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투 노멀’, 울게 하소서, 평범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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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1월 11일 9:00 오전

 

마음의 실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바다보다 어둡고 캄캄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인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탄식이나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체념은 흔한 유행가의 가사만은 아니다. 맞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모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조차 알지 못한다. 신화 속의 미로는 이제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자기의 마음에 갇힌 채 뱅뱅 맴돌다가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해 점차 시들어버리는 얼굴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자화상이다. 최초의 탈출자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로를 빠져나왔다. 마음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20세기가 일군 최고의 성과는 다름 아닌 ‘마음의 학문’이다. 프로이트가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향해 무의식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후로 숨겨진 마음을 알 수 있는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이제 한 길 사람 속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유익함은 많다. 개인의 내면을 설명하는 전문적인 어휘가 늘어난 만큼 마음과 감정은 더 이상 미궁이 아니라 분명하게 규정될 수 있는 실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체가 대부분 부정적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긴 하지만 그게 나라니 어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경향이 어느새 증상으로 바뀌어 있으니 말이다. 걱정이 많다고 했더니 불안장애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어렵다고 하니 대인공포증이라고 한다. 이렇게 따지면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공부를 못하면 학습장애일 테고, 잠을 설치면 수면장애일 텐데.

살면서 겪는 압박이나 부정적인 감정에 스트레스성 무엇이라든지 무슨 장애라든지 질병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효율로 따지자면 이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내가 어떤 부분에 취약한 상태인지를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 상태를 극복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약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약한 존재로 만드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약함도 있지만, 그것을 돌파할 힘도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과 감정의 ‘건강함’은 어쩌면 이런 돌파력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감정적 취약함이 질병이 되어버린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짜 마음의 힘은 무엇일까.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탁월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평범한 가족’을 다룬 뮤지컬

2008년에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고 2010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넥스트 투 노멀’은 매우 세련된 뮤지컬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전통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 안의 갈등과 아픔을 다룬 이야기는 미국 현대드라마의 서사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 오닐이나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로 대표되는 미국 현대드라마에서 ‘가족’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혈연과 애정으로 엮인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개인을 얽어매는 굴레인 가족. 밀접하게 엮일수록 상처만 주고받을 뿐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위기는 극복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붕괴되고 있는 가족의 틀 안에서 사람들은 소외되고 그래서 또한 외롭다. 가족은 안주할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새로운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 현대드라마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전제를 향해 쓸쓸하면서도 냉정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미국 문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넥스트 투 노멀’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작품이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 역시 쓰리고 아프다. 이 작품이 록 뮤지컬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뭔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사가 문학적으로 깊어지는 만큼 록 역시도 음악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록은 강한 에너지와 분명한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젊은 장르였다. ‘헤어’에서 록은 극이라는 틀에 매이지 않고 직접적으로 외치는 자기 선언이었으며, ‘록키호러쇼’에서는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발칙한 도발이었다. 록의 변화는 천천히 감지되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거치며 이야기의 옷을 입기 시작하더니 ‘렌트’에 이르러서는 극적 리얼리티를 담아낼 수 있는 음악적 언어로 확장된 것이다. ‘넥스트 투 노멀’에서 비로소 록은 에너지가 아닌 깊이를 갖춤으로써 클래식에 버금가도록 안정적인 음악으로 성숙했다. 이러한 여유는 록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록 뮤지컬을 표방하면서도 록을 사용하지 않는 역설적인 선택이 꽤나 과감하니 말이다. 이야기의 주된 갈등이 드러나기까지 발라드와 클래식 사이에 록의 에너지를 아껴두다가 주인공의 내면이 폭발하는 순간 연주되기 시작하는데 그 효과가 상당하다. 이 작품에서 록은 우아하면서도 격정적이다. ‘넥스트 투 노멀’의 무대에서도 계보의 흔적이 보인다. 극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기호로서 이 작품의 무대는 연극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정집의 내부이지만 차가운 철제빔으로 나뉜 각각의 공간은 서로의 세계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3층으로 구현된 무대 역시 중소극장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의도적으로 분배한 높이의 공간에서 아래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단 한 명의 인물. 이렇듯 부재하는 인물을 극의 중심으로 활용하는 연출방식에서도 이 작품의 세련된 면모는 돋보인다. 부부인 댄과 다이애나의 플롯과 그들의 딸인 나탈리와 남자친구 헨리의 플롯을 이중적으로 겹쳐놓은 솜씨도 그렇다. 주된 플롯과 서브플롯이 엮이면서 작품의 주제의식이 선명해지는 것은 연극적 플롯의 고전적인 방식이다. 문학적이고 연극적인데, 더없이 뮤지컬답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를 이렇게 일관성 있게 통합한 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흔치 않다. ‘넥스트 투 노멀’이 빛나는 이유이다.

 

 

 

치료에서 치유로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계보가 아니라 질문에 있다. 전통적인 가족 서사 위에 병든 감정과 깨진 마음에 대한 질문을 얹었을 때, 미국의 현대드라마는 금세 보편적인 이야기로 지평이 확 넓어진다. 모든 정신적 문제의 바탕에 가족이 있다는 것은 심리학의 기본 전제인바, 심리학의 시대에 가족의 서사는 곧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가족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거리를 두어야 할 적에 가깝다. 무의식에 저장된 상처의 기억은 가깝게 밀착된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친구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너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문제는 이제 일상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상한 감정과 부서진 마음을 스스로 모른 체하며 그저 견디는 사람들은 자기 안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간다. 이 작품은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고립은 증상일까 상처일까. 증상을 기준으로 보자면 다이애나는 정신의 질병을 가진 환자이다. 조증과 우울증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성격장애에, 환시를 현실로 착각하는 조현증상도 있고, 섹스중독의 경향을 보이다가 갑자기 무기력해지기를 반복한다. 이쯤 되면 부정할 수 없는 정신병 환자인 셈이다. 작품의 1막은 다이애나의 다양한 증상과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얼마나 꼼꼼하게 그려지는지, 마치 실제 치료의 시뮬레이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단 약물치료. 효과는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조울증이 오기도 하고 무감각해지기도 해서 일상생활이 어렵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당장 환시가 심해진다. 상담 치료를 병행한다. 과거를 떠올리라지만 무의식에 가둘 만큼 마주하기 싫은 기억을 끄집어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그런 의지를 발휘할 힘이 아예 없다. 그렇다면 최면을 통해 기억을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덕분에 감춰둔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하지만 그 기억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 이때 선택은 두 가지다. 기억을 없애거나 나 자신을 없애거나. 다이애나는 두 가지를 다 선택한다. 그리고 모두 실패한다. 다이애나의 ‘증상’은 치료로 호전되지 않는다. 그의 증상은 뇌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가 무의식에 가둔 것은 상실의 기억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된 아들을 잃었을 때 어린 엄마 다이애나는 아이를 미처 떠나보내지 못했다. 4개월이 지나도록 슬픔이 지속되는 것은 병이라는 의학 교과서의 처방대로 그의 슬픔은 질병으로 진단되어 약으로 다스려졌을 뿐이다. 그는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다. 제대로 눈물을 쏟지도 못하고, 한 번도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영혼이 박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게 되었을 때 다이애나는 비로소 자기 앞에 누가 있는지를 보게 된다. 딸 나탈리는 위로받아야 할, 나처럼 상처받은 사람이고, 남편 댄은 자신로의 상처를 직시해야 할, 나처럼 상처를 외면해온 사람이다. 그들 모두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인 거다. 특수한 사람들의 질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처였다. 치료로 시작된 이야기는 치유의 시작으로 결을 바꾼다. 노멀(normal)의 의미 또한 바뀌어 있다. 모든 사람이 정상일 순 없다. 모든 사람은 그저 평범할 뿐이다.

비로소 평범해지기까지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말의 뜻을 따라가 보면 평범함이란 보통(平) 사람들(凡) 모두가(common) 모이는 자리(place)이다. ‘남들만큼’이나 ‘남들처럼’ 같은 상대적인 자리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인 자리에 평범함이 있는 거다.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자리는 어디이며 피할 수 없는 처지란 무엇일까.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저자인 철학자 김상봉은 인간이 서로 만남을 이루는 장소는 고통의 자리라고 말했다. 고통의 기원은 죽음이다. 고통이란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작은 죽음인 바, 그 고통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이다. 나의 죽음 이전에 현실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이니, 나의 소중한 존재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내가 죽기 전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고통의 다른 이름은 상실이다. 상실의 경험은 한 사람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버린다. 어떤 위로의 말이나 눈빛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슬픔의 벽이 쌓여서 폐허가 된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 벽을 대신 허물어줄 순 없다. 그 벽을 허물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상실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 벽을 허무는 방법은 오직 하나라고 말한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마라.’ 슬픔은 넘치는 것이어서 자칫 우리를 삼킬 수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끄집어내 흘려보내려면 눈물이 북받칠 때 언제든 실컷 울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잠언이다. 눈물은 곧 애도이며 애도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이자 행위이다. 울 수 있음은 자기 자신과 상실의 경험을 화해시키는 시작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슬픔 속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곳이 인생에 허락된 ‘공통의 자리’(commonplace)임을 깨닫는다. 평범함은 이런 것이다. ‘넥스트 투 노멀’은 평범해지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사람들로 끝을 맺는다. 그들은 각각 다른 시작점에 서있다. 상처를 인정하고 견디며 오늘을 살아갈 결심을 하는 아내가 있고, 자기 역시 상처에 매인 사람이었음을 깨닫는 남편이 있고, 부모의 상처를 반복할까 두렵지만 그 시행착오 안으로 들어서기를 선택하는 딸이 있다. 상처를 감추고 함께하기보다 상처를 받아들이고 홀로서기를 선택하는 이 가족의 마지막은, 그렇기에 파국이 아니다. 다이애나는 이제 마음껏 울 것이고, 댄은 잊으려 애썼던 아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나탈리는 네가 미칠 때 같이 미쳐주겠다는 헨리와 함께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이들이 자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모른다. 그저 그들은 시작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시작은 분명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다. 그래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처의 흔적은 불쑥불쑥 고통의 기억으로 살아올 거다. 상처에는 유효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에게도 손바닥의 상처는 그대로 남았지 않았던가. 3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도 부활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보여준 것은 못에 박힌 손바닥의 상처였다. 예수를 증명하는 유일한 몸의 흔적이, 제자들이 알아볼 만한 분명한 증거가, 바로 이 상처였던 거다.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처만이 각자의 삶이 진정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해줄 증거일지니,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무엇을 잃었는지에 인생의 본질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평범해진다는 것은 이런 삶이 진짜임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이 자리에서 상처는 말할 수 없는 금기가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슬픔이 될 것이다. 상처와 더불어 만들어내는 편안함이 오직 평범한 삶의 근처에서만 싹틀 수 있는 이유일 터. 이런 삶을 이길 힘이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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