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얍 판 츠베덴 & 홍콩 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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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2월 24일 9:00 오전

 

 

2019년, 홍콩 필은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그라모폰’이 선정한 2019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미국과 유럽의 여러 유수 악단을 제치고 이름을 올린 것. 아시아 최초였다. 2020년, 츠베덴과 홍콩 필은 이 영광에 안주할 새도 없이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 올해의 시작을 알리는 1월, 베토벤 교향곡 1번이 홍콩문화센터에 울렸다. 홍콩은 시대의 불안 속에 있었지만, 거장의 또 다른 시작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잠시나마 평온해 보였다

 

1 츠베덴 홍콩 현지 인터뷰 2 악단의 역사 3 홍콩 필 대표 인터뷰 4 홍콩 필 공연 현지 리뷰 5 화제의 명반 소개 6 홍콩문화센터와 문화지구 7 내한 레퍼토리 프리뷰

INTERVIEW

지휘자 얍 판 츠베덴

부드러운 카리스마, 불안의 시대를 지휘하다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 196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 8세 바이올린 시작 15세 오스카 백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 (도로시 딜레이 사사)18세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최연소 악장으로 취임하여 16년 간 활동29세 번스타인의 제안으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리허설 지휘35세 세인트 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로 미국 데뷔, 네덜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취임36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마지막 녹음을 마침, 네덜란드 브라반트 오케스트라 영구 객원지휘자 취임. 아내와 함께 자폐아동과 청년들을 위한 파파게노 재단 설립46세 오페라 ‘나비 부인’으로 네덜란드 국립오페라극장 데뷔  47세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역임(~57세) 50세 라디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BBC프롬스 데뷔 2012 ‘뮤지컬 아메리카’ 올해의 지휘자 선정 51세 홍콩 필 음악감독 취임55세 뉴욕 필 상임지휘자 취임58세 ‘그라모폰’ 2019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홍콩 필 선정   59세 콘세르트헤바우 상 수상

 

도시 곳곳 시위 흔적으로 불안의 시간을 달리고 있는 홍콩,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뉴욕, 그리고 이 두 곳을 빠르게 오가는 츠베덴. 그래서일까, 그의 주변에는 항상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1월 16일 홍콩 필과 함께한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시리즈 첫 공연이 끝난 직후의 백스테이지에서도, 17일 단원 오디션을 앞두고 만난 20분간의 짧은 인터뷰에서도. 두 도시 속 분주함과 긴장감을 닮은 지휘자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홍콩 필은 2019년 ‘그라모폰’이 선정한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아시아 최초로 이름을 올리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츠베덴은 이 기쁨의 순간에서 이미 빠져나온 듯 보였다. 힘찬 숨소리와 함께 들어 올린 지휘봉의 끝은 과거를 지나 이미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올해의 시작을 알리는 1월, 츠베덴과 홍콩 필은 영광에 안주할 새도 없이 베토벤의 시즌으로 뛰어들었다.

불안의 시대를 넘어서는 리더십

현재 홍콩은 계속되는 시위로 불안정하다. 오랜 기간 홍콩에서 활동한 음악가로서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또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의 역할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때때로 대화보다 음악을 통해 서로 더 잘 연결된다. 네덜란드에 있는 파파게노 재단(자폐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츠베덴이 1997년 설립한 단체)에는 38명의 음악치료사가 음악으로 사람들을 연결하고 치료한다. 홍콩 필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가 음악이 지닌 치유의 힘을 믿는다면, 지금 이 세계가 마주한 더 큰 문제들도 음악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통해 홍콩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한다면 무척 뿌듯할 것 같다.

2012년부터 홍콩 필과 음악감독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함께하게 된 계기와 악단으로부터 받은 첫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면.

홍콩 필은 재능은 있으나 아직 그것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매일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즐기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8년을 함께하며 경험한 홍콩 필은 어떤가.

단원들도 젊고, 오케스트라의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뉴욕 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파리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등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닌 악단들과 함께해왔다. 홍콩 필은 현재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되기 위한 그들만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고, 이것이 내게 매우 큰 성취감을 준다. 우리는 전설적인 악단,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성장하는 길에 서 있다. 나는 악단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어서 어떠한 한계점도 두지 않는다.

홍콩 필에서 이룬 성과 중 하나가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음반일 것이다. 2015년에 시작해 2018년까지 4부작을 모두 실황녹음했다. 이 레퍼토리를 선정하고 음반녹음으로까지 작업을 진행한 이유가 있는가?

매니지먼트와 이사회, 심지어 정부와도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홍콩 필을 세계 최고의 악단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떻게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 수 있느냐? 전통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세계에서는 스스로 실력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만약 바그너 ‘링’ 사이클을 최고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다면 분명 세계적인 반열에 이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낸 일이다.

이를 통해 홍콩 필과 더욱 친숙해진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링’ 사이클을 진행하는 동안 홍콩 필이 점점 발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더 높은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꿈꾼다면, 반드시 ‘링’을 올리라고 말하고 싶다. 바그너의 음악은 서로의 소리를 더 주의 깊게 듣도록 만든다. 성악가들과 함께하며 오케스트라는 이전보다 더 유연하고 강력해진다. 바그너를 통해 얻는 이 모든 것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위한 학교와도 같다. 서로를 들으며 점점 악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진정한 앙상블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실제로 ‘링’ 사이클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다.

3월, 홍콩 필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을 선보일 예정인데, 이 두 곡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베토벤은 교향곡 3번 ‘영웅’을 가장 혁명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향곡 5번 ‘운명’이 그의 교향곡들 중 가장 상징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완벽함과 주제를 공유하는 곡이 바로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이다. 두 작곡가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을 한국과 일본 투어에서 연주하기로 한 것은 이들 모두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음악이 그렇지 않은가. 음악은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베토벤과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도 모두 그들의 영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뉴욕과 홍콩, 세계를 넘나들며

2018시즌부터는 뉴욕 필도 함께 이끌고 있다. 두 단체의 성격이 다른 만큼 지휘자의 역할과 작업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막 홍콩을 대표하는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1842년에 창단된 뉴욕 필은 이미 177년의 역사를 지닌 단체인데, 이들이 명성을 얻으며 직면한 상황을 바로 지금의 홍콩 필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유명 악단이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 그 수준이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욕 필은 177년 동안 그 힘을 강화해 왔고, 모든 지휘자는 뉴욕 필과 함께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명성에는 이미 충분한 가치와 자격이 있다. 홍콩 필은 신생 오케스트라이므로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뉴욕 필이 200년 가까이 무대에 오르며 자신들이 어떻게 연주해야하는 지를 알았다면, 홍콩 필은 이제 막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은 젊은 오케스트라이지만,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두 단체의 성향이 다른 만큼 각 악단에서의 주력 레퍼토리 또한 달라질 것 같다.

뉴욕 필은 굉장히 많은 양의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전통이 있다.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기성 작곡가들의 신작도 연주한다. 이러한 전통은 홍콩 필에선 보기 드물다. 계속 시도는 하고 있다.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준비 중인 프로그램도 있나?

뉴욕 필과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이미 모두가 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뉴욕 필은 현재 새로운 공연장을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어떤 사이클을 진행할 가능성은 있으나, 반드시 베토벤이 되리란 보장은 없다. 동양에서는 흔히 ‘유럽 사운드의 오케스트라’와 ‘미국 사운드의 오케스트라’로 해외 오케스트라를 분류하기도 한다.

 

 

음악은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베토벤과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도 모두 그들의 영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당신은 뉴욕 필과 홍콩 필 외에도 시카고 심포니·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로테르담 필하모닉·로열 콘세르트헤바우·파리 오케스트라·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런던 교향악단 등을 지휘하고 있다. 전 세계 오케스트라를 만나며 느낀 대륙적 특성이 있는가? 또한, ‘동양적 사운드 오케스트라’라는 표현이 성립된다고 보는가?

음악의 아름다움은 각 오케스트라마다 자신들의 소리를 가진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나는 ‘미국 사운드’나 ‘아시아 사운드’, 또는 ‘유럽 사운드’가 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지켜오고 내세운 전통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오케스트라는 주로 공연장과 연결되어 있다. 빈 필은 무지크페라인이 있고,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도 그들의 공연장이 있다. 그러나 아직 홍콩에서 서양의 클래식 음악은 시작 단계로, 조금 더 성장해야 한다. 40년쯤 후에는 ‘아, 이것이 그 특정 사운드구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성장하는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의 역량이 성장하고, 악단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느끼는가? 그 도달점에 이르게 하는 힘은 역사인가, 지휘자의 리더십인가, 관객인가?

관객은 객석에 앉아 공연을 즐기고 관람하는 사람일 뿐 오케스트라 성장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없이는 오케스트라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관객의 취향과 존재를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악단의 성장에 필요한 것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노력과 음악에 대한 애정, 확실한 계획과 리허설, 마음과 정신에 대한 명확한 파악 등의 결합이다. 이성과 감성이 함께 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안에서 하나의 멤버가 되어 악단의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를 확실히 알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모든 사람에게 ‘심장’이 있듯 오케스트라에도 ‘심장’이 있다. 플루트 수석, 오보에 수석, 클라리넷 수석, 바순 수석. 이렇게 네 파트가 오케스트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모든 혈관들이 다른 단원에게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목관악기를 심장이라고 하니 좀 의외의 답변이다. 그렇다면 다른 악기는 그 ‘심장’이 될 수 없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모든 악기들이 디테일한 기교와 소리를 내고 그 소리들이 통일을 이룰 때에 오케스트라의 심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디테일이 훌륭해질수록 소리도 오케스트라도 훌륭해진다.

악장에서 포디움에 오르기까지 37세에 바이올리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완전히 전향했다. 로열 콘세트르헤바우 악장으로서 쌓은 20년의 시간이 아깝다거나, 이후의 보장되지 않을 미래가 두렵지는 않았나?

인생에서 무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길 원한다면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게 낫다.음악에서 배운 한 가지는 지금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훗날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매우 불행하리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당신에게 이러한 확신을 주었나?

언제나 확신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선택한 일을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고, 내가 살아온 방식이자 생각이다. 오히려 가장 큰 위험이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말이 퍽 인상적이다.

삶의 모든 부분에는 실패에서 오는 위험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조차도! 그러나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괜찮다. 자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일에 전념해라. 지금 카페에서 우리에게 서빙한 젊은 직원도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 이 차의 맛이 더 좋은 게 아닌가? 100퍼센트의 애정을 갖고 일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같은 확신을 갖게 되는데 선배들의 역할도 중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음악적으로 영감을 준 이전 시대의 지휘자들이 있는가?

나는 많은 지휘자를 좋아한다. 특히 무티, 번스타인, 솔티, 줄리니를 존경하는데, 이들 중 세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는 무티 외에 세겡과 게르기예프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1943~2019)가 타계했다. 전 세계 수많은 음악가들과 팬들이 그를 추모했고, 한 시대를 풍미한 실력있는 지휘자이자 따뜻한 성품의 음악가로 기억했다. ‘객석’에서 진행한 추모기사(2020.1월호)에서 영국의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그를 ‘다정한 미소의 마에스트로’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신은 어떠한 음악가로 기억에 남고 싶은가?

나는 얀손스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닌 지휘자가 아니다. 그는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아는 대가였고 늘 사운들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얀손스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미소보다도 말이다. 솔직히 사람들이 나를 어떤 지휘자로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지 않나. 하지만 얀손스처럼 기억되는 지휘자가 되는 것은 모든 지휘자들이 갖는 꿈일 것이다.

글 이미라 기자

 

ORCHESTRA HISTORY

홍콩 필의 역사 1948~ 츠베덴이라는 날개를 달다

홍콩문화센터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홍콩 필의 역사는 나름 복잡하다. 홍콩 필의 전신이 되는 중영 오케스트라(中英管弦樂團/Sino-British Orchestra)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설립된 중영 클럽 내의 소모임에서 출발했다. 1946년, 일본의 강제 점거와 전쟁이라는 혼란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으나 영국과 중국 간 문화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이 모여 사설 단체인 중영 클럽을 만들었다. 여기에 소속된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20명 내외의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중영 오케스트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중영 오케스트라로 시작하다

이 시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는 벨라루스 출신의 의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솔로몬 바르드였다. 그는 1947년 가을 홍콩으로 돌아와 중영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으며 1948년 4월 성 스테판 여학교에서 첫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후 그가 계속 이 앙상블을 이끌었으나 1953년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아리고 포아를 초청해 그에게 지휘자 자리를 넘겨주고, 바르드는 악장의 자리로 스스로 물러났다. 아리고 포아(Arrigo Foa, 1900~1981)는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역임한 전문 음악가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지휘자까지 겸임했다. 1953년 홍콩으로 이주한 포아는 중영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줄리어스 카첸이나 루지에로 리치와 같은 저명한 연주자들과의 협연도 성사시켰다. 1957년, 단원들은 중영 클럽에서 떨어져 나와 오케스트라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때 현재의 명칭인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개명이 이뤄졌으며 기존 단원들 대다수를 포함해 포아와 바르드 역시 새 앙상블을 떠나지 않았다. 견고한 성장과정을 거치다 하지만 앙상블의 규모 자체는 간신히 정규 오케스트라의 그것에 턱걸이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설립 당시부터 참여한 인원 중 상당수가 직업 음악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주력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당시 연주회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규모가 작은 고전파와 초기 낭만파 음악들이 주를 이룬다. 1974년 홍콩 정부 당국의 주도로 홍콩 필은 홍콩 내 최초의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홍콩 필은 정기 연주회 숫자를 늘리고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연주회의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게 됐다. 현재는 시즌마다 140회 이상의 연주회와 18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성장했다. 홍콩 필은 크로스오버 장르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1982년 홍콩의 대중가수인 관정걸과의 합동 연주회를 시작으로 매년 대중가수와의 연주회를 개최하고 이를 음반화하고 있다. 이 중에서 1996년 발매된 장학우와의 ‘애여교향곡(愛與交響曲, Love &Symphony)’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디딤돌을 바탕으로 날아오르다

홍콩문화센터에 자리를 잡기 전 홍콩 필의 연주회장으로 사용된 곳은 센트럴 지역에 위치한 시청 콘서트홀이었는데, 이곳은 규모의 제약 때문에 대편성 관현악곡 공연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1989년 홍콩문화센터의 개장으로 이런 제약에서 벗어난 홍콩 필은 당시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애서턴의 지도하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애서턴은 1995년 가을 홍콩 필의 미국·캐나다 연주 투어를 성사시켰다. 애서턴의 뒤를 이어 음악감독이 된 사무엘 웡은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통한 오케스트라의 체질 개선에 힘썼으며, 2003년 런던 바비칸과 파리 샹젤리제 극장 등을 방문하는 유럽 연주 투어를 이끌었다. 그 뒤를 이은 에도 데 바르트(Edo de Waart, 1941~)는 말러 교향곡과 오페라를 적극적으로 연주함으로써 레퍼토리 확대와 새로운 청중의 확장에 기여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재직한 바르트의 뒤를 이어 2012/13 시즌부터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얍 판 츠베덴은 정열적으로 홍콩 필을 이끌며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공고히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단연 주목할 성과는 낙소스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이다. 마티아스 괴르네·미셸 드영·팔크 슈트루크만·스튜어트 스켈톤·사이먼 오닐 등 인기 성악가들의 절창과 츠베덴의 탄탄한 리드를 등에 업은 홍콩 필의 연주력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다. ‘니벨룽의 반지’의 성공에 힘입어 홍콩 필은 2019년 ‘그라모폰’지의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선정됐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 여러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홍콩 필이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팬 투표로써 결정되는 선정 방식의 덕을 본 것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평론가들만이 따로 선정하는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렸다는 것 자체가 홍콩 필의 높아진 위상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이 상을 받은 아시아 최초의 오케스트라가 된 것 역시 커다란 쾌거다. 츠베덴과 홍콩 필의 비상이 홍콩의 어수선한 정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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