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小)극장에서 소통(疏通)하는 소(疏)극장으로

소극장은 처음부터 대형자본이나 공공기금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수명이 짧다. 하지만 한국의 소극장은 이러한 명멸의 역사를 반복하면서도 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사라지고 지워지고, 그러면서도 또 다시 얼굴을 드러내는 소극장의 동시대적 원형(原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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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9월 9일 9:00 오전

이 시대의 소극장 정신

소극장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실험극장’이나 ‘대안극장’ 정도가 될 것이다. 이른바 소극장은 예술의 타성으로부터 벗어나 첨단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 예술의 창조적 실험공간이자 그 대안모색을 위한 주체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1978년 사물놀이의 탄생지도 소극장 ‘공간사랑’이었다. 남사당패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의 작은 사건이 오늘날 국악의 한 장르를 차지하는 ‘대안’이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1988년 개관한 음악전용 소극장 예음홀에는 베토벤 같은 단단한 고전은 물론 21세기를 예견하는 작품들이 오르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 사거리 동서양빌딩 3층에 자리했던 168석 극장에는 새로운 예술을 갈구하는 아방가르드보이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극장은 처음부터 대형자본이나 공공기금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수명이 짧다. ‘그곳’들은 우리 예술사에 작지만 진한 방점을 찍었어도 어느새 그 장소는 다른 장소로 탈바꿈되어 현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소극장은 이러한 명멸의 역사를 반복하면서도 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 연명의 모습은 과거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늘날의 소극장은 처음부터 ‘소극장’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카페, 서점 등과 같은 문화공간이 특정 시간대에 임시적으로 ‘소극장화(化)’되어 공간의 성격을 재설정하고 새로운 예술을 내놓는 창구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책을 읽어도 되고 음악을 들어도 되고 때로는 예술가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따라서 과거의 소극장이 공간적으로 구획된 특정 공간을 일컬었다면, 지금은 애초부터 다용도 목적을 안고 태어난 공간이 ‘특정 순간’이나 ‘특정 시간’에 잠시 소극장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명멸의 물결과 맞서지 않고 변화하고 흘러가는 트렌드에 제 몸을 맡긴 채 유연하게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예술가들도 구획된 소극장으로 들어가기보다, 제 스스로 공간을 특정화시켜 ‘순간의 소극장’으로 만들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디든 소극장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며, 소극장의 물리적 개수는 줄었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라는 숲 속에서 ‘소극장 정신’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소극장, 더 정확하게는 이번 호에 소개되는 소극장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사라지고 지워지고, 그러면서도 또 다시 얼굴을 드러내는 소극장의 동시대적 원형(原型)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성으로 점철된 홍대 인근의 산울림 소극장(서울 마포구)은 그 이름처럼 여전히 ‘산’으로 존재하고, 신촌극장(서울 서대문구)은 동시대 예술이 숨 쉴 공기를 제공하는 휴식처와도 같다. 풍경을 뜻하는 ‘경(景)’자를 사용하여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겠다는 취지로 문을 연 우란문화재단(서울 성동구)의 ‘우란1경’부터 ‘우란5경’까지는 이 시대의 예술 트렌드가 소극장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티엘아이아트센터(경기 성남시)도 대형 음악회와 그곳에서의 화려함에 도취된 관객들에게 작은 실내악이 주는 숨결의 소중함을 몸소 보여주는 곳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통적으로 네 개의 소극장들은 ‘작은(小) 극장’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점차 다종다양해지는 관객들과 소통(疏通)하는 ‘소(疏)극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 이번 특집은 소극장의 소개로만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이어갈 소극장 정신을 품고 있는 ‘현재’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한국 소극장 운동의 맹아 산울림 소극장 산울림 소극장 1985년 개관,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157

“이 지랄 더는 못 하겠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은 말한다. 블라디미르는 능청거리며 받아친다. “다들 하는 소리지.” 언젠가 임영웅은 이 대사가 연극인으로서 가장 공감된다고 하더라. 못 하겠다, 못 하겠다, 하면서도 계속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임영웅에게는 산울림이 그랬다.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임영웅은 한국일보 다목적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초연했다. 이후 그는 작품에 따라 배우를 캐스팅하는 프로듀서 시스템을 모색했다. 1960년대는 민간 극단이 단원에게 고정 월급을 주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극단 산울림 창단 공연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올렸다. 못 하겠다, 못 하겠다, 외치던 임영웅은 연극을 제대로 하기 위해 산울림 전용 극장을 고심했다.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아내 오증자는 살던 집을 정리하고 작은 공연장을 건립하자고 말했다. 그들은 예상했을까. 그렇게 시작한 산울림 소극장이 훗날 한국 소극장 운동의 맹아가 되리라고. 현재 산울림 소극장은 임영웅의 자제인 임수진과 임수현이 운영하고 있다. 그간 수많은 담론을 양산한 산울림. 새로운 운영진들에게는 오히려 30년의 역사가 부담이 될까 봐 걱정이기도 하다.

INTERVIEW

임수진 극장장 & 임수현 예술감독

1985년 아버지인 임영웅 연출가의 자택을 허물고 산울림 소극장이 세워졌다. 그 시절 기억 속에 산울림은 어떠한 공간이었나?

임수현 극장과 집이 분리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집에 오면 유명 배우들이 늘 연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엄청난 일인지 몰랐다. 임수진 당시 우리는 극장 3층에 살았다. 아버지는 밑에 있는 극장에서 항상 뭔가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를 이어서 소극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임수진 현실적인 이유였다. 부모님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극장을 누군가 맡아야 했다. 임수현 거창하게 얘기하면 숙명이었던 것 같다. 2002년에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는 부모님이 활동을 무리 없이 하실 때다. 나는 주로 번역을 하면서 부모님을 도와드렸다. 한국에 혼자 있을 때는 엄두가 안 났는데, 2011년에 누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운영을 맡았다.

아버지는 어떠한 조언을 해주셨나?

임수진 아버지가 연극을 연출하실 때는 굉장히 세심하신 편이다. 배우들의 눈빛과 시선 하나까지도 상세히 지시하신다. 그런데 극장 운영에 있어서는 그냥 잘 해보라고만 하시더라.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보고 자란 딸과 아들이 크게 벗어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임수현 오히려 어머니가 걱정이 많았다. 우리들이 힘들 게 뻔히 보였나 보다. 이전에도 극장 운영과 기획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셨다. 임수진 아버지가 연극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뒤에서 극장 운영을 살뜰히 살폈기 때문이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많이 변화했다. 극장을 운영할 때 이전과 동일한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면 무엇이고,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임수진 이전 산울림 소극장에는 극단 산울림의 공연이 많이 올랐다. 내가 전문 연극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장르의 공연도 많이 올리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연말마다 선보이는 산울림 편지 콘서트이다. 클래식 음악과 연극이 어우러지는 공연이다. 이처럼 융복합 공연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임수현 전통적인 산울림 연극을 봤을 때 정치적인 색깔이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을 강하게 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클래식한 작품을 많이 올렸다. 그래서 나도 작품을 기획할 때 그런 면을 생각하게 된다. 연극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는 고전 작품들 말이다. 그중 하나가 2017년에 선보인 연극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임수현 예술감독이 직접 번역과 각색, 연출을 맡았다. 산울림 소극장의 새로운 레퍼토리로 기획한 건가? 임수현 산울림 소극장이라고 하면 ‘고도를 기다리며’가 브랜드처럼 되어 있다. 또 다른 브랜드 공연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문학을 전공했고, ‘이방인’은 원래부터 좋아하던 소설이다. 연극으로 각색할 엄두가 안 났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목표는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연극성을 보여줬으면 했다. 원작의 많은 부분을 가져왔고, 좋은 배우가 함께해 관객 반응이 좋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산울림 소극장이 걸어온 길에는 고전적 미학에 관한 신념이 엿보인다. 사실 이전에는 해외 고전 작품을 번역하여 올리는 것이 지식인들의 책무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시대가 변하면서 고전 작품을 다시 올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고전’이 동시대 관객과 만나는 지점이 필요하다.

임수진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산울림 고전극장을 기획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고전을 그대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 맞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대표적으로 얘기할 만한 작품은 이기쁨 연출의 ‘줄리엣과 줄리엣’이다.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시대 관습 때문에 사랑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핵심이다. 로미오를 여성인 줄리엣으로 바꿔서 오늘날 이슈가 되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다. 사실 산울림 고전극장의 경우는 막이 오르기 전까지 매번 조마조마하다. 공연을 올릴 때까지 어떻게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수현 우리가 대본을 확인하면 검열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좀 있었다. 애초에 고전극장은 사람들에게 고전을 소개하려는 교양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시대적인 이슈에만 민감한 작품이 만들어져 주객이 전도되기도 했다.

한국연극의 중심지는 대학로이기 때문에, 홍대에 위치한 산울림만이 가진 독특함도 있을 것이다.

임수현 지역적인 문화가 의외로 연극에 유리한 접근은 아닌 것 같다. 홍대가 젊은이들에게 ‘핫’한 장소이기는 하지만, 연극 관객으로 이어지는 건 별개다. 다행히 인근에 경의선 책거리가 생겨서 우리 극장까지 하나의 문화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임수진 마포구와 함께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마포구도 홍대 주변을 문화거리로 만들기 위해 고민 중이다. 극장 운영을 맡고 안타까웠던 점은 근처에 사는 분들이 산울림을 잘 모르더라. 산울림이 건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공연도 알려지면 좋겠다. 그래서 마포 지역 주민 할인 티켓을 만들었다. 상인 협회와 의논해 공연을 보면 식사 할인을 받는 방법도 해보려고 한다. 이번 산울림 고전극장은 마포중앙도서관과 협업했다. 고전극장 관련 강연을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진행했다. 지역주민에게 산울림 공연을 많이 알리고, 그렇게 연극 관객층을 넓히고 싶다.

앞으로 산울림이 어떤 형태의 극장이기를 바라나?

임수진 산울림이 지금까지는 연극을 통해 말해 왔다. 앞으로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분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됐으면 좋겠다. 산울림에서 공연을 보든, 전시를 보든, 음악을 듣든 이곳에서의 시간이 좋기를 바란다. 임수현 파리에서 유학할 때 복잡한 시내 한복판에 한 소극장이 있었다. 세워진 지 70년이 지난 극장이었다. 거기서 매일 이오네스코 작품이 공연된다. 운영이 어려워 여러 번 문을 닫을 위기가 있었는데, 이오네스코 작가가 직접 도와주기도 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그야말로 랜드마크가 됐다. 산울림도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산울림 공연을 보면서 추억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그리고 산울림 연극이라면 믿고 보는 관객도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유지하려면 계속 좋은 작품을 만들고 좋은 기획을 해야 한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신화섭(스튜디오 무사)

 

다시, 신촌(新村)을 위한 분출 신촌극장

신촌극장 2017년 개관,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13길 17

 

추억은 참 이상하고도 아름답다. 정지된 시간에 무슨 힘이 있어서 자꾸만 그리로 걸어가게 할까. 용혜원 시인은 추억을 두고 평생토록 꺼내보는 마음속 일기장이라고 했다. 연극연출가 전진모에게 신촌 언저리는 그러한 일기장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굴다리 너머 첫 골목길. 그곳의 한 주택에는 ‘신촌극장’이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초록 철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옥탑, 바로 신촌극장이다. 신촌극장은 전진모 연출가와 원부술집 대표 원부연이 함께 2017년 6월 3일 개관했다. 전진모와 원부연은 연세대 연극동아리 토굴에서 만났다. 토굴의 동아리방에는 연극대본과 술병,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전진모의 추억 속 신촌은 그러한 곳이다. “저는 00학번이에요. 당시 신촌에는 특색 있는 공간이 많았어요. 지금은 상권이 변하며 체인점이 많아졌죠. 신촌이 추억이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거쳐 가는 공간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웠어요.” 전진모는 잠시 연극을 쉬며 원부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작가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14주에 걸쳐 일곱 명의 작가가 낭독 공연을 올렸다. 전진모는 그중 한 작품이라도 공연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모색했습니다. 사실 크라우드 펀딩은 지인들에게 빚지는 일인데 일회성 공연으로 휘발시키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지원받은 돈을 장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극장을 계획했어요.” 그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4천여만 원을 모금 받았다. 모인 금액은 옥탑을 리모델링하고, 조명과 음향 장비를 설치하는 비용으로 사용했다. 신촌극장의 객석은 40석인데 의자마다 후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촌극장은 정말이지 작은(小)극장이어서 공간이 주는 한계성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성이 창작자의 창의성으로 전환되고 있다. 독특한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해보고 싶은 창작자들이 모이며 신촌극장은 새로운 실험의 장이 됐다. “신촌극장을 운영하면서 임대업이 안 되도록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이 극장의 쓰임을 정확하게 찾아서 미션을 수행하고 싶어요. 신촌극장은 창작자들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아요.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기를 바라죠. 그 점이 자연스럽게 신촌극장만의 색깔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신촌극장은 불친절한 극장이기도 하다. 주택 4층에 있으니 연로한 관객은 올라가기가 힘들다. 작품 정보는 SNS 채널로만 홍보하니 공연을 놓치기 일쑤다. “관습적인 공연을 올리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죠. 그러니 관습적인 사람들이 와서 관습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폭넓은 관객을 수용할 계획은 있어요. 2017년에는 일요상영회를 열어서 독립영화감독의 단편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역사 속 소극장은 대부분 극단 전용 극장으로 설립됐다. 그런데 전진모는 자신의 작업을 위해 신촌극장을 만든 게 아니라고 명료히 말한다. 많은 이들이 신촌극장이 신촌을 신촌(新村)답게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며 후원하지 않았는가. 극장이 자유로운 도전으로 채워져 왕성한 생명력이 감돌기를 바랄 뿐이다.

빛과 그림자를 담은 경(景) 우란문화재단

성수동은 시간이 뒤섞여있는 동네다. 오랜 세월 동안 수제화 거리로 자존감을 지켜 온 성수동.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업체가 떠났고, 인적 드문 성수동 골목에는 호젓한 적막감이 돌았다. 그러던 성수동이 몇 년 전부터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도시 재생의 움직임 속에 낡은 구두 공장은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빛바랜 벽돌과 녹슨 철문들은 성수동만의 오묘한 체취가 됐다. 지난해에는 이러한 성수동에 낯선 콘크리트 건축물이 하나 세워졌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우란문화재단이다. 우란문화재단은 인재들이 스스로 성장하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했던 고(故) 우란 박계희(워커힐 미술관 설립자)의 뜻을 이어받아 2014년 설립됐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4년 동안 우란문화재단은 프로젝트박스 시야를 거점으로 다양한 공연·전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작년부터 성수동으로 사옥을 이전한 우란문화재단은 본격적인 두 번째 여정을 시작했다. 개관 후 우란문화재단은 ‘베르나르다 알바’와 ‘맛있는 만두 만드는 법’을 올렸다. 2019년에는 ‘새닙곳나거든’과 ‘네이처 오브 포겟팅’, ‘섬:1933~2019’을 선보였다. 오는 9월에 올릴 신작 ‘사랑의 끝’은 배우 문소리와 지현준의 출연이 확정돼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란문화재단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박희경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란문화재단 2018년 개관, 서울 성동구 연무장7길 11

“2014년에 우란문화재단이 발족하면서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공연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듬해부터는 전시로 사업을 확장했죠. 한 공간에서 공연과 전시, 교육을 함께하다 보니 사옥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동안은 물리적 한계가 있었는데, 성수동 시절을 맞이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대가 큽니다.” 재단의 환경을 개선한 이유는 다양한 인재가 좋은 공간에서 자유로이 뛰어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성수동으로 이전한 우란문화재단은 인력 육성 프로그램 ‘우란이상’과 공연·전시 기획 프로그램 ‘우란시선’을 통해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마련했다. 1층에서 3층까지 각 층에 위치한 주요 공간은 ‘경’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전시장인 우란1경, 공연장인 우란2경, 레지던시 공간인 우란3경, 녹음실 우란4경, 입주 레지던시 우란5경으로 불리고 있다. ‘볕 경’, ‘그림자 영’으로 불리는 한자어 ‘경(景)’에는 사물을 조화롭게 비추는 ‘빛’과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의 의미를 담았다. “우란문화재단은 ‘플랫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우란문화재단을 거쳐서 더 좋은 환경으로 가기를 바라죠. 우란문화재단만의 레퍼토리를 발굴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요, 레퍼토리 극장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많은 걸 생산하고 나가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려고 해요. 한 작품이 지속적으로 재공연을 한다면 다른 예술가들의 기회가 사라지는 겁니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시작된 작품이 다른 좋은 파트너를 만나 재공연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 프로젝트의 마지막 숙제입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신촌극장·우란문화재단

 

클래식 공연장의 새로운 혁신 티엘아이아트센터

 

INTERVIEW

티엘아이 대표이사 김달수

본디 지방 공연장은 지역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데 현재 성남에서 재미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44석의 객석을 가진 티엘아이아트센터는 반도체 회사 티엘아이의 메세나 활동으로 건립됐다. 김달수 대표이사는 일회성 협찬보다는 극장 운영과 같은 문화 인프라 구축이 한국 공연계의 토양을 기름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성남 지역 문화에도 기여하면 좋으리라. 그런데 티엘아이아트센터의 탁월한 기획력 덕분에 오히려 서울 시민들이 성남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2013년 티엘아이 사옥을 지을 때 공연장을 마련한 이유는 무엇인가?

티엘아이는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고민하는 회사다. 우리 회사가 성남 지역에도 기여하는 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지만 알찬 공연장을 만들어 연주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마침 대학 동기 중 음향을 설계하는 친구(동아방송예술대 두세진 교수)가 있어서 건물을 지을 때부터 두 개의 층을 연주홀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IT 업계에서 문화예술에 공헌하는 점이 인상 깊었다. 사원들에게도 예술적인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편인가?

예술가는 독창성, 개성,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우리 회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티엘아이(TLI)의 풀네임은 테크놀로지 리더스 이노베이터(Technology Leaders & Innovators)이다. 기술적으로 혁신을 만들려면 결국은 우리만의 생각과 개성,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추구하는 기업 가치도 예술과 가까이 있을 것 같다.

애플은 기술자에게는 참 부러운 회사다. 애플은 기술로 문화를 바꿔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티엘아이도 우리 분야에서 그런 기업이 되고 싶다.

티엘아이아트센터는 모든 좌석이 R석으로 되어 있다.

공연장의 형식적인 부분에는 많은 돈을 쓰기가 어려웠지만, 음향 하나는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관객이 어느 자리에서든 공연을 편하게 즐기기를 바랐다.

프로그램 기획자들에게 특별히 요청하는 부분이 있나?

박평준 음악감독이 오면서 아티스트 폭이 넓어졌다. 사실 나는 가능하면 공연장 운영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한다. 박평준 감독님에게도 내가 왜 이 홀을 만들었는지 이유만 말씀드렸다. 믿고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티엘아이아트센터를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인가?

홀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 언젠가 한 첼리스트가 공연한 뒤 앞으로 여기에서는 하면 안 되겠다고 했다. 소리가 너무 깨끗하게 들리니 조금만 실수해도 티가 난다는 것이다. 티엘아이아트센터에서 공연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고 하더라. 이런 얘기를 들으니 공연의 질이 높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공연장 로비에 해외 콘서트홀 모형을 조각해둔 이유도 티엘아이아트센터에 오른 연주자들이 앞으로 세계무대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꿈, 더 나아가 우리나라 예술에 기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티엘아이가 한때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다가 최근에 잠시 주춤했다. 다시 새롭게 개발 연구하는 분야가 생겼으니 그 분야의 리더가 됐다는 소리를 듣고 은퇴하는 게 꿈이다. 현재 우리나라 음악계는 세계적인 연주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히말라야에 가면 그 주변에 있는 산들도 다 높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1등만 인정해준다. 2등과 3등도 굉장히 잘하는 데 말이다. 여러 연주자들의 음악을 더 자주 감상하는 사회가 된다면 아웅다웅 싸우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글 장혜선 기자

 

티엘아이아트센터 2013년 개관, 경기 성남시 중원구 양현로405번길 12

 

제1회 티엘아이 체임버 뮤직 페스티벌

반짝이는 첫걸음!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티엘아이아트센터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실내악 축제는 플루티스트 이예린이 예술감독을 맡아 이끈다. 그는 티엘아이와는 두 차례 리사이틀을 통해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젊은 피아니스트 송영민은 프로그래밍 디렉터를 맡았다. 이예린 감독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내딛는 감동적인 첫걸음이라는 의미를 담아 페스티벌의 주제를 ‘프레미 빠(Premier pas)’라고 지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이 가진 다소 진부한 이미지를 탈피해 보다 생동감 넘치는 축제를 지향하고자 한다”며, “따뜻한 음향으로 실내악 연주에 최적화된 티엘아이아트센터에서 최정상급 연주자들을 만날 기회”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는 ‘첫걸음’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첫’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특별한 것처럼, 반짝이는 의미를 담아 첫걸음을 내딛는다. 페스티벌의 첫째 날인 9월 18일에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새로운 도전-첼로와 사랑에 빠진 피아니스트’라는 부제로 피아니스트 이진상과 첼리스트 김민지, 피아니스트 정재원과 첼리스트 심준호가 짝을 이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연주한다. 9월 19일에는 ‘B’로 시작하는 세 작곡가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의 곡을 연주한다. 클래식 음악을 탄생시키고 기초를 다진 음악의 아버지 바흐,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이 세상에 나온 베토벤, 그의 뒤를 이어 독일 낭만파 음악을 꽃피운 브람스의 곡을 만날 수 있다. 9월 20일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든 콰르텟과 소프라노 한경미의 무대가 마련됐다. 9월 21일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양한 악기들의 하모니를 만나볼 수 있다. 플루트 이예린, 리코더 김규리, 쳄발로 아렌트 흐로스펠트, 색소폰 최진우, 그리고 피아노에는 박재홍이 함께한다. 오페라와 현대 곡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레퍼토리 구성이 일품이다. 이번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는 9월 22일에 열리는 ‘시크릿 콘서트’이다. 연주자 및 프로그램을 당일에 공개하는 말 그대로 시크릿 콘서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프로그래밍을 맡은 피아니스트 송영민은 “이 축제에서만 볼 수 있는 최정상급 연주자들의 캐스팅과 새로운 기획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특히 “마지막 공연은 시크릿이기 때문에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축제의 첫걸음을 상징하는 희망,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앞으로의 꿈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영민 이예린

글 국지연 기자 사진 티엘아이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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