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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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2월 17일 9:00 오전

래빗 홀

뾰족해진 마음에 다가서는 방법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다)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 데구루루 구르고 발길질을 하고 포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딱 그 자리에 발이 묶인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빈자리를 확인하고 상실감에 젖지만 그들은 먹고, 일하고, 학교에 다니고, 그리고 또 웃고 화내고 울면서 살아간다. 그들의 시간은 느리고 더디다. 시간 속을 유영하듯 흘러가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끊임없이 휘적대느라 종종 헛발질하기도 한다.

거북이걸음으로 상실에 다가서기 존 카메론 미첼이 연출한 영화 ‘래빗 홀’(2010)은 아이를 잃은 부부가 상실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아이를 잃은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상실을 견디는 이야기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남편 하위(아론 에크하트)와 아내 베카(니콜 키드먼)는 아이를 잃고 자신만의 슬픔에 몰두하느라 부부로서의 역할도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서로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슬픔을 극복하는 확연히 다른 방법들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는 하위와 베카를 거의 한 화면 속에 담아내지 않는다. 하위 이야기, 베카 이야기라고 따로 불러도 될 만큼 두 사람의 분절된 시간 속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한때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부부였지만, 이들은 이제 완전한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이가 살아있을 때의 기억과 현재의 지붕이다. 집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지 8개월 뒤, 카메라는 하위와 베카라는 부부가 사는 집과 그들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하위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현재로 불러와 아들을 계속 현실 속에 머물게 한다. 반면 베카는 아이에 대한 기억을 거부한다. 버리고, 지우고, 외면한다. 하위와 베카는 상실을 극복하는 각자의 이정표를 따라 지그재그로 마구 걸어간다. 그리고 자신만의 상처 극복법은 결국 타인에게 또 다른 생채기를 남긴다. 지독한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만, 인물들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시간도 마음도 모두 성장이 멈춰버린 탓이다. 실체가 없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와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하루하루, 매시간이 지옥 같다. 사실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미각이 포함된다. 하지만 기억은 계속 뭉그러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눈으로 덮여버린 도로처럼 그 실체를 잃어버리고 가물댄다. 그러니 기억을 놓치면 상대방의 존재도 함께 휘발되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기억을 묶고,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그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사람들은 가끔 웃기도 하고, 배가 고파 먹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슬픔을 잠시 잊고 내려놓기도 한다. 죽을 만큼 힘들어 바닥을 기더라도 진짜 죽지는 않고, 당장 죽어버릴 것 같이 숨이 막혀도 숨은 쉬고 있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다. 느린 보폭을 따르는 배려 영화는 데이비드 린제이 에브에어리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2007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수상작이며, 토니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아 많은 나라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사건의 열쇠를 쥔 제이슨의 개인사를 포함하여 원작 희곡 속에서 비중이 컸던 인물들을 조금씩 구석으로 밀어내고, 영화는 주인공 부부의 이야기에 훨씬 더 몰두하고 집중한다. 뮤지컬 ‘헤드윅’의 원작자이자, 2001년 동명 영화에서 헤드윅 역을 연기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줄곧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관조적인 시선으로 비극적 사고를 겪은 후 충격과 상처를 극복해 가는 남녀의 삶을 바라본다. 죄책감, 위로, 상실과 극복에 이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유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각자가 걷는 길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속물이고, 평범하게 비겁하고, 일반적으로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거라고 속삭이면서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니콜 키드먼은 아이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는 베카가 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며 교통사고 운전자와의 교감과 용서라는 쉽지 않은 숙제를 풀어간다. 우유부단한 하위의 태도는 얼핏 무책임해 보이지만 배우 아론 에크하트의 연기를 만나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덧입는다. 두 사람은 정서적 교감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럴듯한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며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들이 어쩌면 각자 상실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고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어떤 것도 뚜렷하게 결정하지도 돌이킬 수도 없는 우유부단한 그들의 모습이, 어쩌면 연약하기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에 가깝다고 설득한다.

 

그저 그거면 되는 작은 위로

‘래빗 홀’은 입을 닫아버리고, 각각의 상처를 홀로 웅크려 핥고 있는 두 사람이 다시 손을 맞잡는 과정을 보여주며 배려를 이야기한다. 깊은 우물 안에 갇힌 사람에게 넓은 세상을 보라고 다그치지 않는 배려. 빽빽한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사람에게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한심해하지 않는 배려. 텅 빈 사람이 안타까워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르기 전, 그가 앞서 깨어져 있음을 인정하는 배려. 그리고 더디고 느린 걸음을 가진 사람의 팔목을 드잡이하거나, 떠밀지 않는 배려. 그렇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상대방의 한숨이 의미하는 것, 그때의 침묵 사이에 놓였던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영화 ‘래빗 홀’의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굴을 상상하게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동차 사고를 낸 제이슨이 그린 만화의 제목으로 등장한다. 만화 속에서 ‘래빗 홀’은 일종의 평행우주론을 실현하는 구멍이다. 그 속에는 다른 차원의 내가 존재한다. 평소의 나와 다르게 행동하면서 새로운 차원이 생기면, 그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위와 베카는 아이를 잃은 후 친구와 가족과 함께 하는 첫 번째 파티를 상상한다. 이들의 내레이션과 함께 이어지는 파티 장면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지만, 파티가 끝난 후 허무함과 공허함 속에서 다 털어내지 못한 슬픔을 가진 두 사람은 묵묵히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아준다. 그저, 그거면 됐다, 이걸로 됐다, 하는 작은 위로가 둘을 감싼다. 정말 그거면 오늘도 살만하다 말하는 것 같다.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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