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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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2일 9:00 오전

가을, 브람스의 서정

에도 데 바르트/KBS교향악단(협연 게릭 올슨)

9월 19일 오후 8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자연이 아름다운 계절, 클래식 음악계의 프로그램도 중후하고 서정적인 낭만을 노래하는 작품들로 점점 채워지고 있다. 9월 19일과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KBS교향악단의 브람스 선율로 물들었다. 노련하고 균형감 있는 명지휘로 음악계를 사로잡아 온 지휘자 에도 데 바르트와 1970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게릭 올슨의 만남은 신선한 에너지와 긴장감 넘치는 풍성함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첫 곡으로 연주된 게릭 올슨 협연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완벽하고 세련된 테크닉을 구사하던 게릭 올슨의 어느덧, 연륜과 깊이가 쌓인 원숙한 피아니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2012년 타다아키 오타카가 지휘하는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음반을 발매한 바 있다.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만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피아노 선율은 오케스트라 앙상블 속에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수준 높은 피아노 테크닉이 필요한 요소마다 차분하고 안정된 균형감을 유지했다. 그렇게 브람스가 그린 큰 그림을 완성해 가는 그의 모습은 밝고 화사하게 그려낸, 우아한 브람스의 음악적 이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3악장 첼로 수석 김우진의 따뜻하고 섬세한 독주 연주가 오케스트라와의 대화처럼 친밀하고 인상적이었다.

2부에서 펼쳐진 브람스 교향곡 2번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받은 영감이 바람의 숨결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때로는 결렬하고 화려하게 펼쳐지며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은 풍성함을 맛보게 했다. 밝고 따뜻한 1악장에 이어 고독하고 쓸쓸한 가을의 우수를 느끼게 하는 2악장의 낭만과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3악장의 향연, 그리고 오보에의 따뜻한 선율, 4악장에서의 자유롭고 온화한 행복함은 축제의 환희와 낭만을 느끼기에 충분한 앙상블이었다.

봄날에 꿈꾸는 희망처럼, 높은 산에 오르니 보이는 풍경처럼 차분히 쌓아 올린 풍성한 화음들 사이에 브람스의 낭만이 비로소 피어나고 있었다. 노련한 에도 데 바르트의 지휘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피아니스트 게릭 올슨의 만남이 이뤄낸 시너지였다. 국지연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옥상훈/한국문화예술위원회

느리고 주변적인 삶의 면면

연극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9월 1~11일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유튜브 영상도 10분이 넘으면 외면당하는 짧은 콘텐츠의 시대에 160분짜리 연극이 용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극작가로 잘 알려진 장우재가 연출한 연극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얘기다. 연극은 아모스 오즈의 단편 소설집 ‘친구 사이’를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공동소유·공동노동을 원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연출가 장우재는 단편 소설집을 극화하며 여덟 개의 단편을 막별로 구성하는 대신, 무대 위에 한꺼번에 펼쳐놓았다.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각각의 서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무대는 이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무대는 회전하며 중심에 위치하는 배우들을 바꾼다.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치지만, 무대의 어느 한구석을 바라봐도 극은 진행 중이다. 오히려 대사가 없는 동안 일상적인 행동을 연기하는 배우를 볼 때 인물의 상황이 더 와 닿기도 한다. 이로써 ‘빠르고, 간단히, 요점만’에 익숙한 이들에게 장우재는 끈덕지게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옥상훈/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키부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청년 요탐이 있다. 요탐이 표를 구하는 행위는 월요일부터 6일간 진행되는 시간의 축에서 중심이 된다. “누구세요?” 경계하며 묻는 이웃의 목소리에 그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이번 주 토요일 있을 총회에서 자신을 위해 찬성표를 던져달라고. 요탐의 외삼촌은 대학 진학을 지원하겠다며 그를 이탈리아로 초청했다. 그러나 키부츠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그의 진로가, 인생의 방향이 투표에 부쳐진 것이다. 요탐은 과반수 찬성표를 얻어야만 키부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2 대 2에서 2 대 3, 다시 5 대 5… 요탐이 이웃을 만날 때마다 바뀌는 투표 결과에 극의 마지막, 요탐의 향방을 점쳐보게 된다.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제 편을 늘려가는 요탐을 보니 문득 어린 시절 부르며 놀던 노래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상대에게 당당히 진격하다 다시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비슷하다. 다만 우리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가위바위보가 아닌, 설득과 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집에 찾아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 요탐에게 키부츠 사람들은 때로는 동의의, 때로는 반대의 근거가 되는 각자의 사정을 얘기한다. 서로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만 존재하던 그들이 만남을 거듭하며 개개의 삶을 너끈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원칙과 관습, 집단의 분위기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의 중심을 잡아간다.

기자는 연극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를 “이해를 구하다 결국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로 읽었지만, 관객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가 도출될 수 있는 작품이다. 극중 워낙 다양한 상황에 처한 각기 다른 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을 관람하는 일은 곧 자신의 가치관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궁금해진다, 당신의 이야기가. 박서정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예술을 좇는 핏빛 발자국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9월 6일~11월 10일 |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왜 예술가로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하지?” 진정한 예술을 위해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세속적인 말. 짧고 강렬한 삶을 살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 이들을 보며 우리는 고통과 광기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야말로 타인에게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예술의 영감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예술가들의 고통은 정당하게 치부해버린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안으로 만든 작품이다. 다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현대 유럽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는 예술가들로 재탄생시켰다. 미와 젊음에 집착하다 파멸했던 원작의 도리안은 모던 아트 작가 제이드로, 도리안이 지닌 아름다움을 초상화에 담아냈던 화가 배질은 사진작가 유진으로, 도리안에게 유미주의적 예술관을 강요하는 헨리는 신진 아티스트를 발굴해 스타로 키우는 기획자 오스카로 변신했다. 총체극 또는 콜라보 프로젝트로 장르명을 명명한 작품인 만큼, 창작진 역시 화려하다. 연출가 이지나·작곡가 정재일·안무가 김보라·비주얼디렉터 여신동 등이 참여했다. 제이드 역 김주원·문유강, 유진 역 이자람·박영수·신성민·연준석, 오스카 역 강필석·마이클 리 등 출연진 역시 장르를 불문한다.

단순한 젠더프리캐스팅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작품의 캐스팅이 영리한 이유는 동성애를 다루는 기존 작품들과 차별화된 관점을 제기해서다. 잘생기고 젊은 남성 배우들의 동성애는 대학로 주 관객층에 소구했고, 무분별하게 남용된 이들의 열애설은 본디 뮤지컬이 동성애와 에이즈 등 변두리적인 소재를 다루며 관객과 호흡해온 것을 조금씩 흩뜨려 놓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원작에서부터 등장하는 동성애적 소재를 남남·남녀·여여 등 페어별로 각기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제이드와 유진이 마치 서로의 소울메이트인 것처럼 묘사했다.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의 흡입력을 높인 장치였다.

서두의 문장은 오스카의 말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예술관으로 충돌한다. 제이드의 재능과 스타성을 알아본 오스카는 그를 예술계의 스타로 부상시킨다. 그러나 일약 유명인이 된 제이드는 양극성 장애(manic-depression)에 시달리며 조금씩 광기로 치닫는다. 유진은 그러한 제이드를 곁에서 끝까지 지켜본다. 광기의 과정을 무용과 동작으로 풀어낸 부분은 다소 불친절했지만, 신선했다. 잔잔하면서도 날카롭게 흐르는 정재일의 음악은 관객의 마음속으로 깊이 침투했다.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에 비해 곳곳에서 실험적 요소가 돋보였다. 다만, 불편했다. 미쳐가는 예술가를 보고 있는 관객은 지쳐갔다. 예술은 건강한 체력과 정신에서부터 탄생한다는 믿음을 지켜가고 싶었기 때문일 것.

원작과의 싱크로율 또한 높지 않았다. 제이드가 지속해서 “나 어때? 아름다워?”라고 물어보는 장면을 통해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원작 속 도리안 그레이를 연상시키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미와 젊음에 탐닉하는 제이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예술가에 한정짓기 보다는 현대인의 정신분열적 증세를 묘사하는 것에 가까웠다. 예술의 본질을 좀 더 깊숙이 파고드는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예술을 좇는 ‘핏빛’ 발자국이 그저 상처에서 그치지 않고 숭고함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말이다. 권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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