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상의 운명

찬란한 생명력을 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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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14일 9:00 오전

네모난 천 조각에서 신체의 형상을 가진 의상으로, 한 벌의 의상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무대의상이 살아 있다. 무대의상이 가진 생명력을 믿기 때문일까. 때론 무대 위에서 의상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이러한 문구를 떠올린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다.” -황연희·권희수 저, ‘백스테이지를 엿보다’

 

 

 

무대 위 캐릭터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대의상. 이젠 그들의 운명을 돌아볼 차례다. 장르별 디자이너·의상감독에게서 핵심적인 의상들의 탄생기를 들어본다. 전반적인 의상 제작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면 또한 마련했다. 극적인 삶을 살다 가는 무대의상,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글 ‘객석’ 편집부

오페라 의상

국립오페라단 ‘안드레아 셰니에’ ‘봄봄·동승’ ‘1945’ 라벨라 오페라단 ‘안나 볼레나’

 

작품별 의상 파헤치기

 

‘안드레아 셰니에’(2015)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며 비운의 사랑을 승화한 실존 인물 안드레아 셰니에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국립오페라단 의상감독 김진우는 ‘안드레아 셰니에’ 의상의 제작 자체가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원단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커튼이나 카펫 등 인테리어용 원단으로 의상을 만들었기 때문. 당시 연출뿐 아니라 의상·조명·안무까지 관할했던 스테파노 포다는 주역을 제외한 무용수나 합창단은 모두 조형물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귀족·하인 할 것 없이 모두 영혼 없는 사람들처럼 나타내고자 한 것. 따라서 실제 강철판을 사용하여 만든 보디스(bodies) 위에 패니에(18세기 말 사용된 스커트 안에 착용하는 가로로 긴 코르셋)를 제작하여 시대가 갖고 있는 실루엣을 극대화했다. 영혼 없는 혁명기 프랑스인을 표현하기 위한 두 번째 조치는 검은색 의상과 하얗게 분칠한 얼굴을 통해 색감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특히 크랙(crack)을 주요 이미지로 활용해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상이 가진 면적이 크지 않다 보니 입체적인 형상보다는 터치나 페인팅으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봄봄·동승’(2017)

의상감독 김진우는 서양 디자이너와의 협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으나, 국내 창작진과의 작업을 통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귀중하다고 말한다. ‘봄봄·동승’이 그러한 작품으로, 소설가 김유정의 ‘봄봄’과 함세덕의 ‘동승’을 한 공연에서 무대화했다. 한국 근대 소설들을 소재로 한 작품인 만큼 인물들을 닥종이 인형처럼 표현했다. 닥종이 느낌을 주기 위해 제작 전 원단을 주름 잡는 사전작업을 진행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주름이 펴지지 않게 굳혔으며, 재단 과정을 거친 이후 페인팅을 올려 작품이나 캐릭터의 성격과 어울리는 따뜻한 색감을 표현했다.

‘1945’(2019)

9월 27·28일 공연한 ‘1945’ 역시 한국적인 정서의 작품으로, 배삼식 원작의 연극을 오페라로 각색했다. 주역을 포함해 합창단·무용수·어린이 연기자 등 굉장히 많은 출연진의 공통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돌아갈 곳이 없는 난민들이라는 점이다. 길을 잃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본인이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처절함을 보여주고자 의상 제작 후 낡고 오래된 느낌을 주는 작화 작업을 진행했다. 신발·모자·양말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얼룩덜룩하게 염색하는 과정 또한 거쳤다. 특히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데나 주워 입은 듯한 레이어드 룩을 통해 이들이 언제부터 이 옷과 소품들을 착용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전후 상황을 표현했다.

의상 제작 과정

작품 선정 이후 연출가와 디자이너를 포함한 제작진이 꾸려진다. 오페라의 경우, 해외 연출가가 섭외되는 경우가 많아서 해외 디자이너와의 협업이 잦다. 개막 다섯 달 정도 전에 디자이너로부터 최종 의상 디자인을 받으면 디자인을 기초로 제작소 선정을 준비하고, 약 두 달 전 제작소를 선정한 후 본격적인 제작을 시작한다. 공연이 끝난 후 의상들은 여주에 소재한 보관소로 보내진다. 이전 국립극장 소속 단체였을 때의 의상에서부터 최근 의상까지 빼곡히 쌓여 있다. 매년 청소하고 관리하며 보관에 철저한 주의를 기울인다. 같은 작품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의상이나 소품들이 있다면 재사용한다. 따라서 의상감독의 첫 역할은 디자이너로부터 디자인을 받은 이후 보관하고 있는 의상 중 어떤 것을 재사용하고 어떤 것을 새롭게 제작해야 하는지를 협의하는 것이다.

민간오페라단의 의상 운용 과정

공연통합예술전산망 종합통계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오페라 공연의 매출액은 약 10억 원으로, 300억 원이 넘는 뮤지컬 매출액의 겨우 3%에 해당하는 수치다. 자본력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무대의상의 제작 기간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개 6개월 정도의 작업 기간이 주어지는 뮤지컬 의상과는 달리 오페라는 최대 2개월로 ‘단타’일 수밖에 없다. 공연 이후 보관·관리 과정에도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민간오페라단의 경우 무대의상을 제작하는 대신 대여업체를 이용하는 경우가 잦다. 가끔 여러 단체가 한 업체의 의상을 똑같이 입고서 공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라벨라 오페라단은 무대의상을 중요하게 생각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중세 유럽인 작품의 의상을 모던하게 재해석하거나, 한국 전통 의상으로 바꾸는 식이다. 의상디자이너 김미정은 라벨라 오페라단과 함께한 첫 작품 ‘안나 볼레나’(2015)에서 고증에 충실하되 강렬한 색감을 사용했다. 무대의상은 색상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은 물론 서사의 진행 방향을 암시한다. 극 초반 왕의 변심을 깨닫고 분노한 안나는 빨간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죽음을 결심한 이후 그녀는 창백함과 공포를 머금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사형대로 향한다. 라벨라 오페라단은 ‘안나 볼레나’와 함께 도니체티 여왕 3부작에 속하는 ‘마리아 스투아르다’로 시리즈를 이어간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국립오페라단 ‘1945’ 10월 4·5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라벨라 오페라단 ‘마리아 스투아르다’ 11월 22~2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발레 의상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호이 랑’

작품별 의상 파헤치기

‘백조의 호수’

고루한 생각일까. 그래도 고전 발레의 정형미를 느껴보고 싶다면 ‘백조의 호수’를 추천할 테다. 특히 국립발레단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의 아름다움이 찬연하다. 먼저 1막, 왕자의 생일 장면에서의 군무. 여성 무용수들은 ‘로맨틱 튀튀(다리를 감싸는 길이)’를, 남성 무용수는 ‘화이트 타이츠’를 입고 춤을 춘다. 다음 장에서는 오데트와 백조들이 ‘클래식 튀튀(허리선에서 옆으로 뻗은 형태)’를 착용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특히 호숫가에서 추는 24마리 백조들의 신비로운 군무는 발레블랑(백색발레)의 대표 장면으로 꼽힌다. 클라이맥스는 단연 2막에서의 흑조 오딜 출연이다. 오데트와 대조적인 블랙 튀튀를 입은 흑조는 짙은 분장과 화려한 장식이 더해져 팜 파탈 이미지가 부각된다. 국립발레단 의상감독 김인옥이 처음 발레단에 들어와 맡은 작품은 ‘백조의 호수’. 이후 15년이 지났는데도 국립발레단은 여전히 같은 의상을 입고 있다. “해외 작품은 오리지널 프로덕션 팀이 내한해 안무와 의상, 무대 세트까지 직접 관여해요. 의상이 낡았는데도 무대 위에서 보면 정말 예쁩니다. 러시아 의상이 참 그런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도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특별함이 있죠.” 주역 무용수들은 옷이 낡아가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주역들의 의상은 새로 맞추기도 하지만, 군무 의상은 대부분 보수를 택한다. 무대 위 막과 의상이 낡아가는 질감이 동일해야지만 통일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는 특히 군무가 아름다워요. 푸른 조명 아래에서 춤추는 백조들 장면이 유명하죠.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볼 때 특히 백조들의 머리 깃털을 주목하면 좋을 것 같아요. 리얼리티와 신비로움을 강조하고 싶어서 전부 진짜 깃털로 바꿨거든요. 옆에서 보면 백조 모양이 오롯이 부각되죠.”

‘호이 랑’(2019)’

국립발레단의 2019년 신작 ‘호이 랑’은 장지연이 엮은 ‘일사유사’에 등장하는 효녀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군에 들어가 적군을 물리치는 랑의 이야기다. 국립발레단의 솔리스트이자 2015년부터 꾸준히 안무작을 선보이고 있는 강효형이 안무를 맡았다. 의상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루이자 스피나텔리가 함께했다. “보통 해외에서 제작하면 2~3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려요. 우선 의상디자이너는 각본을 보며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져요. 이후 연출가와 안무가, 의상디자이너, 무대디자이너가 함께 만나서 회의합니다. 이번 ‘호이 랑’은 국내 제작진이 한국적인 것을 강하게 강조하지는 않아서 루이자 스피나텔리가 색감 위주로 접근했어요.” 해외 디자이너와 작업하다 보면 보통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낯설어하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의상감독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한국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원단을 추천한다. 디자인이 완성되면 발레단 단원들의 치수를 재서 해외로 보낸다. 이후 가봉 의상이 오면 피팅하고 수선하는 시간이 3~4주 정도 소요된다.

“주인공 랑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갑니다. 여성스러운 옷을 벗고 갑옷을 입은 후 결의를 다지는 장면이 있어요. ‘호이 랑’의 대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전쟁 장면에서는 보통 회색을 많이 써요. 군인 느낌을 내야하기 때문인데요. 이번 ‘호이 랑’에서 나오는 군무에서도 회색 색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의상 제작 과정 국립발레단은 한 번 의상을 제작하면 폐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의상은 두 곳에 나눠서 보관한다. 국립발레단 사무국이 위치한 예술의전당과 여주의 의상 창고에는 아름다운 발레복이 빼곡히 쌓여 있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등 매해 시즌 레퍼토리로 올라가는 작품은 보통 예술의전당 의상실에 보관한다. 드물게 공연되는 작품들은 여주로 보낸다. 주역 무용수들은 대부분 자신 체형에 맞춘 의상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무용수들의 개인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여름 은퇴한 김지영 수석무용수의 의상은 현재 발레단 솔리스트들이 편하게 돌려가며 착용한다고. 김인옥은 “김지영 무용수는 발레리나로서 균형이 잘 잡힌 예쁜 몸이기 때문에 그녀의 체형으로 마네킹을 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주로 러시아에서 의상을 공수했는데, 요즘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도 의상을 의뢰하고 있다. 보통 해외에서 공수한 옷은 몸판이 늘어나지 않아서 무용수들이 불편함을 느낀다. 의상감독 김인옥은 국립발레단 의상에는 특별히 스판 원단을 넣어달라고 요청한다. 무용수들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원단이 늘어나서 더욱 편하게 춤출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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