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 핀커스 주커만

백전노장의 선견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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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2월 23일 9:00 오전

 

핀커스 주커만에게는 오래된 오해가 있다. 그를 두고 혹자는 차갑거나 내향적이라고 말한다. 주커만은 지난 10월, 호주 애들레이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통영 공연을 위해 내한했다. 그는 분주한 일정을 쪼개 한국 바이올린 영재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하여 이번 내한은 ‘연주자 주커만’이 아닌, ‘교육자 주커만’을 만날 수 있는 신선한 기회였다. 그런데, 주커만 이 사람. 꽤 자상하고 다정하다. 그간의 소문은 풍문이었나

 

핀커스 주커만/애들레이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통영국제음악재단

since 1988 핀커스 주커만 내한 보고서

# REPORT ~2018

언제부터인가 주커만이 한국에 가까이 다가왔다. 주커만의 최근 공연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2016년에는 핀커스 주커만과 함께하는 경기실내악축제가 도내 곳곳에서 한 달간 펼쳐졌다. 주커만은 아내인 첼리스트 어맨다 포사이스와 일본인 피아니스트 이쿠요 나카미치와 함께 실내악축제의 화려한 오프닝을 열었다. 성남아트센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고소현과 같이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예술의전당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는 경기필 무대에 섰다. 2018년 5월에도 경기필과 롯데콘서트홀에서 호흡을 맞췄다.
주커만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67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 레번트릿 콩쿠르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리면서다. 그가 국내에 실체를 드러낸 건 1970년대. 그는 1977년 12월, 이화여대 강당에서 내한 공연을 가졌다. 1988년 2월에는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내한 리사이틀을 가졌다. 당시 그의 공연 소식은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등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한편 「주커만」은 여러면에서 정경화와 비교돼 흥미로운데 「리벤트리트」 국제콩쿠르에서 공동 우승한것 이외에도 나이가 1948년생으로 동갑이며 「줄리아드」 음악원의 「갈라미안」 밑에서 함께 공부했다는 점 등이다.

– ‘동아일보’ 1988년 1월 30일

주커만과 정경화는 줄리아드 음악원의 갈라미언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며, 레번트릿 콩쿠르 공동 우승을 계기로 숙명의 라이벌이라 불렸다. 정작 주커만은 세간의 관심에 차갑게 반응했다.

“(정경화는) 물론 세계적인 훌륭한 연주자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세계를 뭐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녀의 음악은 라디오에서 몇 번 들었을 뿐입니다.”

– ‘객석’ 1997년 4월호

#‘객석’ 속 주커만

한국인들은 주커만의 내한을 늘 반겼다. 주커만이 내한할 때마다 언론은 취재하고자 달려들었고, 그는 늘 차갑게 반응했다. 1988년 2월의 내한을 앞두고 ‘객석’도 표지 인터뷰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런데 기사 분량이 소략하다. 주커만이 방대한 리코딩을 발표하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그 기사에는 당시 인터뷰를 진행한 김영기 뉴욕특파원의 답답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카메라와 녹음기를 점검하고 얼음판 위를 기듯이 차를 몰았다. 가끔 머리를 처박고 있는 미끌어진 차들 사이를 조심스레 빠져 맨하탄 북서쪽 웨스트엔드 711번지의 그의 사무실에 간신히 도착했다. “엊저녁 눈을 보자마자 식구들과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어요.” 여비서 웬디양이 울상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도 찾고 있었단다. – ‘객석’ 1988년 2월호

 

“어떨 때는 약속된 연주를 펑크내고 롱 아일랜드 어느 곳으로 숨어버리지요. 그럴 때마다 저희들이 무척 곤란을 당해요.” 내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로 들린다. 어쨌든 좋다. 주위 사람들과 그에 대해 간접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챙겨들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객석’ 1988년 2월호

뉴욕에서 약속된 인터뷰 당일, 주커만이 감쪽같이 잠적해버렸다는 것. 담당 기자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심지어 그의 비서도 울상이었단다. 실제 핀커스 주커만은 인터뷰를 꺼리는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는 어릴 적 바이올린을 연습하라는 어머니의 불호령만큼이나 싫어했다고. 김영기 특파원은 주커만이 무려 3년간이나 자신과의 인터뷰 약속을 어겼다며, 본의 아니게 인터뷰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객석’ 독자들에게 사과한다. 주지하다시피 주커만은 천성적으로 사교적이지 못하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질색했다고 한다.

핀커스 주커만이 2월 4일 서울에서 독주회를 갖는다기에 부랴부랴 접촉을 시도했는데도 본의 아니게 이루어지지 못한 점 독자들에게 사과드려야겠다. – ‘객석’ 1988년 2월호

그는 분명 냉담한 사람이었다.

 

# report 2019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실제로 만난 주커만은 꽤 다정하다. 지난 10월, 그가 호주 애들레이드 심포니 오케스트라(ASO) 통영 공연을 위해 내한했다. 최근 주커만은 ASO와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ASO는 기존의 예술 단체와 같이 한 명의 아티스트를 예술감독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2016년부터 협력예술가 핀커스 주커만, 수석 객원지휘자 마크 위걸즈워스, 작곡가 캐시 밀리컨, 신진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스 클리포드로 팀을 구성해 운영해오고 있다. ASO는 주커만이 비상임 음악감독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추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2년은 더 ASO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라고 한다. 혹자는 주커만에게 더 유명한 악단으로 가야지 왜 ASO를 선택했냐고 묻는다. 주커만은 우연히 ASO와 협연한 후 이 악단이 가진 음악적 신념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일흔을 넘긴 현역 음악가에게는 유명한 악단보다는, 소신 있는 단체가 더 큰 전율을 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함께한다면 이 악단의 인지도가 높아질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10월 25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ASO 내한 공연에서 주커만은 지휘봉을 잡았다. 이번 공연은 ASO 아시아 투어로 이뤄졌고, 주커만은 중국과 한국에서 함께 연주했다. 중국에서 건너와 통영 연주를 마무리하고 바로 호주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빠듯한 스케줄. 주커만은 분주한 일정을 쪼개 한국 바이올린 영재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10월 25일 통영 연주를 마친 후 바로 서울로 와서 26일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27일에는 시그니엘 서울 호텔에서 두 차례 바이올린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그리도 꺼리는 사람이, 이 바쁜 와중에 어린 학생들을 만나다니. 꽤나 의외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번 내한은 ‘연주자 주커만’이 아닌, ‘교육자 주커만’을 만날 수 있는 신선한 기회였다.

 

2018/2019 주커만 연주 동향

2018/2019 시즌, 주커만은 70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고 있다. 런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PO)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함께하는 열 번째 시즌이었다. RPO와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투어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서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콜로라도 심포니·LA 필, 유럽에서는 NDR 라디오필하모니·카메라타 잘츠부르크·모스크바 스테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그가 사랑꾼이라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커만은 첼리스트 아내인 어맨다 포사이스와 피아니스트 앤절라 쳉과 함께 주커만 트리오를 결성했다. 최근에는 솔리스트보다는 트리오로 투어 공연을 잡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와 더 오래 옆에 있고 싶기 때문이라고. 주커만과 어맨다 포사이스 부부는 2018년 5월, 천안예술의전당에서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줄리아드 음악원 동문이자 함께 갈라미언을 사사한 이츠하크 펄먼과는 견고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최근에도 듀오 리사이틀은 물론, 실내악·오케스트라까지 함께하며 여전히 친밀한 사이임을 보여줬다. 한국을 방문한 주커만은 10월 2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바딤 레핀과 그의 아내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함께한 ‘투 애즈 원’을 관람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주커만과 레핀, 자하로바, ‘객석’의 김기태 대표는 저녁 식사 모임을 가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 처음 한국에 왔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확실한 건 한국은 지난 20년간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만난 경관, 음식, 친구들은 정말 특별했어요. 얼른 다시 한국에 가고 싶네요!”

 

©박관우

 

 

 

 

 

 

 

 

# 마스터클래스 관찰기

지난 10월 26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이강숙홀에서 열린 주커만 마스터클래스를 참관했다. 이날 마스터클래스에는 한예종 예술사에 재학 중인 여섯 명의 학생이 지도를 받았다. 한 학생당 30분씩, 총 세 시간 동안 주커만은 레슨에 온전히 힘을 쏟고 있었다.

교육장의 주커만

예상하기로 주커만은 조금 차가운 사람이다. 특히 레슨에 있어서는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학생들을 대하는 주커만의 자세는 퍽 살갑다. 레슨 때는 곡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한 음 한 음’을 세심하게 짚어냈다.

갈라미언의 부활

‘한 음 한 음을 통해 얻어지는 소리의 창조’는 실은 그의 스승인 갈라미언이 강조하던 교육법이다. 주커만은 언젠가 갈라미언의 레슨을 두고 “테크닉뿐만 아니라 악기 소리에 대한 느낌, 음악의 본질 등을 쉽게 체득케 하는 강한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주커만은 이번 마스터클래스에서 학생들에게 꼭 고쳐야 하는 디테일들을 지적했다. 특히 연주 자세를 꼼꼼히 살폈다. 활을 컨트롤하는 오른손, 악기를 지탱하는 어깨와 턱의 위치 등 그가 조금만 자세를 바로잡아도 학생들의 음색은 확연히 깊어졌다.

녹음기는 꺼두세요

그는 학생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힘주어 강조했다. “레슨 할 때 녹음하지 마세요. 녹음기에는 자신이 틀리게 한 연주가 담겨지겠죠? 잘못된 연주를 계속 듣다 보면 음악은 길을 잃어요.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음반을 들으며, 자신의 연주를 그 음반에 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모방은 좋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야 해요.”

 

“줄리아드 음악원을 다니던 10대에 저는 모든 종류의 문화를 즐겼어요. 그건 매우 막중한 일이었죠. 육체적, 정신적, 지식적 성장에 있어서 10대 시기는 정말 중요하다고 봐요.”

 

 그 역시 누군가의 제자였다

# 첫 스승, 아이작 스턴

핀커스 주커만은 1948년 지중해 해안을 따라 자리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바이올리니스트였기에 그는 자연스레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처음 악기를 손에 잡은 일곱 살, 몇 달 동안은 튜닝하는 법만 배웠는데도 아버지는 단번에 아들의 청음 능력을 알아차렸다.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주커만이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아이작 스턴(1920~2001)과의 만남 덕분이다. 아홉 살 때 만난 아이작 스턴은 주커만의 미국 유학길을 열어주었다. 그야말로 강력한 후원자였다. 주커만은 아이작 스턴을 자신의 첫 스승이라고 인정한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고. 아이작 스턴은 자라나는 주커만에게 말했다. “핑키! 스펀지가 되어라. 너는 지금 뉴욕에 있고, 많은 공연을 즐길 수 있어.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그저 스펀지가 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여!” 음악계에는 소위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사단’이 있다. 아이작 스턴을 비롯해 이츠하크 펄먼, 핀커스 주커만, 길 샤함, 막심 벤게로프 등이 강한 결속력을 보인다. 아이작 스턴은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대부라고 불리곤 했다. 그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항거하며 푸르트벵글러, 카라얀과는 협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스승 아이작 스턴과는 달리 주커만은 과감히 독일을 방문해 놀랍다. 주커만의 부모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1970년대, 주커만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독일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Here to Make Music!)”

 

펄먼과 주커만, 갈라미언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둘은 여전히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Chris Mikula

#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 계보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에는 일련의 계보가 있다. ‘명교수’라 불렸던 갈라미언(1903~1981)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핀커스 주커만, 이츠하크 펄먼, 정경화, 김영욱, 강동석을 길러냈다. 갈라미언의 교수법이 다소 강압적이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제자이자 주커만의 음악적 동료인 펄먼은 여러 인터뷰에서 갈라미언의 레슨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갈라미언은 말보로를 피우며 레슨 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학생들 옷에 냄새가 잔뜩 밸 정도였다고. 갈라미언은 제자들에게 늘 채찍질하던 스승이다. 통상적으로 스승의 레슨 방식은 곧이곧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지기 마련. 그렇기 때문에 주커만의 자상하고도 섬세한 레슨 스타일은 의외성을 준다. 주커만의 기억 속에 갈라미언은 어떠한 스승이었을까. “갈라미언은 교사로서 선견지명이 있었죠. 우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어떻게 하면 음악적으로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인내심이 있었으며, 문화 예술의 정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 갈라미언의 선견지명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안내한 사람이 아이작 스턴이었다면,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길을 이끌어 준 스승은 단연 갈라미언이다. 갈라미언은 학생의 재능을 단번에 꿰뚫고, 그 재능을 발전시키는 탁월한 교육자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커만이나 펄먼, 정경화가 배출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런데 갈라미언은 처음부터 주커만에게 연주자의 길을 열어준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제자에게 “애송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건넸고, 연주 무대에는 일체 못서게 했다. 방황심이 생긴 주커만은 당시 연습 대신 운동을 하고 카페를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단다. 그는 줄리아드에서 보낸 자신의 10대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줄리아드 학생이었을 때 난 아주 훌륭한 수영 선수였어요. 물론 탁구도 좋아했고요. 모든 종류의 문화를 즐겼고, 그건 매우 막중한 일이었죠. 육체적, 정신적, 지식적 성장에 있어서 10대 시기는 정말 중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후대를 위한 움직임

갈라미언은 주커만에게 음악적인 부분 외에도,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법을 가르쳤다. 음악적인 분출을 하지 못해 갈증이 심했던 그였지만, 재밌는 점은 현재의 주커만도 제자들에게 갈라미언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일례로 주커만은 SBS ‘영재 발굴단’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바이올린 영재 고소현(2006년생)에게 거듭 말했다. “10대에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콩쿠르 출전을 자제하고,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연습하면 안 된다!” 주커만은 이번 인터뷰에서도 고소현이 무르익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고소현은 주커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맨해튼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소현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입니다. 뛰어난 기교와 직감을 가졌죠. 지금 뉴욕에서의 시간이 소현에게 어떠한 성장을 불러올지 우리는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 원거리 교육 프로그램 Distance Learning Programs

주커만은 20년 전부터 맨해튼 음대와 함께 원거리 교육 프로그램(Distance Learning Programs)을 개발해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원격 온라인 마스터클래스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맨해튼 음대의 교수진은 대부분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전문 연주자들. 교수들의 해외 연주 때문에 레슨이 자주 취소되자, 맨해튼 음대는 전략적으로 원격 마스터클래스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주커만 역시 워낙 투어가 많은 연주자 아닌가. 오롯이 학교를 지키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정기적인 레슨’이라고 말한다. 그는 2000년대부터 맨해튼 음대와 함께 적극적으로 기술 발전을 모색했고, 오랜 기간 연구 끝에 현재 학교는 폴리콤(polycom) 기업과 제휴 협약을 맺어 질 높은 영상 레슨을 구현하게 됐다. “오래전부터 화상 레슨을 시도해왔어요. 투어 공연을 할 때에도 화상을 통해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레슨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지 학생들의 실력이 꾸준히 향상되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차 기술은 개선됐고, 맨해튼 음대는 영상 레슨 기술을 갖춘 최초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 전부터는 맨해튼 음대뿐 아니라, 캐나다의 오타와 내셔널 아트센터에도 영상 레슨 시스템을 유치했다. 그는 한국도 IT 강국인데다가 훌륭한 개발자들이 많으니 눈여겨보고 있다고 한다. 잘 갖춰진 한국의 IT 기술을 음악 교육에 접목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가장 좋은 건 해외 학교와 국내 학교가 협약을 맺어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다채로운 레슨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테다.

# 에필로그

주커만의 자상한 모습을 보니 그간의 풍문(?)이 오해인 듯싶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마스터클래스에서 만난 주커만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때면 조금 피곤한 기색을 비춘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조금 더 관찰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러던 중 주커만의 팬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주커만에게 뛰어오자, 그는 다시금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장난을 친다. ‘아! 학생들에게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다정해지는 사람이구나.’ 짧은 시간 지켜본 그는 참 좋은 스승이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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