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상임지휘자 로빈 티치아티

젊은 역사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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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30일 9:00 오전

RECORD REVIEW

내한은 취소됐지만, 우리는 그를 알아두어야 한다

©Monica Menez

로빈 티치아티(1983~)는 음악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주목 받고 있는 차세대 지휘자이다. 현재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인 그는 10월 13일, 예술의전당에 그의 오케스트라와 내한하여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니콜라 베네데티 협연),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일본을 강타한 태풍 ‘하기비스’로 항공기가 결항되면서 내한 하루 전날 취소되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세계의 중심지에서 부상하고 있는 그를 만나보자.

 

베를린의 젊은 별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베를린 심포니커 등 7개의 오케스트라, 3개의 오페라극장,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합창단들이 공존하는 음악의 천국이자 각축장이다. 도시에 흐르는 이러한 음악적 전통과 물줄기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삼기 위한 문화적 욕심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과거 국제적 지휘자와 음악감독들의 등장은 이러한 환경 구축에 큰 힘이 됐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는 또 다른 과제와 직면하고 있다. 바로 세대교체이다. 바렌보임(1942~)은 여전히 베를린의 음악황제이고, 노장 크리스토프 에센바흐(1940~)가 2019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맡았지만, 다른 곳에선 젊은 리더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페트렌코(1972~),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1972~), 코미쉐 오페라극장의 아이나르스 루비키스(1978~)가 그 대표주자들이다. 그리고 로빈 티치아티가 있다. 그는 2017년부터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이탈리아의 혈통을 이어받고 런던에서 태어난 티치아티의 조부 니소 티치아티(1924~1972)는 작곡가·첼리스트·피아니스트였고, 증조부 프란체스코 티치아티(1893~1949)도 작곡·피아니스트였으니 말이다. 로빈의 형 휴고 티치아티(1980~)도 현재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천히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가문의 ‘후광’보다 ‘노력’으로 성장했다. 15세에 시작한 지휘 공부. 캠브리지대에서도 실제 무대에서 지휘를 연마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다만 사이먼 래틀과 콜린 데이비스 밑에서 부지런히, 착실히 공부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5년 때이다. 스물 두 살의 청년은 ‘오로라’라는 이름의 실내악 앙상블을 창단하고 4월에 첫 공연을 가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던 리카르도 무티가 개인 사정으로 못 나오게 되자 라 스칼라는 수소문 끝에 티치아티를 과감하게 지휘대에 세웠던 것. 브람스 2중협주곡과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을 깔끔하게 소화해낸 청년은 어느새 라 스칼라 역사상 최연소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그 뒤의 여정은 누구라도 탄탄대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티치아티의 선택은 남달랐다. 그는 스웨덴의 가블레 심포니와 함께 조용한 작업 속으로 들어갔다(2006~2009).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레이블이 녹음 제의를 했고, 심지어 그의 곱슬머리를 부각시키며 ‘영국의 두다멜’로 띄우려는 마케팅 제의도 있었다.

하지만 티치아티는 준비되지 않은 레퍼토리의 녹음제의는 일절 거절했고, 언론과의 접촉도 스스로 아꼈다. 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새 얼굴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혼자만의 목표를 세워놓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을 보고 스승 래틀은 “참을성 있는 지휘자”라고 말했다지만, 로빈은 “천천히, 서두르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티치아티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는 2009년 5월 가블레 심포니의 임기를 마친 그를 수석지휘자로 영입하며 2009/10 시즌을 시작했다. 가블레 심포니에 몸담고 있던 2008년 여름, 스코틀랜드 북부에 위치한 하일랜즈 투어에 객원으로 왔던 그와의 호흡이 좋았던 것이었다. 2010년에는 밤베르크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도 겸직하게 되었다.

그에게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는 직장, 그 이상의 곳이었다. 티치아티는 찰스 맥커라스(1925~2010)가 1992~95년에 재직하며 남기고 간 원전연주의 유산과 흔적으로 더듬고 공부했다. 이렇게 역사적 감각을 키움과 동시에 생애 첫 레코딩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나가기도 했다.

티치아티와 이 악단의 호흡은 재직시절 린(Linn) 레이블을 통해 나온 음반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슈만, 하이든, 브람스의 교향곡 녹음, 베를리오즈 ‘여름밤’과 환상교향곡 등 바로크부터 낭만기까지 음악적 철로를 깔고 그 위를 횡단했다.

그리고 28세이던 2011년에는 2014년 시즌부터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을 이끌 음악감독으로 지명된다. 글라인드본은 1934년부터 시작된 오페라축제이다. 초기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주를 이루었으나, 오늘날에는 여러 작품들이 오르고 있다. 하이팅크, 유롭스키 등 쟁쟁한 지휘자들도 이곳을 거쳤다.

 

글라인드본의 티치아티

“음악이란 끊임없이 묻고 질문하는 장이다.” 티치아티는 호기심의 엔진을 맹렬히 돌리는 지휘자이다. 글라인드본 총감독 데이비드 피카르트의 증언 하나. 티치아티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티치아티가 갑자기 무대소품 부서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단다. 사무실에 들어간 티치아티는 기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차 한 잔을 함께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피카르트는 “지금까지 음악감독이 무대소품실에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티치아티의 적극적인 자세, 무대라는 우주의 모든 부분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높이 샀다.

티치아티는 “위대한 작품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과감하고, 꼼꼼하고, 그리고 작품이 불편해 할 정도로 묻고 조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하나의 통일체라는 느낌보단 자신이 찾고 발굴한 뛰어난 조각들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글라인드본에서 지휘한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티토 황제의 자비’ ‘코지 판 투테’가 특히 그러하다. 하나의 색채로 다졌다기보다는 어느 부분에선 원전연주를 연상시키는 폐달을 과감히 밟는가 하면, 어느 부분에선 과감한 루바토를 걸어 모차르트를 낭만기의 작곡가로 견인하는 과감함도 선보인다.

 

그리고, 베를린의 티치아티

2014년, 티치아티는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를 객원지휘하며 첫 만남을 가졌다. 그 만남으로 인해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는 2015년 10월, 2017/18 시즌부터 5년 동안 그에게 지휘봉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나는 베를린 도치이 심포니가 지닌 유연성, 풍부한 사운드, 단원들이 몸소 보여주는 헌신에 즉시 매료되었다. 내가 항상 찾던 것을 이곳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2017년, 베를린 음악계의 공기가 바뀌고 있었다. 런던 필하모닉에서 다종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인 ‘선곡의 공작새’ 유롭스키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취임공연에서 의외로 드보르자크와 브람스 카드를 내놓으며 조용한 입성식을 치루었던 반면, 2017년 9월 26일 티치아티는 취임 공연에서 발톱을 과감히 드러냈다. 장-페리 레벨(1666~1747)의 ‘원소’,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 초연으로 토마스 라르허(1963~)의 교향곡 2번을 선보이며 화제를 낳았던 것. 투간 소키예프(2012~2016)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그는 바로크(레벨)로 역사적 감각을 드러냈고, 낭만주의(슈트라우스)로 감성의 깊이를 보여주었고, 현대음악(라르허)로 동시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고전적인 레퍼토리로 다진 대지 위에 자신만의 성좌를 펼쳐보였고, 그 별자리는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취임과 동시에 활발해진 것은 음반 녹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휘자들은 포디엄 너머로 이 동그란 원반을 전 세계로 날려 자신의 이름과 악단의 명성을 높인다. 자체 레이블을 보유한 베를린 필이 래틀 시대에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적극적인 도입과 고급 박스물을 쏟아냈는가 하면, 건너편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올해로 자체 레이블 10주년을 맞아 얀손스의 기념비들을 더 높이 치켜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로 티치아티는 스코티시 재임 시절부터 단단히 인연을 맺어온 린(Linn) 레이블을 통해 브루크너, 드뷔시, 라벨, 뒤파르크, 포레 등으로 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지금,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는 티치아티의 음악적 실험실과도 같다.

스승 래틀은 그런 티치아티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지금 한 번에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지휘자”라고. 니콜라스 케니언이 지은 책 ‘사이먼 래틀’(2002)에서 래틀의 성장기와 젊은 시절은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래틀의 모습에서 티치아티가 묘하게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티치아티의 곱슬머리는 두다멜보다 래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베토벤·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Ondine ODE1334-2

로빈 티치아티/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바이올린/2019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

나란히 담긴 베토벤(고전)과 시벨리우스(낭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두 곡은 각각 1806년과 1905년에 태어나 한 세기의 시간차를 지녔고, d단조로 구성되었다. 음반의 주인공이 서울시향의 2019년 ‘올해의 음악가’라서 더욱 반갑다. 2011년 온딘(Ondine)에서 출시한 테츨라프의 멘델스존·슈만 협주곡과 2017년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앨범은 그에게 상복을 안겨준 명반인데, 이 음반은 전작을 뛰어넘을 기세로 가득하다. 테츨라프만의 과감한 진행에 동조하며 함께 힘을 실어주는 티치아티의 지휘도 눈여겨 볼 것. 특히 도이치 심포니에서 교향곡녹음에만 주력해온 티치아티만의 협주곡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해설지에는 테츨라프의 장문 인터뷰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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