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을’ & ‘나는 광주에 없었다’

봄빛이 찬란할수록 시리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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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3일 9:00 오전

연극 REVIEW

 

5월이 계절의 여왕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때에 가장 많은 종류의 꽃이 피기 때문이라고 한다. 벚꽃과 목련, 라일락의 4월을 거쳐 아카시아나 장미같이 향 짙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는 화려한 계절. 이렇게 봄은 짙어져가는 색과 향으로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런데, 봄이 찬란할수록, 화려할수록 마음 한켠이 아리다. 봄을 만끽하기엔 무언가 불편하고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겪은 사건들, 공동체가 경험한 기억들, 그 역사가 찬란한 봄을 역설적인 비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봉건 작·연출의 ‘잃어버린 마을’(4월 27일~5월 1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고선웅 연출의 ‘나는 광주에 없었다’(김경주·안준원·고선웅 작, 5월 4~6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이 두 편의 연극은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 아픈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은 1948년 제주도 4·3항쟁을,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어 각각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사건을 무대화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두 사건이 지독하게 닮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잃어버린 마을’

마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도 말할 수 없었던 시간들

‘잃어버린 마을’은 4·3항쟁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방법과 시각이 독특하다. 사건의 재현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사건을 겪어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플롯은 두 가지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첫 번째 플롯은 1979년과 1980년을 배경으로, 동혁이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중심이 된다. 4·3항쟁 당시 곤을동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혁은 그 자리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가족을 건사하고 있다. 서울 간 아들이 교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지만 1980년 5월 간첩으로 몰려 고문 받을 때 동혁이 아들을 꺼내서 제주로 데리고 온다. 이 과정에서 동혁이 4·3항쟁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받는 아들에게 힘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지는데, 그것이 두 번째 플롯이다. 1948년과 1949년을 배경으로 곤을동 마을사람들이 당한 일들, 동혁이 서북청년단 행세를 하게 된 내력을 보여주는 두 번째 플롯은 첫 번째 플롯과 교차하면서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과거를 오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연극이 독특한 것은 첫째, 4·3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을 연관지었다는 점이며, 둘째, 피해자의 시선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 수많은 희생자, 거기에 누명과 오명을 씌워 모독하며, 지금까지도 진실을 밝히지 않는 행위까지 지독하게 닮아 있는 두 사건을 한 무대에 올림으로써 우리의 현재가 지독한 고통의 과거를 거쳐 왔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 의도하지 않게 주민들을 탄압하는 가해자였던 동혁의 죄책감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훨씬 넘어서는 고통으로, 가해자도 궁극적으로 최고 명령권자 혹은 최고 권력자에 의해 만들어진 희생자라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연출가 김봉건은 4·3의 상황을 무대화하는 데에 정성을 들였다. 돌을 괴어놓은 무대와 대나무숲, 연신 들려오는 파도소리로 시청각 환경을 만들었고, 4·3의 잔혹성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조명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정제된 몸짓과 소리로 표현된 4·3항쟁은 말로 설명하거나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얼마나 구차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런 설명으로는 결코 형언할 수 없는 사건이자 상처라는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젊은 연기자들의 연기가 아직은 성글었지만 그 중심을 중견 연기자들이 잡아주었고, 많은 움직임들을 위해 신체훈련에 노력을 들인 것이 눈에 띄었다. 1970년대인데 현재의 단어들(아갈머리, 꽐라 등등)이 갑자기 튀어나와 당황스러웠고, 현수막이 꼭 무대 위에서 내려와야 했는지 의아스러웠으며, 내레이션의 효과적 활용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하지만, 4·3항쟁에 대해 본격적이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꼭 기억해야 할 작품이 되었다.

‘나는 광주에 없었다’

나는 광주에 없었다.
그러나 광주는 나에게 있다

세 명의 작가가 함께 창작한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관객참여형 연극이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무대에 개입하기 위해 몇 가지 설정을 했는데, 첫째, 플롯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항쟁이 진행된 시기로 한정했고, 둘째, 무대를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극장 한가운데에 길을 만들어 좌우로 나눠앉은 관객이 자유롭게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했으며, 셋째, 다양한 시청각 장치를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1980년 5월의 광주에 있다는 약속을 거는 것이었다.

5·18을 다룬 연극 중에서 정확하게 그 날짜와 그 상황에 집중한 작품은 드문데, 관객참여를 위해 이 작품은 그 시간과 사건에 대한 재현이 목적이 되었다. 연출가 고선웅을 비롯해 작가가 3명이라는 것은 이 목적을 위해 다양한 연극적 언어를 활용해 일반적이지 않은 재현을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장점이 되었다.

관객이 앉아 있는 곳의 정면, 높은 곳에 설치된 화면에 공수부대들이 속속 광주에 도착하고 있다는 자막이 뜬다. 동시에 타악기의 커다란 울림소리가 관객의 심박수와 연동한다. 서치라이트로 비추는 하늘에는 헬기가 떠 있고, 거대한 인형으로 만들어진 계엄군 지휘관은 괴물처럼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시민들은 다양한 옷을 입고 다양한 자세로 맞서고 있다. 이것을 무대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당시 그곳에 있었던 양 점점 옥죄어오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무대 양끝을 끊임없이 오가는 시민들의 움직임,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시민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함께 하면서 5·18을 머리가 아닌 심장과 온 세포를 통해 체험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관객체험형이라는 단어를 고려한다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은 두 번뿐이라서 굳이 관객체험이 필요한 것인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관객들이 빈번히 무대 위를 오르내리지 않아도 온몸으로 당시 상황을 현재인 듯 체험하는 것 자체도 넓은 범주의 관객체험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이 공연은 제대로 관객체험형인 셈이다. 눈앞에서 곤봉에 맞는 평범한 시민을 보는 것, 인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계엄군 지휘관의 명령, 완벽한 차단으로 섬이 되어버린 고립감 등등은 체험 그 이상의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공연된 극장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이어서 더 특별했다. 광주에서 5·18항쟁을 이야기한다는 장소성은 물론이고, 닫힌 극장의 셔터를 올려 극장 앞 광장으로 관객을 이끌어낸 마지막 장면은 극장 안에서 체험한 5·18이 특별한 경험이 아니고, 관객의 눈앞에 보이는 이곳, 이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또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들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지역, 다른 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한다고 해도 이 극장만큼의 효과는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두 편의 공연을 보며 공통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누가 벌인 일인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아직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는 것인지. 이런 질문들이 도달한 것은 슬픔이었다. 수많은 무고한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슬픔. 우리 현대사가 아프기 그지 없는 것은, 그리고 봄빛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아리고 시린 것은 애도 받지 못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 그들로 인해 지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봄도 그래서 하냥 슬프고 아프다.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넌버벌컴퍼니·아시아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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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연극 ‘잃어버린 마을’ & ‘나는 광주에 없었다’-1
‘잃어버린 마을’

5_연극 ‘잃어버린 마을’ & ‘나는 광주에 없었다’-2
‘나는 광주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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