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필하모닉 & 크리스티안 틸레만 (2)

브루크너 정신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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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21일 9:00 오전

 

part 2 빈 필하모닉, 변치 않는 음악의 정신

 

11월 1일 빈 필하모닉이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함께 서울 공연을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Haas 판)이다.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 교수였지만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교향곡 7번이 라이프치히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였다. 그러자 그의 이전 작품들도 여기저기서 연주되기 시작했고, 그를 외면했던 빈에서도 그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생 최고의 관심 속에서 탄생한 교향곡 8번의 초연은 한스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이 맡았다. 변치 않는 특유의 빈 필 사운드는 브루크너가 들었던 바로 그 소리를 재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11월 2일에는 빈 음악의 상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그의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 그리고 성이 같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이 함께 연주될 예정으로, 다양한 ‘슈트라우스’를 비교하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한편 11월 3일 대구 공연에서는 이번 아시아 투어에 함께하는 또 한 명의 지휘자 안드레아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빈 필하모닉은 역사적인 공연과 음반에서 단연 돋보이는 단체다. 빈 필하모닉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그들의 역사는 세계 클래식 음악사와 그 궤를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두텁고 찬란하다.

빈 필하모닉의 탄생

16~18세기 유럽에서 기악곡은 주로 궁정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관현악곡을 작곡하는 프리랜서 음악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궁정이 아닌 곳에서도 대규모 기악공연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당시 빈에서의 궁정 밖 공연은 전문가로 구성된 상시단체가 아닌, 전문연주자와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구성된 임시 관현악단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1833년 프란츠 라흐너는 빈 궁정 오페라(현재 빈 국립 오페라) 출신의 전문 음악가들을 모아 ‘예술가 협회’를 결성하고 베토벤의 교향곡 등으로 네 번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고 9년 후인 1842년에 여러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재명명하여 발족했고,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명문화했다.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결정은 구성원들의 투표로 결정하고, 선출된 기구인 행정 위원회가 일상적인 관리를 담당하는 현재의 운영 방식도 이때 만들어졌다. 빈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첫 연주회는 1842년 3월 28일에 오토 니콜라이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5년 후 니콜라이가 빈을 떠나고, 이듬해 혁명이 일어나자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1854년부터 칼 에커트가 이끌면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1860년에 그가 지휘한 네 번의 정기연주회 이후 빈 필의 정기연주회는 오늘날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 1860년에 빈 필은 오토 데소프를 상임지휘자로 선출했다. 이 기간에 레퍼토리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아카이브와 운영 절차 등 조직의 규칙이 다져졌다. 그리고 10년 후 오케스트라는 새로 지어진 ‘무지크페라인’의 황금홀으로 옮겼다. 데소프는 15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빈 필에 쏟았고, 오늘날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성장의 기틀이 마련되자, 안타깝게도 데소프는 알력에 의해 밀려나 빈을 떠나고 말았다. 1875년에 빈 필은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한스 리히터를 선택했다. 1882~1883년에 위원회와의 갈등으로 잠시 빈 궁정 오페라의 감독이었던 빌헬름 얀이 맡기도 했지만, 리히터는 빈 필과 함께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 비극적 서곡, 교향곡 제3번을 비롯하여,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 등을 초연하며 빈의 대표 음악단체로 성장시켰다.

계속되는 혼란

리히터는 1898년 5월 만장일치로 재선임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9월에 건강상의 이유로 돌연 사임했다. 구스타프 말러를 지지하는 쪽의 압력 탓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리히터의 후임으로 말러가 선정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로 보인다. 당시 리히터 지지자와 말러 지지자로 나뉘며 분열 조짐이 있었지만, 리히터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갈등을 잠재웠다. 하지만 분쟁의 봉합으로 얻어진 결과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말러는 강력한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의 첫 해외 연주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에도, 리히터 지지자들과 반유대주의자들은 말러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그의 베토벤 해석에 대한 비판과 그가 만든 규율에 대한 반감도 불만을 가중시켰고, 운영자들과의 마찰도 심각해졌다. 결국 말러도 이듬해 4월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1901~1903년 공백기에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주니어가 빈 필을 이끌었으며, 이외에는 객원지휘자로 정기연주회를 진행했다. 1908년에 새로운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펠릭스 바인가트너가 선출되었다. 바인가르트너는 데소프와 리히터에 이어 빈 필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2년 첫 남미 순회공연을 포함하여 (정기연주회에서 사임한 후) 1936년까지 432회의 음악회를 소화하며 빈 필을 세계적인 악단으로 올려놓았다. 바인가르트너는, 자의적이었던 말러와 달리, 정확한 템포를 유지하는 등 악보 중심의 베토벤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한 시즌에 최소한 두 곡의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했고, 1916~1917년과 1926~1927년에는 전곡연주라는 기념비적인 과업을 완수했다.

1927년 바인가르트너가 바젤 극장의 감독으로 옮기면서 사임한 후, 빈 필은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후임으로 선출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하모닉에서의 활동이 과중하여 3년 만에 사임했고, 그 뒤를 이은 클레멘스 크라우스도 3년 만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유럽의 무게중심이 베를린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었던 탓에, 빈 필은 연속으로 두 지휘자를 베를린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빈 필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던 푸르트뱅글러를 재영입하면서, 브루노 발터와 동등하게 나누도록 하여 부담을 줄였다. 발터는 빈 필과 함께 바그너의 ‘발퀴레’ 1막과 2막 일부, 말러의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 등의 중요한 음반을 녹음했고, 1935년 영국과 프랑스 투어를 이끌었다. 그런데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독일과 합병되자 발터는 빈에서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래서 빈 필은 푸르트뱅글러의 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잡았다.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가 시작된 것은 이때였다. 본래는 겨울에 전쟁이 소강상태가 될 때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나치의 지원으로 1939년 12월 31일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들로 연주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1940년 12월 31일과 1941년 1월 1일에도 슈트라우스 2세의 곡들로만 반복 연주하면서 신년음악회로 바뀌었으며, 전쟁 후에도 이 전통은 이어졌다. 지휘자는 크라우스를 시작으로, 요제프 크립스, 빌리 보스콥스키, 로린 마젤이 장기간 이끌었다가, 1987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이후 매년 지휘자를 초청한 관례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빈필하모닉을 이근 역대 지휘자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칼뵘 , 부르노 발터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20세기 중반 이후 빈 필은 세계 정상의
관현악단으로서 영예를 누리며 거장들을 맞이했다

확고해진 명성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부터는 푸르트뱅글러가 쉬어야 했다. 대신 나치와 무관했던 지휘자들이 객원으로 포디움에 올랐는데, 특이하게도 1947년 1월에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이 지휘봉을 들었다.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무혐의가 확인되어 그해 말부터 지속적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발터와의 재회도 이 해에 이루어졌다. 발터는 제1회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빈 필과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연주했다. 푸르트뱅글러 역시 나치 관련 무혐의가 확인되어 1947년에 빈 필에 복귀했으며, 1954년까지 빈 필의 주요 지휘자로 활동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빈 필은 세계 정상의 관현악단으2로서 영예를 누리며 거장들을 맞이했다. 1956년 칼 슈리히트와 앙드레 클뤼탕스의 지휘 아래 첫 미국 투어를 했으며, 카라얀과 칼 뵘, 번스타인, 이스트반 케르테슈 등이 빈 필로부터 최상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피에르 불레즈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또한 빈 필의 명예를 최근까지 이어준 공신들이었다.

 

빈 필하모닉 사운드

발터는 1960년 인터뷰에서, 지금의 빈 필 사운드는 1897년에 처음 들었던 사운드와 똑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과거의 소리를 유지하고 있는 ‘빈 필 사운드’는 이 악단의 핵심 가치이다. 빈 오보에, 욀러 클라리넷, 빈 혼, 로터리 트럼펫, 로터리 튜바, 슈넬라 팀파니 등 빈에서 개발되었거나 예전부터 사용된 악기를 사용하는 데서 다른 관현악단과 다른 고유의 사운드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더블베이스를 관악기 앞에 배치하는 것도 남다른 현장 사운드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빈 국립 오페라에서 3년 이상 활동한 단원 중에서 빈 필 단원을 선발한다는 규정 또한 독특한 사운드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즉 연주 실력과 빈 음악가들과의 조화가 검증된 인물로서 뛰어난 밸런스를 보장한다. 하지만 1997년까지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논란거리였다. 여성을 영입하면 빈 필 특유의 감성적 통일성을 해칠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정서적 장벽이 높았다. 현재 세 명의 악장 그룹 중 한 명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큰 변화를 상징하지만, 전체 단원 중 여성 단원의 비율이 타 관현악단보다 현저히 낮은 6%라는 점은 아직 불균형이 해소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30년 이상 근속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에서 인적 쇄신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빈 필의 고유한 사운드는 객원지휘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휘자가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따라가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따라서 지휘자가 달라져도 사운드와 해석이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빈 필하모닉의 역사적 음반

빈 필하모닉의 음반 중에서 명반을 소개하려면 객석의 모든 지면을 다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네 음반을 골라보았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추모하며’라는 타이틀의 음반은 빈 필의 정기연주회 지휘자였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것으로, 1936년 2월 25·26일에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8번을 수록했다. 오래된 녹음에 잡음을 깨끗이 제거했으면서도 훌륭한 악기의 밸런스와 임장감을 확보하고 있으며, 비브라토 없이 깔끔한 당시 연주 스타일도 확인할 수 있다. 절도 있는 리듬과 유연한 선율을 대조시켜 극적 효과를 얻는 점도 눈에 띈다. 템포나 다이내믹 등의 측면에서 오늘날 표준적인 해석과 큰 차이가 없는데, 바인가르트너의 연주가 베토벤 해석의 표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인가르트너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음반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발터가 지휘하는 말러의 ‘대지의 노래’는 1936년 5월 24일 빈의 무지크페라인에서 녹음된 음원으로, 당시는 빈 국립 오페라의 감독으로 임명되는 등 빈에서의 입지가 한창 높았을 때였다. 오래된 녹음임에도 감상에 지장을 주는 요소는 없으며, 훌륭한 밸런스와 비브라토를 자제하는 빈 필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그러면서 말러의 작품이 요구하는 넓은 표현의 스펙트럼까지 확보하고 있다. 템포는 약간 빠르게 당겨져 있는 데 반해, 마지막 악장은 여유를 둠으로써 죽음을 동경하는 마음에 어울리는 마무리를 들려준다. 풍부한 음향과 굵은 비브라토를 들려주는 스웨덴의 메조소프라노 셰르스틴 토르보리와, 자유로운 리듬으로 노래하는 미국인 테너 찰스 컬맨의 대비도 흥미롭다. 이 음반에는 2년 후인 1938년에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5번 중 아다지에토도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감성이 오늘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음반은 워낙 많지만, 1953년 5월 30일에 연주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만년의 연주로서 좋은 음질을 들려준다. 푸르트뱅글러의 자의적인 해석이 엿보이는데, 장면에 따라 템포를 변화시키고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설정하여 원색적인 이미지로 유도한다. 마치 구체적인 메시지를 말하는 듯하다.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이 연주가 가진 남다른 호소력이자 분명한 매력이다. 빈 필이라면 신년음악회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저마다 특색과 개성이 있지만, 카라얀이 맡은 1987년은 가장 완성도가 높은 연주회로 인정받고 있다. 1964년에 빈 국립 오페라의 예술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소원해진 빈 필과의 재회와 함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와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 등 세 슈트라우스의 작품만을 수록한 완벽한 프로그램, 그리고 ‘봄의 소리’를 세상에 알린 캐슬린 배틀의 환상적인 노래 등 모든 것이 최상이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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