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소리, 그 완전한 몰입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5월 6일 9:00 오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44분 18초의숨 막히는 몰입이 시작된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들어 심취했을 때, 우리는 ‘몰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삶에서 무언가에 이토록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우리는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4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열 번째 정규 음반이 한국에 출시됐다. 타이틀은 ‘Immersion’, 바로 몰입이다. 음반 타이틀에 이 단어를 내세울 정도로 그녀의 이번 음반은 아티스트 본인은 물론이고, 듣는 이에게도 몰입감을 준다. 음반 작업 방식도 이전과는 다르다. 그동안 주로 라이브처럼 순간적으로 녹음하고 끝나는 원 테이크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번에는 작업 기간을 대폭 늘려 소리를 탐구하고 되짚어갔다. 마치 소리라는 재료로 음악을 실험해 보듯이. 함께한 레이블에도 변화가 있다. 2008년 한국인 최초로 독일 재즈 프리미엄 레이블 ACT와 계약을 맺는 등 주로 재즈 전문 레이블과 함께해왔던 그녀가 이번에는 세계 3대 음악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 뮤직 그룹과 손을 잡았다. 팝 음악 중심의 워너 뮤직 그룹과 함께한 이번 음반은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를 띤다. 다수의 자작곡은 물론이고,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편곡 작품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현대 재즈뿐만 아니라 포크·블루스·발라드·샹송 등 다채로운 색깔이 나윤선을 통해 몰입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된 것이다.

이번 음반의 시작이 궁금하다.

그동안의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녹음 방식도 좋았으나, 실수가 있어도 되돌리기 힘들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녹음 말고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이전 레이블과 계약이 끝나고 새로운 곳과 함께하게 되며 기회가 찾아왔다. 음반을 준비하며 사운드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사람을 찾았고, 우연한 기회로 2013년 니나 시몬 헌정 음반을 통해 만났던 프로듀서 클레망 듀콜과 다시 연락이 닿게 되었다. 그는 클래식 타악기를 전공한 현대음악작곡가이자 현대무용가로 영화음악·팝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아티스트와 작업을 이어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프로듀서다. 그에게 내가 만든 자작곡을 들려주었더니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악기를 쌓아둔 스튜디오 안에서 새로운 소리를 찾는 데만 몰두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둘이 머리를 싸매고 연주해 본 뒤에야 녹음하자는 결론을 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나던 작업이 이번에는 일주일 넘게 걸렸다고.

일주일은 초반 작업이었고, 녹음은 2주 동안 진행했다. 총 3주가 걸린 셈이다. 보통 이틀 만에 끝냈던 그동안의 작업에 비해 어마어마한 시간이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완전히 빠져있었다. 음반 타이틀처럼.(웃음)

프로듀서가 클래식 음악을 베이스로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작업하는 데 있어 서로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었을 것 같다.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같이 울듯이 나는 무대 안팎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경험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프랑스 특유의 색채감을 지닌 클레망과 함께 작업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소리가 들렸고,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어쿠스틱 악기의 소리를 변형해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50의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신선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다음에는 더 심화된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음반에 첼리스트 피에르 프랑수아 듀퍼도 참여했다고.

그는 첼리스트이자 재즈 드러머이면서 퍼커셔니스트이다.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는 뮤지션이어서인지 어떠한 선입견이나 제한 없이 음악을 가지고 놀더라. 알베니스의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함께 연주했는데, 편곡한 악보를 보여주었더니 곧바로 첼로를 뉘어서 기타처럼 연주해 보였다. 그와 함께한 새로운 시도들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번 음반에는 자작곡도 다수 수록되어 더 눈길을 끈다.

곡 작업을 위해 2주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머물렀다. ‘이 세상의 끝’이라 불리며 하루에도 수십번 날씨가 바뀌는 변덕스런 곳이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장소다.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연주하러 자주 찾는 곳인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연주하는 사람도 많다. 이곳에서 15곡 정도를 썼고, 클레망에게 보내주었다. 그가 듣고서는 음반 전체를 자작곡으로 채우자 했지만, 내가 손사래를 쳤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 다른 사람의 곡을 재편곡해서 내 나름의 해석으로 부르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곡을 쓴 것은 언제였나?

재즈 공부를 위해 프랑스에 와서 주로 스탠다드나 기존의 곡들을 했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이 곡을 써보라고 하더라. 그렇게 얼떨결에 곡 하나를 쓰고, 거기에 한국어 가사를 붙였다. 프랑스에서 낸 첫 음반 ‘One Way’에 수록했는데, 그 곡이 프랑스 재즈 라디오 방송(TSF)에서 소개되었다. 한국어로 부르는 재즈가 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나 보다. 그 이후로 조금씩 작업을 이어간 것이지 자작곡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제 꽤 많은 작품이 쌓였을 것 같다.

그렇지도 않다. 한 번도 내가 곡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걸 ‘완벽주의’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뭐가 되고 싶고, 어떤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엘라 피츠체럴드나 루이 암스트롱 같은 사람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이 자리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이 음악을 하셨고, 그 덕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접하며 소리에 대한 귀 훈련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윤선을 디바혹은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가.

솔직히 ‘디바’ ‘세계적인’ 이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것은 맞지만, 세계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의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것에는 정말 감사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꿈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꿈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 재즈와 만나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재즈를 시작했는데, 재즈와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우연한 만남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류회사에 다니다가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로 데뷔해 ‘오션 월드’와 ‘번데기’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뮤지컬은 노래와 춤, 연기 모두 잘해야 하는 장르가 아닌가. 한국 뮤지컬 1세대이신 어머니를 보며 뮤지컬 배우가 얼마나 많은 끼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처럼 노래 조금 할 줄 안다고 뮤지컬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숨 걸고 임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에게 창피한 마음도 들었고. 하지만 노래는 더 배우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내게 ‘재즈’를 권유했고, 파리에 최초의 재즈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에 무작정 떠났다. 재즈가 미국에서 태어난 음악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으니 친구 말만 듣고 간 것이다.(웃음) 불어도 잘 못하고 노래도 몰랐지만, 그저 열심히 했다. 많이 배우고 싶은 마음에 동시에 학교 네 군데를 다니며 재즈와 성악을 공부했다. 공부를 이어가다 보니 프랑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크고 작은 무대에도 설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재즈와의 만남이 지금의 삶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다.

-‘재즈라 하면 보통 미국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프랑스에서 만난 재즈는 어땠나?

종종 사람들이 “네가 미국으로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프랑스로 가길 잘한 것 같다. 그곳에 있으면서 유럽의 많은 나라를 다녔고, 다양한 뮤지션을 만났다. 그리고 오히려 미국보다 유럽의 재즈 시장이 훨씬 크다. 듣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재즈 뮤지션도 많고 70년 역사의 니스 재즈 페스티벌처럼 설 수 있는 무대도 많다. 동네마다 재즈 페스티벌이 하나씩 있을 정도다.

즉흥성이 강한 재즈를 하는 데 있어 어떤 요소들이 영감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하다.

일 년에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다보면 250일은 길 위에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이 이동 시간이니 시간을 내어 산책하거나 사색할 시간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많이 보고 듣고 접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공연하는 곳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차를 타고 가면서 듣는 그곳의 라디오 소리, 그들의 말투와 행동, 끝나고 만나는 관객들의 반응과 몸짓,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이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사람한테 가장 많은 영감을 받는 것 같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 그들이 풍기는 냄새와 소리, 맛이 다 다르다.

뮤지션으로서 바라는 음악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내 음악이 일상의 배경이 되길 바란다. 사람과 가까운 음악,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음악이 되어 마음을 움직이고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면 한다.

그래서일까, 나윤선의 음악에서는 편안하고 진실한 사람 냄새가 난다.

재즈라는 음악 자체가 솔직한 음악이다. 일부러 꾸며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피부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무대 공포증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파인 옷도 못 입는다. 그래도 내 모습을 진실되게 다 보여드리려 한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솔직한 모습으로 보였으면 한다.

이번 음반의 많은 수록곡이 여러 종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다. 나윤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은가.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사랑이 없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 모두 자신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고, 환경 문제도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인 것 같다. 100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이 너무 없어서, 자꾸만 없어져서 안타깝다. 흔했던 공기인데, 미세먼지로 인해 숨쉬기조차 어려워진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흔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도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스스로 더 ‘사랑, 사랑, 사랑’을 되뇐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허브뮤직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