대현, 이흥렬은 ‘노래의 메아리’에, 나운영은 ‘다함께 노래 부르기’ 사업에 함께 한 작곡가들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1960년대의 이어령의 1963년 에세이집 ‘흙 속의 저 바람 속에’의 음화(音畵)인 셈이다. 물론 1960년대 들어서 본격화된 산업화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순수와 자연 찾기로서의 음악하기로 볼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반론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국현대예술사대계Ⅲ’ 중에 “4·19와 5·16은 미술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라고 묻는 글이다. 이 책에서 “1960년대 전반의 미술을 시대정신으로 읽어내고자 할 때 우선 주어지는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다”라며 1950년대를 통해 1960년대 미술계가 현실과 접점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연 소재를 추구한 선호했던 1960년대 창작가곡을 바라보는 데에 적용 가능한 성찰이다.

‘사실은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격동과 현실을 우리 미술이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주문같이 보인다.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고 전쟁을 거치며 분열적이고도 냉전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논리로 고착되어 갔던 1950년대, (···) 민족적 비극이나 전쟁 체험 같은 뜨거운 현실은 오히려 기피의 대상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작품생산의 적극적 근거로 삼기에는 힘든 여건이었다. 그 대신에 1950년대 화단의 빈자리는 여인좌상, 노인좌상, 꽃, 풍경 등을 소재로 한 나름한 완상물(玩賞物)들에 의해 메꾸어졌다.’

이 가곡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가곡의 원형으로 불리는 것들이 많다.

한편, 1960년대 문화예술의 한쪽에서는 순수성과 비정치성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회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예술과 정치의 관계 대신에 부정의 정신이 자리하거나 그 부정성을 예술 자체의 존재양식으로 내면화는 아방가르디즘이 뿌리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에는 백낙청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가 게재되었다. 백낙청은 순수문학론이 지배하던 기성평단에 대한 치열한 전복적 목소리를 의욕적으로 표출하는데, 저자는 순수문학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깨트리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유연한 비평적 입장을 보여주자고 한다. 가령, “문학이 역사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그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해야겠다는 말과는 매우 다르다. 후자가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인데 반해 앞의 것이야말로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여 삶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순수문학론의 이념적 뿌리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현재 ‘한국가곡이 밤’ 같은 타이틀의 공연에서 불리고,  KBS 1FM 등에서 흘러나오는 창작가곡들에 담긴 자연을 통해 표상화된 ‘순수’, 그리고 1960년대 가요정화운동을 위해 ‘실용’음악을 작곡한 ‘순수’음악가들의 움직임은 완료되고 종결된 역사가 아니다.

이러한 음악들에 녹아든 정권 이데올로기가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된 창작가곡 작곡과, 해외 가곡 수용 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물론 향후 살펴볼 작곡가들의 중요한 이면이기도 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참고문헌|박헌호, ‘한국인의 애독작품-향토적 서정소설의 미학’,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이강숙 외 ‘우리 양악 100년’, 조희연,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 최유준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황병주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 예술사대계Ⅲ’, ‘동아일보’ ‘경향신문’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