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2019/2020 시즌 개막 ‘오르페우스’ 시리즈

위기를 기회로 만들까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2월 16일 9:00 오전

WORLD HOT_

‘지옥의 오르페’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이다. 영국 공연예술의 중심지 웨스트엔드에 위치하며, 이름에서 느껴지는 보수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진취적인 극장으로 통한다. 과감한 연출적 시도와 탁월한 기획력으로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는 2015년부터 경영 부실 등의 이유로 영국예술위원회로부터 3년간 지원금의 약 30% 삭감을 통보받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 해 예산의 약 40%를 정부지원금에 의존하던 극장은 이 위기를 타파하고자 경영진을 교체하고, 작품 수를 과감하게 줄였다. 대신 시리즈 공연, 투어, 다양한 미디어 활용으로 새로운 관객과의 접점을 늘려나가고 있다. 승부수를 띄운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2019/ 2020 시즌 첫 작품은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를 주제로 한 오페라 시리즈다. 글루크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 버트위슬의 ‘오르페우스의 가면’, 글래스의 ‘오르페’로 구성됐다.

네 가지 시선

신을 감동시킨 음악가 오르페우스와 그의 아름다운 연인 에우리디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페라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몬테베르디 이후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오르페우스’ 시리즈 또한 바로크부터 현대까지의 오페라를 폭넓게 아우른다. 그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는 원작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과장되지 않은 음악은 극과 조화를 이루며, 감미로운 선율로 오르페우스의 아름다운 음색을 묘사한다. 반면, ‘지옥의 오르페’는 이야기를 완전히 비틀었다. 두 주인공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었고, 천국과 지옥의 신은 시도 때도 없이 에우리디체를 유혹한다. 종잡을 수 없는 막장 스토리에 오펜바흐 특유의 음악이 만나 유쾌한 오페레타가 탄생했다. ‘오르페우스의 가면’은 비선형 구조의 오페라로, 과거·현재·미래 시점의 세 인물이 동시에 한 무대에 등장한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가 빠진 자리를 다양한 타악기와 전자음악으로 채웠으며, 복잡한 음악을 두 명의 지휘자가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오르페’는 극 중 오르페우스가 사랑에 빠지는 공주 역을 추가해 재미를 더했다. 글래스는 장 콕토의 영화 ‘오르페’를 극으로 만들면서 배경음악처럼 일정하게 반복되는 오묘한 음악을 더했다.

경계 넘기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는 이번 시리즈 중 세 작품을 오페라 연출 경험이 없는 다른 장르 연출가에게 맡겼다. 우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는 영국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가 맡았다. 그는 현대적인 영상과 무용수 열네 명의 춤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합창단을 오케스트라 피트로 내리는 과감함을 보였으나 대신 음악적 풍성함을 잃었다. ‘지옥의 오르페’는 연극 연출가 엠마 라이스가 맡았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재임한 그녀는 레치타티보를 활용해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했다. 하지만 극적 요소에 비해 음악적 카타르시스가 부족하여 연극을 보는 듯했다. ‘오르페우스의 가면’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예술감독 다니엘 크레이머가 연출가로, 음악감독 마틴 브래빈스가 지휘자로 참여했다. 올해 85세 생일을 맞이한 버트위슬은 33년 만에 다시 제작된 본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연출가는 시간의 연속성을 파괴한 이 오페라를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각적 파격을 선택했다. 특히, 디자이너 다니엘 리즈모어를 섭외하여 의상을 제작했는데, 스와로브스키로부터 크리스탈 40만 개를 협찬 받아 화려하게 의상을 디자인했다. 커튼콜에 등장한 제작진은 기립 박수를 받았지만, 시각적인 효과에 치중한 나머지 극의 흐름과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진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르페’의 연출은 영상감독 네티아 존스가 맡았다. 그녀는 정형화된 작품을 효과적인 영상과 배우의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콕토의 영화 ‘오르페’를 오마주한 영상과 글래스의 음악은 절묘하게 어울리며 몰입감을 선사했다.

 

 

오직 영어로만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는 모든 오페라를 영어로 번안해서 공연한다. 이러한 작업의 밑바탕엔 모국어로 번안된 음악이 연주자와 관객 사이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한다. 그러나 원곡 특유의 맛깔스러움이 사라지고, 영어로 된 아리아와 대사를 다시 익혀야 하니,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정상급 가수들을 만나기란 어렵다. 그래서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는 성악적 기량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가수들의 전반적인 기량은 뛰어나진 않았지만, 작품마다 주목할 만한 가수들이 있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에서 오르페우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앨리스 쿠트는 안정적으로 극을 이끌며, 특히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무얼 할까(Che Faro Senza Euridice)’에서 큰 박수를 받았다. ‘지옥의 오르페’에서는 트렌스젠더 바리톤 루시아 루커스가 대개 여자가 연기하는 여론(Public Opinion) 역할을 맡아 데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출신 가수들의 활약도 눈에 크게 띄었다. 바리톤 알렉스 오터번은 ‘지옥의 오르페’ 플루토 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했으며, 소프라노 사라 타이넌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오르페’ 두 작품의 에우리디체로 출연하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바리톤 니컬러스 레스터와 소프라노 제니퍼 프랜스의 수려한 외모는 ‘오르페’ 영상과 조화를 이루며 영화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쉽게도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도 오페라는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극장의 관람객 수는 매년 줄어 재정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브렉시트에 대한 불안감으로 예술가들 또한 영국 방문을 꺼리는 모양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는 틀에서 벗어난 시도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오르페우스’ 시리즈가 위기의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를 구원할 전환점이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글 이성우(런던 통신원)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