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오페라 무대를 빛내는 한국의 젊은 성악가 75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6월 22일 9:00 오전

세계 오페라 무대를 빛내는 한국의 젊은 성악가 75인
COVER STORY+SPECIAL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젊은
성악가 75인

대한민국은 성악 강국이다!

전 세계 성악가가 모여드는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부터 독일과 미주의 크고 작은 극장에 한국인 성악가들이 포진해있다. 캐스팅 디렉터들은 “한국인이 노래 잘하는 건 다 안다”고도 말한다. 대한민국은 ‘성악가 강국’이다. 이번 특집에는 세계 오페라를 활보하는 젊은 성악가 75인의 면면을 살펴본다. 이들이 노래하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공통의
키워드가 보일 것이다. 쾰른 오퍼에서 종신 가수로 활동 중인 사무엘 윤이 후배들의 환경을 대변했고, 75인의 성향을 도표로 분석했으며, 세계 무대로 나아가기 위한 제언을 담았다 기획·글 편집부

 

CONTENTS
총론 및 제언
사무엘 윤 인터뷰
75인이 말하는 오페라와 삶
앙케이트 설문

 

베이스 조성준
소프라노 이혜진
베이스 장경욱
소프라노 이효은
테너 김세영
소프라노 라하영
테너 김윤권
바리톤 이치훈
메조소프라노 윤혜인
소프라노 김아영
바리톤 김기훈
소프라노 오지선
테너 김범진
소프라노 손나래
테너 박승주
소프라노 이동민
테너 이현재
소프라노 최예은
바리톤 최성규
소프라노 조푸름
소프라노 김하얀
바리톤 조병익
소프라노 이지현
바리톤 최인식
베이스바리톤 김병길
소프라노 이한나
소프라노 정선경
테너 김정훈
테너 김훈
테너 도영기
테너 선태준
베이스 유명헌
소프라노 이수연
바리톤 김한결
테너 서경한
소프라노 김수연
베이스 김동호
베이스바리톤 강원용
소프라노 박재은
바리톤 이장원
테너 이준범
베이스 여신영
소프라노 배수진
소프라노 박소영
테너 김영우
소프라노 김은희
바리톤 이호준
소프라노 양제경
테너 김건우
테너 이준호
소프라노 권은주
바리톤 서정혁
테너 전권수
테너 김민석
베이스 문석훈
테너 문세훈
베이스 최희윤
테너 김성현
바리톤 김광현
소프라노 안지현
테너 이효상
테너 류용현
소프라노 양귀비
바리톤 한경석
바리톤 임윤택
메조소프라노 김효나
테너 송성민
베이스 류지상
테너 김효종
베이스바리톤 차정철
테너 심윤성
테너 이호철
바리톤 정승기
바리톤 이상민
테너 박성규
※인터뷰 배열순

【 INTRO 】

성악가 강국임을 입증하는 그들

 

단군의 취미가 노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성악과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임 후 2012년 서울시오페라단장으로 취임했던 이건용도 “세계에서 좋은 성악가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좋은 성악가는 좋은 오페라를 만드는 필수조건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나라는 좋은 오페라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조건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굳이 통계를 내지 않아도 한국 성악가의 우수성은 주변에서 입증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성악가들의 꿈은 원 모양이었다. 고국을 떠나 유럽이나 미국 유학을 거쳐 국내 교수직에 안착하는, 일종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회항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이들의 꿈은 ‘부채꼴’ 모양이다. 성악과 오페라의 본 고장 이탈리아와 독일로 떠난 그들은 어느 장르보다도 높은 언어·문화의 장벽을 넘고 오페라극장이라는 성지에 입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꿈은 드넓은 세계로 ‘쭉’ 뻗고 있으며, ‘넓게’ 번지는 부채꼴과 닮아 있다.
클래식 음악이 기악/성악으로 나눠지듯, 이들의 성장과 활동도 두 음악만큼 다른 양상을 갖는다.

성악가는 많지만 만나기가 어렵다
기악의 경우, 콩쿠르 스타가 배출되면 리사이틀이나 오케스트라의 초청 협연을 통해 그를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생긴다. 설령 독주가 아니라도 실내악 프로젝트를 통해 그를 만날 수도 있다. 여러 악기가 함께 하는 실내악이라 해도 그의 아우라는 빛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성악은 다르다. 기악의 콩쿠르 스타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져 10대 후반이나 20대 초·중반에 걸쳐 있고, 이러한 생물학적 나이는 영재나 천재 이미지와 함께 하는 데에 유리하다. 하지만 성악은 대기만성형 장르이다. 따라서 기악음악가와 달리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신체적 변화에 의해 콩쿠르의 영광이 백지화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목소리를 얻기도 한다.
캐스팅이라는 문제도 걸려 있다. 작품이라는 ‘전체’의 ‘일부’(출연진)가 되는 과정에는 음악적인 것 외에도 비-음악적인 요인들이 함께 한다. 이것을 ‘사회생활’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음악 훈련에만 매진해 온, 그래서 음악을 위한 감각만 발달시켜온 젊은 성악가들은 체험해보지 못한 비-음악적 시간과 과정을 체험하면서 누군가는 맞는 옷(배역)을 입지 못해 잊혀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음악만으로 도무지 풀지 못하던 행운과 기회를 얻기도 한다.
기악의 실내악처럼 솔리스트로서의 아우라를 보여줄 수 있는 레퍼토리층도 누적되어 있지 않으니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공연은 오페라나 독창회인데, 국내 오페라 단체의 생태계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 부족한 상황이다. 도·시립에서 운영하는 음악단체도 기악 중심의 교향악단이 대부분이다. 오페라단체는 국립오페라단, 서울시오페라단, 광주시립오페라단, 대구오페라하우스 등 소수에 불과하다. 민간오페라단은 공연 여부 타진과 함께 프로덕션을 겨우 꾸릴 뿐이니, 새로운 캐스팅을 통한 이들의 소개는 더더욱 힘든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젊은 성악가들은 보다 많은 기회를 찾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미성숙한 시스템이 해외 젊은 성악가를 방치하거나, 수용하더라도 대중문화와 부합된 방송 콘텐츠로 일부 수용만 할 뿐이다.
이번 특집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럽과 미주의 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들의 이야기이다. 성장과 학습 과정, 콩쿠르 경력, 에이전시나 극장으로의 진입 과정, 현지에서의 경험, 이방인으로서의 불안감, 앞으로의 희망 등을 골자 삼아 공통의 질문지를 보냈다. 답변은 제 각각이었다. 하지만 주로 20~30대를 차지하는 이 세대가 살아가고 노래하는 환경의 현주소와 이 세대의 죔쇠 역할을 할 공통의 키워드가 보일 것이다. 이들이 처한 지금의 환경과 현주소는 후배들이 마주할 환경이기도 하고, 개선하거나 발전 정책을 수립할 때 참고해야 할 중요한 참고 자료이기도 하다.

힘내라! 한국성악가
답변이 적힌 인터뷰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페라 발전을 위한 공청회나 포럼을 가면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오페라단 창단이나 오페라극장 건립이다. 눈에 보이는 굵직한 하드웨어의 생성과 이를 한방에 해결할 메머드급 예산만이 답이라고 우기는 그들의 주장과 의견에 진력이 나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때의 답은 ‘혁명의 이노베이션’이 아니라, 맥락과 환경을 살피며 점진적으로 시도하는 ‘맥락적 리노베이션’일 것이다. 몇 십년 동안 천편일률적인 기악 레퍼토리로만 정기연주회를 채워나가는 도립·시립 교향악단. 그들의 안정성은 변화된 기획력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들이 성악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콘서트 오페라나, R.슈트라우스의 성악 협주곡 등을 발굴·소개한다면 성악은 물론 기악의 생태계도 변화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전과 합동작전을 펼쳐야 할 윗세대는 계속 답답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결국 ‘생각의 질’이 아니라, ‘예산의 양’을 먼저 따지는 그들에겐 ‘양’적인 전략만이 통할 뿐이니, “여기 이렇게 많은 성악가들이 있습니다”라며 이들을 모아본 것이기도 하다. 작고 소중한 움직임을 실천하고 있는 사무엘 윤의 인터뷰도 곁들였다. 그리고 이번 특집에서 특별히 다루진 못했지만 ‘객석’의 커버를 장식했던 소프라노 캐슬린 킴·임선혜·임세경·황수미, 테너 이용훈 등을 비롯하여 본지 여러 기사를 장식한 소프라노 박정원·서선영·홍혜란·여지원, 테너 김세일·정호윤·최원휘, 바리톤 김주택, 베이스 연광철·박종민·전승현 등은 이번 지면이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사랑하기에 보다 멀리 있는 75인에 집중했다.
이번 특집은 새로운 캐스팅을 물색하기 위해 늘 해외로 촉각을 향하고 있는 기획자들,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오페라극장 관계자들이 성악가들을 물색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성악가 509,884명의 이력과 출연 작품이 등록된 오페라베이스(www.operabase.com) 검색과 분석을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검색과 추천, 검증과 재검색 과정에서도 편집부가 훑은 정보의 그물망에 다 포획되지 못할 정도로 해외 활동 성악가들의 수는 많다. 만약 자신의 존재와 소식을 편집부로 보내준다면 다음의 기획과 기사를 위해 좋은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 SPECIAL INTERVIEW 】

쾰른 오퍼 종신가수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해외에서 한국성악가로 살아간다는 것

사무엘 윤(1972~)의 인생은 성악가들이 꿈꾸는 인생이기도 하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그는 1999년 독일 쾰른 오퍼에 입성해 주역 가수가 되었고, 15년의 시간을 거쳐 종신 가수가 되었다. 15년의 시간은 한 극장이 그를 지켜본 시간이자, 그가 부단히 노력해온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도 오르며 그는 쾰른을 넘어 독일과 유럽의 대표 성악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후배들과 갖고 있다. 방문할 도시가 정해지면 그 도시에 유학·활동 중인 후배들에게 연락해 ‘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다 불러라’고 전한다. 그러면 수많은 성악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무대에선 작은 조연일 뿐이고, 삶에서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이방인들일 뿐이다. 사무엘 윤도 그 시간을 고스란히 거쳤기에 그 힘겨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사무엘 윤은 그들의 노래와 삶의 한탄을 다 들어준다. 그리고 격려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때로는 꿈만 심어주는 헛된 희망보다 정신줄을 바짝 당겨 직면한 현실을 바라보게도 한다.
그런 그는 몇 해전부터 후학들을 향한 개인적인 도움과 마음이 공론화되고, 공공재로 전화될 수 있도록 여러 제도와 장치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귀국 후 자가격리 중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작년부터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고신대학 인근에서 2주간 자가격리 중이다.”
올해도 많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을 텐데.
“다 취소됐다. 하반기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도 예정 중이었다. 이를 위해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에 미국에 몇 번 오갔는데, 전면 취소다.”
‘석좌 교수’라는 호칭이 멋있어 보이긴 한데, 국내음악계에서 그런 명칭이 ‘교수’라는 교육자의 기능 외에 학교의 명성을 높이는 경우로만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명예직인가, 실제로 수업을 진행하는가.
“11명의 학부생과 10명의 대학원 과정 제자들이 있다. 특히 대학원 과정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이곳 부산까지 찾아오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작년에 교내에 성악가와 오페라코치 양성을 위한 최고연주자과정(KAAD, Kosin Advanced Artist Diploma)도 개설했다. 고성현, 강요셉, 서예리, 임선혜, 정호윤, 캐슬린킴 등 최고의 성악가들과 이경재(서울시오페라단 단장)와 같이 현장 전문가들이 강사진이다. 더불어 고신대와 쾰른 오퍼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성악학도와 오페라코치의 유럽 진출을 도모할 예정이다. 부산 북항에 오페라하우스가 건립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유럽 극장의 좋은 시스템을 잘 차용해 이곳을 거친 학생들이 그 무대에 서며 지역 음악발전에 이바지할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
사무엘 윤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이탈리아 베르디 음악원에서 유학하고, 1999년부터 쾰른 오퍼의 전속 가수로 활동했다. 처음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1998년 외환위기에 따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여파로 유학생들이 줄줄이 공부를 포기하던 시절, 그도 열번 넘게 콩쿠르에서 고배를 마셨다. 첫아이의 출산까지 앞둬 절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파우스트’의 아리아들로 토티 달 몬테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쾰른 오퍼의 극장장이 오디션 참가 기회를 줘 1999년부터 극장 전속 가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15년이 되었을 때, 계약법에 따라 종신 가수가 되었다. 2013년에는 제3회 쾰른 오페라 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쾰른 오퍼의 ‘중요하고 단단한 부속’이 된 그는 2015년부터 국내에서 일종의 마스터클래스를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선정된 한 명에게는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행의 기회가 주어진다. 오펀스튜디오란 일종의 인턴십 프로그램이다. 비단 오페라극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음악 전통을 중요시하는 독일의 유명 오케스트라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여럿 있어 후학을 양성하고, 독일 음악계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일찍부터 ‘전체’의 맛을 보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게 한다. 현재 유럽에서 활동 중인 청년 성악가나 오케스트라 단원의 이력에는 이러한 오펀스튜디오나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경력이 들어가 있다.
쾰른 오퍼 내에 이러한 제도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호주오페라재단이 주최하는 콩쿠르에서 선발된 한 명을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 재단의 후원이 어려워지자 지원이 중단될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의 후원을 통해 한국 성악도를 위한 기회로 살려냈다.”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내게도 음악 앞에 좌절하고 주저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모두 건너왔기에 ‘받은 만큼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스터클래스 시간이 끝나면 학생들에게 각자의 고민과 소망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고 들었다.
“나 역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배운 시간이었으니, 나에겐 ‘레슨비’와도 같은 쪽지였다. 수첩에 옮겨 적고 틈 날 때마다 보았다. 함께 나갈 길을 공유하는 것이다.”
쾰른 오퍼를 비롯하여 독일 오페라극장의 오펀스튜디오에는 얼마 동안 있게 되나?
“계약은 1년 단위인데, 연장해 최대 2년까지 가능하다.”
특전이라면?
“실력이 좋고 운이 좋으면 극장 오페라에 단역이나 조역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본인에게도 이런 기회가 온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무대에 노출되면 수료생들에 대한 시선과 생각이 달라질 텐데.
“단역만 맡던 내게 처음 주어진 조역이 ‘피가로의 결혼’의 정원사 안토니오 역이었다. 그때 주연을 한다는 심정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장과 캐스팅 매니저가 오더니 ‘사무엘이 이렇게 좋은 소리를 갖고 있는지 몰랐다’라며 칭찬했다.”
성악가들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극장장이 결국 그들의 운명결정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쾰른 오퍼에서 다섯 명의 극장장을 거쳤다. 극장장과 성악가들은 비즈니스 관계부터 보이지 않는 인간적 유대까지 매우 다양한 구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극장장도 시(市)와 복잡한 관계가 되어 때로는 파트너가, 때로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독일에선 10월이 되면 극장장의 우편함에 희비가 갈리는 편지가 도착한다. 해고 통보편지, 아니면 앞으로도 함께 하자는 편지가 시로부터 배달되기 때문이다. 그때 성악가들의 희비도 갈린다. 극장장의 교체는 소속 성악가들의 물갈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극장 ‘소속’ 가수라 하여도 많은 부분이 보장되지 않는다.
“소속 가수로 15년 근무하면 극장이 종신 가수 자격을 줄지 말지를 결정한다. 예전에는 10년이었는데, 근래에 들어 바뀌었다. 매년 계약하며 긴장해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 셈이다.”
소속 가수에서 종신 가수가 되려면 한 곳의 극장에서만 근무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종신 가수로 임명되면 그 극장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됐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이 스케줄을 잘 운영하여 다른 극장에 게스트로 출연할 수도 있다. 극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을 제지하진 않는다. 극장 소속의 성악가가 페스티벌이나 다른 극장의 프로덕션에 꾸준히 초대를 받으면 그가 극장을 홍보하는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임명(채용)되지 못 하면?
“15년의 결승점을 바로 앞에 둔 14년 차에 해고 통보를 받는 경우도 꽤 있다. 한 극장에 많은 시간을 바쳐온 성악가에겐 슬픈 일이다. 매년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고비를 넘어온 시간이니. 하지만 극장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 명의 노련한 성악가에게 들이는 비용으로 2~3명의 신진 성악가를 불러들여 새 피를 수혈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니,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종신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텐데.
“2012년, 그러니까 쾰른 오퍼 소속 가수로 활동한 지 13년차 해였다. 그 해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타이틀롤을 맞지 않았더라면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신 가수의 꿈만을 마냥 바라보며 살 수도 없을 것이다.
“5년여 정도 극장에서 근무하다보면 남아야 할지 떠나야 말지 감이 온다. 혹은 극장 소속 합창단원으로 입단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 극장의 성악가 캐스팅은 도시와 극장의 규모를 떠나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따라서 최근 극장 프로덕션의 질을 결정하는 여러 요소 중 극장 소속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인 경우가 많다.”
스승으로, 현장의 선배로 활동하면서 후배 성악가들이 가장 중요시했으면 하는 게 있다면?
“실력도 운도 좋아야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과 인격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가끔 내 앞에서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학생이나 후배가 있다. 하지만 자세와 인생관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순간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요행을 바라면 오래가기도 어렵고.”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인간 욕심은 끝이 없는데,
그게 꿈이 되면, 제가 그걸 꿈이라고 쓰고 말하면
음악을 공부하는 후배들도 그런 꿈을 꾸게 됩니다.
언젠가 거기 이르겠죠.
그럼 이젠 뭘 해야 하나 싶어집니다.
음악가로서의 꿈이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조성준 베이스
조성준(1993~)은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제19회 국민일보 신인음악회로 국내 무대에 데뷔한 그는 2019년 서울국제콩쿠르 3위·대구국제오페라어워즈에서 1위로 주목받았다. 현재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그녀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네! 나를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네…!”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의 4막. 낮게 깔린 첼로 선율 위로 서재에 홀로 앉은 필리포 2세의 모습이 보인다. 타들어 간 초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데, 왕은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도, 아내의 사랑도, 아들의 사랑도 받지 못한 고독한 왕. 그는 마치 절벽 위에 홀로 선 늑대처럼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고 울부짖는다. 최고의 베이스 아리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 조성준이 꿈꾸는 무대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이십 대의 젊은 음악가. 조성준의 꿈은 이제 막 시작됐다. 글 이미라

성악 공부를 처음 시작했던 계기는 무엇인가. 목소리가 좋다며 성악을 해보지 않겠냐는 가족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 성악을 공부하다 보니 오페라 가수의 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 같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가 가장 막막했다고. 연세대 재학 시절, 군 휴학을 포함하여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성악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 복학했는데 너무 막막하더라.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를 김관동 교수님이 제자로 받아주셨고, 그 가르침 덕분에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졸업 후 2019년에 서울국제콩쿠르 3위, 대구국제오페라어워즈(DIOA) 1위에 입상했다. 당시 DIOA 심사위원이었던 쾰른 오퍼 극장장에게 캐스팅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됐다.
본래 독일 활동을 기대했나. 학창 시절부터 항상 독일 유학을 꿈꿨다. 입시 선생님도, 지도 교수님도 독일에서 유학하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에 소속되어 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지금은 주로 단역을 맡고 있다. 어린이 오페라의 주역을 맡기도 했고. 한해 6~7개 작품 정도를 소화하고 있으며, 다음 시즌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 역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이 외에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베르디 ‘돈 카를로’의 필리포 2세 역이다.
해외 활동에 있어 차별이나 편견은 없었나. 오히려 위축된 생각으로 스스로 벽을 쌓았던 것 같다. 독일어로 소통하고 노래하기 때문에 언어적인 부분에서 힘든 면은 있었지만, 극장 동료들 사이에서 차별이나 편견을 느낀 적은 없다.
신인 가수로서 극장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편인가. 무리한 요구에 대해 무조건 응하지 말라는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갑과 을의 관계다. 되도록 극장의 요구에 따르며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극장과의 관계에도 훨씬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현지에서 느낀 독일 극장 시스템의 장점이 있다면. ‘오페라의 대중화’인 것 같다. 처음 독일에 와서 놀랐던 점이 오퍼에서 하는 공연의 대부분이 매진된다는 것이다. 오페라가 대중에게 가까이 있다는 점이 가장 부럽다. 한국은 현재 대중음악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어서 상대적으로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이 관심받지 못하는 것 같다. 대중의 취향을 아쉬워하기보다는 한국 오페라계에서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공연을 만들 수 있도록 독일의 ‘어린이 오페라’와 같은 시도를 더 많이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껏 참여한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무엇인가. 대학 시절 연기했던 ‘사랑의 묘약’의 둘카마라가 기억난다. 독일에서 선보였던 슈테판 요하네스 한케의 현대 오페라 ‘세 개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Der Teufel mit den drei Goldenen Haare)’도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다.

 

이혜진 소프라노
이혜진(1993~)은 서울대와 프랑크푸르트 음대를 졸업했다. 현재 하노버 음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2017년 쾰른 콩쿠르에서 1위했다. 마그데부르크 극장 소속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마그데부르크는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중심지다. 이 도시는 유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오토 1세 황제는 마그데부르크를 근거지로 신성로마제국을 세웠다. 이후 도시는 점차 발전했다. 오토 대제가 묻혀 있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훈데르트바서가 설계한 그뤼네 치타델레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곳곳에 보인다. 아울러 이 도시는 바로크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 텔레만의 고향이기 때문인데, 매해 텔레만을 기리는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도시의 최초 극장인 마그데부르크 극장에는 소프라노 이혜진이 소속 단원으로 있다. 글 장혜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보며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고. 예원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오페라 가수의 꿈은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마리아 칼라스의 연주를 자주 들었다. 마리아 칼라스처럼 진실된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칼라스를 좋아했으면 이탈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을 텐데. 그녀의 주 활동 무대였던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유학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막상 유학을 결정할 시기가 되자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의 유학지에 관심이 갔다. 마지막까지 미국과 독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각 도시마다 아름다운 극장이 있는 독일을 택했다.
2017년 쾰른 콩쿠르에서 1위해 주목을 받았다. 첫 해외 콩쿠르 수상이었다. 우승과 더불어 청중상까지 받았다. 이 콩쿠르를 통해 지금의 에이전시를 만나게 됐다. 평생 잊지 못할 콩쿠르다.
마그데부르크 극장과의 인연도 쾰른 콩쿠르를 통해 맺어졌는데. 쾰른 콩쿠르를 통해 독일 에이전시가 생겼고, 에이전시의 권유로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극장 오디션은 처음이었다. 극장에서 원하는 시즌 배역이 정해져 있어서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오디선 현장에서 세 곡을 연달아 불렀다. 2주 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펀스튜디오를 알아보던 시기여서 얼떨떨했다.
극장 소속이 된 후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극장 생활 2년차여서 아직까지 크게 힘든 점은 없다. 하나 꼽자면 동료들이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이들의 말을 빠르게 이해하는 게 조금 힘들다.
마그데부르크는 바로크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다. 바로크 작곡가 텔레만(1681~1767)의 고향이다. 매해 텔레만 페스티벌이 열리고, 근처 할레에서는 헨델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바로크 애호가들이 눈여겨 볼만하다.
마그데부르크 극장은 재정이 여유로운 편인가? 우리 극장은 소속 가수가 음악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하고 있고, 경제적인 부분으로 압박하진 않는다.
극장에선 주로 어떤 역할을 맡나? 나는 파트가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다. 첫 시즌에는 ‘마술피리’ 밤의 여왕, ‘돈 파스콸레’ 노리나 역을 맡았다. 두 작품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현대적인 연출도 재밌고, 의상도 다섯 번 갈아입었다. 공연 도중에는 가발이 벗겨져 당황하기도 했다. 돌발 상황이 생기니 순발력이 늘더라.
극장의 막내 단원이라고! 극장에서 최연소여서 그동안 밝은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주변에서 나에게 낭만시대 오페라와 어울리는 소리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역을 맡고 싶다. 대학 때 참가한 콩쿠르 파이널 무대에선 루치아의 아리아를 불렀다. 루치아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면 매번 눈물이 났다. 전막 오페라에서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와 마리엘라 데비아의 60대 영상을 보면 많은 영감을 받는다. 그 가수들처럼 오랫동안 건강하게 무대에 서고 싶다.

장경욱(1993~)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현재 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펀스튜디오 영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올 9월부터 2년간 드레스덴 젬퍼오퍼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아버지의 꿈을 좇아 시작된 이야기. 이제는 그 위로 자신만의 스토리를 쌓아갈 차례다. 성악가로서 한 단계 더 위로 도약할 시간. 장경욱의 이야기가 새로운 챕터를 맞았다. 두 번째 장의 시작은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다. 한마디 한마디,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덩달아 두근거린다. 글 이미라

 

드레스덴 젬퍼오퍼 오펀스튜디오에서 2년간의 활동을 앞두고 있는데. 지난해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제1회 대구국제오페라어워즈(DIOA)가 열렸다. 베를린 도이치오퍼·빈 슈타츠오퍼·드레스덴 젬퍼오퍼·LA 극장 등 세계 유수 극장장들이 대구를 찾아 성악가들을 캐스팅하는 아티스트 마켓 형식의 콩쿠르였다. 거기서 드레스덴 젬퍼오퍼의 극장장에게 발탁되어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극장은 어떤 특징을 지녔나? 동독의 드레스덴에 위치한 극장이다. 460년의 전통을 지닌 젬퍼오퍼는 1869년 9월 21일, 대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완전히 불에 타 버렸으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독일 오페라의 대가 바그너와 친구로 지내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의 이름을 딴 이곳은 드레스덴의 필수 관광지이기도 하다. 츠빙거 궁전, 마리엔 교회와 멀지 않다.
극장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역시 명성 있는 악단인데. 이 극장을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오랜 역사가 만든 특유의 음색과 풍부한 울림으로 유명하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예술감독으로 이끌고 있고, 지난해 내한한 바 있다.
극장 소속 가수로서 기대되는 점이 있다면. 우선 매달 월급을 받으니 집세나 생활비를 부모님 도움 없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 같다. 또 극장 생활을 직접 해봐야 느낄 수 있겠지만, 세계적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성악가들의 음악을 눈앞에서 보고 듣고, 함께 작품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배움이자 혜택일 것 같다.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과 환경을 마주할 텐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이 다 다른데, 하나의 작품을 두고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나오겠는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만남이 항상 설렐 것 같다.
아버지의 꿈을 대물림받아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 사건은 무엇이었나.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처음으로 주·조역 공개 오디션을 열었는데, 경험 삼아 나가보자는 마음으로 참가했다. 그해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리골레토’를 지휘할 예정이었던 줄리안 코바체프(대구시향 상임지휘자)가 심사위원으로, 작품에 맞는 성악가들을 찾기 위한 자리였다. ‘시몬 보카네그라’ 중 피에스코의 아리아 ‘부정한 영혼(Il lacerato spirito)’을 불렀는데, 내 마지막 저음(F#)을 듣고, 스파라푸칠레 역으로 뽑았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도 ‘리골레토’를 꼽았다. 2018년 대국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이었다. 리골레토와 이중창을 부르는 장면에서 마지막 저음(F)을 극장 커튼이 다 내려올 때까지 길게 내야 했는데, 커튼이 너무 천천히 내려와서 식겁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마술피리’ 자라스트로와 ‘돈 조반니’의 레포렐로.
독일로 떠나기 전 국내 활동 계획이 있는가. 8월에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을 공연한다. 둘카마라 역을 노래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성악가가 되기 위한 자세라면. 미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악과 오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남들보다 매번 10%씩 더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훌륭한 성악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이효은 소프라노
이효은(1993~)은 숙명여대 졸업 후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세종페스티벌’에 참가했다. 2017년에는 사무엘 윤 마스터클래스에 발탁되어 2018/19 시즌에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했다. 이후 독일 빌레펠트 극장에서 소속 가수로 활약 중이다.

이효은이 처음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 것은 고등학생 때다. 무려 매점 자유이용권이 걸린, 전교 외국어 노래대회. 즐겨 부르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Think of Me’를 선보이고, 그는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다. 부상보다 값진 것은 무대가 주는 감동과 전율이었다. 그 맛을 알아버린 차에 우연히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영상물을 만났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듣고 성악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이효은은, 이제 그 자신이 ‘밤의 여왕’으로 분해 무대에 서고 있다. 글 박찬미

원래 미국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고. 숙명여대 음대 재학 중, 자매결연 대학인 미국 인디애나 음대에서 연주할 기회가 생겨 잠시 미국에 머무른 적이 있다. 당시의 경험으로 인해 그곳에서 더 공부를 이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특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 극장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독일로 방향을 튼 이유는 무엇인가. 2018년, 우연히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의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에 발탁됐다. 반전된 상황이었지만, 흘러가듯 움직였다.
빌레펠트 극장에 입성하게 된 계기는. 쾰른 오퍼에서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 프로덕션에 참여했던 이가 바로 빌레펠트 극장의 음악감독이었다. 그가 첫 합주 연습을 마치고 내게 빌레펠트 극장 소속 가수 자리를 권유했다. 이후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소속 가수가 됐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극장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1904년에 개관해 이미 백 년이 넘은 세월을 지낸 극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도시에 피해가 극심했는데, 다행히 극장이 위치한 구역은 피해가 덜했다. 당시 극장이 임시 대피소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요즘엔 음악·무용·연극 세 분야의 팀이 꾸려져 다양한 공연을 올리고 있다. 가끔 뮤지컬 공연도 진행된다.
고정 수입이 들어온다는 것 외에 극장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인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처음 공연할 기회가 많다는 것. 도시의 크고 작은 콘서트 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작품 준비의 시작은 무엇인가. 극장 측에선 연주자들을 위한 악보 준비가 첫 번째 할 일이다. 나에겐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과 악보를 공부하는 것이 첫 과제다. 악보를 숙지한 후, 연습코치와 연습을 시작한다. 대사가 있을 경우엔 따로 발음교정 코치도 참여한다.
그다음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만나는 것인가. 오케스트라는 아직이다. 지휘자가 개인 연습에 자리해 음악의 방향성에 대해 가이드를 준다. 방향성을 확실히 잡은 후에 연출자가 합류한다. 연습 무대를 통해 연기를 전반적으로 지도 받는 과정이 이어진다. 연출까지 일정 수준 완성되면,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고 분장과 의상, 조명 등이 갖춰진 최종 리허설을 진행한다. 첫 공연이 있기 며칠 전에 볼 수 있는 단계다.
극장에서 주로 맡는 배역은 무엇인지. 매년 다른 작품들을 준비하기 때문에, 항상 다른 캐릭터를 맡는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주로 높은 음역대에서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역을 노래한다.
가장 좋아하는 배역은.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내 생애 첫 오페라 배역이기도 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은?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역을 고대하고 있다.
훌륭한 성악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

김세영 테너
김세영(1993~)은 서울대 재학 중 도미,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 학사와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를 졸업했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야바 영 아티스트· 베를린 오페라 아카데미 영 아티스트·산타페 오페라 영 아티스트·울프 트랩 오페라 영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복숭아일지라도, 세상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복숭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과일을 선택했을 때, 그 이유를 내 안에서 찾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복숭아에 비유한 김세영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변함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복숭아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라고. 글 이미라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수많은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야 했다고. 2013년부터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줄리아드 음악원 재학 시절, 어느 유명 연출가가 리허설 중 유일하게 동양인이었던 내게 ‘왜 영어 이름이 없느냐, 발음하기 어렵게 왜 한국 이름을 쓰냐’며 모든 출연진과 직원 앞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최근에 올랐던 유명 극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극장과 연출가의 프로덕션 미팅에서 캐스팅한 배우를 한 명씩 소개하는데, 내 사진을 본 연출가가 “영어는 알아듣느냐”며 무시했다더라. 이에 극장장이 불쾌해하며 제대로 주의를 줬다고 전했다. 단지 동양인이란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닫고 비호의적으로 나오는 극장장과 캐스팅 디렉터들이 너무나 많다. 첫인상과 10분여의 노래로 평가받는 오디션에서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고, 그저 다른 지원자와 같은 선상에서 평가받기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에 상처받고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용기를 잃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역을 따낼 수 있도록 남들보다 10배 이상 더 준비하고, 더 잘하는 성악가가 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런 치열함으로 최연소이자 유일한 동양인으로 산타페 오페라 오디션에서 발탁된 것이 아닐까. 줄리아드 음악원 1학년 때부터 산타페 오페라와 울프 트랩 오페라를 항상 꿈꿔왔다. 석사를 시작한 2018년, 산타페 오페라에 경험 삼아 오디션을 봤는데, 지원자 1,600여 명 중 30명을 뽑는 오디션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자 최연소로 합격했다. R. 슈트라우스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존 애덤스 ‘닥터 아토믹’, 푸치니 ‘나비부인’, 번스타인 ‘캔디드’에 출연했고, 이후에도 계속 제안받았다.
현재 영 아티스트로 2년 차인데. 1년 차를 마치고, 2019년에 바로 재계약 제의가 왔지만, 울프 트랩 오페라에서도 제의가 와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번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산타페 오페라에서 다시 계약 제안이 왔고,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하게 됐다.
전 세계적으로 젊은 가수들을 거의 헐값에 쓰는 오페라 단체들이 늘고 있다는데. 산타페 오페라는 젊은 성악가들에게 대우가 좋은 몇 안 되는 극장 중 하나다. 극장마다 암암리에 이야기하는 ‘급’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자본력도 좋고, 역사도 깊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오르는 배우들을 주·조연으로 데려오다 보니 항상 주목받고 있다. ‘산타페의 계약을 따내면 바로 업계의 레이더 안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다.
주로 맡는 배역은. 라이트 리릭 테너로, 바로크·고전·현대 오페라는 물론, 벨칸토 오페라 중에서도 높은 음역과 기교가 필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중 ‘잔니 스키키’의 리누치오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브리겔라를 가장 재밌게 공연했다.
꿈의 역할이 있다면. 로시니 ‘오리 백작’.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가 출연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3번이나 더 볼 정도로 흠뻑 빠졌었다.
선택받는 좋은 가수의 조건이라면. 나만의 희소성, 무대 장악력, 오페라를 향한 사랑, 열린 마음, 그리고 수준급의 영어 실력. 내가 자주 맡는 역할에 맞는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또 모든 만남에 늘 진심으로 대하려 한다. 오페라의 세계는 매우 작다. 내 한순간의 이기심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 회자될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라하영 소프라노
라하영(1993~)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함부르크 음대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9/20 시즌 튀링겐 오펀스튜디오에서 활약했고, 2020/21 시즌 뉘른베르크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꿈꾸던 라하영은 미국 유학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다. 첫 유럽 방문이었는데 빈이라는 도시가 퍽 매력 있게 다가왔다. 늘 부르던 독일 가곡을 레슨 받았는데, 깊은 충격에 빠졌다. 현지에서 제대로 된 발음, 그 발음이 노래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음악적으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을 배웠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이후 독일어에 푹 빠져 공부했고, 마침내 독일에서 자리를 잡았다. 라하영은 사랑스럽고 씩씩하다. 씩씩하여 더욱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글 장혜선

혼자서 뭐든 잘 하는 성격으로 보인다. 성악을 시작한 뒤부터 성격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악을 시작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진로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첫 은사인 임정화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마치 어머니처럼 날 챙겨주셨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성악을 공부하기가 힘들었다. 야간 자율학습과 빼곡한 수업 때문에 연습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대원여고에 음악반이 있다는 정보를 찾아 전학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18세 나이에 혼자 이리저리 알아보고 부모님께 말씀드린 게 새삼 대단하다.
독일에서 오펀스튜디오도 분주히 알아봤다고. 함부르크 음대 졸업을 앞두고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여러 오펀스튜디오에 지원서를 보냈는데, 뮌헨이나 베를린의 큰 극장에서는 아예 초대장도 못 받았다. 작은 극장들은 오디션 기회를 줬지만 전부 떨어졌다. 세상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
튀링겐 오펀스튜디오는 어떠한 기회로 들어가게 된 건가? 튀링겐 주에 있는 바이마르 극장에서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원래 있던 소프라노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서 빈자리가 생겼다. 나에게 2019/20 시즌부터 튀링겐 오펀스튜디오 참여가 가능한지 묻더라. 함부르크에서 바이마르로 급하게 이사를 왔다.
대중은 무대 위 가수가 늘 화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뒤에선 보이지 않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유럽 오페라 무대에 동양인이 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든 한국 성악가를 존경하고 있다.
튀링겐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럽나? 바이마르 극장에서 주로 활동했다. 바이마르는 괴테와 실러의 도시다. 괴테는 바이마르 극장의 극장장이었다. 이 극장에선 리스트가 지휘를 했고,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 초연했다.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수준급의 오케스트라가 있는 것도 특이점이다.
주로 사랑스러운 역할을 많이 맡는 편인데. 바이마르 극장에서 ‘돈 조반니’ 체를리나 역으로 데뷔했다. 내 목소리와 외모에 딱 맞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노래하는 내내 행복했다. 이외에도 ‘헨젤과 그레텔’의 모래요정, ‘마술피리’의 파파게나 같은 역할을 맡았다.
밝은 성격은 천성인가? 타인에게 밝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페라를 하다보면 새로운 제작 환경에 익숙해져야 한다. 첫 만남에선 나를 어필하기 보다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 같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어린 나이어서 묵직한 작품은 아직 힘들다. 그런데 내 심장은 아주 뜨겁다. ‘라 트라비아타’나 ‘라 보엠’의 음악을 들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당장이라도 무대에 뛰쳐나가고 싶지만 천천히 기회를 잡으려 한다. 유럽에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은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김윤권 테너
김윤권(1991~)은 서울대에서 베이스 연광철을 사사했다.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9/20 시즌부터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작은 어머니의 노래였다. 여덟 살 소년은 성당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다. 어머니는 아들을 천주교 청주교구 어린이 합창단에 보냈다. 보이소프라노를 맡은 김윤권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미사곡을 부르며 종교음악을 익혔다. 변성기가 지나며 자연스레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 도이치 오퍼에서 활동하는 가수가 되었지만, 그에겐 첫 마음이 끝 마음이다. 오라토리오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다음 시즌, 바흐 ‘마태수난곡’에서 솔로를 맡게 됐다며 그는 순결한 마음을 전했다. 글 장혜선

시작이 종교음악이어서 그런가, 맑은 목소리가 참 좋다. 현재 도이치 오퍼에서의 두 번째 시즌이다. 단역부터 주역까지 많은 배역을 소화하고 있는데,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서 벨몬테 역이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 잘 맞는 소리로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 모차르트 오페라를 앞으로 많이 하고 싶다.
벨몬테 역은 원래 커버였는데, 기회가 온 것이라고. 초기 캐스팅된 테너가 극장 소속이어서 큰 무리 없이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두 번째 공연 전날 밤, 극장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원래 맡았던 가수가 다쳐서 준비를 해야 될 것 같다고. 그날 밤 가사와 동선을 체크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공연 당일, 무대 오르는 게 확정된 건가? 맞다. 가끔 악몽을 꾼다. 준비되어있지 않는 상태로 오페라 무대에 서는 악몽. 그날 서곡이 나오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더라. 그렇게 도이치 오퍼에서 모차르트 작품의 테너 주역을 맡게 됐다. 공연을 마치고 극장 관계자들에게 많은 축하를 받았다. 꿈만 같던 순간이다.
스승인 베이스 연광철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운명이었다. 내가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연광철 선생님이 부임했다. 선생님은 아침 레슨 전에도 일찍 학교에 오셔서 연습을 하시더라. 음악을 대하는 검소한 모습이 늘 인상 깊었다. 성악가로 활동하며 고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과의 기억이 좋은 방향을 제시해준다. 나에겐 연광철 선생님이 남들에게 없는 답안지 같다.
독일에서도 스승과의 만남을 자주 갖나? 선생님도 베를린에서 자주 공연을 하신다. 내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큰 기쁨 중 하나다.
독일 유학에 대한 방향성도 연광철의 영향인가? 선생님이 유학한 독일에 가고 싶어서, 독일 가곡과 독일어 공부, 독일 테너에 몰입하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장학생 제안도 받았지만, 도이치 오퍼 베를린 한국인 장학생 오디션(WCN 주최)이 날 독일로 이끈 가장 큰 계기다.
이후 도이치 오퍼 캐스팅 감독에게 직접 연락했다고.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 입학한 후 “한 번 만나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그는 “그 때의 오디션(WCN 주최)이 기억난다”며, “조만간 오디션 자리를 잡아주겠다”고 답장했다. 반년 뒤 독일에서 오디션을 통해 극장에서 자리를 얻었다.
베를린은 세 개의 대규모 오페라 하우스를 지녔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와 베를린 코미셰 오퍼, 베를린 도이치 오퍼. 그중 도이치 오퍼는 가장 젊은 극장인데. 1912년 문을 연 극장인데, 당시 베를린 왕실 오페라였던 슈타츠오퍼와 비교하면 더 부유했다. 도이치 오퍼는 바그너의 위대한 작품을 올려야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수적인 레퍼토리를 지향하고 있으며, 다른 극장보다 좋은 가수들이 많이 오는 것 같다.
도이치 오퍼의 데뷔 무대는 어땠나? ‘투란도트’의 퐁 역을 맡았는데. 이 작품은 도이치 오퍼에서 12년째 공연해 온 작품이었다. 이미 익숙한 공연이어서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 없이 공연을 올리더라. 당황했지만 동료들이 잘 이끌어줬다. 공연 후 “도이치 오퍼에 온 걸 환영해”라며 따뜻하게 맞아줬다.
도이치 오퍼 공연은 늘 만석인가? 모든 오페라가 매진되는 건 아니다. 유명한 가수가 초빙되거나, 초연 작품은 항상 만석이다.
언어적인 어려움을 돌파하는 노하우는? 준비와 눈치!
시즌 중에는 일주일 내내 극장에 있겠다. 휴일 없이 매일 출근한다. 극장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원동력은 든든한 아내다. 바쁜 시간 속에도 아내와 딸과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치훈 바리톤
이치훈(1991~)은 연세대 성악과, 이탈리아 파르마 아리고 보이토 음악원을 거쳐 현재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오사카 콩쿠르(2016)·마리오 란차 콩쿠르(2017)·프랑코 페데리치 콩쿠르(2019)에서 우승했다.

오페라 장르에도 운명이 있다면, 오페라부파는 코미디 배우의 역전승과도 같다. 친근한 감초 역할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끝내 주연을 꿰찬. 오페라부파는 초기 오페라의 익살스러운 막간극으로 출발해 희극 오페라라는 독립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심각한 내용 일색의 오페라에 지쳐있던 관객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서민과 광대처럼 친근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반겼다. 이치훈은 바로 이 친근함이 가진 위력을 믿는다. 이를 위해 그는 철저히 관객의 입맛에 맞출 준비가 되어있다. 글 박서정

어릴 적 개그맨을 꿈꿨다고. 성악을 배우기 전의 이야기다. 나의 말 한마디에 웃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좋았다.
오페라부파 작품을 특히 즐길 것 같다. 로시니 ‘라 체네렌톨라’에 돈 마니피코 역으로 출연했던 기억이 난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어느 때보다 즐겁게 연주했다.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이 오페라부파의 매력이다.
웃음이야말로 문화적 차이가 가장 크게 작동하는 영역인데. 동양인이고, 외국인이지만 서양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오페라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도를 공부하고, 이탈리아어의 뉘앙스부터 말할 때의 제스처까지 따라 한다. 프로파일러가 수사하듯이 파헤치고 또 파헤친다. 그러면 그 역할이 곧 내가 되는 때가 온다.
그럼에도 인종적 장벽을 느낀 적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라 체네렌톨라’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다. 같이 무대에 서 있을 땐 몰랐는데, 객석에서 보니 중국인 동료가 왕자 역할을 하는 모양새가 영 어색하더라. 아무리 분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어도 외적인 한계가 있었다. 당시 난 신데렐라의 아빠 역이었는데, 신데렐라는 이탈리아인이었다. ‘토종 한국인’ 아빠를 둔 신데렐라라니.(웃음)
100 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 발탁됐다. 꿈에 그리던 극장이라 도전에 의의를 두고 임했다. 동영상 심사부터 시작해 라 스칼라 극장에서 치러지는 결선까지 2주가 소요됐다. 한 단계씩 올라가 결선 무대에 섰을 때, 더 바랄 것 없이 행복감에 취해 노래했다.
합격 후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테너 이정원 선생님. 군대 전역 후 선생님을 사사하게 됐다. 처음 인사드리는데 선생님께서 “그래, 반갑다. 바리톤이구나.” 하셨다. 15세에 테너로 성악을 시작해 계속 고집해온 나였다.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테너라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께 레슨을 받다 보니 내게 맞는 음역은 바리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간 인위적으로 가벼운 소리, 예쁜 소리를 내기 위해 목을 짜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오페라 가수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의 주요 과정은? 발성·음악·언어·연기 등 오페라 가수를 키우는데 적합한 수업을 한다. 일 년에 한 번 아카데미 프로덕션 오페라가 있다.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를 비롯해 라 스칼라 극장의 여러 작품에 조·단역으로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아카데미생은 개인 출입카드로 라 스칼라 극장의 모든 공연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유명 성악가를 만날 기회도 많았다고.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 ‘리골레토’의 리골레토 역 커버를 맡았다. 리골레토 역을 맡은 바리톤 레오 누치의 은퇴작이자, 9회 공연 단독 캐스팅이었다. 한 번은 내가 할 수도 있겠다고 내심 기대했는데 전 회차를 완벽하게 해내더라. 열심히 준비했던 만큼 언젠가 리골레토 역할을 해보고 싶다.
10년 뒤 어떤 성악가가 되고 싶은가. 소리를 잘 내는 성악가보다, 웃음과 감동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성악가.

윤혜인 메조소프라노
윤혜인(1991~)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베를린예술대에서 오페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바이마르 음대에서 오페라 최고연주자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2018/19시즌부터 튀링겐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 중이며, 최근 알텐부르크 게라 극장에서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의 올가 역으로 데뷔했다.

윤혜인에게 좋은 가수의 조건은 내 안의 나를 마음껏 보여주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다. 무대 위에서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가수. 나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끌어 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는 오늘도 자신감을 가지고 무대에 오른다. 글 이미라

오페라 가수를 결심한 계기는. 다양한 인물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매력에 빠져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역할에 빠져 충실히 연기하면 꼭 다른 세계를 구경하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참 좋았다. 노래뿐 아니라 연기와 춤도 좋아하는 나로선 무대 위 종합예술인 오페라를 통해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좋다.
소프라노에서 메조소프라노로 전향했다. 늘 파트에 관해 고민했다. 대학 때도, 졸업 후 유학을 나오면서도 파트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이제껏 해왔던 공부를 뒤로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게 너무나 어려운 도전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베를린예술대학에서 석사를 시작하며 만난 선생님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메조소프라노 공부를 시작했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나를 믿고 널 맡겨 보겠니. 난 우리가 잘 해낼 것 같아. 함께 해보면 좋겠구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내어 도전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때의 인연과 도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튀링겐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하며 바이마르 극장에 자주 오르고 있다. 극장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도시인 바이마르에 위치해 있다. 바이마르는 베를린에서 세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도시이지만, 괴테와 실러를 배출한 곳이다. 문화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라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국립극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특히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독일 내에서도 유명하다.
주로 어떤 역할을 맡아왔는지. ‘헨젤과 그레텔’의 헨젤, ‘코지 판 투테’의 데스피나 등 젊고 가벼운 소리를 가진 메조소프라노 역할을 주로 한다.
가장 좋아하는 역할을 꼽아본다면. 유럽 극장 첫 데뷔였던 ‘헨젤과 그레텔’의 헨젤. 헨젤은 메조소프라노에게 정말 중요한 ‘바지 역할’(Hosen Rolle, 여가수가 남장을 하고 남자 역할을 연기하는 것) 중 하나다. 무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게 뛰어놀았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카르멘. 메조소프라노가 주역인 오페라가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카르멘은 주인공의 이름이 작품 제목이 될 만큼 비중이 크고 아주 매력적인 역할이다.
요즘 많은 독일 극장에서 오페라 외의 다른 장르도 선보인다고. 뮤지컬이나 재즈 등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레퍼토리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바이마르 극장에서도 뮤지컬 공연이 있는 날이면 늘 티켓이 매진된다고 하더라. 이러한 추세로 본다면, 앞으로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가수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 같다.
앞으로 꿈꾸는 나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 소리가 좀 더 성숙해졌을 때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들이 있다. 욕심내지 않고 지금부터 차근히 갈고닦는다면 10년 뒤에는 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김아영 소프라노
김아영(Antonia Ahyoung Kim, 1991~)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하노버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체코 푸스티나 콩쿠르 3위(2017)·폴란드 얀 키에푸라 성악 콩쿠르 1위(2017)·이탈리아 알카모 성악 콩쿠르 특별상(2019)·대구국제오페라어워즈 2위(2019) 등 국내외 여러 콩쿠르에 입상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 중이다.

나무든 풀이든 모든 생명체는 뿌리를 닮는다고 한다.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눈에 보이는 실체의 본질을 결정하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이에 따라서 보이는 부분의 견실함이 결정된다는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높이 자라려면 뿌리가 깊어야 한다. 김아영은 높이 자라기 위해 깊숙이 뿌리 내리는 중이다. 글 이미라

곳곳에서 만난 인연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번에 데뷔하게 된 도이치 오퍼와 임링 페스티벌, 그리고 얀 키에푸리 페스티벌은 모두 대구와 독일, 폴란드에서 열렸던 각각의 콩쿠르를 통해 캐스팅됐다. 특히 임링 콩쿠르를 통해서는 지금의 소속사와 만나게 되었고.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며 만난 모든 인연이 소중함을 배우고 있다.
현재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데. 현재 극장 소속이 아닌 프리랜서로, 기획사를 통해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있다. 아직은 큰 역할보다는 작은 역할을 소화하며 많이 보고 배우며 경험을 쌓는 중이다. 올가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퍼 ‘발퀴레’의 오르트린데로 역으로 데뷔할 예정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며 느낀 매력이 있다면. 사회보장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클래식 음악을 향한 노년층의 지지도가 높은 편이다. 거의 모든 연주와 공연에 참석해 여러 방면으로 지지해주고 있다. 독일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며 가장 매력적이라 느낀 부분은 모든 지역, 심지어 작은 도시에서도 극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그 극장들 모두 다른 색깔을 지녔다. 다른 나라에 비해 현대 음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다르고, 새로운 연출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도 있을 것 같은데. 무대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재정난을 겪고 있는 작은 극장은 저렴한 가격에 젊은 성악가들에게 무리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 이제 막 오페라 시장에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좁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하지만, 시장은 돌고 돈다고 생각한다. 최근 트로트가 다시 유행했고, 패션계에서도 레트로가 유행하지 않았나. 언젠가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높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만큼 매력적인 장르라는 것을 꼭 알리고 싶다.
새로운 작품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 만나는 연출가, 지휘자, 그리고 출연진을 대하는 자세가 궁금하다. 그들의 성격과 음악적 색깔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색깔을 녹여낸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무언가 불편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바로 물어보고, 또 솔직하게 답하는 편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이 있다면? 매번 달라지긴 하지만, 지금은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 부인이나 ‘투란도트’의 류 역할을 제일 하고 싶다.
좋은 가수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10년 뒤 기대하는 나의 모습은. 시간이 흐른 만큼, 더 깊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음악가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김기훈 바리톤
김기훈(1991~)은 연세대를 졸업 후 하노버 음대에서 공부했다. 독일 하노버 극장 소속으로 활동한 바 있다. 2015년 서울국제콩쿠르 우승,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도밍고 오페랄리아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KBS ‘열린음악회’에 나오는 성악가를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은 그만의 비상한 재주였다. 그는 이 재능을 사람들을 웃기기 위한 개인기로 활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성가대에서 만난 강사가 성악을 권유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 담판이 필요했다. 성악 선생님에게 “노래 좀 하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공부를 하고,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음악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결과는 후자였다. 그날 아버지도 아들의 노래를 듣곤 많이 놀랐다고 한다. 글 장혜선

성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기억이 생생하겠다. 물론. 부모님이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 놀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생 사기꾼 아니냐”고도 하셨다.(웃음)
‘프로계획러’라고 들었다. 하노버 극장에서 일하게 된 그림은 언제부터 그린 건가? 2015년 서울국제콩쿠르 우승 이후 여러 제안이 많았지만, 연세대와 하노버 극장 1개월 연수 프로젝트를 가기로 결정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극장장이 한 명을 선정해 1년간 무급으로 공연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여기에 뽑혔고 이후 솔리스트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총 세 시즌을 하노버 극장의 앙상블로 일하게 됐다.
하노버 극장은 현대 오페라에 개방적이다. 새로운 오페라 제작에 관심이 많은 극장이다. 많은 수의 현대 오페라를 올린다. 지금도 동시대 작곡가에게 오페라 작품을 의뢰해 올리고 있다.
하노버 극장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것들은? 당시에는 조연이었지만, 레퍼토리를 늘리는데 도움이 됐다. 작품을 1년에 여섯 개 이상 올린다.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Askonas Holt)와는 어떻게 연을 맺었나? 2019년에 세 개의 콩쿠르에 도전했다. 폴란드 모뉴슈카 콩쿠르,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소중한 인연을 쌓는 계기가 됐고, 모뉴슈카 콩쿠르를 통해 지금의 매니지먼트를 만날 수 있었다.
대형 매니지먼트에 소속되면서 받는 혜택이 좀 달라졌나? 작은 에이전시에서는 그 회사가 컨택할 수 있는 극장 위주로 진행된다. 반면 대형 에이전시는 세계적인 극장을 중심으로 오디션이 이뤄진다. 연봉 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매니저와의 친밀도가 좋다고 들었다. 무게감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 매니저와 작품에 관한 논의를 많이 하고 있다. 극장 측에서는 내게 드라마틱한 역할을 주려는 분위기이고, 소속사에서는 현 나이에 맞는 건강한 배역을 권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배역은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유쾌하지만, 부조리한 건 못 참는 성격으로도 보인다. 처음 독일에서 언어 문제 때문에 힘들었다. 그때 이상한 연출가와 작업하게 됐는데, 오늘 하는 말이 다르고, 내일 하는 말이 다르더라. 내가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가 싶었다. 작품 중에 욕도 많이 하고 싸우고 그랬다.
단순한 언어 문제일까?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의 한계는 아니고? 그럴지도. 한 번은 스위스에서 연주 후 뒤풀이를 갔다. 한 노신사가 다가와 “동양인이 왜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묻더라.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편견을 부수기가 쉽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유럽 오페라 관객층이 대부분 노년이라던데, 정말인가? 객석에는 대부분 흰머리가 보인다. 앞으로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 제작이 필요하다고 본다. 새로운 세대의 입맛에 맞춰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문화 육성 정책을 펴지 않으면 오페라계는 계속 축소될 것이다.
국내 오페라계는? 마찬가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게.
앞으로의 김기훈이 정말 기대된다. 10년 뒤에는 세계 최고의 극장들을 휘젓고 다니고 싶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고.

오지선 소프라노
오지선(1990~)는 숙명여대와 독일 로스토크 음대·드레스덴 음대를 졸업했다.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오페라 합창단으로 활동했고, 현재 데트몰트 극장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 중이다.

데트몰트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리페 지구에 속해있다. 이 지역의 유일한 오페라극장에 시민들의 애정도 남다르다. 1918년 화재로 무너진 극장을 기부금을 모아 다시 세우기도 했다. 오지선은 데트몰트 극장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 중이다. 글 박서정

 

오펀스튜디오 제도를 설명해달라. 극장 소속 가수가 되기 위해 솔리스트로서 무대에서 경험과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제도다. 데트몰트 극장의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을 거쳐 2019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데트몰트 극장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면. 여러 도시에서 오페라를 보러 온 관객들로 매년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유일한 오페라극장이어서다. 가끔은 거리가 멀어 오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 연주자들이 직접 출장 가서 오페라를 공연하기도 한다.
극장에서 주로 맡는 역할은? 나이가 어린 편이고, 목소리도 무겁지 않아서 밝은 성격의 소녀 역할을 주로 맡았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 역, ‘피가로의 결혼’의 바르바니아 역, 로르칭 ‘밀렵꾼’의 그레천 역 등이다.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 궁금하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 역이다. 유명한 아리아 ‘나를 때려줘요, 마제토’와 ‘만일 원하신다면’, 돈 조반니와 함께 부르는 이중창 ‘그대의 손을 내게 주오’를 꼭 해보고 싶었다. 다음 시즌에 체를리나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어서 행복하게 연습하고 있다.
연습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가장 먼저 작품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본 지식이 뒷받침될 때 연출가나 지휘자가 원하는 캐릭터, 음악의 방향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동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함께 분석하면서 공연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특히 표현하기 어렵거나 난해한 작품도 있었을까? 2016년 독일 로스토크 음대 석사 졸업 연주회에서 참여했던 작품이 기억난다. 현대적으로 꾸민 모차르트 ‘마술피리’였다. 나는 파미나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파미나는 사랑을 꿈꾸는 여린 공주에서 영화 ‘스타워즈’ 속 여장부로 재해석됐다. 헬리콥터로 납치를 당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몹쓸 짓을 하려는 모노스타토스를 때려눕히기도 했다. 심지어 무대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속 말춤을 추기도 했다. 새롭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동양인 성악가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한국에서 창극 ‘춘향전’을 올리는데, 외국인이 아무리 한국어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춘향이 역할을 맡는다면,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슷하게 오페라는 대부분이 서양이 배경이고, 서양에서 서양 사람들과 만들어내야 한다. 이질감 없이 극을 이끌기는 어렵겠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극장 활동을 시작해보니 차별 없이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이미 전 세계의 크고 작은 오페라극장에서 주·조역으로 활동하는 자랑스러운 동양인 가수들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를 맞았다. 해외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동양인 가수를 바라보는 인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개인적으로도 독일에서 음악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단순히 노래를 더 잘하고 싶어 오른 유학길이었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우연히 사무엘 윤 선생님을 마주쳤다. 공연을 앞두고서든, 공연 도중의 쉬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조언과 가르침을 주시더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노래를 나누고, 용기를 불어넣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페라가 그저 귀족들이 향유하던 서양의 문화예술에 그치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계기였다.
앞으로 어떤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나. 고등학생 때 우연히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무대 영상을 봤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데 자신도,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관객도 모두 미소를 띤 행복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노래를 부르며 평생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대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며 좋은 영향력을 전하는 가수가 되기를 바란다.

김범진 테너
테너 김범진(1990~)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베를린 음대를 졸업했다. 현재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활동하며, 드레스덴 음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벨레데레 콩쿠르와 미르암 헬린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김범진은 극장으로 향하는 출근길마다 생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노래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그가 소속된 드레스덴 젬퍼오퍼는 독일 건축 거장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건물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재건된 바 있다. 극장은 초기 르네상스·바로크 양식, 그리스 코린트 양식이 어우러져 재건되었고, 현재 유럽 어느 오페라극장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가 처음 마음을 뺏긴 도시는 빈이다. 빈에서 열린 벨레데레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하며 빈은 그에게 기분 좋은 도시로 남았고, 공부가 더 필요했기에 독일 베를린 음대에 진학했다. 베를린을 선택한 이유도 메이저 오페라극장을 세 개나 지닌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글 장혜선

베를린 음대 마지막 학기에 젬퍼오퍼 오디션을 봤다. 독일에서도 수준 높은 극장이다. 이곳에서 오페라를 시작하면 많이 배울 것 같았다. 출근길마다 외관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노래하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성악을 시작했다. 시작이 좀 늦은 편인데. 음악 선생님이 성악을 권유했다. 평범한 학생이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당황한 나에게 선생님이 같이 연주를 보러 가자고 했다. 테너 김우경 리사이틀이었는데, 그때부터 성악을 결심했다. 21세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드레스덴 젬퍼오퍼는 바그너의 여러 작품이 초연된 극장이다. 극장 설계자인 고트프리트 젬퍼와 바그너가 절친이었다. R. 슈트라우스의 대표작인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도 초연된 극장이다.
음향 전문가들이 젬퍼오퍼의 홀 사운드를 극찬하던데.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와 함께 소리 좋은 홀로 꼽힌다. 훌륭한 어쿠스틱을 지닌 만큼 노래하기 편하다.
무엇보다 젬퍼오퍼의 자랑은 상주 오케스트라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아니겠나! 맞다. 공연할 때마다 웅장한 음악에 감격한다.
젬퍼오퍼도 매 공연마다 캐스팅 오디션을 보나? 우리 극장은 가수 목소리와 캐릭터에 맞는 배역을 극장장이 정해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과 전혀 안 맞는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극장 규모가 커서 매 시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이 돌아간다. 보통 솔리스트는 한 시즌에 평균 7~10개 작품에 선다.
다른 극장에서는 무리하게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더라. 가수라면 오랫동안 좋은 목소리를 유지해야 한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억지로 해내며 가수 생활을 하는 건 회의적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젬퍼오퍼에서 일하면 독일 오페라계의 긍정적이고 희망찬 모습만 접할 것 같다. 우리 극장은 시즌동안 매일 공연하는데도 빈 객석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흥행한다. 독일 사람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페라를 즐기러 온다.
극장 규모가 큰 만큼 스타 예술가들과 함께한 기억이 많겠다. 많은 대가를 만났다. 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 앨런 길버트, 프란츠 벨저 뫼스트, 오메르 메이르 벨베르와 호흡했다.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2018/19 시즌, ‘나부코’의 이스마엘 역을 맡았다. 젬퍼오퍼에서 첫 주역이었다. 사실 2019/20 시즌에 오를 예정이었는데, 한 테너가 아파서 모든 공연을 취소했다. 덕분에 내가 한 시즌 먼저 데뷔하게 됐다.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은? 음악성, 타고난 소리, 언어적 센스가 있어야 하겠지. 그러나 제일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주변에서 꿈을 이루는 사람을 보면, 꾸준히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더라. 나 역시 갈 길이 멀지만 하루하루 꾸준히 보내려 한다.
10년 뒤가 기대된다. 10년 뒤면 테너로서 가장 전성기다. 어느 극장에서든 건강하고 유연한 소리를 유지하고 싶다. 힘든 길, 묵묵히 앞으로 걸어갈 테니 지켜봐주길.

손나래 소프라노 
손나래(1990~)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함부르크 음대에서 석사 및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오펀스튜디오를 거쳐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휘자 켄트 나가노·마시모 자네티,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등과 작업했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는 독일에서 시민 투표로 세워진 첫 번째 국립 오페라극장이다. 1678년 개관 이래 이곳의 지휘자 겸 쳄발리스트로 근무한 헨델이 자신의 첫 오페라 ‘알미라’를 올리며 작곡가로 인정받고, 말러가 상임지휘자로 머물며 틈틈이 작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인 극장에 손나래가 있다. 글 박서정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오펀스튜디오 경쟁률은 어마어마하다던데. 올해 오펀스튜디오에서 소프라노 한 명을 뽑는데 전 세계에서 온 700여명의 소프라노가 몰렸다고 들었다.
오디션에서 짧은 시간에 두각을 나타내려면 특별한 전략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R. 슈트라우스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체르비네타의 아리아와 알반 베르크 ‘룰루’의 아리아를 포함해 몇 곡을 들고 갔다.
둘 다 오디션에서 잘 부르지 않는 레퍼토리이다. 악보를 받아든 오디션 반주자가 당황하더라. 오디션 직전 주어진 10분 동안 널뛰듯이 변화하는 템포, 익숙지 않은 화성을 초견으로 가수에게 맞추기란 정말 땀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두 아리아는 다 맞춰보지도 못한 채 “심사위원이 다른 곡을 시켜주기만 기도하자”며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가. 그런 셈이다. 다행히도 헨델 ‘알치니’의 모르가나의 아리아로 1차 오디션을 통과했다. 2차 오디션에서는 후기 낭만과 현대 오페라 경험이 풍부한 반주자를 만나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를 불러 합격했다.
당황할 법도 한데, 무대가 체질인가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나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하는 오페라 가수가 됐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소속 가수로 발탁된 과정이 특별하다고. 2년간의 오펀스튜디오 계약이 끝나고 1년 동안은 프리랜서로 일했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알치나’ 리허설을 하는데, 극장 관계자가 두꺼운 악보를 들고 서둘러 다가왔다. 무언가 급한 일이 터졌구나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슈만의 오라토리오 ‘파우스트의 장면’ 첫 공연이 2주도 안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가수가 빠지게 된 것이었다. 혹시 이 악보를 빨리 익힐 수 있는지 물어봤다. 켄트 나가노와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당장 이틀 후였다.
그런 비상상황에서 왜 당신을 찾았을까. 잘 공연되지 않는 레퍼토리라 소프라노 솔로를 할 수 있는 가수를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악보를 빨리 보는 것을 알고 있던 담당자들이 때마침 극장에 있던 나를 찾아왔다.
공연은 무사히 마쳤나. 첫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퇴장하니, 예술감독과 캐스팅 감독이 나에게 가장 먼저 뛰어왔다. 극의 비중은 높지 않았지만, 켄트 나가노가 전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파트라고 할 정도로 중독성 있는 멜로디였다. 독일가곡을 좋아하는 내 목소리에 슈만의 음악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몇 주 뒤에 “다른 극장으로 갈 생각은 말아달라”며 극장 소속 가수로 계약을 제안받았다.
독일가곡을 좋아한 것이 독일행을 결정한 데 영향을 미쳤나. 늘 독일에서 음악을 하고 싶었다. 브람스의 ‘5월의 밤’을 부르는데 음울하고 텅 빈 색채가 잘 나오지 않자, 선생님께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슈바르츠발트를 상상해보라고 하셨다. 겨울에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숲을 고독하게 걸어가는 브람스의 심정을 느껴보라고. 독일가곡을 부를 때마다 마음 한편에 질문이 가득 찼다. 브람스와 슈만이 왜 이런 음악을 썼는지 그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함부르크는 브람스가 태어나고, 활동한 도시이다.
살아보니 독일의 예술성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 같은가.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중요하게 인식한다. 며칠 전 TV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산업의 경제적 타격을 논하는 토론회에서 독일의 부총리 겸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가 젊은 예술인들의 피해를 언급하는 것을 봤다. 독일이 국가 위기에서도 배고픈 젊은 예술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박승주 테너
박승주(1990~)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공부했다. 알카모 콩쿠르, 퀸소냐 콩쿠르,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다. 201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영 아티스트로 활동했고, 2019/20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다.

이탈리아는 극음악의 본향이다.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는 유럽 곳곳으로 퍼져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인지 성악가에겐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이 있다. 오페라의 시작점이자,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 도시 곳곳마다 오페라극장이 있는 나라. 학창 시절, 박승주도 그랬다. 그는 막연히 이탈리아 유학을 꿈꿨다. 하지만 좋아하는 가수들이 대부분 독일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박승주는 독일 만하임 음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이탈리아를 꿈꿨던 청년은, 독일에서 자신을 연마하고, 현재 미국에서 극장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 사연으로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소속 가수로 활동하게 됐을까? 글 장혜선

스스로 독특한 이력이라고 생각하나? 독일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데뷔한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다.
2018년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콩쿠르 우승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메일이 왔다. 캐스팅 담당자가 이미 2017년도에 한 콩쿠르에서 나를 봤다고, 축하인사를 건네며 극장에 합류해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콩쿠르 우승도 기뻤지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설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성악가에게는 콩쿠르 입상이 큰 기회를 주는 듯하다. 콩쿠르를 보고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유럽의 오페라 차이가 궁금한데. 음악적으로는 유럽 극장들과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미국 오페라 자본의 힘은 대단하다. 무대만 놓고 비교하면 미국의 오페라는 연출이 화려하고, 무대 세트와 의상이 정말 멋지다!
유럽 오페라극장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실정은 좀 다른가? 미국 또한 상황이 많이 다르지는 않다. 아무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라고 하지만 공연마다 객석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젊은 가수들이 극장과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독일에서도 오페라 주역 오디션을 많이 봤다고. 결국 오디션 최종에서 독일인이나 유럽인으로 확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재능 있는 동양인들은 작은 무대라도 설 수 있길 바라고 있다.
그렇다고 국내 오페라계가 신진 가수들에게 관대한 것도 아니니 답답하겠다. 젊은 가수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한국에는 재능 있는 성악가가 너무 많다. 해외에서는 실력 있는 젊은 가수는 절대 놓치지 않고 계약을 체결한다. 한국도 국내 신진 가수들을 적극 활용해 무대를 제공해주면 좋겠다.
뉴욕에서의 일상은? 대부분 극장에서 보낸다. 쉴 때는 미국인 친구들과 게임을 한다. 뉴욕은 한인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어서, 미국 친구들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이 알려주려고 한다.
호탕한 성격은 천성인가? 오페라를 하다보면 새로운 제작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순간들이 많다. 첫 만남부터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웃기거나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 친해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환경에 완벽히 스며든 나를 발견한다.
결과적으로 박승주의 꿈은 최고의 성악가가 되는 건가? 아니다. 최고의 가수가 되기보다는, 겸손하게 노래하고 싶다.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항상 겸손하고 성실하게 임하면 관객의 기억 속에 남는 좋은 가수가 될 것이다.
10년 뒤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노래하고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클래식 음악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

이동민 소프라노
이동민(1990~)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독일 쾰른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현재 독일 겔젠키르헨에 있는 레비어 음악 극장의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의 겔젠키르헨은 19세기 이전까지 그저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런데 1800년대부터 석탄광산이 문을 열었고, 이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탄광 지역이 되어 부를 누렸다. 겔젠키르헨의 케네디 광장에는 1959년에 개관한 오페라극장이 있다. 정식 명칭은 레비어 음악 극장(Musiktheater im Revier)이다. 주로 오페라와 뮤지컬, 발레를 선보이는데, 개관 초기에는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1997년부터 이 극장은 독일 문화재로 지정돼 국가 보호를 받고 있다. 건물 외벽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다른 독일 극장에 비해 모던한 느낌이다. 극장은 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추구한다. 1968년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의 ‘포토토시스(Photoptosis)’가 초연됐고, 1998년 알베르트 로르칭의 1899년 작 ‘레지나’를 선보인 역사적인 기록이 있다. 현재 이 극장에서 이동민이 소속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글 장혜선

겔젠키르헨의 레비어 음악 극장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쾰른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하던 시기였다. 레비어 음악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생겼다. 연주가 끝나자 극장장이 무대 뒤로 와서 다음 시즌에 오펜바흐 ‘호프만 이야기’에 올림피아 역으로 출연을 제안했다. 올림피아의 아리아를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아서 기회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준비해 오디션에 임했다. 이후 좋은 평을 받으며 데뷔했고, 인연이 이어져 현재 소속 가수가 됐다.
극장에는 두 개의 홀이 있다. 1,004석의 대극장과 336석의 소극장을 갖췄다. 오페라·발레·뮤지컬·어린이 공연 등 다양한 문화체험을 제공한다.
극장에선 어떤 배역을 소화해주길 바라나? 현재 주역부터 조역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좋아하는 배역은 ‘호프만 이야기’의 올림피아,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진주조개잡이’ 레일라!
한 시즌에 몇 개의 작품을 올리는지? 시즌마다 다르지만 보통 4~5개의 작품을 하는 것 같다.
극장 소속 가수의 최대 장점은? 작품마다 계약하는 프리랜서와는 달리, 시즌마다 계약을 하기에 재정적으로 안정적이다.
관객과의 호흡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늘 관객과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라는 마음이 생겨 많은 걸 함께 나누게 된다.
욕심나는 배역은? 너무 많다. ‘햄릿’의 오필리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 ‘리골레토’의 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등을 맡고 싶다.
지금까지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좀 특별했던 공연이 있다. 2016년 쾰른 오퍼에서 라벨의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을 올렸는데, 그 작품에서 1인 3역(불, 공주, 종달새 역)을 맡으며 데뷔했다. 무대 뒤에서 짧은 시간 안에 가발과 의상, 메이크업을 교체하느라 애쓴 기억이 난다. 의상팀과 분장팀이 하나가 되어 나를 변신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정신이 없었지만 한 번도 등장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가곡도 좋아한다고 들었다. 맞다. 가곡을 좋아해 언젠가 가곡 리사이틀과 가곡 음반을 발표하고 싶다.
순수한 열정이 참 좋다. 앞으로의 10년 뒤가 기대된다. 늘 순수한 마음으로 노래할 것이다. 음악으로 삶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좋은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싶다.

이현재 테너
이현재(1990~)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2017년 린츠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며 잘츠부르크 영 싱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현재 스위스 바젤 오페라 스튜디오 단원으로 활동 중이며 독일 하노버 슈타츠오퍼 솔리스트 앙상블 단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나에겐 가장 큰 인연이었다.” 부모가 모두 성악가인 이현재에게 오페라 가수로서의 성장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 보컬로 활동하며 한때 가수를 꿈꿨지만, 발성의 기초를 닦기 위해 성악과에 진학했고, 이내 오페라 큰 매력을 느꼈다. 한국에서 스위스로, 그리고 이제 독일에서의 삶을 앞둔 그에게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글 이미라

부모님을 따라 성악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내 노래의 스승이자 멘토인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 기초적인 발성이나 음악적인 아이디어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언제 어디서든 물어볼 수 있는 환경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을 수 있었다. 지금도 꾸준히 아버지께 피드백을 받고 함께 공부해 나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부모님의 유학으로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나 또한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학을 나오기 전 이미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그중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나라로 나오게 됐다. 현재 스위스 바젤 극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8월부터는 독일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스위스로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2017년 린츠 콩쿠르에 입상한 이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영 싱어 프로젝트에 관한 오디션 제의가 왔고, 그 오디션 이후에는 바젤 극장에서 오페라 스튜디오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인 성악가가 많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스위스는 조금 낯선 느낌인데. 바젤은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도시로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와 음악적인 교류가 활발하다. 유명한 고음악 학교(Schola Cantorum Basiliensis)가 있어 고음악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바젤 극장은 고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올린다. 무대연출 또한 매우 독창적이고 현대적으로 해석되는 공연이 많다. 바젤 극장은 대부분의 공연이 매진되고 항상 관객으로 가득 차 있다.
바젤 극장에서의 첫 시즌은 어땠나. 나는 첫 시즌에는 5개의 배역을 받았다. 오페라극장의 경우 보통 시즌 시작 전 오페라 디렉터·캐스팅 디렉터와 만나 다음 시즌의 배역을 논의한다. 특별히 원하는 배역이 있으면 디렉터와 상의 후 오디션을 진행하기도 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2019년 세계 초연으로 올린 ‘안데르센 이야기(Andersens Erzählungen)’로 당시 왕자 역을 맡았다. 공연이 입소문을 타며 세 번의 추가공연이 편성되었는데, 모든 공연이 매진되고, 수많은 관객의 기립박수도 받았다.
8월부터는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새 여정을 시작한다. 극장장들이 극장을 옮길 때 소속 솔리스트에게 함께 가자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의 경우가 그랬다. 바젤 극장의 극장장이 하노버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제의를 받았고, 마침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라 함께하게 됐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을 텐데. 새로운 연출가·성악가·지휘자·디자이너들과의 작업은 즐겁다. 항상 새로운 영감을 주고 발전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출가나 지휘자의 요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어려운 요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연습하고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고 더 발전된 것을 느낀다.
또다시 극장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어떤 장점이 있나. 계약 동안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오페라 스튜디오에서는 정기적인 마스터클래스와 워크숍이 있어 문화적·음악적 경험은 물론 다양한 무대 경험도 할 수 있다.
신인의 경우 극장의 요구에 다 맞추는 것이 좋을까? 극장의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매우 위험 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요구할 때에는 이를 거절할 수 있어야 목소리를 지킬 수 있다.
노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발성’.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과 음악을 유연하게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발성을 갖춰야 관객들에게 내 음악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
꿈의 배역이 있다면. 푸치니 ‘라 보엠’의 로돌포.
1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많은 나라에서 공연을 올리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

최예은 소프라노
최예은(1990~)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2016/17 시즌 스위스 바젤 극장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했으며, 2019/20 시즌 독일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약하고 있다.

최예은의 목소리는 독일 가곡에서 유독 빛난다. 학창 시절, 레슨 선생님은 유학을 생각한다면 독일을 염두에 두라고 했다. 독일 가곡을 부를 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말이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어 가사를 맛깔나게 표현하니 무조건 독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독일에 오면 ‘꽃길’을 걸을 줄 알았건만,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음대 졸업을 앞두고 에이전시와 극장 오디션을 수없이 보러 다녔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동양적인 얼굴이어서 안 된다” “이미 우리 극장엔 한국인이 많다” 등의 피드백을 받았다. 깊은 상실감에 잠식되어 있을 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을 뽑는 사무엘 윤 마스터클래스 소식을 접한 것이다.
글 장혜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귀국을 고민하고 있을 때 사무엘 윤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했다. 독일에서 활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유학생이 오디션을 봤는데 내가 최종 1인으로 발탁됐다. 현재 독일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 초년생이 곧바로 에이전시에 들어가는 게 참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에 있는 모든 에이전시에 메일을 보냈다. 거의 150곳이었다.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연락 온 곳은 단 열 군데였다. 그중에도 나에게 관심을 보인 에이전시는 단 한 군데. 암담한 마음이었다.
이제 마음이 안정됐나? 한창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설움이 많았는데. 쾰른 오퍼에서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느끼지 못한다. 언젠가 동양인이 연기할 때 소극적이어서 연출가들이 우려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한 평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극장에서는 어떤 역할이든 활동적으로 임했다. 한 번은 연출가가 나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쾰른 오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오펀스튜디오는 보통 작은 무대에서 어린이 오페라를 자주 올린다. 그런데 지난 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카르멘’을 정통 오페라로 공연했다. 한국인 솔리스트가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이 참여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도 공연에 함께했다. 사무엘 윤과 가까이에서 호흡을 맞추며 많은 것을 배웠다. 마음이 벅찼던 순간이다.
2016/17 시즌에는 스위스 바젤 극장 오펀스튜디오에 있었다. 독일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좀 다른가? 그때는 유럽에서 처음 일하게 되어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첫 연습 때 동료들의 기에 눌려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추후에 새로운 극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인 자세로 활동하겠다고 다짐했다. 쾰른 오퍼에서는 먼저 동료들에게 다가가 이름을 물어보고 나를 소개했다.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기죽는 유학생들도 많은데. 유학생들이 언어 문제로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여전히 독일어가 부족하지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이겨내는 중이다.
여가 시간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오페라 가수는 적게는 한 시간, 길게는 몇 날 며칠 동안 무대에 서야 한다. 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운동을 하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역할은? 베르디 ‘리골레타’의 질다 역! 어느 오디션을 가든지 항상 첫 번째로 질다의 아리아를 부른다.

최성규 바리톤
바리톤 최성규(1990~)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왕립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이후 영국 로열 아카데미 오페라에서 활동했다. 프랑스 레자주리엘 콩쿠르에서 1위했다. 현재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 영 아티스트 소속이다.

바리톤 최성규는 주로 혈기왕성한 인물을 맡는다. 예를 들면 브리튼의 ‘루크리시아의 능욕’의 주니어스 같은 역할. 매력적인 캐릭터와 빠른 템포의 음악은 지금의 최성규를 대변한다. 바리톤은 원숙한 역할이 많기에 천천히 무르익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최성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0대 초반의 그는 아직은 영 아티스트로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에 몰두하고자 한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같은 역할 말이다. 돈 조반니는 주변 인물에 맞춰 매번 자신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아니던가. 최성규 역시 매혹적인 바리톤이 되기 위해 젊음을 쏟고 있다.
글 장혜선

독일어를 열심히 배웠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영국을 선택한 건가? 독일 유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독일 학교 오디션을 접수하던 중 영국왕립음악원 마스터클래스가 열린다는 걸 알았다.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후 영국왕립음악원 입학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했다. 장학금을 받게 되어 마침내 영국으로 오게 됐다.
영어는 독일어에 비해 좀 편한가? 언어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잘 느끼기 위해 영어를 들을 땐 행동도 함께 관찰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지금 속해있는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는 어떠한 기회로 들어가게 됐나? 영국왕립음악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로열 아카데미 오페라에 속해 있을 때였다.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의 지휘자가 참여한 마스터클래스를 하게 됐고, 그로부터 오디션을 추천 받았다. 그 시기에 다른 오페라 스튜디오 오디션이 겹쳤다. 미국에서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최종 오디션을 본 후, 밤에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서 런던으로 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 오디션을 보러 이동했다.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받는 혜택이 궁금하다.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는 여섯 개 단체(로열 오페라 하우스·글라이드본 극장·웨일즈 내셔널 오페라·스코틀랜드 오페라·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오페라 노스)와 협력하고 있다. 영국 아트 카운슬(arts council)의 후원을 받으며 그동안 수많은 아티스트를 배출했다. 나는 소속된 오페라단과 작업하며 다양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다. 현재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지휘자나 성악가, 연출가가 많이 초청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혼란스러운 요즘, 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의 보호를 받고 있는지? 스튜디오에 속해 있으면 현 시점 같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기성 가수로 발전하도록 많은 오디션과 오페라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준다.
동시에 매니지먼트에도 소속되어 있다. 그동안 노래 연습에만 집중해서 문서처리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이런 부분에서 에이전시의 역할이 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차이콥스키 ‘이올란타’에서 로베르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지난해 봄에 런던 공연을 마치고, 여름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같은 작품의 다른 프로덕션으로 올랐다.
연습 외에는 무엇을 하며 일과를 보내나? 영국에는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주로 공원을 걷거나 음악을 듣는다. 좋은 공연이나 전시를 보기도 하고. 연습 후에는 스튜디오 동료들과 영국 펍에서 수다를 떤다. 보통 오페라를 제외한 이야기를 나눈다. 쉬는 시간에는 동료들 사이에서 오페라 이야기가 금지다. 누가 오페라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No more opera talk!(더 이상 오페라 얘기는 금지!)”라고 한다.

조푸름 소프라노
조푸름(1989~)은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재학 중 도미하여 줄리아드 예비학교와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한국인 최초로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영 아티스트에 선발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스폴레토 페스티벌·링컨센터페스티벌·홍콩아트페스티벌 등에서 주역으로 활약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2016/17시즌 개막작으로 ‘홍루몽(Dream of the Red Chamber)’이 세계 초연됐다. ‘M 버터플라이’로 토니상을 받은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미술감독 팀 입, 대만의 저명 무대감독 스탄 라이, 그리고 총감독을 맡은 작곡가 겸 지휘자 브라이트 성까지, 스타급 연출진이 대거 참여한 화제의 무대였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조푸름이었다. 세련된 노래와 연기로 초연작이 갖는 한계를 극복한 그는 단숨에 청중을 사로잡았다. 글 이미라

십 대부터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힘든 점은 없었는가? 아직까지는 편견이나 한계를 느껴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서도, 그리고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도 오히려 더 많은 기회와 사랑을 받고 있다. 더불어 ‘동양인이라서’ 얻은 이점도 있었다. 브라이트 성의 ‘홍루몽’과 엘레나 랑헤르·데이비드 파운트니의 ‘아름다움과 슬픔(Beauty and Sadness)’, 토시오 호소카와의 ‘마츠카제(Matsukaze)’ 같이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세계초연작에 뽑혔으니.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발탁되며 급성장했는데. 이를 통해 오페라 가수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었다. 조이스 디도나토·제이미 바튼·타마라 윌슨 등 존경하는 가수들이 이 프로그램의 출신이고, 무대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늘 가고 싶었다.
극장에서 개별 오디션을 마련해주었다고. 콩쿠르 방식으로 오디션이 진행됐다. 당시 줄리아드에서 메트 오페라와 함께 작품을 준비 중이었는데, 학교에서 보내주지 않아 결선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극장에서 나에게만 따로 오디션 시간을 잡아주었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됐다. 성악가로서 터닝 포인트라 할 만큼 많은 경험과 성장을 이루었던 시기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데.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지금의 매니저를 만났다. 미국에서는 매니지먼트 없이는 오디션을 보기 힘들다. 물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데뷔는 매니저 없이 얻은 기회였지만, 당시에는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가 매니저 역할을 대신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디션 외의 캐스팅 과정도 궁금하다. 극장이나 매니저, 디렉터의 추천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심지어 의상 디자이너의 추천으로도 기회를 얻는 경우가 있다. 캐스팅 통보는 보통 매니저를 통해서 오는데, 길게는 3년 전, 짧게는 일주일 전에도 받는다.
주로 맡아온 배역은? 배역 욕심이 많아서 새로운 역할에 관심이 많다. 목소리는 리릭이지만,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가벼운 역할도 하고 싶어 줄리엣(로미오와 줄리엣), 미카엘라(카르멘), 무제타(라보엠)를 비롯해 파미나(마술피리)와 수잔나(피가로의 결혼)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고전부터 현대까지 모든 레퍼토리를 소화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R. 슈트라우스 ‘살로메’는 꼭 하고 싶다. 음악도 좋지만, 가수이자 배우로서 굉장히 도전적인 역할이다. 벌써 수만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모든 생활이 음악을 중심으로 흐르는 것 같다. 리허설이나 공연 중에는 틈날 때마다 악보를 본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계속 듣고 공부하는 거다. 리허설 기간에는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없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쉬는 날에 그림도 보고, 책도 읽는다.
미래에 그리는 나의 모습이 있다면. 모든 청중에게 감동과 힐링을 줄 수 있다면 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영혼의 거울인 것처럼, 음악 또한 영혼의 거울이다. 내 모든 것이 음악을 통해 낱낱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행복한 가정 안에서, 더 부유해진 마음으로 따뜻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하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하얀 소프라노
김하얀(1989~)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다. 맨해튼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오페라 인덱스 콩쿠르, 이스트 코스트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현재 산타페 오페라 수습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뉴멕시코주 중부에는 산타페 마을이 있다. 산타페는 불운한 역사를 예술로 승화한 도시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거주하던 이곳에는 16세기부터 이방인이 침입했다. 200년 동안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미국의 47번째 주로 편입됐다. 산타페 도시 곳곳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오묘한 풍경에 매료된 세계 각지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산타페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예술 명소는 사막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오페라하우스, 크로스비 극장이다. 1956년 미국의 지휘자 존 크로스비는 부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산타페 오페라를 설립했다. 1957년 여름부터 매해 산타페 오페라 페스티벌을 열었고, 1998년에는 대자연을 병풍삼아 크로스비 극장을 지었다. 극장에는 벽이 없어서 오페라가 시작하는 저녁 시간이 되면, 눈부신 노을이 무대로 쏟아진다. 소프라노 김하얀은 산타페 오페라의 수습단원이다. 글 장혜선

해질녘, 크로스비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면 무슨 기분인가? 지난해 산타페 오페라에서 올린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 참여했다. 특별한 연출 장치가 없어도 자연 그 자체가 훌륭한 배경이 됐다. 내가 노래할 때마다 새들이 화답하듯이 지저귄다. 지는 노을을 보며 공연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산타페는 매혹의 땅이라고 불린다. 그 별칭에 걸맞게 매혹적인 시간이었다.
뉴욕 맨해튼에서 거주하고 있다. 연습이 없을 때에는 무엇을 하며 일과를 보내나? 최대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많이 보려고 한다. 여가시간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닌다. 센트럴파크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고. 뉴욕에 있으면 다문화적 요소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다.
관객의 입장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매력은 무엇인가?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원어 뿐 아니라 자국어 공연도 올린다. 현대 작곡가들의 오페라 작품도 한 시즌에 한 편은 선보이고 있다. 젊은 성악가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높으며, 관객층을 세분화한 홍보 마케팅이 인상적이다.
유럽 오페라극장의 상당수가 재정난에 시달린다. 미국의 실정은 어떠한가? 미국도 매년 비슷한 상황이다. 극장도 시대를 뛰어 넘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가수에 대한 후원과 지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 가장 힘든 점은? 서양인들에 비해 체구가 작아서,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많지 않다는 한계를 느꼈다.
주로 무슨 역할을 맡나? 한때는 요정 역할 전문이었다.(웃음) 주로 지고지순한 역할을 많이 맡는다.
나쁜 역할을 맡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그동안 해봤던 캐릭터와는 정반대인 야망 있는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
매니지먼트 없이 홀로 활동하고 있는데, 힘들지는 않나? 혼자 활동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조력자가 있으면 더 넓은 시장을 만날 것 같다. 노래에만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고.
훌륭한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몸이 악기인 만큼 최상의 컨디션으로 언제든 좋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조병익 바리톤
조병익(1989~)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피렌체 마지오 피오렌티노 극장에서 영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토티 달 몬테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트레비소·볼차노·페르모·페라라 등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에서 데뷔했다.

어릴 적부터 매달려온 운동을 그만뒀다. 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내가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노래’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콩쿠르 입상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합격. 모두 한 해에 이룬 성과였다. 바리톤 조병익의 잠재력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글 이미라


오페라 가수를 꿈꾼 것은 언제부터였나. 친구이자 노래 인생의 동반자인 바리톤 김주택으로 인해 오페라 가수를 꿈꾸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과 삶을 원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난 김주택과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오페라 무대에서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같은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데. 대학생 때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열리는 토티 달 몬테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했다. 그때 나를 눈여겨본 마에스트로가 바로 잔니 탕구치다. 수많은 대극장의 극장장을 역임한 분이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었고,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피렌체 마지오 피오렌티노 극장에서 영 아티스트로 활동한 것도 그와의 인연 덕분인가. 그의 소개로 오디션을 봤다. 여기서 합격하며 2년 과정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극장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데. 에이전시에서는 어떤 도움을 주고 있나. 에이전시 소속 가수가 되면 유럽에 체류 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유럽 활동이 더 수월해진달까. 또한, 극장장의 권위로 가수를 바로 극장에 캐스팅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에이전시가 꼭 필요하다.
현지에서 느끼는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해 입금이 늦어지는 건 이젠 보통의 일이 되어버렸다. 나라의 경제가 너무 힘든 상황이라 모두 그것을 감안하고 일하는 분위기다. 문을 닫은 극장들도 있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이탈리아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마무리는 항상 잘 극복해 나가자는 다짐으로 끝난다. 오페라를 향한 사랑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이끌고 나아가는 원동력일 것이다.
오페라의 특성상 노래 외에도 갖추어야 할 부분이 많을 텐데. 정해진 역할에서 본인만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대체 불가한 배우가 훌륭한 오페라 가수라고 생각한다. 오페라는 ‘극’이기 때문에 노래 실력은 기본이고, 그 나라의 언어로 완벽하게 연기하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연습 전후의 식사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 새로운 제작 환경에도 금방 적응하는 것 같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2016년 토리노 왕립극장에 공연했던 ‘라 보엠’의 쇼나르 역. 토리노 왕립극장은 1896년 ‘라 보엠’이 초연된 곳이다. 그 후 100주년 기념 공연에 루치아노 파바로티·미렐라 프레니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올랐고, 영광스럽게도 12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도전하고 싶은 작품은. 베르디의 작품을 더 많이 연기해 보고 싶다. 2018년 이탈리아에서 ‘라 트라비아타’(레오 누치 연출)의 제르몽 역에 발탁되어 데뷔했다. 베르디의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작품을 더 잘 연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국내 활동 계획이 있다면. 모국에서 노래하는 것은 모든 성악가의 바람일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이탈리아의 공연이 취소되며 한국에 왔다. 국내에서 오페라 오디션 소식을 듣고 참가했는데,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이지현 소프라노
이지현(1989~)은 한양대를 졸업한 후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이후 이탈리아 라 스칼라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오스트리아 그란디 보치 콩쿠르에서 1위했다. 현재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 최고의 고도(古都)다. 고대 로마 시대에 도시가 조성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도시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아마 한국인에게는 축구구단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친숙할 테다. 4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은 생전의 모차르트가 종종 방문한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이곳은 1999년부터 시에서 직접 극장을 운영하며 현재 주로 오페라·발레·연극을 올린다. 이지현은 2018/19 시즌부터 아우크스부르크 극장 소속 가수로 일하고 있다. 글 장혜선

작은 인연이 당신을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으로 이끌었다. 만하임 음대 재학 당시였다. 학교 주최로 에이전시 오디션이 있었다. 그때 심사위원이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의 캐스팅 매니저였다. 당시 그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추천으로 쳄린스키의 ‘난쟁이(Der Zwerg)’의 주역을 맡은 바 있다. 만하임 음대 졸업을 앞두고 그가 나에게 아우크스부르크 극장 소속 가수를 제안했다. 좋은 기회여서 바로 오디션에 응했다.
한양대 재학 시절에 만난 박정원 교수가 인생의 은사라고. 한양대 신입생 시절, 첫 실기 시험에서 꼴등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실력이 부진했는데 박정원 교수님은 항상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교수님 덕분에 노래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마침내 4학년이 되자 실력이 향상됐고 수석으로 졸업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양인 편견 때문에 캐스팅이 좌절된 적이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기였다. 극장 캐스팅 매니저가 나를 ‘마술피리’ 파미나 역으로 발탁했다. 그런데 연출가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가수만 원했다. 무대에 못 서는 것은 물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오디션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실력을 쌓아서 서양 가수들보다 잘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극장 소속 가수들이 때로는 극장과의 불화로 힘들어한다. 극장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수의 어떠한 태도가 바람직할까? 중·소규모 극장은 젊은 가수를 뽑아서 한 시즌에 여러 역할을 맡도록 한다. 심지어 가수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주기도 한다. 객원 가수를 더 적게 뽑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다. 그로 인해 젊은 가수들이 맞지 않는 역할을 하면서 목소리가 망가지게 된다. 그러면 극장은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다. 극장은 우리의 성대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길.
극장장이 바뀌면 솔리스트가 교체되기도 하는데. 맞다. 대부분의 극장이 그렇다. 소속 가수로 발탁되더라도 자기 발전에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언제든 자신이 먼저 극장을 박차고 나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극장장은 보통 5년 주기로 바뀐다. 그전에 미리 에이전시를 통해 다른 극장 오디션을 알아보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독일 극장 시스템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독일 극장의 시즌제는 정말 좋은 시스템이다.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에서 현대 오페라에 참여했다. 2018년 다이 후지쿠라(1977~) 일본 작곡가의 ‘솔라리스’에 하리 역으로 올랐다. 폴란드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SF소설을 토대로 각색한 작품이다. 우주정거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현대 음악으로 표현한 오페라였다. 현대 오페라는 첫 도전이어서 너무 떨렸다.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푸치니 ‘나비부인’에 자주 참여했던 것 같다. 매번 이 오페라를 볼 때마다 푸치니의 아름다운 음악이 마음에 와 닿아 눈물이 나온다. 기회가 된다면 독일에서도 ‘나비부인’을 꼭 해보고 싶다.

최인식 바리톤
최인식(1989~)은 연세대를 수석 졸업한 뒤 쾰른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테네리페 콩쿠르 3등 및 청중상(2018), 비냐스 콩쿠르 4등 및 청중상, 마드리드 극장 특별상(2020)을 받았다. 2015~2017년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했고, 2017/18시즌부터 쾰른 오퍼 앙상블 멤버로 활동 중이다.

그의 꿈은 가수였다. 어릴 적 학교 축제에 나가 노래를 불렀고,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노래로 4연승까지 해봤다. 노래에 대한 그의 재능은 이내 성악도로, 그리고 오페라 무대로 이어졌다. 노래에 대한 타고난 감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늘 최선을 다하는 숨은 노력 때문이었을까. 부산예고와 연세대를 거쳐 독일 쾰른 오퍼에서 데뷔하기까지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유쾌한 젊은 성악가 최인식의 이야기다. 글 이미라

고등학생 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꿨나.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2010년, 대학생 때 이화여대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하면서다. 그때 무대 위에서 바라본 객석과 관객들의 박수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인연을 거쳤을 텐데. 대학에 진학해 김관동 교수님께 이전보다 더 세밀하게 연구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때 ‘예술가’가 되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무엘 윤 선생님의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1년간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해외 무대로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본래 독일로의 유학을 꿈꿨었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막연히 이탈리아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독일 가곡을 공부하며 큰 매력을 느꼈다. 더불어 독일에서 일할 기회도 주어졌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지. 독일에서 지내며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색깔과 방향이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
오펀스튜디오로 첫 인연을 맺은 쾰른 오퍼와 계속 함께하고 있는데. 1년간의 오펀스튜디오를 마치고, 다시 1년 더 연장 계약을 하며 2년간의 생활을 마쳤다. 이후 솔리스트로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쾰른 오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데. 자랑한다면. 독일 라인강변의 고도 쾰른에 위치해 있다. 새로운 연출로 선보이는 고전 레퍼토리를 비롯해 매 시즌 한 편 이상의 현대 오페라를 공연하며 주목받고 있다.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바그너 ‘하이덴쾨니히’부터, 현대 오페라인 코른골트 ‘죽은 도시’, 슈레커 ‘이렐로에’, 슈토크하우젠 ‘빛으로부터의 일요일’ 등의 세계 초연 기록도 갖고 있다.
이곳에서 처음 맡은 배역은 무엇이었나? 오펀스튜디오 2년 차에 ‘라 보엠’의 마르첼로 역으로 데뷔했다. 대개 오펀스튜디오 시절에는 어린이 오페라를 주로 하는데,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극장 솔리스트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시즌에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 역으로 데뷔할 예정인데. 2010년에 처음 공부했던 오페라를 프로 무대에서 선보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사랑의 묘약’의 벨코레와 ‘파우스트’의 발렌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엔리코, 그리고 ‘카르멘’의 에스카미요 역을 해보고 싶다. 베르디 작품중에는 ‘팔스타프’ ‘돈 카를로’ ‘가면 무도회’ ‘맥베스’를 공부해보고 싶고, 더 나이가 들면 바그너의 ‘링 사이클’에 도전하고 싶다.
한 작품을 이끌어 가는 오페라 가수로서의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할까. 기본적으로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연구 분석과 악보 분석, 그리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와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오페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만남이기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은 서로 조율하며, 합의점을 찾아가야 한다.
훌륭한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이 있다면. 자신감은 가지되 자만심은 가지지 않는 겸손한 마음.
10년 뒤,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가? 겸손하고 유쾌한 젊은 성악가이기를 기대해 본다.

김병길 베이스바리톤
김병길(1989~)은 경성대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7~2019년 도이치 오퍼 베를린의 영 아티스트로 선정됐고, 현재 도이치 오퍼 베를린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세 개의 오페라극장을 가진 베를린은 단연 유럽 오페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도이치 오퍼 베를린은 1961년 개관했다. 근방의 다른 오페라극장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독일 분단 시절부터 서독 정부의 문화적 자존심이었다. 김병길은 성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 그는 어떠한 기회를 통해 도이치 오퍼에 몸담게 됐을까?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생성하는 베를린에서 그는 오늘도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글 장혜선

도이치 오퍼 베를린과의 첫 인연은? 매순간 많은 인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중 결정적 사건은 2016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도이치 오퍼 베를린 한국인 장학생 오디션(WCN 주최)이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극장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극장에 들어가 무슨 역할이든 한결같이 최선을 다했다. 현재는 장학생이 아닌 소속 가수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병길의 최대 무기는 ‘강인함’이다. 아무래도 오페라는 서양 음악이기에 동양인인 나는 캐스팅에 한계가 있다. 한번은 베이스 연광철에게 이 문제에 관해 물어봤다. “우리는 그들보다 2~3배는 더 잘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간다.”라고 강조하셨다. 타국에서의 삶은 서러울 때가 많다. 일상에서도 많은 편견을 견디며 지내야 하는데, 오페라에서는 오죽하겠는가?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도이치 오퍼에서 일하며 얻는 수혜는? 도이치 오퍼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세 개의 오페라극장 중 하나다. 객석 규모로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크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를 많이 초청하는 극장이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수혜는 대가들과 함께한 공연이다. 테너 조셉 칼레야와 그레고리 쿤드,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같이 무대에 섰다.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바로 물어보며 음악적인 지식을 채웠다. 잊지 못할 값진 경험이다.
신인 가수 등용에도 진취적인 극장이다. 도이치 오퍼는 해외 주요 콩쿠르 사무국에 연락해 오디션에 참여할 가수들을 추천받는다. 선출된 신인 가수는 유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며 많은 걸 배운다. 극장 규모에 걸맞게 모든 프로젝트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반면 유럽 극장의 관객 연령층은 점점 고령화되고 있는데. 흔히들 ‘하얀 파도’에 비유하더라. 오페라 관객 연령대가 점점 높아지면서 객석이 하얀 파도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최근 유럽 대다수 극장은 온라인 홍보와 어린이 오페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음악에는 시대를 초월한 힘이 있기에 조금씩 노력하면 충분히 개선될 거라고 본다.
한국 오페라계에도 도입되길 바라는 유럽 극장 시스템이 있나? 유럽은 잘 만들어진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린다. 무대 세트 또한 오랫동안 보존하여 재사용한다. 수많은 오페라 가수가 거쳐 간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예를 들면 우리 극장의 ‘토스카’는 1969년에 초연한 프로덕션을 그대로 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오페라 프로덕션이 일회성으로 공연된다. 좋은 프로덕션을 개발해 이를 보전하면서 역사를 쌓으면 멋지지 않을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네덜란드인, ‘살로메’의 요하나안, ‘나부코’의 자카리아!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며 늘 준비 중이다.
국내 무대에 대한 열망은 없는지? 늘 국내 무대에 서고 싶다. 도이치 오퍼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이한나 소프라노
이한나(1989~)는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무대에 오르며, 디렉터로도 활동 중이다.

소리는 ‘마음의 거울’이다. 소리로 살아가는 성악가들에게 진실된 마음이 더욱더 중요한 이유다. 주어진 삶을 겸손히 살아가다 보면, 그것이 내 마음이 되고, 또 아름다운 소리로 나올 거라고. 그렇게 이한나는 진실된 음악가를 꿈꾸며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글 이미라

처음 오페라 가수를 꿈꾼 순간은. 일찍이 노래를 시작했지만, 오페라에 대해선 막연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오페라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하나의 극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배우며 그 매력에 빠졌다. 그때부터 오페라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동기부여가 된 사건이 있었다면. 2018년, 웨스트 뮤직 아카데미(Music Academy of the West)에 보컬 펠로로 참여해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만났다.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 바리톤 사이먼 킨리사이드, 소프라노 데버라 보이트 등의 저명한 성악가에게 마스터클래스와 코치를 받으며 전문 연주자로서 도약하기 위한 많은 동기부여를 얻었다.
텍사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현재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데. 텍사스에서 5년, 뉴욕에서 2년 반, 캘리포니아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며 미국의 동부·서부·남부 각 지역의 특징을 직접 경험하고 배웠다. 미국은 각각의 주가 마치 독립된 나라처럼, 모두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을 지녔다. 특히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의 나라답게, 규모가 큰 도시일수록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 수요가 상당히 높으며, 예술에 대한 기부도 지역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주로 어떤 방식으로 극장과 일하나? 대부분 에이전시를 통해 극장 오디션을 보고, 시즌마다 새로운 계약을 통해 무대에 선다. 여름 페스티벌 라인업도 에이전시를 통해 결정된다.
극장도 소위 갑과 을이 존재하는 작은 사회인데. 극장 안에서 을의 입장인 가수는 당연히 갑의 입장인 극장장의 의견과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에 가수는 능동적이고 협조적 자세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 부담이 없어야 한다. 모든 비즈니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극장장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 가수들과의 관계, 그리고 연출자·지휘자 등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본인의 음악 실력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을 일명 ‘하녀 담당 가수’라고 소개했다. 모차르트 오페라를 중심으로 ‘코지 판 투테’의 데스피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를 줄곧 해왔고, 그 외에도 ‘박쥐’의 아델,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의 콘스탄테, ‘헨젤과 그레텔’의 그레텔 등 주로 밝고 사랑스러운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면? 2017년 여름 멕시코에서 열린 산 루이스 오페라축제의 슈트라우스 ‘박쥐’. 당시 아델 역을 맡았는데, 노래는 독일어로 대사는 스페인어로 해야 했다. 역할 자체가 말도 빠르고 동시에 재치 있는 연기를 선보여야 해서 완벽한 대사를 위해 뼈아픈 노력을 했다. 아직도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공연을 마치고, 노래를 잘했다는 이야기보다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관객들의 칭찬에 얼마나 기쁘던지.
공연 기획자, 음악감독으로도 활동 중이라고. 이전부터 준비해온 디렉터로서의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 노래 연습과 피아노 연습은 물론이고, 브로드웨이에서 발레·재즈 수업을 매주 들었다.
기획자의 관점에서 한국에 필요한 시스템을 제시해본다면. 현재 전 세계 극장에서 다른 분야와의 협업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 극장에서도 연극·뮤지컬 등 다른 장르의 연출가들이 오페라에 참여해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오페라는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 시간 동안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극이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더욱 독창적이고 심미적인 연출이 필요하다. 한국 정서에 잘 맞는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수에만 집중되어 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개성 있는 연출자·디자이너를 찾아내는 등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선경 소프라노
정선경(Eva Jeong, 1988~)은 영남대 학·석사를 졸업하고, 에센 폴크방 음대에서 오페라 석사를 마쳤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라이나 카바이반스카를 사사하며 사르자나 콩쿠르와 발세지아 콩쿠르에 상위 입상했다. 현재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오페라·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고 있다.

관객이 있는 한 음악은 죽지 않는다. 이탈리아에는 문을 닫는 작은 극장도 있지만, 새롭게 지어지는 큰 규모의 극장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흥망성쇠를 걱정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오페라를 사랑하는 많은 관객이 존재한다. 매일같이 새로운 공연이 탄생하는 이곳에서 정선경의 두 번째 길이 열렸다. 글 이미라

독일 유학까지 마친 후, 잠시 성악을 잊고 살았다고. 나는 독일에서, 남편(테너 류용현)은 이탈리아에서, 각자의 공부 때문에 2년간 떨어져 지냈다. 더 이상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아 독일에서 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이탈리아로 왔다. 오페라를 배우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지만, 가정에 대한 신념과 애정이 더 컸기 때문에, 이곳에 오며 주부이자 아내로서의 삶을 마음먹었다. 이미 많은 연주로 바쁜 남편이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고, 또 더 잘하는 사람을 밀어주자는 생각에 노래를 접었다.
다시 오페라 무대에 오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세계 최고의 ‘토스카’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의 마스터클래스 오디션을 보았다. 라이나 선생님은 매년 불가리아 오페라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남편도 그중 하나였고. 오디션에 합격하여 3주 동안 매일 레슨을 받았다. 잠시 묻어두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된 시간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불가리아 극장에 주역으로 올랐는데. 마스터클래스 2주 차쯤 되었을 때, 극장 캐스팅 매니저가 선생님을 찾아왔다. 마침 내가 노래 부를 순서였고, ‘돈 파스콸레’ 중 노리나의 아리아 ‘기사의 뜨거운 눈길’을 불렀다. 노래를 들은 캐스팅 매니저가 바로 다음 시즌 작품의 주역을 제안했다. 마침 ‘돈 파스콸레’의 여주인공을 찾고 있었던 것. 그렇게 몇 달 뒤 불가리아 극장에서 데뷔했다. 공연 직후 극장장에게 ‘리골레토’ 질다 역을 제안받았고, 이후 ‘돈 조반니’와 ‘세비야의 이발사’에도 올랐다.
오페라 공연에 있어 중요한 점이 있다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언어는 노력하고 부딪히는 만큼 느는 것 같다.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은.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역. 대학에서 여러 번 공연했던 작품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다시 공부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아디나의 성격이 나와 닮아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소속사 없이 활동 중인데.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대부분의 가수는 소속사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일 년에 공연 한번 못하는 가수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사 없이 공연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소속사가 필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 밀라노에 거주하며 체감하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모습이 있을 것 같다. 어려운 현실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공연을 만들어 올리고, 또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는 나라가 이탈리아다. 재정난은 공연뿐 아니라 콩쿠르에도 영향을 미쳤다. 입상해도 상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관객을 통해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동네에서 늦은 밤에 열리는 아주 작은 음악회에도 언제나 관객이 가득 찬다. 물론 현재는 관객 연령대가 매우 높은 편이지만, 어린 나이부터 오페라와 음악회에 대한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 기획에 힘쓰고 있다. 문을 닫는 작은 극장도 있지만, 새롭게 지어지는 큰 극장도 있다. 관객이 있는 한 음악은 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꿈꾸는 나의 모습은. 10년 뒤에는 엄마가 되어있지 않을까.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해나갈 수 있을지 아직 자신은 없지만, 행복한 오페라 가수이자 엄마를 꿈꾼다.

김정훈 테너
김정훈(1988~)은 서울대 재학 중 베르디 콩쿠르 1위에 입상, 이후 비냐스 콩쿠르와 툴루즈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다. 2015~2017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수료한 후 해외 주요 극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2018년 4월, 김정훈은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섰다. 그 뜨거웠던 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무대 위의 그는 ‘맥베스’의 맥더프였다. 로열 오페라의 음악감독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한 그 공연에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베이스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가 함께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 그에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인생에 ‘한방’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김정훈에게도 결정적 한방이 있었다. 때는 2014년. 김정훈은 툴루즈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1위 했다. 콩쿠르가 끝나고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캐스팅 감독인 피터 카토나에게 연락이 왔다. 이후 음악감독인 안토니오 파파노와 미팅이 잡혔고, 로열 오페라 하우스 역사상 최초로 오디션 없이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다. 글 장혜선

결국 김정훈의 ‘한방’은 툴르즈 콩쿠르였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꽤 보수적인 극장인데, 쉽지 않은 기회를 얻었다. 맞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기회가 닿는 대로 해외 콩쿠르에 참여했다.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런던이 좋아서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커리어 시작점으로 정했다.
런던을 토대로 하지만 사실 독일과 스위스, 노르웨이, 칠레 등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 중인데. 극장 소속이 아닌 에이전시 소속으로 매니저와 함께 일하고 있다. 런던에서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현재 매니저가 공연을 보러 왔다. 이후 그의 제안으로 에이전시와 일하게 됐다.
아무래도 에이전시 소속이면 활동 영역이 넓어진다는 장점이 있을 듯하다. 여러 국가를 상대로 나를 어필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전시는 규모와 담당 매니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처음 계약하기 전 여러 정보를 수집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매니저는 실질적으로 어떠한 일을 도와주나? 보통 가수 한 명당 2~3명의 매니저가 붙는다. 메인 매니저는 캐스팅에 관한 일을 해준다. 극장에 나를 어필하고, 오디션을 마련하고, 바로 캐스팅을 잡아오기도 한다. 나머지 어시스턴트는 스케줄 관리와 비자 발급, 세금 관련 일을 도와준다.
현재 한 해에 평균 5~6개 공연에 오르고 있다. 프로덕션을 제외하면 공연 횟수로는 3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한다. 오디션은 보통 1~2년 전에 열린다. 캐스팅 통보는 거의 바로 오는 편이다. 본격적인 리허설은 새로운 프로덕션은 6~8주 정도, 리바이벌 프로덕션은 2~4주 정도 진행된다.
극장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늘 새로운 제작 환경에 적응해야 된다. 어렵진 않은가? 모두와 만나는 리허설 첫날이 가장 중요하다. 리허설 첫날부터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자신감을 갖기 위해 작품의 배경 지식과 음악을 완벽하게 준비한다. 보통 작품 1년 전부터 하루에 두 시간을 할애해 준비하는 편이다.
결국 유럽 활동에서의 역점은 에이전시 계약이겠다. 심지어 일부 가수들은 여러 개의 에이전시와 컨택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경제가 침체됐는데, 오페라계에도 그 영향이 미치나? 이탈리아는 극장의 재정난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북유럽권은 오페라를 향한 국가 지원이 지속되고 있다. 유럽 오페라극장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럽 전체로 특정하기에는 조금 과장됐다고 본다.
해외 오페라는 한 번 프로덕션을 만들면 길게는 30년을 활용한다. 한국 오페라와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은 새롭게 프로덕션을 만들면 3~4번 공연한 후 폐기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재정난이 있을 수밖에.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투란도트’ ‘안드리아 셰니에’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에 서고 싶다. 아직 30대 초반이어서 주로 ‘라 보엠’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하고 있지만, 내 목소리 컬러와 맞는 역할은 전부 30대 후반부터 시작할 수 있기에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훈 테너
김훈(1988~)은 오페라르스 매니지먼트 소속 가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음악 축제, 스위스 제네바 극장 ‘사랑의 묘약’, 라 스칼라 극장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잔니 스키키’, 플라시도 도밍고 라 스칼라 데뷔 50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했다.

우리는 무대 위 화려한 아티스트의 모습을 동경하지만, 그 빛을 내기까지는 큰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김훈은 우리가 흔히 ‘희생’이라 부르는 이 일들을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 위한 ‘절제’라 말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성악가로 살아남기. 겉모습도 말도 다른 이곳에서 그는 무대 위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문화적으로 닮아가려 부단히 노력했고, 무대 위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절제의 삶을 선택했으며, 가수로서의 본업에 집중하기 위해 에이전시에 소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라 스칼라 극장의 주역으로 올랐다. 글 이미라

현재 활동 중인 밀라노를 성악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밀라노는 ‘베르디의 도시’다.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들은 말이 “베르디를 하지 않고서는 성악가라 할 수가 없다”였을 정도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여러 국립음악원이 존재하며, 콩쿠르가 이탈리아 북부에 밀집해 있어, 전 세계의 젊은 성악가들에게 오페라 무대의 등용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한국 성악가들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동양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을텐데. 오페라 리허설 때였다. 연출자와 가수가 처음 만나서 작업을 하는 날이었는데, 내가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이 레치타티보 부분에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다른 이탈리아 가수로 바꿀 수밖에 없어”라고 하더라. 아직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는데, 너무 당황스럽고 분한 마음이 들어 수백, 수천 번을 읽어 완벽하게 보여주자며 이를 갈았다. 한계라면 아무래도 비주얼적인 괴리감이 아닐까. 서양 노래를 하는 동양인으로서 다른 동료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서 있을 때 아직도 많이 어색하다. 그래서 수염도 길러 보고, 그들이 쓰는 제스처와 표정도 따라 해보고 있다.
이러한 편견을 이겨내는 건 결국 실력일 테다. 내가 생각하는 오페라 가수의 조건은 ‘절제력’이다.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시간과 식사량을 조절하고, 금주는 물론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맵거나 짠 음식·탄산·커피·초콜릿 등을 먹지 않는다. 이러한 절제는 음악에도 적용된다. 처음부터 과하게 하다 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져 좋은 컨디션으로 오페라를 마치지 못한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이러한 ‘절제력’ 없이 좋은 가수가 되기 힘들다.
결국 치열한 노력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 올랐는데. 영상 심사를 통과하고 오디션을 보는 날까지 약 한 달 간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 문을 붙잡고 기도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하늘도 함께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라 스칼라 극장의 특징은. 오페라 본고장으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오페라의 시대적 고증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다. 실제로 관객들도 고증에 맞지 않게 변형된 연출과 표현에 대해 거침없이 혹평을 날린다.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면. 2년 반 동안 6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그중 어린이 오페라로 선보인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역. 내 연기를 보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새로운 제작 환경에 적응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관계자들의 정보를 먼저 충분히 익힌다. 연출가와 지휘자의 스타일은 어떤지, 어떤 작품을 했는지 미리 알아두고 만나면 왠지 그들과 이미 친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아 함께 작업하는 공간이 어색하지 않다.
지금 소속된 에이전시와는 어떻게 만났나. 나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에이전시와 인연을 맺었지만, 이 외에도 방법은 다양하다. 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 공연 때마다 에이전시 매니저들과 대표가 방문해 각자의 필요와 기호에 맞는 성악가와 오디션을 치른다. 중·대형 콩쿠르를 통해 에이전시와 만나기도 한다.
앞으로 꿈꾸는 자신의 모습은. 한국과 유럽을 오가는 오페라 가수. ‘배워서 남 주자’라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내가 공부한 것을 무대 안팎에서 나누고 싶다.

도영기 테너
도영기(1988~)는 부산대를 거쳐 뤼벡 음대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교회 음악의 대가인 지휘자 톤 쿠프만과 협연하기도 했다. 슈만 ‘시인의 사랑’, 슈베르트 ‘백조의 노래’ 등 가곡에도 뛰어나 여러 차례 독창회를 가졌다. 현재 독일 카셀 극장 소속 가수로 활약 중이다.

이제는 추억이 된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 다양한 끼를 가진 일반인이 출연해 재능을 뽐내는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장으로 역할 했다. 도영기가 처음으로 전 국민에게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것도 이곳에서였다. 10년 전 ‘의경 독수리 5형제’라는 이름의 풋풋한 성악도로 등장했던 그는 독일 중부의 예술 도시 카셀에서 활약하는 성악가로 거듭났다. 글 박찬미

어느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가. 독일 헤센 주의 한 도시 카셀이 주 무대다. 카셀은 세계적인 명성의 현대미술 전시 축제인 도큐멘타(Documenta)를 5년 마다 개최하고 있는 도시다.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카셀 극장은 주기적으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올리고, 현대 오페라도 자주 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악가로서 노래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묻는다면, 여지없이 2016년 카셀 극장에 데뷔하며 노래한 칼 오르프의 ‘달’이라고 답할 것이다.
극장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극장에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에 바로 도전했다. 오디션 이후 예술감독으로부터 작품 제안을 받았다.
에이전시에도 속해 있는가? 오페라 성악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에이전시인 비란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WAM Berlin)에 소속되어 있다. 지휘자 지중배도 한 식구다.
많은 성악가들이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언급하던데. 직접 여러 극장의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극장이 전체 공개 오디션을 개최하는 것도 드물다.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으면 오디션과 역할 모집 공고 등을 빠르게 수집할 수 있다. 나도 혜택을 많이 얻었다. 에이전시를 통해서 나를 다른 유럽 국가에 알릴 수 있는 오디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더 다양한 나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이 생기는 것이다.
타지에서 활동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모국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영어로 노래해야 한다는 것. 드문 경우이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새로운 언어를 익혀서 무대에 서야하는 경우도 생긴다. 여전히 연습 일정이 없을 땐, 언어 공부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다.
한 해에 4~5개의 작품을 올린다고. 일반적으로 그렇다. 극장에서 첫 시즌을 맞이했을 땐 한 동료가 갑작스럽게 병가를 내서 추가적으로 작품을 소화하기도 했다.
유럽의 극장과 소속 가수의 관계는 어떠한가. 가수의 능력과 캐릭터에 따라 역할을 맡게 된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자신만의 색깔을 뚜렷이 한다면 가수도 얼마든지 극장에게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극장장이 바뀌는 등의 큰 변화가 생긴다면 당장 자리를 잃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내게 더욱 적합한 극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의 오페라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훌륭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동료들도 놀라워할 정도다. 더 열린 사고방식으로 국제적인 교류를 추진한다면 세계적인 오페라 시스템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외 젊은 성악가들의 기회가 위축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오히려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콩쿠르가 개최되고 있고, 극장에서도 오펀스튜디오를 통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불러 모으고 한다. 많은 한국의 성악가가 이 기회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훌륭한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근거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용기와 끈기.

선태준 테너
선태준(1988~)은 서울예고·서울대를 거쳐 쾰른음대 석사 및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2014년 쾰른 오퍼 영 아티스트로 선발되어 ‘라 체네렌톨라’ ‘돈 조반니’ 에 출연했다. 독일·스위스·한국 등에 다수의 오페라에 올랐다. 현재 바이마르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된다. 나를 제대로 아는 것. 수많은 선택이 놓인 삶을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테다. 수많은 오페라 작품과 배역 앞에 선 오페라 가수에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감 있게 무대에 오르고, 극장과 동등한 입장에 서서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 선태준의 자신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얻은 자신감과 겸손함으로 무대에 나서고 있다. 글 이미라

독일 내 몇몇 오페라극장에서 극장장 교체 소식이 들렸다. 극장장이 바뀌면 솔리스트도 자연스레 교체된다고 하던데. 축구팀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한 축구팀의 감독이 바뀌면 팀의 전술과 스타일에 변화를 줄 것이고, 그에 가장 알맞은 선수를 데려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장장이 바뀌면 그가 선호하는 캐릭터와 목소리가 있을 테니 가수가 교체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맡은 배역에 성실하게 임하다 보면, 존중과 박수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결국 잘 보여야 하는 건 극장장이 아닌 ‘관객’이다.
극장과의 이상적인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배역이 본인에게 맞을지 극장과 논의 할 수 있다.
어떤 배역이 잘 어울리는가. 쾰른 오퍼에서 영 아티스트로 활동할 당시 로시니 ‘라 체네렌톨라’와 모차르트 ‘돈 조반니’ 등 내게 어울리는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시즌에 예정된 스트라빈스키 ‘난봉꾼의 행각’의 톰 레이크웰 역과 ‘잔니 스키키’의 리누치오 역도 기대되지만,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을 꼭 해보고 싶다.
2018년 바이마르 극장 솔리스트로 발탁됐다. 우연한 기회를 실력으로 잡았는데. 2019년 2월, 오페라 ‘돈 조반니’ 돈 오타비오 역에 캐스팅되었던 가수의 공연 취소로, 출연 제안을 받았다. 공연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 빠듯했지만, 귀중한 기회였기에 열심히 준비했다. 첫 공연 이후 극장 디렉터가 솔리스트를 제안했고, 그해 8월부터 바이마르 극장에서 일하게 됐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극장이 아닌가.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이 초연되고, 리스트·슈트라우스 등 수많은 작곡가가 활동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과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주로 어떤 역할을 맡아왔나? 2019/20 시즌에는 돈 오타비오·호프만·페란도·율리시스 등 로맨틱테너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쾰른 극장에서 맡았던 로돌포 역과 바이마르 극장에서 맡았던 호프만 역을 가장 좋아한다.
한 해에 오르는 작품 수는. 5~7개 작품을 준비하고, 총 30~35회 정도 공연한다. 보통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 다음 시즌의 작품과 배역을 통보받고, 오페라를 올리기 두 달 전부터 음악 코칭 연습에 들어간다. 연출 리허설은 초연작은 5주 전부터, 재연이라면 1~2주 정도 준비해 공연한다.
많은 무대만큼, 늘 새로운 만남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을 하나의 악기라 생각하며 연출자와 지휘자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그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며, 또 내가 그들에게 좋은 가수로 인정받는 방법이다.
좋은 가수의 조건은 무엇일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 평범하고도 어려운 일을 꾸준히 해낸다면 그에 따른 주변의 평가가 자연스레 그 사람의 위치를 만들어줄 것이다.
10년 뒤 나의 모습은.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테너, 자상하고 따뜻한 선생님, 화목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빠가 되는 것.

유명헌 베이스
유명헌(1988~)은 경희대 성악과 졸업 후, 바이마르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2016~2018년까지 독일 킬 극장에서 객원 솔리스트로 일했고, 2018년부터 에르푸르트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독일의 중부 지방인 에르푸르트. 20만 인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종교 개혁 중심에 선 마틴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수학했고,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선 사제 서품을 받은, 한마디로 루터의 ‘정신적 고향’이다. 매해 11월에는 루터를 위한 추모 행사도 열린다. 이외에도 다채로운 연중 행사는 에르푸르트의 자랑이다. 봄에는 튀링겐 바흐 음악 주간이 열려서 교회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여름에는 대성당 70개의 계단에서 야외 축제가 펼쳐진다. 2017년부터 유명헌은 에르푸르트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글 장혜선

에르푸르트 극장에는 어떻게 발탁됐나? 2018년 초 바이마르 음대에서 석사를 마칠 즈음이었다. 다른 극장의 오펀스튜디오에 합격한 상태여서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도 교수님이 갑자기 에르푸르트 극장 오디션 제안이 들어왔다고 보러 가라고 했다. 오디션 당일이 마침 생일이었다. 무대 감독에게 축하 인사를 받고 오디션에 들어갔다. 다음날 메일로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계약서가 와있더라. 나중에 알아보니 극장 관계자가 한 콩쿠르에서 날 눈 여겨 봤다고 하더라.
에르푸르트는 멋진 도시이다! 매해 다채로운 페스티벌이 열리고, 주요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개혁의 중심지이지 않은가. 한국으로 치면 대전 정도의 위치다. 독일 중부에 있어서 베를린이나 뮌헨 등 주요 도시로 이동이 쉽다. 튀링겐 주에서는 가장 부유한 지역이고, 우리 극장은 주립 극장이다. 특히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성당에서 매년 여름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정말 아름답다.
극장에선 주로 무슨 역을 맡나? 주역과 조역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가장 도전이 됐던 건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 역이었다. 최근에는 카프카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필립 글래스의 ‘유형지에서’라는 카머 오페라 작품을 했는데, 음악적으로 역량이 크게 발전한 계기였다.
독일은 극장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데뷔 4년차인 햇병아리여서 아직 독일 오페라극장을 완벽히 체감하긴 어렵다. 유연하게 극장 분위기에 맞추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극장의 요구에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존중받는지를 살펴야 한다.
원래는 대학을 관두고 연극을 하려고 했다고. 대학 때 공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연극을 하려고 했는데, 친한 형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래를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오페라에 관심이 생겼다. 이후 오페라 가수로 결심을 굳혔다.
독일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 군대에 있을 때 동기 중 라이프치히 유학생이 있었다. 그때 독일어를 배웠다. 사무엘 윤이 바이로이트에서 주역을 맡으며 한국에서 유명세를 탈 때였다. 그래서 독일에 더 관심이 갔다.
체격이 좋은 편이다. 오페라 가수로서는 큰 장점이겠다. 키가 184cm여서 동양인 치고는 큰 편이다. 그래도 가끔 체격의 한계를 느낀다.
바이마르 음대에서 학업을 병행 중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나? 7월에 졸업 예정이다. 쉬는 날에는 보통 학교를 가거나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낸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로엔그린’의 하인리히, ‘나부코’의 자카리아, ‘루치아’의 라이몬도,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 힘든 역할을 해낼 때 성취감이 좋다.
오페라 가수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건? 건강한 신체, 좋은 눈과 귀, 빠른 언어 습득과 순발력!

이수연 소프라노
이수연(1988~)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빈 음대 오페라 석사와 리트 오라토리오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독일 ARD 콩쿠르 2위 및 청중상(2015)·오페랄리아 콩쿠르 문화예술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독일 올덴부르크 극립극장 소속이며, 오는 8월부터 도르트문트 극장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20대 초반, 슈만의 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부르며 미래를 상상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다시 이 곡을 부른다면, 그땐 어떤 감정이 나올까? 이수연은 그렇게 다시 자신의 10년 후를 그려본다. 그곳이 어디든 노래하고 있을 것이며, 더욱 성숙한 성악가가 되어있으리라 기대하며. 글 이미라

첫 해외 생활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했다. 스무 살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여행을 갔다. 도시 전체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재밌게 봐서인지 마치 그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대학 졸업 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2015년, 뮌헨 ARD 콩쿠르가 성악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조금 더 넓은 오페라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방송국에서 개최하는 콩쿠르라 현장은 물론 방송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에게 나를 알릴 수 있었다.
현재 활동 중인 올덴부르크 극장에 오게 된 것도 콩쿠르의 역할이 컸다. ARD 콩쿠르에 입상했을 당시 올덴부르크 극장의 캐스팅 디렉터에게 메시지가 왔다. 올덴부르크는 내게 낯선 도시였고, 대도시에 살고 싶었던 터라 큰 기대 없이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극장 분위기도 좋았고, 내게 제안하는 역할들도 평소에 꿈꿔오던 것들이었다. 당시 여러 극장을 두고 고민한 끝에 이곳에서 첫 솔리스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올덴부르크 극장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한 시즌에 보통 6~7개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나는 그중 3~4개 작품에 출연한다.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와 언어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최근 4년 동안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차례로 선보였다. 연간 회원이 많고, 네덜란드와도 가까워서 네덜란드에서도 많이 찾아온다. 극장 자체가 도시의 랜드마크여서 지역 주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극장에서의 역할은? 4년 동안 활동하며 주로 리릭 콜로라투라의 역할을 맡았다. ‘연대의 아가씨’의 마리 역으로 데뷔한 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의 콘스탄체, ‘리골레토’의 질다, ‘몽유병의 여인’의 아미나, 그리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 등을 맡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무엇인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 역. 작품을 이끌어가는 역할인 만큼 극의 중심에 내가 있는 듯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R.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의 소피와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의 체르비네타 역.
이제 곧 도르트문트 극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극장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극장이 가수의 가치를 얼마나 알아주고 존중하느냐가 중요하다. 극장의 요구가 내 목소리에 무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성실히 임하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무리한 요구라면 과감히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동료와의 관계도 중요할 것 같은데. 리허설 전에 함께할 동료들의 간략한 이력 정도는 찾아보고 간다. 최근에 어떤 작품을 했고, 주 무대는 어딘지. 첫 대화에 도움이 된다. 리허설 과정에서는 상대방의 의견도 잘 듣지만, 그와 함께 내 의견도 능동적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더불어 좋은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 5분짜리 아리아를 잘 부르는 성악가들은 매우 많지만, 오페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본인의 기량을 다 펼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긴 공연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이 필수다.

김한결 바리톤
김한결(Leon Kim, 1987~)은 한양대에서 고성현을 사사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루이지케루비니 음악원에서 공부를 이어간 그는 오페랄리아 콩쿠르 3위 및 특별 청중상(2017)을 비롯해 여러 콩쿠르에 상위 입상했다. 스테이지 도어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돌아보면,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김한결의 고백이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길에 놓였던 중요한 만남과 사건들은 모두 신이 예비한 것이었다고. 그래서 지금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은 그의 신앙적 고백이자 찬양이다. 성악을 전공한 아버지를 만난 것도, 한때 태권도 선수를 꿈꾸며 체력을 다진 것도, 좋은 스승을 만나 오페라 가수가 된 것도, 배우자와 아이를 만난 것도, 그리고 지금 소프라노 조수미가 소속된 에이전시를 만나 무대에 오르는 것도. 이 모든 것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겸손한 고백이다. 글 이미라

어릴 적 꿈은 태권도 선수였다. 유치원 때부터 운동에 빠져 태권도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혈소판 부족으로 출혈이 쉽게 발생하고, 또 피가 잘 멈추지 않는 병에 걸리며 포기해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부터 아버지께 노래를 배워 대학에 들어갔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때 병이 저절로 완치됐다.
어린 시절 운동했던 것이 지금 활동에도 좋은 바탕이 되었다고. 오페라 준비 기간에는 극장에서 매일매일 많게는 8시간씩 한 달간 연습한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작품 스케줄이 맞물리면,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 작품에 투입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연속 세 작품을 한 적도 있다. 노래하기 훨씬 전부터 운동을 했기에, 몸이 잘 준비된 것 같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게 된 계기는. 사실 오페라에는 큰 흥미가 없었는데, 대학에서 고성현 교수님을 만나며 달라졌다. 교수님의 노래에 반해 매일 듣고 흉내 냈다. 그렇게 열심히 연구했던 모든 순간이 내가 성악가로 성장하는 데 근본이 된 것 같다.
이탈리아로 나온 지 1년 만에 세계 최고 에이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스테이지 도어’에 캐스팅됐다. 2015년에 피렌체로 유학 온 후, 피아니스트이자 오페라 코치인 안나 토카폰디와 자주 공부했다. 가끔은 집으로 찾아가서 레슨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의 남편이 내가 노래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다. 알고 보니 그분이 소프라노 조수미의 에이전시 매니저였다. 내게 큰 관심을 보이며 여러 콩쿠르를 권해줬고, 그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스테이지 도어와 계약을 맺었다.
2016년부터 5년째 함께하고 있는데. 에이전시와 만나기 위해선 먼저 나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가장 쉽고 좋은 경로가 콩쿠르이고. 콩쿠르 결선 무대는 대부분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극장장과 지휘자, 에이전시에서 많이 참관한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콩쿠르가 가장 유리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에이전시 입장에서는 그들이 직접 발견한 가수에게 더 흥미를 느낄 테니까.
소속 에이전시의 장점이라면. 한 해에 6개 작품을 하고 있는데, 에이전시가 워낙 명성이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거의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에이전시 이름이 어느 정도 가수의 실력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미 공연했던 극장의 경우도 오디션이 필요 없다.
언어적 한계에 부딪힌 적은 없는지. 초반에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연습에 차질이 생긴 적도 있고, 쉬는 시간에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혼자 멀리 숨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는 일!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부딪히다 보니 언어도 늘고, 자신감도 붙으며 편하게 작품에 임할 수 있었다.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베르디 오페라라면 다 좋다.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백작 역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올겨울에 하게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공부 중이다.

서경한 테너
테너 서경한(1987~)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공부했다. 석사 졸업 후 노르트하우젠 극장의 소속 가수로 발탁돼 활동 중이다.

독일 중부의 노르트하우젠은 공업 도시로 알려져 있다. 철도의 교차점이며, 맥주나 담배, 목재 등 제조업이 활발한 도시. 인구가 약 4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이지만, 마을에는 음악이 도처에 가득하다. 근교 광산 동굴에서는 매해 광산 음악회가 열리고, 마을 중심에는 17세기에 설립된 노르트하우젠 극장이 있다. 테너 서경한은 노르트하우젠 극장에서 3년간 소속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매 시즌 네 개의 작품을 올리는 이 극장에는 늘 관객이 붐빈다. 서경한은 예술을 향한 독일인의 열정에 늘 두근거린다고 한다. 글 장혜선


예술의 도시 베를린에서 공부를 했는데, 노르트하우젠이 좀 답답하진 않은가? 독일에 살며 느낀 점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도 문화 활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노르트하우젠 극장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한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관현악·연극·무용·뮤지컬 등 여러 장르의 공연을 올린다.
작은 도시의 극장이어서 재정난이 있을지 궁금하다. 독일 오페라 시장은 견고하다.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면 문화생활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경제가 건강하고, 대부분의 극장이 표 값이 아닌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후배 가수들에게도 독일을 추천하고 싶다.
노르트하우젠 극장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기획하는지? 주민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생성한다. 주변 도시에서도 버스를 대절해 공연 보러 오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긴다. 그 모습을 보면 나까지 행복해진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을 택한 이유는? 나도 여느 성악도처럼 이탈리아와 독일, 미국 중 고민이 많았다. 기도를 하다가 독일로 마음이 잡혔다.
노르트하우젠으로 발걸음을 하게 된 계기는? 2017년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여러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노르트하우젠 극장장에게 전화가 와서 오디션을 제안받았다. 다음날 바로 극장으로 가서 오디션을 본 후 솔리스트로 발탁됐다.
졸업 후 바로 직장이 생겨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마음이 불안했을 것 같은데. 고정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으니 프리랜서보다는 안정적이다.
테너는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많다. 내년에는 ‘사랑의 묘약’ 네모리노 역을 맡는다고. 현재 극장에서 대부분 테너 주역을 맡고 있다. 여러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다양한 배역을 맛보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지금 극장에서 더욱 다양한 배역을 경험하고 싶다.
해보고 싶은 역할은? ‘라 보엠’의 로돌포, ‘잔니 스키키’의 리누치오, ‘예브게니 오네긴’의 렌스키, ‘진주조개잡이’의 나디르.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2018년 존더스하우젠 극장에서 선보인 ‘라 트라비아타’ 중 알프레도 역! 첫 테너 주역이었다. 그리고 베르디 음악은 언제나 심장을 울린다.
매 작품마다 배역 오디션을 진행하는가? 우리 극장은 공연을 올리기 1년 전에 배역 오디션을 치른다. 극장에서 마음에 드는 가수가 나올 때까지 오디션을 연다.
오디션을 진행할 때 극장과의 마찰은 없는 편인가? 성악가 개개인의 장점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역이 있을 테다. 극장과 역할을 잘 조율하는 것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잘하는 걸 극장에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배역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마찰이 생길 수 있는데. 현재 나는 하얀 도화지라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극장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내가 해석한 부분을 굳이 주장하진 않는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연습과 공연 외에는 어떠한 일과를 보내는가? 공연을 위한 체력 관리.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 종종 주변 도시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국내 무대에 대한 열망은 없는지? 기회가 된다면 국내 오페라 무대에 서고 싶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스승님들에게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다.

김수연 소프라노
김수연(1987)은 서울대 재학 중 도미하여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학사를, 인디애나 음대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뉴욕 링컨 센터에서의 리사이틀 데뷔 공연을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 빈 무지크페라인, 프라하 스메타나홀, 베를린 필하모니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기회는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잠재적 기회까지 포착해내는 이에게 비로소 ‘운’이라는 것도 따르는 법이다. 김수연은 기회를 보는 밝은 눈을 가졌다. 우연한 연결고리로 기회를 잡았다면, 그 기회로부터 최대의 결실을 거두어내기 위해 대단한 추진력을 발휘한다. 전 세계의 공연계가 침체되어 있는 지금도, 그녀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 멀리 시선을 던진다. 글 박찬미

2014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스프링 갈라콘서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나의 공연을 인상 깊게 본 에이전시에서 제안을 해왔다. 3개월 뒤 있을 큰 페스티벌의 오프닝 콘서트에 대신 들어갈 소프라노를 급하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큰 페스티벌’이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음악 페스티벌이었던 것인가. 맞다. 그 에이전시는 다름 아닌 세계적인 스타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곳이었고, 그들이 말한 ‘오프닝 콘서트’는 카우프만과의 단독 무대였다.
당시 유럽 무대에서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이었는데. 그야말로 ‘새내기 소프라노’였다. 하지만 더 많은 아리아를 노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에이전시에 강하게 어필하고 나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날의 공연은 또 다른 무대를 잇는 가교가 됐다.
요나스 카우프만과의 만남은 어땠는지. 발성부터 음악적인 부분까지 자상하게 조언해주고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년 전,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까진,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빈이라는 도시의 지리적 위치가 주는 혜택이 있다. 우선, 무지크페라인·빈 슈타츠오퍼·빈 폭스오퍼 등이 위치한 곳으로, 공연의 역사가 아주 풍부하다. 밀라노나 베를린, 프라하 등 다른 유럽 주요 국가와도 근접해 있어 음악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도시다. 실제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테너 라몬 바르가스가 거주지로 삼고 있다.
뉴욕에 자리를 잡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연히 내가 속한 에이전시도 비슷한 시기 미국에 지사를 냈다. 덕분에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더 폭넓은 기회를 얻고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 공연계가 위축되어 있는데. 함께 일하고 있는 에이전시들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새로운 미디어 콘텐츠를 개발하고 상용화해 클래식 음악가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최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온라인 갈라콘서트를 열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클래식 음악 공연의 새 지평이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라도, 오페라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지난 2012년 미국의 뉴욕 시티 오페라가 수년간 누적된 재정난에 시달리다 결국 문을 닫았다. 유럽에서도 지역 극장 합병 소식 등이 들려오곤 한다. 그런데 아시아 오페라계, 특히 중국의 오페라 성장세가 대단하다. 2년 전, 지휘자 탕무하이와 톈진 오페라극장의 ‘팔리아치’에 출연하면서 중국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라는 걸 체감했다. 현지 관계자가 중국 내 33개 성(주)의 300여 개 도시에서 각각 오페라 홀 혹은 대형 공연장들을 세운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한국 성악가들이 중국 오페라 시장에 기대를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하는 배역은. ‘나비부인’의 초초상. 홀로 오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 역할이라 어깨가 무겁고 때론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나비부인의 오르내리는 감정곡선을 타고 극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의 쾌감은 가장 짜릿하다.

김동호 베이스
김동호(1987~)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 석사를 취득하고,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을 비롯해 트리에스테·칼리아리·베로나 극장 등 유럽 전역에서 오페라·오라토리오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 스테이지 도어 소속 가수다.

 

“잘하는 사람이 끝까지 남는 게 아니라 끝까지 남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다”는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대구의 한 공업고등학교에서 시작된 김동호의 꿈은 이제 이탈리아의 중심에서 피어나고 있다.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타협하지 않고, 알맞은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 얼마나 빠르냐보다는 어느 곳으로 향하느냐에 그의 시선은 맞춰져 있다. 글 이미라


2020년 시작부터 가슴 뛰는 일이 있었다고. 올해 1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도니체티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돈 알폰소를 노래했다.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라 생각한 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공연 후 커튼콜에서 처음으로 테너·소프라노 주인공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 늦은 시기에 음악과 만났다. 어떻게 성악의 길에 들어섰나. 고교 시절, 당시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했다. 선생님의 목표는 내가 사범대를 나와 음악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 길이 성악가의 길로 바뀌었다. 선생님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인연이다. 성악을 알지 못했던 그 시절부터 늘 한결같이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은 길로 이끌어주셨다. 콩쿠르에서 떨어지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항상 “서른두 살, 그때 꽃이 필 거다”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정말로 정확히 32세에 데뷔했다.
한국에서 독일로, 그리고 이탈리아로 왔는데. 가장 좋아했던 대학 선배가 라 스칼라 아카데미에 발탁되어 이탈리아로 떠나며 그때부터 나도 이탈리아 유학을 꿈꿨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 할 시기가 되니 모두 독일 유학을 추천하더라. 그렇게 베를린으로 떠나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우연히 라 스칼라 아카데미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결국 꿈꾸던 곳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해외로 나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어려운 점은 없었나. 늘 ‘언어’에 대한 선입견이 따르는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언어로 된 오페라에 동양인이 오를 때,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번은 전 출연진이 모여 지휘자와 첫 연습을 할 때였다. 스페인 출신의 지휘자가 내 노래의 첫 소절을 듣자마자 발음을 지적하더라. 출연진 중 유일한 이탈리아인이었던 성악가가 내 딕션이 완벽하다고 이야기하고 난 후에야 지적을 멈췄다. 유럽인이라면 자연스레 넘어갈 일도 동양인에게는 늘 문제 삼는다. 그래서 성악가들 사이에선 “동양인은 유럽인보다 최소 3배는 노래를 잘해야 함께 노래 할 수 있다”는 말이 유명하다.
이런 선입견이 첫 만남에서 긴장감을 불러올 것 같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을 갖는다. 이제는 캐스팅 중 한 명 이상이 이미 같이 공연했던 동료여서 적응하기도 어렵지 않다.
배역에 대한 캐스팅은 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주역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베테랑 가수들을 섭외한다. 그리고 평소 에이전시 오디션을 통해 눈여겨봤던 가수들에게 세컨드 캐스팅이나 단역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서 신인 가수가 단역을 잘 소화해 눈에 띄면, 그다음 시즌에서 다시 캐스팅될 확률이 높아진다.
캐스팅에 있어 에이전시의 역할이 크다던데. 대체로 에이전시를 통해 필요한 성악가와 연출자, 지휘자를 섭외하기 때문에 좋은 에이전시에 소속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때로는 극장 측에서 에이전시에 대한 신뢰도만으로 가수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콩쿠르를 제외하곤 사실상 에이전시 없이 공연 기회를 얻기는 힘들다.
여러 무대에 올랐지만, 또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악마 역을 할 때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구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꼭 해보고 싶다. 베이스가 주인공인 몇 안 되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한국에서도 이뤄졌으면 하는 시스템이 있는지. 학생 할인이나 당일 현장 판매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오페라를 관람 할 수 있는 것. 이런 티켓 판매 시스템이 한국에도 적용되면 좋겠다.

강원용 베이스바리톤
강원용(1987~)은 연세대에서 김관동을 사사하고,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를,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석사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뉘른베르크 극장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겸손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 사람, 과장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의 성과는 주변의 덕으로 돌리고, 섣불리 아는 체하지도 않는다. 진심만 꾹꾹 눌러 적은 답변에 인터뷰지를 읽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강원용이라는 ‘가수’, 아니 이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겸손은 미덕이 맞다. 그리고 그 겸손이 예술과 예술가를 키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글 박서정


뉘른베르크 극장에서 맞는 다섯 번째 시즌이다. 맞다. 그동안 오펀스튜디오 신분에서 극장 소속이 되었고, 극장장도 한차례 바뀌었다.
새로 온 극장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극장장이 바뀌면 솔리스트가 대거 교체되지만, 극장에 꾸준히 방문하면서 계속 쓸 가수를 찾기도 한다. 반복되는 공연에 익숙해지지 않고,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장의 분위기도 바뀌었나? ‘2019 올해의 지휘자상’을 받은 조아나 말비츠가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있다. 덩달아 언론의 관심도 뜨겁다.
예컨대 어떤 시도인가? 음악적 범위가 넓어졌다.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언어도 독일·이탈리아·프랑스·체코·러시아·영어 등 다양한 오페라를 노래했다. 세상엔 정말 많은 오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도.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꽤 오랜 준비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새로운 프로덕션의 경우, 보통 6주의 시간이 주어진다. 미리 공부할 수 있도록 녹화된 비디오를 주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언어 지도를 받는다. 가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발음은 괜찮을지, 노래를 잘할 수 있을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연출가들이 있다. 당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관객이 보는 것은 무대 위의 모습뿐이다. 가수는 무대에서 좋은 노래와 연기로 승부하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성실함이 요구된다. 늘 객석에서 관객의 눈으로 보고 조언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아내가 있어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아내와 음악적인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편인가? 음악적·발성적·연기적 고민도 아내와 함께 나눈다. 타고나길 생각이 너무 많은 성격이다. 아내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유학을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 같다.
유학지는 어떻게 결정하게 됐나. 연세대에서 사사한 김관동 선생님께서 베를린에서 공부하셨다. 선생님께 배우면서 독일이란 나라가 궁금해졌다. 또 학부 시절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 하노버 극장에서 6주간 레슨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공연도 보고, 연출가와 작업도 했다. 독일 행을 결정짓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재정난으로 유럽 오페라계가 어려운 가운데, 독일은 비교적 안정적인 것 같다. 극장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래의 오페라 팬을 다지기 위해 매 시즌 어린이 오페라를 활발하게 올린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콘서트도 마찬가지다.
젊은 성악가로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는가. 오히려 젊은 가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9/20 시즌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돈 알폰소 역으로 더블 캐스팅됐다. 당시 나는 31세였고, 같은 역의 동료는 경험이 풍부한 가수였다. 당연히 그가 첫 공연을 할 줄 알았는데, 연출가이자 극장장 젠스 다니엘 헤어초크가 나를 지목했다. 언론의 관심이 주목되는 첫 순서라 긴장했지만 이후 여러 신문에 호평 기사가 실려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연출가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같다. 대략적인 작품의 컨셉만 설명한 후, “그냥 한번 해보자, 네가 하는 걸 먼저 보겠다” 하기도 한다. 때문에 대본을 볼 때부터 캐릭터 분석을 중요하게 고민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은. 내 나이와 소리에 맞는 작품과 역할을 차근차근 해나가고 싶다. 맡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고민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즐겁다.

박재은 소프라노
박재은(1987~)은 이화여대 학사, 베를린예술대 가곡·오라토리오 석사와 오페라 석사, 프라이부르크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ARD 콩쿠르 베렌라이터 특별상(2015)등을 수상했다. 프라이부르크 극장 오페라스튜디오를 거쳐 현재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삶의 가치관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 살아가는 자세가 곧 존재 자체를 만들어가고,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고 마음속에 들어있다. 박재은의 삶은 끈기와 도전, 긍정적인 마음이 감싸고 있다. 스스로 틀을 만들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긍정적인 마음과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끈기가 더 많은 기회를 만들고 있다. 글 이미라


끝없는 오디션의 반복, 성악가의 숙명인 것 같다. 그래서 끈기가 필요하다. 지금껏 이 길을 걸어오며 쉽지 않은 현실에 좌절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시 도전했을 때 얻어낸 결과물들이 많았다. 좋은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 성악가의 세계는 끝없는 오디션의 반복이니까.
해외 활동에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는가? 이미 독일 어느 극장을 가도 동양인이 포화 상태인지라, 웬만하면 더 이상 동양인을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동양인이라 차별한다’라는 식의 사고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실제로도 독일인이나 다른 동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동양이라서 받았다고 생각한 불이익을 그들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가곡과 오라토리오보다 오페라에 더 매력을 느낀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 유학을 나왔을 때만 해도 오페라 가수보다는 가곡이나 오라토리오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베를린예술대학에서 라이만 오페라 ‘멜리진’의 주역을 맡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오페라의 매력에 빠졌다. 정말 어렵고 분량도 많은 현대 오페라였는데, 노래하면서 이처럼 마음이 꽉 찼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이후로 더 큰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프라이부르크 극장과는 오펀스튜디오로 첫 인연을 맺었다. 여러 오디션에서 쓴잔을 마시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오디션이었다. 2차에서 ‘라 보엠’ 중 미미의 아리아를 부르는데, 수백 번 불렀던 노래 가사를 초반에 잊어버려 입을 틀어막고 멈추는 실수를 했다. 너무 큰 실수라 합격을 기대하지 못했는데, 극장의 파르비스 볼롱 음악감독님이 기회를 주셨다.
지금은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데. 오펀스튜디오 1기생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던 중, 2017/18 시즌에 ‘라 보엠’의 미미 역할 커버를 맡게 됐다. 연출자로 모교인 베를린예술대학의 프랑크 힐브리치 교수님이 오면서, 연습 때 직접 노래해 볼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다. 모든 공연이 연일 매진되면서 추가 공연이 생겼고, 당시 주역을 맡았던 가수가 스케줄을 소화할 수 없게 되며 내게 기회가 왔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기 직전, 극적으로 솔리스트 계약을 하게 됐다.
계약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솔리스트는 1~2년 단위로 재계약을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극장의 방향과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요구, 특히 나와 맞지 않는 캐스팅에 대해서는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독일 오페라는 새로운 시도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다양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할 것 같은데. 연출가마다 개성이 강해서 처음 연습에 들어갈 때마다 성향을 파악하느라 무척 애를 먹는다. 특히 실험적인 연출이나 가존의 내용을 비틀어 생각하는 연출가들이 많은데, 웬만해서는 그 의도에 맞춰 다 시도해 보려고 노력한다. 일단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난 후 대화로 맞춰나가는 식이다. 질문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편이다. 꽤 수평적인 구조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오히려 질문을 반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에 올랐나? 리릭 소프라노 역할을 맡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라 보엠’의 미미, 오펜바흐 ‘호프만 이야기’의 안토니아,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 베르디 ‘팔스타프’의 알리체 등을 연기했다. 이번 시즌 마지막 작품으로 ‘나비부인’의 초초상을 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게 됐다.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이장원 바리톤
이장원(1987~)은 세종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하노버 음대에서 오페라 석사와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오사카 콩쿠르(2012)와 이탈리아 파도바의 아이리스 아다미 코라데티 콩쿠르(2018)에서 우승했다. 현재 독일 올덴부르크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류스타를 꿈꾸던 소년은 현재 왕국이었던 독일 올덴부르크에 위치한 극장의 소속 가수가 됐다. 이장원의 발걸음을 아이돌에서 오페라 가수로, 잭슨 파이브에서 바그너로 이끈 것은 그날 밤의 오페라 티켓이었다. 글 박서정

오페라 가수가 된 사연이 극적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19세까지 연예기획사 연습생으로 지냈다. 자유로운 흑인음악에 정말 푹 빠졌었다. 그런 내게 당시 노래 선생님은 “성악을 해야 할 목소리”라고 늘 말씀하셨다.
흑인음악과 오페라는 거의 정반대 아닌가.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몰랐다. 창의성이 배제되고 재미없는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께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 티켓을 주시며, 숙제를 하나 내주셨다. 가서 직접 듣고 느낀 것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 하는 수 없이 예술의전당을 갔는데, 성악가들이 그리 큰 공연장을 목소리 하나로 꽉 채우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같은 곡이라도 어떻게 해석해 부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더라. 생각보다 클래식 음악은 꽤 아름다웠다. 그날을 계기로 성악을 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뒤늦게 성악에 뛰어들며 조바심은 없었는지. 콩쿠르에서 결과를 내려 하기보다, 나에게 맞는 곡을 찾는 과정으로 여기며 임했다. 산마리노 공화국에서 열린 레나타 테발디 콩쿠르에서 처음으로 바그너의 노래를 시도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빈 극장장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내게 극적이고 강렬한 역할이 잘 어울린다고 조언해주기도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올덴부르크 극장 오디션에서는 가볍고 부드러운 곡을 불렀다고. 지금 극장과는 게스트 가수로 첫 인연을 맺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몬테로네 백작 역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리허설을 할 때마다 극장장과 예술감독이 참관하더라. 이상했다. 보통 극장 고위관계자들은 리허설에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첫 공연의 첫 분량을 막 마쳤는데, 대기실로 극장장이 찾아왔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함께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드라마틱한 노래는 익히 들었으니, 오디션에서는 다른 스타일의 노래도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래 독일 활동을 계획했나? 처음에는 음악과 패션의 도시인 이탈리아 밀라노를 꿈꿨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공부 이후 활동까지 고려해 독일 유학을 권하셨다. 매 공연 객석에 빈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올덴부르크 사람들의 오페라 사랑은 뜨겁다. 현재는 독일을 비롯해 이탈리아·스위스 등 다른 유럽 국가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앞서 작품 해석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동양인으로서 서양의 음악을 표현하려면 먼저 그들의 정서를 잘 알아야 한다. 시간을 내서 아침마다 열리는 시장에 가는 등 생활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려고 한다.
이 밖에 오페라 가수가 갖춰야 할 능력은? 오페라 역시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이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작업할 때 관객에게 감동도 줄 수 있다.
특별히 협업과 소통의 소중함을 느꼈던 무대가 있었는지. 2018년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주역인 리골레토를 노래했다.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다. 고지대였던 탓인지 연습하는 내내 왼쪽 귀에 이명현상이 있었다. 다행히도 귀한 동료와 스태프의 배려로 차츰 회복되더니, 공연 당일에는 오롯이 배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함께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고 관객과 느꼈던 감정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준범 테너
이준범(1987~)은 추계예술대를 거쳐 빈 국립음대에서 석사·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프라이부르크 극장 오펀스튜디오를 통해 무대에 서면서 프라이부르크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함께 소화했다. 현재 프라이부르크 극장에서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유연함. 간단해 보이는 이 단어를 실천으로 옮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유연한 사고방식은 생각지 못한 길을 제시하곤 한다. 이준범의 삶과 음악을 이야기할 때, 이런 유연함은 빼놓지 못할 키워드다. 성악을 시작한 계기부터가 그렇다. 오랜 기간 피아노를 배웠던 그는 이를 전공으로 택하고 싶었지만 마주한 현실의 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살짝 길을 틀었다. 곧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을 발견했다 글 박찬미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3개월 앞두고 준비를 시작한 예고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추계예술대에서 공부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공부한 것이 기초가 되어 빠르게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오페라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대학 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테너 김영환 교수님이 출연한 푸치니 ‘토스카’를 보고서였다. 교수님은 음악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주셨다.
교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성악가는 ‘아’ 소리를 내더라도 그로부터 ‘희로애락’이 묻어 나와야 한다”는 것. 직간접적인 경험들이 내면으로 깊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빈 국립음대에서 석사·최고연주자과정을 공부하면서 만난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테너 정호윤·강요셉, 베이스 심인성·박종민으로부터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학업을 마치고 프라이부르크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을 통해 오게 됐다. 이곳의 오펀스튜디오는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최고연주자과정을 병행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1차 합격자는 음대에서 교수들이, 2차는 프라이부르크 극장에서 선발한다. 계약은 보통 2년. 계약이 끝나면 솔리스트로 정식 계약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바질리오 역을 통해 정식 솔리스트로 발탁됐다.
선발 과정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가고자 하는 극장에 동양인이 얼마나 소속되어 있는지도 선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하는 동안 프라이부르크 극장에 한국인 솔리스트가 5명 있었다. 솔리스트로 발탁된 이후, 새로 꾸려진 오펀스튜디오에는 동양 출신 성악가가 단 한 명도 없더라. 극장에 이미 동양인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면,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다.
프라이부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많은 독일인이 은퇴한 뒤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꼽힌다. 이미 많은 사람이 노후를 이곳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프라이부르크 극장의 객석은 940석 정도로, 유럽 극장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그런데 공연이 있을 때마다 객석의 80퍼센트 이상이 찬다.
독일의 오페라극장 운영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독일의 문화 사업은 국가와 시로부터 비교적 많은 지원을 받는다. 코로나 사태로 8월 말까지 극장이 폐쇄되고, 모든 연주가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소속 가수들은 월급을 계속 받고 있다. 어느 정도의 삭감을 면치는 못했지만. 프리랜서의 경우에도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 국가 경제가 탄탄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두터운 독일 같은 국가의 경우에는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 오페라 제작 시스템에 필요한 것은? 한국에서는 공연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연습 기간에도 정당한 금전적 보상이 필요한데, 이런 시스템이 아직 미숙한 것 같다.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극장이 프리랜서 가수에게도 숙소비와 연습 수당을 책정해 지급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 한국에 오디션을 통한 캐스팅 방식이 잘 시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긍정적인 변화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은?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역을 노래해보고 싶다. 다음 시즌 캐스팅 회의에서 요구해 볼 생각이다. 단계별로 리릭 테너가 노래하는 캐릭터도 연기해보고 싶다.
성악가로서 필요한 자질은. 맞지 않는 역할이라도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유연하게 소화하려는 노력.

여신영 베이스
여신영(1986~)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음대 오페라 석사와 뮌헨 음대 성악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크레펠트 묀헨글라드바흐 극장 니더라인 오펀스튜디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를 거쳐 현재 브레머하펜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깊이 있는 음악을 하는 가수. 여신영의 목표다. 그에겐 화려한 수상경력도 없고, 어린 나이에 극장의 주역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 공부했고, 두 개의 오펀스튜디오를 경험했으며, 수상 경력 없이 오디션만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겐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 과정에서 겸손한 마음을 얻었고, 바닥부터 천천히 쌓아 올린 기량은 꿈을 좇는 든든한 발판이 되고 있다. 글 이미라

독일 오페라 시장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캐스팅 디렉터였던 콘스탄체 쾨네만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독일 클레펠트 묀헨글라드바흐 극장에서 오펀스튜디오 계약이 끝나갈 무렵, 대구오페라하우스와 함부르크 슈타츠오퍼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오디션이 대구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구로 향했다. 내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콘스탄체가 원래 계약조건이었던 한 시즌 계약이 아닌,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다른 자리를 제안했고, 그렇게 두 시즌 계약을 맺으며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도 그가 새로 만든 기획사의 소속 가수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브레머하펜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데. 로시니 ‘라 체네렌톨라’의 알리도로 역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처음 찾았는데, 이 오디션 이후 다음 시즌부터 솔리스트로서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도 다음 시즌 계약을 마친 상황이었지만, 두 곳의 거리도 멀지 않고, 브레머하펜 극장에서 편의를 봐주며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제시해 주어 함께하게 됐다.
극장의 이름이 조금 낯설다. 어떤 곳인가. 브레머하펜은 세계에서 16번째, 유럽에서 4번째 규모의 컨테이너 항구이다. 유럽 1위의 자동차 무역항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독일 제1항구로서 번성했던 도시였다. 도시가 부유했던 당시에는 파바로티와 같은 대가도 무대에 올랐다고 하더라. 매년 다양한 작품이 올라오지만, 특히 현대 오페라를 실험적으로 잘 선보이는 극장으로, 국제오페라어워드에서 수년간 ‘올해의 오페라하우스’로 지명되기도 했다.
2020/21 시즌에 선보일 작품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주인공 피가로 역으로 오른다. 이 외에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카르멘’에 출연할 예정이다. 앞으로 바그너 ‘파르지팔’의 구르네만츠와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 역도 해보고 싶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무엇인가? 2019/20 시즌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토스카’에서 성당지기 역을 노래했다. 당시 오펀스튜디오 소속으로는 맡기 어려운 큰 역할이었다. 당시 무대 위의 빛과 공기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 무대에서 좋은 인상을 남겨 다음 시즌에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극장 소속 가수의 장점으로 ‘돈을 벌면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다’ 점을 꼽았다. 극장 소속의 음악코치들과 함께 작업할 수도 있고, 함께 공연하는 유명 가수에게 정중히 부탁해 레슨받기도 한다. 사실 그들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50~60대가 넘은 나이에도 깊이 있는 좋은 노래를 부르는 대가들을 보며 동기부여를 받는다.
베이스 연광철과 한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함부르크에서 바그너 ‘파르지팔’로 연광철 선생님과 함께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많이 묻고 배웠다.
유럽 오페라극장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한데. 대중이 오페라를 조금 지루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그 취향에 맞춰 뮤지컬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독일의 많은 극장이 ‘어린이 오페라’ 시스템을 통해 어릴 때부터 오페라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교육을 통해 자연스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배수진 소프라노
배수진(1986~)은 경북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베를린예술대에서 공부했다. 2017년 튀링겐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튀링겐은 독일 중부의 주도로, 에르푸르트·바이마르·아이제나흐 등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를 지녔다. 이곳의 예술은 독일인의 정신적 삶에 영향을 미쳤다. 2017년 배수진은 튀링겐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이후 2년 동안 튀링겐 주에 있는 네 개의 극장(바이마르 극장·노르트하우젠 극장·게라 극장·에르푸르트 극장)에 설 기회를 얻었다. 2018년에는 존더스하우젠 페스티벌에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으로 데뷔했다. 배수진은 훌륭한 성악가의 필요조건은 ‘성실함’이라고 말한다. 성실함을 장착한 그는 튀링겐에서 활기찬 하루를 보내며 조금씩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는 노르트하우젠 극장에서 객원 가수로 활동 중이다. 글 장혜선

오페라 가수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라 트라비아타’ 때문이라고 들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이 작품을 봤다. 작품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문화가 풍성한 튀링겐에서 활동하는 기분은? 좋다. 튀링겐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선발되며 튀링겐 주요 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년 동안 124번 무대에서 17개의 역할로 관객을 만났다.
튀링겐 주에 있는 극장들은 한 시즌에 대략 몇 작품을 올리나? 시즌마다 평균 6~9개 작품을 올리는 것 같다. 극장에선 늦어도 전 시즌에 오디션을 공개한다.
비장의 무기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역이라고. 2018년 비올레타 역으로 존더스하우젠 페스티벌에 섰다. 이후 자연스레 극장 관계자들과 소통하게 됐다.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을 볼 때는 늘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불렀다. 오펀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맡은 역할도 밤의 여왕이다.
오펀스튜디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비올레타 역을 제안 받았다. 당시 어떤 느낌이었나? 노르트하우젠 극장장이 비올레타 역을 제안했다. 하고 싶은 배역이었지만 당시 내가 가진 역량에 비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몇 주를 망설였는데 극장장의 권유로 무대에 섰다. 걱정과는 달리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성장을 했다. 꼭 다시 해보고 싶은 역할이다.
극장장과의 친분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나? 우선 가수라면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깊이 고민한 뒤, 그 가치에 벗어난다면 조율하려고 한다. 만약 조율이 안 된다면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줄리오 페로티 콩쿠르에 입상하며 밤의 여왕 캐스팅을 따내기도 했다. 독일에서 졸업 후 첫 해외 콩쿠르 도전이었다. 콩쿠르 부상으로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을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연기에 특히 공을 들인다고. 베를린예술대학교 졸업 시험 때 오페라 ‘햄릿’의 오필리어를 연기했다. 당시 역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이후 역할 공부를 치밀하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모범생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고된 배움의 과정인 현재도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주어진 배역에는 충분히 공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와 작업해도 즐거운 도전이 되는 것 같다.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싶다.
훌륭한 성악가가 되려면? 성실함이 필수!
따뜻한 성격이 인상 깊다.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가수가 되고자 한다.

박소영 소프라노
박소영(1986~)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사와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 공연(2014), LA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2016),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마술피리’(2019), 뉴욕 필 신년음악회 초청 공연(2019), 독일 코미셰 오퍼 ‘마술피리’(2019) 등에 올랐고, 올해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 ‘닉슨 인 차이나’를 준비 중이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세상의 유혹과 욕망을 발라낸 철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할 정도로 밤의 여왕 아리아는 극강의 고음과 테크닉을 요한다. 박소영은 바로 이 소리를 주 무기로 삼는다. 지난해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독일 코미셰 오퍼에 오른 것도 밤의 여왕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꺼내지 않은 무기들이 많다. 시간과 함께 다채롭게 무르익을 그의 모습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 이미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으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이 역할 덕분에 오페라 가수로서 빠른 시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서울대 재학 시절, 2학년 실기시험곡으로 처음 부른 곡인데, 그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극고음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부른 곡인 것 같다.
현재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활동 중인데. LA 오페라의 영 아티스트로 활동할 당시, 지금의 매니저가 오페라를 보러 와서 영 아티스트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열었다.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렀는데, 며칠 뒤에 우연히 매니지먼트 소속의 다른 가수가 밤의 여왕 역을 취소하면서 내게 그 배역이 들어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함께하게 됐다.
여러 에이전시를 두고 활동하는 가수도 많다고. 나라별, 혹은 콘서트 전문이나 오페라 전문 등 분야별로 나누어 같은 매니지먼트 내에서도 매니저를 따로 두는 경우가 많다. 각 에이전시가 지닌 네트워크가 다 다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자신과 잘 맞는 매니저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매니지먼트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회사 이름만 보고 선택하기보다는, 나와 잘 맞는 매니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같은 방향성을 가졌는지, 내 목소리나 건강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지, 회신을 빠르게 주는지 등 여러 부분을 체크하고 선택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오페라 리허설에서 음악 연습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오페라 연습 첫날, ‘뮤직 런’이라는 이름으로 지휘자와 가수가 오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하며 간단한 코칭을 받고, 바로 다음 날부터 연기 연습에 들어간다. 첫 연습 날, 이미 모든 음악을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룰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16년, LA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올림피아. 플라시도 도밍고가 직접 지휘하고, 디아나 담라우와 빅토리오 그리골로 등 세계 최정상의 성악가들과 함께했다. 그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했다.
앞으로 노래해 보고 싶은 역할도 많을 것 같다.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돈 파스콸레’의 노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도 하고 싶다. 목소리는 나이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지금 내 목소리에 가장 잘 맞는 역할들을 모두 해보고 싶다.
좋은 가수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오페라 가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관리’이다. 아무리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다. 결국 부지런한 사람이 끝까지 가는 것 같다.
미국과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 오르며 체감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오페라 단체는 후원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금액이 항상 일정하지 않다 보니 극장에서 계획했던 작품을 올리지 못하거나 연주 횟수를 줄이는 등 가수들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젊은 가수들에게는 다양한 무대에서 경력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기회가 줄어들면서 성장할 기회도 잃는 것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요즘에는 젊은 가수들이 단체로 모여서 오페라를 유튜브로 생중계하거나, 솔로 연주 영상을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또 다른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김영우 테너
김영우(1986~)는 추계예술대에서 학사·석사를 거쳐, 아일랜드 왕립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했다. 2016년 스페인 사르수엘라 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다.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마친 후, 현재 쾰른 오퍼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잠이나 자려고 들어간 학교 남성중창단. 그곳에서 만난 음악선생님은 “넌 꼭 성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수능이 끝나고 성악을 배웠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 노래를 못한다는 게 괴로웠고, 난생 처음 노래 때문에 울음이 터졌다. 지금의 그를 만든 건 팔 할이 스승이다. 무기력했던 신입생 시절, 스승 김영환은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을 알려줬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도 또 한명의 인생 스승이 되어 쾰른 오퍼에서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걸음걸음마다 늘 은사의 가르침이 그를 단단히 지켰다. 글 장혜선

‘오페라 가수’의 필수조건으로 ‘좋은 은사’를 꼽았다. 오페라 가수의 꿈이 실현된 결정적 사건은 사무엘 윤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사무엘 윤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독일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유럽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다.
쾰른 오퍼는 고전부터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수용하는 극장이다. 가끔은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올릴 때가 많은데, 쾰른 사람들은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이다. 쾰른 오퍼의 가장 큰 자랑은 세계적인 오페라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쾰른 오퍼의 자랑이자 독일의 자랑이다.
극장에선 주로 무슨 역할을 맞나? 주로 리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카르멘’의 돈 호세 역을 가장 좋아하고.
소속 극장이 아닌 다른 극장에 서는 것에 대해 쾰른 오퍼는 관대한 편인가? 극장 소속이어도 에이전시 계약을 할 수 있다. 상황이나 시기가 잘 맞으면 쾰른 오퍼 소속 가수도 다른 극장으로 연주 활동을 간다.
독일의 소규모 극장은 재정난에 시달린다고 하던데, 쾰른 오퍼는 어떤지? 수년전부터 다른 극장에서 활동하는 선배님들이 다들 재정이 어렵다고 하더라. 특히 요즘은 코로나19 여파로 더 힘든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예술을 최고의 유산으로 생각하며 여전히 많은 투자하고 있다. 내가 직접적으로 재정난을 체감한 건 없다.
뒤늦게 만난 성악 인생에서 스승은 어떤 존재였나. 테너 김영환을 주로 언급했는데. 추계예술대에서 만난 은사이다. 대학 시절, 선생님이 보여주신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는 소중한 가르침이 됐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성악을 시작했다. 성악을 늦게 시작한 편이어서 대학교 1학년 때는 동기들보다 많이 뒤쳐졌다. 1학년 1학기 실기 성적은 거의 꼴찌였는데, 이후 수업도 안 들어가고 연습실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다음 학기 실기 시험을 1등 했다. 그때부터 노래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김영환 선생님은 대학 시절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주신 분이다.
아일랜드 왕립음악원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다. 성악학도의 유학지로는 독특한 선택인데. 아일랜드 왕립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 장학생을 선출한다는 말을 듣고 결정했다. 아일랜드에서 베로니카 던 선생님을 만났다. 실제로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일랜드로는 유학을 잘 오지 않는다. 선생님 눈에는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처음 선생님 앞에서 노래했을 때 기쁜 얼굴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느껴본 적은 없나? 편견을 스스로 인정하면, 그것은 아마 내가 지녔던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점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조금씩 인종차별을 느낀 적은 있지만, 무대에서는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다. 특히 쾰른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이 적다.
10년 뒤에도 김영우는 계속 노래를 하고 있을까? 지속적으로 성악가로서 나아가고 있겠지. 아, 그리고, 멀고 먼 이야기이지만 언젠가 꼭 ‘안드레아 셰니에’를 하고 싶다.

김은희 소프라노
김은희(1986~)는 서울대를 거쳐 베르디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피렌체 극장과 파르마 왕립극장에서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파도바 아이리스 아다미 코라데티 콩쿠르(2012)·부다페스트 에바 마르통 콩쿠르(2016) 등에 입상했다.

이탈리아 베로나 한가운데 위치한 아레나 원형극장. 라틴어로 아레나는 모래를 뜻한다. 그 이름에서 로마 시대 세워진 건축물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 바닥에 깔린 모래 위에서 검투사 경기가 펼쳐지던 이곳은 베르디의 작품이 공연된 1913년을 기점으로 야외 오페라극장으로 사랑받았다. 작곡가 푸치니도 즐겨 찾았던 아레나 극장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열다섯 김은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글 박서정


성악을 공부하면서부터 늘 이탈리아를 꿈꿨다고. 중학교 2학년 때 이탈리아로 마스터클래스를 갔다.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에서 본 ‘아이다’의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탈리아의 음악과 문화, 그들의 여유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후에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나. 오히려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이탈리아에 가서 오페라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졌다. 밀라노에 가면 큰 세상을 만날 것 같았다. 졸업 후 망설임 없이 이탈리아행을 결정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결정을 후회한 적은. 실망스러운 순간이 왜 없었겠나. 내 바로 앞에서 “동양인이라서 안된다”라며 캐스팅에서 제외한 연출가도 있었다. 그럴수록 모든 작품에 더 완벽하게 임하려고 한다. 발성과 음악, 발음까지 눈 감고 들으면 한국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반대로 ‘역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본고장이구나’ 느꼈던 적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이탈리아 역시 젊은 세대는 오페라에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극장에서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한다. 30세 이하 관객에게 티켓 가격을 할인해주거나, 초·중·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아침 공연, 어린이들이 직접 공연에 참여하는 기획 등 다양하다. 아이들의 빛나는 눈빛을 본 나로서는 이런 노력이 오페라를 ‘고리타분한 옛날 음악’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었나. 그저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24시간 노래만 생각할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예원학교·서울대·베르디 음악원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다. 서툴지만 열심히 하는 학생을 어여삐 여겨주신 선생님들 덕이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헛된 꿈에 그칠 수도 있었던 딸의 말을 믿고 지원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콩쿠르에 14번 도전할 때까지, 한 번도 결선에 올라가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처음 결선 진출한 콩쿠르에서 우승까지 한 것인가? 그렇다. 보날도 자이오티(1932~2018) 선생님께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됐을 때였다.
어떤 가르침을 받았기에. 노래를 대하는 자세부터 먹는 것, 준비하는 방식같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셨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 등 삶의 지혜 또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나의 노래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이다.
외로운 유학 생활 중 의지가 되었을 것 같다. 표정만 봐도 다 아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돌아가시기 전에 몸이 편찮으셨는데, 콩쿠르가 얼마 남지 않은 내게 소식을 알리지 않으셨다. 나중에야 전해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처음 남편과 함께 찾아뵌 날엔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마치 철없는 막내딸 맡기듯, 오페라 가수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하루종일 말씀해주셨다.
꿈꾸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편까지 얻다니. 이탈리아는 내게 운명 같다.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활동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피렌체 극장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아카데미에서 피아니스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작년에 결혼식을 치르고, 그의 고향인 나폴리에서 살고 있다.
피렌체 극장 아카데미 활동은 경력에 어떤 도움이 되었나. 함께한 친구들과 매일 레슨·리허설·연주를 소화하며 언어도 늘고, 문화도 익혔다. 무엇보다 실전에 바로 투입되어 배우기 때문에 유익했다. 프로 가수가 되기 전의 예습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오페라 가수의 꿈을 심어준 ‘아이다’를 하는 것.

이호준 바리톤
이호준(1986~)은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했다. 발세시아 콩쿠르·파스콸레 파파노 콩쿠르 1위(2019) 등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베르첼리 극장과 스위스 오버작센 페스티벌에 올랐고, 오는 10월 미국 플로리다주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채워지고 평탄하게만 사는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는 고통과 슬픔, 상처와 아픔, 외로움과 그리움, 애통과 절망, 주림과 목마름, 눈물과 기다림 같은 것들이 산다. 가장 깊고 순수한 빛을 품고서. 이호준이 지나온 시간에도 이러한 것들이 산다. 그의 목소리가 깊게 반짝일 수 있는 이유다. 글 이미라

이탈리아에 오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었는데. 군대 전역 후 계속해서 노래해야 할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인생의 멘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분야의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형 탈을 쓰고 전단도 뿌려봤고, 카페 아르바이트, 공사장 일용직, 무대 설치 등 다양한 경험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늘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결국 부모님과의 상의 끝에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성악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여러 나라 중 이곳을 선택했던 이유는. 학창 시절, 선생님들로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입대 전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밝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등 좋은 기억이 많았다.
서양 무대 위의 동양인으로 당연히 힘든 점이 따를 텐데. 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서 완벽히 그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외모나 특유의 뉘앙스 등을 이유로 서양인을 더 선호하곤 하니까. 더 열심히 해서 실력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제약들이 고맙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시스템은 어떻게 다른가? 가수 대다수가 극장에 소속되지 않고, 시즌 혹은 작품마다 여러 극장을 다니며 활동한다. 독일처럼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활동할 순 없지만, 여러 극장과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시즌에 레퍼토리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 지역의 극장에서 다양한 지휘자와 작업할 수 있다는 부분이 큰 이점이다.
연출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면. 같은 유럽이라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연출 스타일은 매우 다르다. 독일이 새로운 해석으로 현대적인 연출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면, 이탈리아는 정통을 고수하는 편이다. 실제로 20~30년 전의 연출을 아직도 그대로 따른다.
트렌드의 변화는 없나. 요즘은 현대적인 시도도 꽤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러한 트렌드의 변화로 가수들에게 유연한 적응력과 변화를 잡아내는 뛰어난 관찰력이 요구되고 있다.
콩쿠르를 통해 여러 극장과 일할 기회를 잡았는데. 많은 콩쿠르와 오디션, 무대를 경험하며 독립성을 키워야 한다. 어떤 가수가 되고 싶고, 어떤 성격의 공연을 하고 싶은지 잘 파악한 후 좋은 에이전시를 만나 활동해도 늦지 않다.
선호하는 배역이 있다면. 바리톤으로 활동 중이지만, 마음속으론 열정적인 드라마틱 테너의 배역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테너의 비중이 ‘오페라의 꽃’이라 불릴 만큼 큰데, 같은 무대에서 상대 테너 배역이 노래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황홀하다. 바리톤 배역은 주로 테너와 대조되는 악역이거나, 친구로서 뒷받침해 주는 역할이다. 이런 특징을 잘 파악하고 좋은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의 음색은 어떤 매력을 지녔나. 하이바리톤 특유의 가벼움과 정통 베르디 바리톤의 리릭한 음색, 그리고 무거운 작품에서의 드라마틱한 성량도 모두 소화하고 있다. 덕분에 ‘세비야의 이발사’ ‘돈 파스콸레’ ‘사랑의 묘약’부터 베르디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를 거쳐 ‘카르멘’과 ‘토스카’까지 다양한 작품에 올랐다.
해보고 싶은 역할은. 베르디 ‘돈 카를로’에서 돈카를로의 충신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로드리고 역할과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정치적 야망과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는 엔리코 역이다.
무엇이 좋은 오페라 가수를 만든다고 생각하나. 긴 공연 기간을 소화할 수 있는 암기력과 체력, 그리고 컨디션 조절 능력과 자제력이 필요하다. 역할과 발성에 관해서도 계속 공부해야 하고. 나이가 들수록 변하는 악기에 맞춘 음악적인 공부와 완급조절도 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 공부도 필수다.

양제경 소프라노
양제경(1985~)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빈 시립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제8회 오사카 음악콩쿠르에서 대상, 2011년 플로리다 성악 콩쿠르에서 1위를 거두었다. 이번 시즌에는 오스트리아 린츠 극장과 바덴 극장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양제경이 노래를 시작한 이유는 조금 달랐다. 노래는 내성적인 성격에 변화를 주기 위한 아버지의 묘수였다. 그런데 2008년 프랑스 파리를 거쳐, 2009년 이탈리아 밀라노, 2010년 미국 워싱턴과 2013년 오스트리아 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에서 유학했던 시간이 그녀에게 정말 변화의 씨앗을 가져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오페라라는 종합극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향성을 얻게 된 것. 이제 양제경은 새로운 동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해외 활동의 노하우라 말하는 그를 보니, 그의 무대가 더욱 궁금해진다. 글 박찬미

음악이 정말 성격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나. 오페라의 장르적 특성도 한몫했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내 성격과 다른 여러 인물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여러 국가에서 공부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사실 학창 시절엔 유학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었지, 어디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명확한 계획은 없었다. 그렇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 매일을 살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적절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곳에서 지냈던 것 같다.
넓은 활동반경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유럽에서 오랫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 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리랜서로 출연한 공연이 호평을 받으면 재초청을 받아, 극장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 새로운 극장에 데뷔해야 할 때는 매번 오디션을 통해 기회를 얻는다.
프리랜서의 고충이 있다면. 연주 때마다 매번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하니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지울 수 없는 매력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지난 2월, 오스트리아 린츠 극장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있는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날 극장에 도착했는지,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이 작품의 악보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건지 의문이다. 긴박했던 상황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아, 고통스러움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낀 날이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역은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감사하게도 오스트리아 바덴 극장에서 내년 3월에 이 작품을 공연하게 되어 준비하고 있다.
바덴 극장은 2018년부터 서 오고 있다. 어떤 곳인가. 빈에 인접한 도시인 바덴은 온천과 휴양지로 유명해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덴 극장도 171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이용하는 휴양 온천장의 오페라극장으로 출발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역 주민이 오페라라는 예술 장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바덴 극장에서만 한 달에 10회 이상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해외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오페라계에 필요한 것을 하나 꼽자면. 해외 여러 나라에서는 어린이 오페라가 굉장히 흔하다. 국내에도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 공연이 자주 오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오페라에 편견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꼭 큰 무대일 필요는 없다. 학교 내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국내 무대에 자주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는지. 유럽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 상 한국 관객을 자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따금 서게 되는 고국에서의 공연에는 큰 애착과 설렘이 있다.

김건우 테너
김건우(1985~)는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 콩쿠르 1등 및 청중상을 받았다.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2017~19)으로 활동했다. 2019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연대의 아가씨’에 주역으로 데뷔했으며, 오페라 전문 채널 ‘Operawire’에서 선정한 ‘2019 월드 오페라 라이징 스타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2019년 7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앞으로의 무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얼굴에 열광했다. 도니체티 ‘연대의 아가씨’ 주역 토니오로 오른 김건우를 향한 것이었다. 한 작품을 위한 그의 꼼꼼한 준비는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하다. 오페라의 배경과 문헌 조사, 캐릭터와 대사 분석은 물론 함께할 연출진과 출연진의 배경과 삶도 미리 공부한다. 서로를 잘 알고 친밀해져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 그렇게 오늘도 그는 많은 이들과 만나고, 알아가고, 함께 하며, 오페라라는 예술을 만들어가고 있다. 글 이미라

2016년 오페랄리아 콩쿠르 우승이 좋은 발판이 되었을 것 같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인 만큼 오페라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극장 관계자들이 심사하고, 결선 무대는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방송된다. 이 콩쿠르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승 후 여러 제안이 있었을 텐데. 콩쿠르 우승 후 로열 오페라하우스 캐스팅 디렉터의 제의로 2017년부터 2년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었음에도 과감히 영 아티스트 트레이닝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에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대의 아가씨’로 주역 데뷔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 공연도 내게 큰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작품은 국립오페라단 ‘진주조개잡이’(2015)이다. 인생 첫 오페라 주역 데뷔였다. 내 부족한 점을 직시하게 해 준 중요한 작품이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한 해에 오르는 작품 수는. 6개 정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한 시즌 최대 11개의 역할까지도 해봤다. 지금은 주역만 하기 때문에 6개 작품만으로도 상당히 벅차다.
현재 TACT 런던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있는데. 매니저를 두고 활동하면 여러 장점이 따른다. 여러 극장의 주요 인사들과 인맥이 있는 매니저와 일하면 좋은 극장과 작품을 많이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그런 매니저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캐스팅이 결정되고 나면 어떻게 준비하나. 리허설 시작 한두 달 전부터 개인 연습에 들어간다. 오페라의 배경과 문헌 조사를 한 뒤 캐릭터와 대사 분석을 하고 음정을 공부하면서 되도록 빠르게 외운다. 이후 상대역의 반응을 예상하며 어떻게 연기할지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본다.
리허설 전, 함께할 사람들의 배경을 미리 조사해본다고. 만나서 할 이야기를 미리 생각해두는 거다. 이들의 문화를 알아야 쉽게 친해지고, 또 서로 친해져야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친화력을 기르는 것은 ‘케미’를 좋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외국 친구들과 주로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들 가진 부모들은 마음이 통하는 것 같다.
공연 리뷰도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는지. 좋은 리뷰를 받으면 다른 연주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오디션 없이 캐스팅되는 경우도 있다.
활동 중 편견과 한계에 부딪힌 적은 없나. 서양 음악계의 한가운데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을 갖추는 것. 이것만이 그들의 차별적 시선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다.
오페라 시장의 위축과 함께 가수들의 자리도 위협받을 거란 예측이 있다. 앞으로 더 치열한 경쟁이 될텐데. 이전 세대보다 더욱 철저히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갖춰야 할 것이 많다. 좋은 귀·다양한 표현력·무대에서의 담대함·냉철한 판단력·언어적 능력·될 때까지 연습하는 끈기·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친화력·악보 분석력·연기력·순발력·좋은 외모와 자기 관리, 그리고 SNS 관리 능력까지.

이준호 테너
이준호(1985~)는 한양대를 졸업고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와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각각 석사과정과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마인츠 오하네스 구텐베르크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거쳐 현재 독일 코블렌츠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 서부의 작은 도시 코블렌츠. 인구 약 10만의 코블렌츠는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독일의 모서리’라는 독특한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준호가 서고 있는 무대는 코블렌츠 극장이다. 1787년 설립돼 233년의 세월을 지낸 이 극장은 2002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유서가 깊다. 도시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활용한 야외공연은 코블렌츠 극장만의 묘미이기도 하다. 글 박찬미

코블렌츠 극장은 꽤 규모가 작은 편이라고 들었다. 작은 규모에 비해 극장장과 예술감독의 열정이 대단하다. 전문적인 관리 덕분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솔리스트의 음악적 기량도 아주 높다. 도시의 오페라 애호가층도 두텁다. 월요일 저녁 공연도 객석이 가득 찰 정도다. 바그너의 작품이나 대규모 오페라를 올리기엔 공간적 제약을 받지만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여름에는 12세기에 건축된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성채를 배경으로 야외 공연도 올린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를 통해 취미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대에 홀로 올라 노래할 기회를 얻었는데, 내 노래를 통해 관객이 깊은 감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됐다. 성악의 매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재학 중이던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가 주최한 오페라에 출연한 것이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래뿐 아니라 연기와 대사, 춤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최고연주자과정을 위해 슈투트가르트 음대 오디션에 참가해 열성을 다해 노래를 불렀는데 엉뚱한 분야에 지원했던 것이다. 이 오디션은 오페라가 아니라 가곡과 오라토리오 전공생을 뽑는 자리였다. 오페라 전공을 위한 오디션은 이미 며칠 전 끝났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런데 한 시간 뒤 오페라 학교의 학과장이 오셔서 다시 한번 노래를 할 기회를 얻었다. 다음날 기적적으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날의 시험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에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작은 단역부터 주역까지 여러 캐릭터를 노래해 왔다. 초반에는 단역과 감초 역할을 많이 했는데, 최근 들어 해보고 싶었던 배역들을 하나씩 해내고 있다.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항해사 역, 모차르트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 역, 프로코피예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트루팔디노 역,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에서 카미유 역을 맡았다.
늘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제작 환경이 어렵지는 않은지. 작품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맡은 배역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 ‘이번 연출자와 지휘자는 어떤 새로운 해석을 보여줄까’하는 기대감도 즐기는 편이다.
한 프로덕션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작품과 작곡가에 대한 배경지식을 공부하고, 악보를 분석하는 작업부터 따지면 총 2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연출가와 모든 가수와 지휘자, 무대 디자이너 등이 함께하는 공식 리허설은 6주간 이뤄진다. 관계자들이 모두 모이는 첫 일정에서는 작품의 콘셉트와 방향성을 설정한다. 이때 처음으로 지휘자와 가수들이 음악을 맞춰보기 때문에 가장 긴장된다.
독일에서는 초연을 가장 중요한 공연으로 여긴다고. 다른 도시의 많은 극장 관계자나, 에이전시 관계자, 그리고 오페라 평론가들이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국 오페라계에 바라는 점을 하나 꼽자면. 유럽에는 오페라 가수의 프로필을 관리하고 게시하는 공식 사이트가 활성화되어 있다. 한국도 국내 성악가나 다른 아시아 국가 출신 성악가의 프로필 데이터를 모아 네트워크망을 구축하면 좋겠다. 더 다양한 성악가들을 만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권은주 소프라노
권은주(1985~)는 한양대를 거쳐 독일 만하임 음대 석사 및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동아콩쿠르 3위, 독일 새로운 목소리(Neue Stimmen) 콩쿠르 1위, 만하임 극장 아놀드 페터젠 상을 받았다. 현재 만하임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처음으로 도전한 국제콩쿠르에서 ‘동양인 여성 최초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09년, 독일에서 열린 ‘새로운 목소리(Neue Stimmen)’ 콩쿠르였다. 화려한 타이틀과 함께 세계무대에 발을 디딘 권은주는 현재 만하임 극장의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겸손하고 따뜻한 음악가, 그가 꿈꾸는 모습이다.
글 이미라

만하임 극장 솔리스트로 많은 무대에 서고 있다. 이 극장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만하임 음대 석사과정 중, 일 년에 한 번씩 극장장들과 에이전시를 초청해 열리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만하임 극장장의 눈에 띄었고, 이후 극장 오디션을 거쳐 소속 가수로 일하게 되었다.
만하임 극장은 어떤 곳인가? 이 극장만의 특징이 있다면. 유네스코 음악 도시로 지정된 만하임은 독일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18세기 만하임악파로 유명하며, 특히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음악 활동을 했던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는 만하임 극장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다. 모차르트를 기념하며 2년마다 페스티벌(Mozartsommer) 또한 열고 있다.
독일 내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로 꼽히는 만하임 극장은 ‘레퍼토리 극장’이라고 불릴 만큼 한 시즌에 올리는 오페라가 25개나 된다. 대부분의 오페라를 극장 소속가수로만 채울 수 있을 만큼 앙상블의 규모가 크다.
활동 중 극장장이 바뀌는 경험을 했는데. 4년 전 극장장이 바뀌는 상황을 겪었다. 그런데 새로 교체될 극장장과 디렉터가 이미 몇 년 전부터 소속 가수들의 공연을 봐왔다고 하더라.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가수가 오디션을 본 셈이다. 기복 없는 실력으로 무대 위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그동안 어떤 배역을 맡아왔는가? 보통 한 시즌 동안 5~7개의 작품에 오른다. 그동안 ‘카르멘’의 미카엘라, ‘라 보엠’의 미미,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마술피리’ 파미나, ‘투란도트’ 류를 맡았다. 그중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캐릭터인 ‘류’를 가장 좋아한다. 2015년에 공연했었는데, 지금까지 공연한 작품 중 가장 많은 환호를 받았다. ‘나비부인’의 초초상 역에도 조만간 도전해보고 싶다.
국내 활동 계획이 있다면. 올 하반기에 오페라 ‘라 보엠’의 미미 역으로 내한할 예정이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스승인 박정원 교수님께서는 늘 “가수의 소리와 음악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인성이 뭍어나온다”고 말씀하셨다. 한해 한해가 지나며 그 말이 점점 더 가슴 깊이 와 닿는다. 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길 갈망하고 애쓰며, 그런 마음이 내 음악에도 녹아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서정혁 바리톤
서정혁(1985~)은 영남대 성악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파우스토 리치 콩쿠르 3위, 아니타 체르케티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다.

바리톤이라면 누구나 베르디 오페라를 열망하지 않을까? ‘베르디 바리톤’이라는 말처럼 베르디의 작품에선 화려한 테너보다 묵직한 바리톤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 서정혁 역시 ‘시몬 보카네그라’ ‘리골레토’ 등을 노래하는 베르디 바리톤이 되고자 한다. 그는 지난해 불가리아 소피아 극장에서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로 데뷔했다. 이후 더욱 베르디를 열망하게 됐고, 언젠가 베르디 ‘리골레토’를 부를 날을 꿈꾼다. 글 장혜선

마침내 지난해, 유럽에서 데뷔했다. 소피아 극장에서 데뷔한 이후 한 해 동안 네 개의 작품으로 네 개의 극장에서 공연하는 성과를 세웠다. 운이 좋았다. 소피아 극장에서는 ‘일 트로바토레’와 ‘돈 파스콸레’ 두 작품을 함께했다.
불가리아의 오페라 분위기는 어떠한가? 동유럽이어서 경제 수준이 좋지 않은 나라다. 사실 극장 수준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다. 막상 리허설을 한 후 선입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수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했다. 이외에도 오페라 한 편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가 체계적이더라. 예를 들어 무대 세트 제작, 소품, 의상, 분장 등 모든 제작 과정을 극장에서 직접 생산하고 관리한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훌륭했다. 우리나라 극장도 오페라 제작에 필요한 모든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극장이 될 것 같다.
동료들과의 소통은 원활했나? 리허설 기간 동안 사소한 농담부터 작품에 관한 깊은 대화를 시도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공존하는 듯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바리톤 레오 누치와 협업했는데. 작년에 파바로티 극장에서 시즌 개막 공연 ‘라 보엠’의 마르첼로 역을 맡았다. 이탈리아 모데나에 위치한 극장으로 파바로티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극장에서의 데뷔 무대여서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 무엇보다 작품의 연출가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 바리톤 레오 누치였다! 동경하는 바리톤 가수다. 매일 그의 음악을 들으며 꿈을 키워왔는데, 이렇게 같은 작품에서 동료로 만나다니. 아직도 꿈만 같다.
데뷔 후 가장 고민하고 있는 건? 좋은 에이전시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에이전시를 못 만나면 극장 활동은 물론, 오디션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가수들이 많다.
좋은 에이전시를 만날 수 있는 빠른 방법은? 아무래도 해외 콩쿠르 수상이지 않을까.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도 점점 무대가 줄어들고 있는데. 수년 전부터 이탈리아는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스레 극장 예산이 줄어들었다. 반면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비교적 개런티가 낮은 신인 가수들에게 이전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으니, 나에겐 기회인 것 같기도 하다.
‘베르디 바리톤’에 대한 열망을 내비쳤다.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좋은 발성이 중요하다. 발성과 함께 나의 음악을 잘 표현하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오페라 가수는 배역에 맞는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세계 각국의 무대를 섭렵하려면 외국어 능력이 필요하다.
보통 하루 일과는 어떠한가? 연습으로 시작해 연습으로 끝난다. 이외의 시간은 보통 집에서 고요히 시간을 보낸다. 음악이나 영화를 즐기거나, 축구 게임을 한다.
올해 국내에서 오페라 출연을 계획했는데,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다고. 아쉽다. 아마 6월쯤엔 확실한 스케줄이 정해질 것 같다.

전권수 테너
전권수(1985~)는 가천대 음대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석사 및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뉘른베르크 극장에서 오펀스튜디오를 수료했으며, 현재 브라운슈바이크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친구 따라 시작한 성악이었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으니 어려서부터 좋아한 노래로 대학을 가볼까 했더랬다. 주변의 “잘한다” 소리에 점차 흥미가 생겼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는 어엿한 오페라 가수로 성장했다. 이것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한 전권수의 성장기다. 글 박서정


너무 솔직한 답변 아닌가. 대학을 가기 위해 성악을 시작했다니. 원래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대학이라는 곳을 갈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먼저 성악을 시작한 친구를 따라 레슨을 받았다.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자꾸 칭찬을 들으니, 더욱 흥미가 생겨 열심히 했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특별한 것을 한다는 데 끌렸다.
오페라의 매력을 느낀 계기는. 당시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모아 기획한 소극장 오페라에 참여한 적이 있다. 성악은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내게 오페라 무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노래하고 연기한다는 사실에 매료됐다.
25세에 처음 참여한 ‘아이다’에서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 역을 연기했다고. 첫 오디션이었고, 학생 신분이었다. 당시 나이와 목소리가 배역에 맞지 않아 큰 기대는 없었다. 담당 교수님께서도 극장 오디션을 한번 경험해보라는 취지에서 허락해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좋은 반응을 얻어 계약이 이뤄졌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기획공연으로 신선한 시도를 선보인 작품이었다. 음악은 그대로되, 순서와 연출에서 변화를 주었다. 유럽의 현대 오페라를 경험하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가수로서 오페라 작품을 표현하는 데 유럽과 한국이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 베를린 음대에 재학 중일 때, 교수님께 독일인으로서 동양인 가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여쭤본 적이 있다. “한국인이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소극적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후 여러 연출가와 동료들과 일을 하며 그들의 표현 방법이 한국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체감했다. 과감하고 때로는 과장되기도 한 표정과 손짓이 무대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폭발시키는지도 알게 됐다. 이를 흉내 내며 나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2018/19 시즌부터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의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독일에는 오페라 또는 연극 전문극장이 있고, 오페라와 연극, 발레 등을 아우르는 종합극장이 있다.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극장이다. 멘델스존·베를리오즈·리스트·R. 슈트라우스 등이 지휘자로 이곳을 거쳐 갔다. 2016년 치른 오디션에서 한번 낙방한 뒤, 재도전해서 계약이 성사됐다. 당시 나를 기용하는 데 회의적이었던 예술총감독이 지금은 나를 굉장히 아껴주고, 좋은 배역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에 소속되면 많은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고 들었다. 한 시즌에 적게는 30번, 많게는 80번의 무대를 경험할 수 있다. 다양한 작품의 크고 작은 역할은 물론,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오페라에 참여하거나, 세계초연 작품의 경우 그 배역의 첫 가수로 이름을 올릴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오페라와 역할을 잘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어떤 역할이 가장 자신 있나. 푸치니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무대에 많이 섰다. 이 역할을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
오페라 가수에게 극장은 직장이기도 하다. 나는 ‘극장과 가수’의 관계가 ‘사장과 직원’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극장장·예술총감독·지휘자·오페라 가수 등 각자의 직책이 다를 뿐이지, 오페라라는 예술을 하는 데 있어 모두가 동등하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성실함, 인내와 끈기, 예술을 바라보는 열린 마음.

김민석 테너
김민석(1984~)은 드레스덴 음대에서 석사와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프랑스 마르세유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2009)에 올랐으며, 2010년 프랑스 니스 오페라극장에서 모차르트 ‘루치오 실라’의 오피도 역으로 데뷔했다. 독일의 다름슈타트 오페라극장(2011~2017)을 거쳐 현재 호프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음악도, 예술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 오직 한 사람으로 인해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고 해도 유별난 일은 아닐 터. ‘세기의 목소리’로 칭송받는 독일의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1930~1966)는 김민석에게 그런 존재다.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오늘도 자신을 단련한다. 글 박서정

처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꾸지는 않았다고. 가곡을 연주할 때 시가 주는 심상과 단어마다 함축된 의미를 표현해내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 시절 가곡을 잘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 가창 기법을 다듬어가던 중에 슬럼프가 왔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다른 쪽의 음악을 표현할 수 없는 가수가 되어있더라.
그 돌파구가 되어 준 것이 오페라였나. 가곡과 오페라는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다르다. 좋아하는 프리츠 분더리히가 어떤 부분에서 가곡과 오페라를 동일하게, 혹은 다르게 표현해내는지 연구하며 많이 배웠다. 자연스레 오페라의 극적이면서 직설적인 표현방식에 매료됐다.
독일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 때문에 프랑스 마르세유 콩쿠르에서 우승, 유럽 데뷔까지 프랑스에서 치르고도 독일을 고집한 것인가? 성악을 공부하면서부터 독일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는 프리츠 분더리히 때문에 성악에 매료됐고, 오페라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극장으로부터 러브콜까지 받았지만, 일주일 후에 있었던 독일 다름슈타트 오페라극장의 오디션을 택했다.
지금은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호프 극장 소속가수로 활동 중이다. 다름슈타트 오페라극장에서 인연을 맺은 극장 소속연출가가 2015년 호프 극장의 각본가로 이직했다. 이후 그가 극장장 교체시기에 내게 이직을 제안해왔다. 오디션을 거쳐 2017년 가을부터 활동하고 있다.
결국 예술을 하는 데도 사람 간의 관계는 중요한 것 같다. 극장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극장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사람이다. 한 극장에서 다른 극장으로의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흩어지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한 프로덕션으로 모이기도 한다. 그때 사람들이 ‘나’라는 가수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가수는 극장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극장의 무리한 요구까지 다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텐데. 우리에게는 응하지 않을 용기가 있어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화법을 배워야 한다. 본인의 가치는 증명하지 않고, 권리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다. 실력이든, 인간관계든, 넓은 팬층이든, 그 이유가 많을수록 가수의 가치는 올라간다.
독일에서 활동하며 동양인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운 적은 없었나? 음악 활동을 하며 편견을 느껴본 적은 없다. 애초에 민족주의적이고,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사람이 온갖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오페라계에서 일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오디션 단계에서부터 동양인으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있다. 연출가가 생각하는 그림에 동양인이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극장 측에서 에이전시에 동양인을 제외한 가수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많이 한다.
소속 극장에서는 주로 어떤 역할을 맡는가. 레제로(가장 가볍고 날렵한 음색의 테너)에서 시작해 지금은 리릭 레제로, 그리고 리리코 스핀토까지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극장에서는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테너 주인공을 노래하고 있다. 오페라 외에는 오라토리오 외부 공연도 많이 하고 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품은. 푸치니의 ‘나비부인’. 백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많은 제안을 받았다. 지난 시즌에도 요청이 있었지만, 두 달간 연습한 후 고민 끝에 고사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작품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이제는 해 볼 자신이 생겼다.

문석훈 베이스
문석훈(1984~)은 경희대 학사와 슈투트가르트 음대 석사를 졸업했다. 뤼벡 극장의 오펀스튜디오와 주역 가수로 활동을 비롯해, 슈투트가르트 극장·본 극장·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 오스트리아 빈 극장에서 객원으로 무대에 올랐다. 현재 다름슈타트 극장 베이스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커다란 극장. 공연 시작에 앞서 조명이 꺼지고, 찰나의 암흑과 함께 긴장감이 스친다. 그 앞에서는 수백 수천의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울려 퍼지는 곳이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경쟁과 긴장이 따른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성악가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문석훈은 좋은 오페라 가수의 자질로 성실함과 강인한 정신력을 꼽는다. 무대 위 긴장감과 압박감을 늘 이겨내야 하는 직업이기에. 글 이미라

음악과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다. 이후 교회에서 노래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수업 시간에도 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좋아했는데, 그 ‘좋아하는 마음’을 쫓다보니 자연스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결정적인 인연이 있다면. 예고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안종상 선생님. 대학 입시를 앞둔 내게 “좋은 대학이나 어떤 콩쿠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최선을 다해 너의 길을 걷다 보면 그런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말이 노래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며 힘들어하던 지난 시간들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독일 내 크고 작은 극장 대부분에서 한국 성악가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데. 슈투트가르트 음대 입시 때도 입학생 3명이 모두 한국 남자였고, 내가 가는 극장마다 항상 동양인 가수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차별을 당한 적은 없다. 다만 무대에 오르며 확실히 외모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금발의 백인이 한복차림으로 판소리를 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많은 동양인을 캐스팅하는 걸 보면, 편견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름슈타트 극장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에이전시를 통해 오디션을 봤다.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의 피에스코,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달란트 등 큰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베이스를 뽑는 오디션이었다. 당시 뤼벡 극장 1년 차였던 내게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지만, 좋은 기회를 저버리기 아쉬워 참가했고, 오디션 바로 다음 날 합격 통지를 받았다.
독일 내 극장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는데. 헤센주에 위치한 극장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35km 정도 떨어져 있다. 헤센주는 위아래로 길게 뻗어있는 형태인데, 비스바덴 극장을 중앙으로 해 위로는 카셀 극장이, 아래로는 다름슈타트 극장이 있다. 가장 큰 규모의 극장 등급에 속하며, 약 천석 규모의 객석을 소유하고 있다. 많은 국립극장이 그러하듯 운영의 많은 부분을 헤센주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그 외 후원·티켓 판매 등으로 극장을 운영한다.
극장이 가수에겐 명함과도 같은 역할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한 도시의 예술을 책임지는 위치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외국인으로서 독일 사회에서의 입지를 나타내고 싶을 때 극장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필을 보여주면 도움이 된다. 공인인증서 같은 느낌이랄까.
그동안 비중 있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극장에 오자마자 세계적인 바리톤 루치오 갈로, 스핀토 테너 박성규, 지휘자 빌 훔부르크와 함께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의 피에스코 역으로 데뷔했다. 당시 막 경력을 쌓기 시작한 내게 매우 영광스런 무대였다. 이번 시즌 작품 중에는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라이몬도 역이 흥미로웠다. 다음 시즌에는 마스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 역을 선보일 예정인데, 작품의 80% 이상을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목소리와 삶으로 사랑을 전하는 예술가. 성악 외적인 부분에서는 언젠가 드라마 연기자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문세훈 테너
문세훈(1984~)은 단국대 졸업 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벨베데레 콩쿠르 2위, 비오티 콩쿠르 3위, 비냐스 콩쿠르 3위, 시츠오카 콩쿠르 1위 등 다수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전문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테너라면 많은 시간을 고음 연구에 할애할 테다. 문세훈 역시 쉴 때조차도 고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도 ‘건강’한 고음의 소리를 위해서이다. 그런 그가 말하길,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것이란다. 문세훈이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 이유도 소리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소리의 고장이기에, 그곳에선 발성의 비밀을 찾을 것 같았다. 무작정 이탈리아에 왔지만 2년의 시간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귀국을 고민하던 차에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 합격했다. 학생 신분으로 라 스칼라에서 공연하면서 오페라 가수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글 장혜선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싶어서, 이탈리아 콩쿠르에 많이 도전했다고. 소리 본고장의 벽은 높았다. 많은 콩쿠르에서 실패했지만, 그럴수록 이탈리아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이탈리아에서 발성의 기초부터 다시 갈고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기초공사부터 다시 한다는 건 어쩌면 도전이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콩쿠르 2위가 영감이 됐다. 이 콩쿠르는 성악가가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큰 시장이다. 수상 후 작은 연주 제안이 많이 들어왔지만, 소리에 대해 더 공부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서기까지 조금 돌아온 듯했지만, 기초공사를 탄탄하게 했으니 후회 없다.
오페라 본고장에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느낀 편견들은 없나? 오히려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인은 콩쿠르에 강하다’는 편견이 있다. 이 편견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되지만, 감사한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려면 에이전시가 꼭 필요하다고 들었다. 무조건 큰 곳을 선호하진 않았으면 한다. 에이전시 규모가 크면 배역이 겹치는 가수도 많기에, 오히려 기회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규모는 크지 않더라도 가수를 아껴주는 에이전시랑 시작해도 좋다.
결국 에이전시와 연결되려면 콩쿠르에 많이 출전해야 할텐데, 그 비용도 부담될 것 같다. 콩쿠르도 그렇고, 오디션 비용도 무시 못 한다. 보통은 이동 경비와 숙박을 가수가 해결해야하니 드는 돈이 만만치 않다. 에이전시에서는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콩쿠르에 나가서 번 상금을 모아서 오디션을 보러 다니라고 하더라.
최근 경제 위기 앞에 오페라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역사를 지닌 극장들이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사실 공연예술은 수요가 있어야 양질의 공연을 할 수 있다. 모든 건 관객이 좌우한다.
이탈리아 관객에게 오페라는 더 이상 매력적인 장르가 아닌가? 오페라 황금기에는 공연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요즘은 다른 즐길거리가 많아져 저녁에 오페라를 보러 오는 관객이 줄었다. 그런데 지난 해 영국 글라인드본 극장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했다. ‘사랑의 묘약’으로 영국 주요 다섯 도시를 투어 했는데, 10대 학생들이 오페라에 열광하더라. 아이들도 충분히 오페라를 즐긴다는 걸 알았고, 이들이 성장해 다시 극장을 찾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2016년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 공연엔 어떻게 참여한 건지? 오페라리아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됐다. 그때 도밍고가 나와 테너 김건우를 따로 불러 내한 공연에 함께하자고 했다. 너무 기뻐서 복도에서 둘이 함께 소리 질렀다.
올해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은 주변 풍경도 예뻐서 많은 오페라 팬들이 찾는다. 2017년 ‘돈 파스콸레’의 에르네스토 커버 역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다음해 ‘장미의 기사’를 올린다는 얘기를 듣고 커버라도 다시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총 11번 공연 중 10번을 내가 무대에 올랐다. 그때 주역 테너가 첫 공연 후 목이 안 좋다며 나에게 기회를 줬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영상으로 보던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참여하다니! 올해 ‘사랑의 묘약’ 네모리노 역으로 공연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어 아쉽다.

최희윤 베이스
최희윤(1984~)은 뮌헨 음대에서 오페라 석사과정과, 콘서트마스터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야쿠프 푸스티나 콩쿠르·마리아 카니글리아 콩쿠르에서 1위(2017)를 수상했으며, 이듬해 독일 포르츠하임 극장 ‘라인의 황금’에서 데뷔했다. 현재 니더바이에른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세 개의 강이 만나는 물의 도시 ‘파사우’, 글로벌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 BMW의 핵심 공장이 위치한 ‘란츠후트’, 바바리아 숲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로마제국의 유물을 품은 ‘슈트라우빙’. 이 세 도시의 예술을 책임지는 단체가 바로 니더바이에른 극장이다. 이곳의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 최희윤. 그는 그를 둘러싼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즐기는 중이다. 글 이미라

 

니더바이에른 극장은 어떤 극장인가. 어떤 지역적·음악적 특징을 지녔는지 궁금하다. 니더바이에른 극장은 독일 바이에른 남부지방에 위치해 있다. 파사우, 란츠후트, 슈트라우빙, 이 세 개의 시에서 지원받고 있으며, 공연 또한 세 도시에 올리고 있다. 매년 벨칸토 오페라와 오페레타를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데, 특별히 2019년부터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올해 최종 리허설까지 마친 ‘발퀴레’는 코로나19 여파로 아쉽게도 다음 시즌으로 옮겨졌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극장에 오게 되었나? 먼저 극장에 이메일로 음원과 이력서를 보냈다. 이후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베이스 주역과 독일 오페라 조·주역을 맡고 있다. 솔리스트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나는 한 시즌에 5개 작품을 소화한다. 오디션은 따로 보지 않고, 극장에서 캐스팅을 통보하는 식이다.
극장과 더불어 매니지먼트에도 소속되어 있는데, 주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 오디션 정보 제공 및 참가 신청을 수월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극장 계약 시에도 월급 협상 등을 대신하고, 가수들의 편의에 신경을 써주며 아티스트가 온전히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극장 대부분이 매니지먼트와 관계를 맺고 있어, 가수가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활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유명 오페라 가수는 “극장에서 요구한다고 무조건 응하지 말라”고 하던데. 본인에게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충분한 대화를 통해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유럽 오페라극장은 젊은 가수들에게 양면성을 보인다. 무대에 설 기회는 많아지고 있지만, 처우는 오히려 예전에 비해 좋지 않다고. 독일 극장의 솔리스트들은 월급을 받는다. 극장은 티켓 판매 수익에 의존해 운영되는 게 아니라 나라와 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처한 극장들은 값싼 젊은 가수를 찾는다. 그때문에 경쟁이 점점 과열되고 있다. 앞으로 오페라계에서 살아남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런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뛰어난 연기력이다.
성악가로서 첫 시작은 바리톤이었는데. 10년 이상을 바리톤으로 공부했다. 그러다 독일 아헨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한 최웅조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께 파트 상담과 레슨을 받고는 베이스로 전향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보날도 자이오티 선생님께 레슨을 받고 국제콩쿠르에 입상하는 성과를 이뤘다.
유학 생활의 시작은 독일이었는데. 당시 동생이 독일 뮌헨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독일 유학을 선택했고, 뮌헨 음대에서 동생과 함께 공부하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독일 무대는. 2019년 베르디 ‘나부코’에 자카리아 역이다. 독일에서 맡은 첫 오페라 주역이었고, 네 명의 주역 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한국인(김경천 니더바이에른 극장 솔리스트·박현주 숙명여대 교수)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고생하며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바그너 ‘신들의 황혼’의 하겐 역.

김성현 테너
김성현(1984~)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함부르크 음대 석사, 뉘른베르크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뉘른베르크 슈타츠오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콩쿠르에서 1위 및 바그너 특별상 등에 입상했다. 뉘른베르크 슈타츠오퍼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마이닝겐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베라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 마이닝겐. 독일 튀링겐주에 위치한 이곳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재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1831년에 개관한 마이닝겐 극장은 도시에 예술적 전통을 입힌 역사적 공간이다. 마이닝겐 궁정극장으로 시작해 지금의 이름을 갖기까지 상업화된 예술의 본질을 되찾는 데 앞장섰다. 오페라·연극·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통해 고전과 현대, 실험과 도전을 넘나들고 있다. 김성현은 이 극장과 닮았다. 열린 마음과 무대에 대한 열정, 오페라에 대한 사랑이 음악가로서의 본질, 그 중심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 글 이미라

19 사태로 유럽 극장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오페라는 유럽인들의 삶의 일부다. 그런데 요즘 극장 및 외부 연주들이 모두 취소되어 예술가들이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 앞으로도 재정난은 더욱 심해지고, 가수들을 향한 기회도 위축될 것이다. 더 심해진 경쟁으로 오직 양질의 예술가들만이 무대에 남지 않을까.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함부르크·뉘른베르크 등 여러 극장을 경험했는데.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한 삶은 오디션의 연속이었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조역들로 경험을 쌓던 중, 뉘른베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주최한 콩쿠르에 입상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극장으로부터 주역을 제안받아 커리어를 시작했다.
현재는 마이닝겐 극장에 소속되어 있다. 에이전시로부터 소개받은 오디션을 통해 극장과 계약했다. 남튀링겐주에 위치한 마이닝겐 극장은 1831년, 다니엘 오베르의 오페라 ‘프라 디아볼로’로 개관했다. 현재 베를린 필의 수장인 키릴 페트렌코와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가 거쳐간 극장이기도 하다.
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이번 시즌은 푸치니 ‘라 론디네’의 루제로 역과 ‘카르멘’의 돈 호세 역을 맡았다. 다음 시즌에는 3개의 새 프로덕션에 참여한다. 마스네 ‘베르테르’의 베르테르와 R. 슈트라우스 ‘아라벨라’의 마테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베니스의 하룻밤’ 중 공작 귀도 역할로 출연할 예정이다. 특히 베르테르와 마테오 역할은 꼭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기대가 크다.
많은 이들이 극장 소속 가수의 장점으로 ‘레퍼토리의 다양화’를 꼽는데. 나 또한 매 시즌 지속적으로 다양한 레퍼토리와 무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선생은 무대’라는 말처럼 무대에서 얻는 경험은 큰 자산이 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는가. 추억이 많은 작품은 2018년 국립오페라단 ‘코지 판 투테’의 페란도 역이다. 지금까지의 무대 중 가장 땀을 많이 흘린 작품이라 자주 회상하게 된다.
유럽 극장의 캐스팅 시스템이 궁금하다. 전반적으로 1~2년 전에 캐스팅 통보를 받는데, 나는 역할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 기간을 최대한 여유 있게 잡으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프로덕션의 연습은 보통 6주를 거쳐 최종 무대에 오른다. 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공연에 공연 관계자 및 기자들이 와서 프로덕션 구성과 지휘자·가수의 역량을 평가한다.
극장의 캐스팅에 항상 응하는 편인가? 가수마다 극장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극장이 무조건 요구한다기보단 상식선에서 역할들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할이 자신의 목소리에 크게 벗어나거나,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프로덕션이 겹쳐있는 경우는 디렉터와 상의해 조정해야 한다.
극장과 좋은 관계를 이뤄나가기 위해 갖춰야 할 자세라면. 가수로서 가진 본질을 잘 이행하고, 동료들과 화합하여 좋은 무대를 만들려는 태도가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국내 활동에 계획이 있다면. 오는 8월 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좋은 프로그램으로 찾아뵙기를 기대한다.

김광현 바리톤
김광현(1984~)은 서울대 졸업 후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이탈리아 베르디아니 콩쿠르, 피엔차 콩쿠르, 마그다 올리베로에서 입상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다.

내내 자신이 없었다. 출발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회 지휘자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대에 입학하는 성과를 냈다. 대학 시절에는 베르디 ‘리골레토’의 주역으로 무대에 섰고, 커튼콜에서 쏟아지던 박수 소리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도록 했다. 그런데 시작이 늦었다는 사실은 꽤 오랫동안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원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어서 떠난 이탈리아 유학길.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중 친구의 권유로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 오디션을 봤다. 성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라 스칼라 극장에서 노래할 날만 소망했는데, 마침내 꿈을 이뤘다. 그제야 스스로에게 확신이 생겼다. 글 장혜선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는 총 몇 명을 뽑나? 오디션을 통해 학생을 선정하는데, 오디션은 2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전 세계에서 많은 젊은 성악가가 지원한다. 약 일주일 정도 오디션을 진행하고 그중 최대 열 명이 합격한다.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가 당신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에이전시를 만나게 된 것도 라 스칼라 덕분이다.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일하는 에이전시를 초청해 오디션을 진행했다. 당시 오디션을 통해 지금의 에이전시를 만났다.
에이전시가 없었을 때에는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주요 극장이 주최하는 오디션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물론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얻을 수 있겠지만, 비공식 오디션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에이전시 소속이면 오디션을 거치지도 않고도 역할을 배정받기도 한다. 에이전시가 없으면 서류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많은 성악가들이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더라. 다른 유럽 국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탈리아는 활동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올해로 이탈리아에서 생활한지 9년이 됐다. 유학 초창기에는 중·소규모 극장에서 오페라를 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는 국가 재정난으로 많은 극장이 문을 닫았다.
직접적으로 체감한 경험이 있다면? 몇 년 전 나름 큰 도시에서 조역으로 오페라에 섰다. 그런데 연주비를 공연이 끝난 후 2년 뒤에 주더라. 문제는 그 극장 뿐 아니라 상당수가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공연 오디션에서 이탈리아 자국민만 지원해주려는 조짐도 보인다. 유학생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동양인이란 이유로 캐스팅 거절당한 적도 있다고.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 2년 차였다. 라 스칼라 극장에 새로운 캐스팅 매니저가 왔다. 아카데미 주최로 ‘세비야의 이발사’를 올리기로 결정했을 때인데, 당시 오디션을 통해 바리톤 레오 누치의 피가로 역을 커버하게 됐다. 한 달 정도의 연습이 끝나고 오페라 제작진이 극장 측에 피가로 역을 나에게 주라고 건의했지만, 캐스팅 담당자가 동양인이란 이유로 거절했다.
라 스칼라 아카데미 경험자로서 한국도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이 많아지길 희망하겠다. 이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 성악가들의 기량을 높이 평가한다. 갓 유학 온 학생들도 수준이 높다. 이 말은 한국의 성악교육 시스템이 훌륭하다는 말이다. 앞으로 한국 주요 극장에서도 영재 육성 프로그램이 원활히 진행돼, 한국 학생 뿐 아니라 해외 학생들도 초빙하면 좋을 듯하다. 영재 교육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해외 극장과의 교류를 통해 학생들을 교환할 수도 있겠다.
베르디 ‘팔스타프’를 꿈꾼다고.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팔스타프’ 포드 역으로 데뷔한 적이 있는데, 아직 팔스타프 역을 못 해봤다.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다.
국내 활동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데. 예술고 출신이 아닌데다가, 성악도 늦게 시작해 한국에 아는 선생님들이 별로 없다. 한국에서의 활동을 하고 싶은데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인 듯하다.
끝으로 성악가란? 몸의 감각으로 해야 하는 직업.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

안지현 소프라노
안지현(1983~)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쾰른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했고, 현재 비스바덴 헤센 극장 소속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독일 중부에 위치한 비스바덴은 고풍스러운 도시다. 마을 곳곳에는 온천과 카지노가 있고, 아름다운 공원은 화려한 건물에 둘러싸여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은 품격 있는 사교 매너를 지녔다. 비스바덴 사람들의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은 예술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비스바덴 헤센 극장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매해 봄이 되면 이 극장에선 비스바덴 페스티벌(Maifestspiele Wiesbaden)이 열린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음악 축제로 꼽힌다. 여름에 열리는 라인가우 페스티벌은 비스바덴 전 지역에서 펼쳐져 도시 자체가 연주회장으로 변모한다. 소프라노 안지현은 비스바덴을 상징하는 헤센 극장의 소속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글 장혜선

비스바덴 헤센 극장의 관객층은 꽤 보수적이라는 말이 있던데. 비스바덴 주민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 고령층이 많다. 그래서 공연 관객층도 보수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고전·낭만 오페라와 현대 오페라를 올릴 때 관객 수에 차이가 있다.
레지테아터 오페라는 지양하는 편이겠다. 새로운 연출을 시도할 경우 관객들이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더라. 반기지 않는 느낌이다.
1년에 몇 편의 오페라가 올라가는가? 매해 20개 정도 오페라 공연을 선보인다. 6~8개는 신작이고, 10~13개는 재공연이다. 오페라 외에도 가곡 리사이틀이 자주 열린다. 5월마다 열리는 비스바덴 페스티벌은 내년이면 125주년이 된다. 이 축제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함께 공연하는 즐거움도 크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축제가 취소되어 아쉽다.
비스바덴 헤센 극장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2년 동안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활동했다. 단원 생활이 끝난 후 연장이 되지 않아서, 객원 가수로 활동하면서 다른 극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수십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오디션이 이뤄지지 않아서 막막했다. 이런 과정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잠시 귀국하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메일을 받았다. 비스바덴 헤센 극장에서 소속 가수를 제안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비행기 안에서 몇 번이나 메일을 다시 읽었다. 꿈만 같았다.
프랑스로 유학 갈 계획도 있었다고. 대학 4학년 때 프랑스로 유학 오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적 있다. 그런데 주변에선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 독일 가곡과 어울린다고 하더라. 결정을 못 내리고 있던 중 어머니도 나의 독일행이 뭔가 운명 같다고 했다. 엉겁결에 독일로 유학을 왔다. 독일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울었던 기억도 난다.
소극적인 성향이라고 들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오페라 첫 연습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막상 연습이 시작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역할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은 주로 밝은 역할이다. 주로 명랑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맡아왔다. 기회가 된다면 ‘람메르무어 루치아’의 루치아, ‘리골레토’의 질다 역 같은 비극적인 여자 주인공을 해보고 싶다. 뮤지컬과 같은 다른 장르에도 호기심이 간다.
가장 인상 깊은 공연은? 2015년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서 그레텔 역을 맡았다. 내가 체구가 작은 편인데, 관객들이 어린 그레텔에서 나오는 성악가의 소리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안내데스크에 찾아가 나의 실제 나이를 물어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효상 테너
이효상(1983~)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인츠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현재 알텐부르크 게라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하며,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리사이틀과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다.

이효상의 노래 인생에는 두 명의 중요한 ‘할머니’가 있다. 한 사람은 그를 성악가의 길로 이끈 친할머니이고, 다른 할머니는 그에게 극장의 문을 열어준 오페라 가수이자 연출가 브리기테 파스벤더다. 현재 알텐부르크 게라 극장의 소속 가수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박서정

할머니의 말씀 때문에 성악을 시작했다고. 고교 시절 교내 중창단 활동을 했다. 발표회에 온 가족들은 노래하는 내 모습을 좋아했지만, 정작 나는 클래식 음악에 크게 흥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내게 “너는 노래를 잘하니 노래로 대학을 가렴”하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이었다.
그럼 오페라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지역의 시립합창단을 다니시던 교회 지휘자님께 레슨을 받고 있었다. 선생님 댁에 식사 초대를 받아 기다리는데, 오페라 ‘투란도트’ 영상을 비디오로 틀어주셨다. 이탈리아 아레나 극장 실황공연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오페라였다. ‘성악이 이렇게 멋있는 것이었나!’ 새삼 느꼈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게 된 계기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실제로 학사 재학 중 여러 선생님께서 이탈리아로 가서 공부하라고 추천하셨다. 나 역시 막연히 이탈리아 유학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2004년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말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더 섬세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독일행을 선택한 데는 극장 소속 가수 제도도 한몫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독일의 오페라 가수이자 연출가 브리기테 파스벤더와의 만남이 궁금하다. 프랑크푸르트 음대 재학 중 극장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오퍼에서 R. 슈트라우스 ‘카프리치오’에 출연했다가 연출가였던 브리기테 파스벤더 선생님을 만났다.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존경하고 싶은 대가였다. 처음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일에서는 철저하지만, 내게는 친절하고 따뜻한 할머니 같은 분이셨다. 작품을 준비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노래 지도까지 해주셨다. 내가 사례하려고 하니, 본인 수업료는 엄청 비싸다면서 농으로 넘기시고는 끝내 받지 않으셨다.
오디션 기회도 직접 마련해줬다고. 당시 교수님으로부터 브리기테 파스벤더 선생님이 나에 대해 “좋은 가수다. 오디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고 전해 들었다. 그때 많은 용기를 얻었고, 학교를 졸업해 지금의 극장에 소속 가수로 오게 됐다.
알텐부르크 게라 극장은 어떤 곳인가? 튀링겐주의 게라라는 지역에 있는 극장이다. 1902년 설립 당시 네오 르네상스와 아르누보 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축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1995년 알텐부르크 극장을 인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뮤지컬·발레·오페라·오케스트라·인형극 등을 공연하고 있다.
극장 생활 중 문화적·인종적인 차이를 느낀 적이 있나.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동양인은 ‘비 일반적’인 존재다. 외모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명백하게 다르다. 특히 오페라에서는 그 이질감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한 예로 분장할 때 종종 눈 화장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해준다. 서양인의 얼굴은 눈썹과 광대 사이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지만, 한국인은 얼굴에 큰 굴곡이 없어서 특히 신경 쓰는 것이다. 최근에는 독일 에이전시나 극장 관계자, 심지어 학교 교수조차 “이미 우리는 충분히 한국인 가수를 가지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말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그럼에도 최근 베르디 ’가면무도회‘의 주역을 맡는 등 중요한 테너로서 활약하고 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지내면서 성실함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대한민국의 오페라 가수로서 한국 음악계의 발전에도 미력하나마 도움을 보태고 싶다.

류용현 테너
테너 류용현(1983~)은 계명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탈리아 베키 토넬리 음악학교,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발로티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이탈리아 키지아나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류용현의 행복론은 긍정의 힘으로부터 시작된다. 유럽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현재 에이전시 막내 연습생(?)으로 들어간 자신을 그 스스로 아이돌 가수 연습생에 비유한다. 그런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겉모습은 부드러우나 속은 굳세다는 걸 금세 알게 된다. 글 장혜선

오페라 가수의 길은 두 스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계명대 대학원에서 만난 김완준 교수님이 오페라 가수의 길을 권하셨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오디션을 봤는데, 키지아나 아카데미에서 라이나 카바이반스카 선생님을 만났다.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결정한 이유는? 당연히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자 생각해왔다. 그런데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아내(소프라노 정선경)를 만났다.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당시 나도 독일에 가고 싶다고 거짓말을 했다.(웃음) 현재는 나와 아내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공연은 언제였나? 2015년이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의 성당 앞에서 야외 공연을 했다. ‘나비부인’의 핑커톤 역이었다. 당시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인식이 있다. 극장 오디션을 다니면서 동양인이어서 혜택을 못 받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잘하면 잘한다고, 못하면 못한다고 바로바로 피드백을 주는 곳이다. 상황에 맞게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이전시가 필수적인데. 지금 속한 에이전시에서 갓 일을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마치 한국 대중음악 기획사에 속한 아이돌 연습생 같다는 생각도 든다.(웃음) 에이전시에 들어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오디션을 거친 후 지금의 에이전시를 만났다. 꿈에 그리던 유명한 극장 오디션들은 대개 에이전시에 속한 가수들에게 먼저 기회가 온다. 극장 관계자들과 개인적으로 인맥을 쌓아 활동하는 가수들도 있지만, 극장과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에이전시가 있는 것이 좋다.
이탈리아 경제가 매우 안 좋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젊은 가수들의 기회가 위축되고 있다고 보나? 이러한 얘기는 유학 오기 전부터 많이 들었다. 막상 이탈리아에 와서 보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꾸준히 일을 하고 있더라. 특히 한국 성악가들이 활발히 활동한다. 극장이 많은 독일이나, 극장이 적은 이탈리아에서도 다채롭게 활약하는 모습이 보인다.
극장 소속이 아니니 늘 새로운 제작 환경에 적응해야 될 텐데,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웃으면서 초콜릿을 나눠준다. 뇌물이다.(웃음)
한국 오페라가 본받았으면 하는 점이 있나? 유럽의 주요 극장은 한 공연이 시작되면 10회 이상 한다. 한국 극장도 공연 횟수를 늘려 더 많은 가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지금 공부 중인 베르디 ‘에르나니’에 참여하고 싶다. 한국 무대에서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한국 무대는 언제나 그립다. 공연 오디션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좋은 오페라 가수는? 모든 무대에 겸손히 임하는 것. 앞으로 더욱 겸손하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즐겁게!

양귀비 소프라노
양귀비(1983~)는 서울대를 거쳐 뮌헨 음대를 졸업했다. 함부르크 콩쿠르(2006)·독일 베르가임 콩쿠르(2008)·마리아 카닐리아 콩쿠르(2009) 등에서 우승 및 입상했다. 2010년 베르디 ‘리골레토’에서 질다 역으로 켐니츠 오페라극장에 데뷔해, 현재까지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양귀비는 2011년 독일 작센주의 2010/11 시즌 오페라 공연을 대상으로 평론가가 뽑은 ‘최고의 가수’로 선정됐다. 작센주에 위치한 켐니츠 오페라극장에서 노래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이룬 쾌거였다. 어느덧 10년째 이 극장 ‘밥’을 먹고 지내게 됐다는 그녀의 이야기다. 글 박서정

음악을 하게 된 이야기부터 해달라. 오페라 가수라고 하면 흔히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일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발표할 때 제대로 서지도 못할 만큼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데 노래할 기회만 있으면 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 나는 노래를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가수를 결심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소프라노 신영옥의 독창회를 본 직후였다.
원래는 이탈리아 유학을 생각했었다고. 유학을 나가기 전, 미국과 유럽에 자주 나와서 둘러보았다. 몇 시간만 기차를 타면 다른 국가에 갈 수 있는 유럽이 매력적이었다. 이탈리아로 결정을 하고, 준비까지 하던 중에 부모님께서 먼저 유학 중이던 동생이 있는 독일을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평소 독일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그곳으로 떠나게 됐다.
10년 동안 활동 중인 켐니츠 극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하다. 2010년 3월 뮌헨 음대 졸업 후, 한국에 잠시 들어와 있었다. 에이전시가 켐니츠 극장 오디션을 4월로 잡았는데,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모든 비행기가 취소됐다. 다시 어렵게 기회를 얻어 겨우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오디션을 볼 당시의 상황이 기억나는가. 3개월 뒤 비자가 종료되는 상황에서 심리적인 압박이 컸고, 무리한 스케줄로 몸도 지쳐있었다. 오디션 바로 전날엔 심한 복통을 앓기까지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디션에 임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만족스러웠던 연주였다. 당일에 바로 계약서를 받았다. 원래는 객원 가수를 뽑는 오디션이었는데, 극장 측에서 “우리가 찾던 가수”라며 소속 가수를 제안했다.
극장 자랑을 해달라. 켐니츠 오페라극장은 ‘모더니즘의 도시’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켐니츠를 대표하는 극장이다. 오페라·발레·연극·인형극·오케스트라 5개의 분야로 이루어져 있고, 매년 20편 이상의 신작과 30편이 넘는 리바이벌 작품을 공연한다. 또한 ‘작센 지방의 바이로이트’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로 바그너 작품을 많이 제작해, 바그러니안들의 갈증을 해소해준다. 2019/20 시즌 캠니츠 오페라극장의 신작인 바그너 ‘신들의 황혼’은 독일무대협회상(Der Faust)에서 연출 부문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극장 소속 가수가 되면 어떤 점이 좋은가. 매 작품 오디션을 보지 않고 출연할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있다. 금전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예술가에 대한 복지도 잘되어있다. 코로나19로 극장들이 시즌을 종료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월급이 보장된다.
반면 극장에 불만족스럽거나 소속 가수로서 유의해야 할 점도 있을 것 같다. 극장과 가수의 관계는 솔리스트들 사이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주제다. 가끔 극장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역량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극장의 요구에 응했다가, 정작 무대에서 제대로 해내지 못해 해고 통보를 받은 동료도 여럿 봤다.
그렇다면 극장과 가수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일까? 프로 축구팀의 구단주와 에이스의 관계라고 할까? 항상 경기력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가수는 극장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실력을 보여주고, 극장은 이 가수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이상적인 공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10년 뒤 기대하는 나의 모습은? 초심을 잃지 않고, 매일 조금씩 더 발전하는 깊은 바다와 같은 예술가가 되기를.

한경석 바리톤
한경석(Elias Han, 1983~)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 도독, 베를린예술대에서 디플롬과 석사를 취득했다. 슬로베니아 오디나 오타 콩쿠르와 쾰른 IMWK 콩쿠르에서 입상했으며, 현재 독일 프라이베르크 미텔제크시쉐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노래는 사람의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습과 결과가 완전히 정비례한다”는 가수 송창식의 인터뷰. 이 말을 큰 힘으로 삼았다는 한경석은 그야말로 ‘연습의 힘’을 믿는다.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연습뿐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오페라 무대를 위해 협력하는 훈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앙상블, 합창단, 피아니스트와 함께 호흡하고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좋은 공연, 좋은 성악가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글 이미라

새로운 음악을 찾아 카세트테이프를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록·메탈 음악만 들었고, 성악가는 ‘열린 음악회’에 나와서 노래 부르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음반을 툭 건네주셨는데, 케이스를 열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 음악을 왜 여태껏 몰랐나 싶더라. 나름 새로운 음악 찾아 듣겠다며 잡지도 찾아보고 테이프도 열심히 모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며 성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후 어떤 인연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나. 좋은 선생님과의 만남 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3학년, 처음 성악을 시작한 나의 입시 선생님이셨던 바리톤 조봉현 선생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 가곡을 부르게 해준 베이스 손성규 선생님, 그리고 독일에서의 입시를 도와주셨던 바리톤 레누스 카슨 선생님과 사모님. 특히 20년 가까이 사사하고 있는 지그프리트 로렌츠 선생님은 세 학기 동안 테크닉만 가르쳐주셨다. 그 후엔 바흐 칸타타나 아주 간단한 가곡만 부르게 했고. 덕분에 기초를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성악가로서 꿈꿔온 생활이 있다면. 전 세계를 옆집 드나들 듯 돌아다니며 노래할 수 있는 것. 감사하게도 현재 독일과 유럽을 중심으로 멕시코·에콰도르 등 남미에서도 연주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소속된 프라이베르크 미텔제크시쉐(Mittelsächsisches) 극장은 어떤 곳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극장으로, 칼 마리아 폰 베버가 14세에 처음 작곡한 오페라 ‘숲속의 아가씨’가 초연된 곳이다. 작지만 공기 좋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 있다. 독일 작센주에는 예술지원기금(Kulturpakt)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극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급여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5% 상승했고, 이 외에도 여러 예술 분야에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극장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악보 첫 장에 적힌 바리톤 배역을 맡기로 극장과 계약했다. ‘라 보엠’의 콜리네 역으로 데뷔했고, 지난 시즌에는 조르다노 ‘안드레아 셰니에’의 제라드, 이번 시즌에는 베토벤 ‘피델리오’의 피차로나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 닥터 팔케 역을 소화했다. 다음 시즌에는 베르디 ‘돈 카를로’에 로드리고 역할로 오른다. 꼭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기쁘다.
직접 극장 홍보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가수 활동 외에도 극장장이나 대외 홍보부의 요청에 따라서 극의 홍보 영상과 포스터를 제작한다.
계약 기간은 보통 어느 정도 유지되는지. 지휘자와 레페티토어를 비롯한 솔리스트들의 계약(NV SOLO)은 1~2년 단위로 연장되기 때문에 매일의 리허설과 공연이 사실상 오디션이다. 보통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를 한 시즌으로 보며, 10월 정도에 계약 통보를 받는다.
10년 뒤 어떤 모습을 기대하나?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무대에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요즘 들어 시간이 지나야만 부를 수 있는 역할들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10년 후라면, 무대 위에서 리골레토나 제르몽 같은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임윤택 바리톤
임윤택(1983~)은 단국대 졸업 후 독일 뷔르츠부르크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바그너 콩쿠르,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2013~2017년 독일 노르트하우젠 극장 소속으로 근무했고, 2017년부터 메클렌부르크 극장에서 활약 중이다.

독일 북부에 위치한 슈베린은 일곱 개의 호수를 지닌 그림 같은 곳이다. 약 1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독일 연방주 수도 중 가장 아담한 규모다. 이 작은 마을이 공연 애호가들에게는 꽤 매혹적이다. 슐로스 정원에서 펼쳐지는 슐로스 페스티벌은 오페라 애호가를 슈베린으로 이끈다. 중심에 위치한 메클렌부르크 극장에는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발레 공연이 가득하다. 바리톤 임윤택은 독일 노르트하우젠 극장을 거쳐, 현재 메클렌부르크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리골레토’를 사랑하는 임윤택은 아마 드라마틱 바리톤을 꿈꾸는 듯하다. 무겁고 극적인, 그래서 더 원숙해야하는 바리톤. 임윤택은 자연과 예술의 도시 슈베린에서 조금씩 무르익고 있다.
글 장혜선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좋아한다고. 2019년 10월에 드디어 ‘리골레토’에 참여했다. 이번 시즌에만 총 13번의 ‘리골레토’가 예정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는데, 코로나19 사태로 마지막 세 번의 공연이 취소됐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바리톤이라면 바그너에 대한 욕망도 클 텐데.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인공 역을 꼭 해보고 싶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분은 어떠한가? 여가 시간이 즐거울 듯하다. 여가 시간은 늘 딸들과 함께한다. 극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면 평범한 세 딸의 아빠일 뿐이다.(웃음)
학창 시절부터 독일 라이프를 꿈꾼 이유는? 그냥 독일이 좋았다. 대학 시절부터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뷔르츠부르크 음대 졸업을 앞두고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다고. 일자리를 구해야하기 때문에 여러 오디션을 보던 시기가 있었다.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한 군데만 기다리고 있는데,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마지막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이었는데 노래도 못 부르고 떨어져 속상했다. 독일에서 좀 더 경험을 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래 부를 기회를 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보통 이런 메일은 무시당하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오디션 초대를 받았다. 마지막 순서로 노래했고 결국 합격했다.
오펀스튜디오 시절 은인(?)을 만났다고 들었다. 당시 노르트하우젠 극장장이 오펀스튜디오에서 공부할 때 나를 좋게 봤다. 그 기회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노르트하우젠 극장 소속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이후 그 극장장이 메클렌부르크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에게 솔리스트 자리를 제안했다. 지휘자와의 오디션을 거쳐 2017년부터 슈베린에서 노래하게 됐다.
극장장과의 좋은 관계가 인상 깊다. 유럽에서는 극장장이 바뀌면 솔리스트가 자연스레 교체된다고 하던데. 무대 위에서 멋진 모습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무대 뒤에선 동료들에게 실력으로 인정받는다면, 극장과의 관계는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가수라면 극장 측에선 오히려 잘 모시려(?) 한다. 극장과 가수가 서로를 신뢰한다면, 가수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오페라 가수에게 필요한 건 유연한 마음인 건가? 항상 유연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어떤 제작 환경에서든 잘 적응하리라 믿는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오페라의 미래는 어떠할까? 독일만 해도 이전보다 극장 수가 적어지고, 작품 규모도 작아졌다. 오페라는 고전 음악이지만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그 변화에 맞춰 어떻게 오페라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오페라 시장도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이제 막 성악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더라. 나는 꼭 라이브 공연으로 많은 음악을 접하길 추천한다. 실황 공연에서는 음반이나 영상에서 느낄 수 없는 다른 감동이 있다.
한국에서 곧 임윤택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나 역시 유럽 뿐 아니라 한국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

김효나 메조소프라노
김효나(1983~)는 이화여대 졸업 후 도미하여 뉴욕 매네스 음대에서 석사과정과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브라이트 성의 오페라 ‘홍루몽’을 노래하고 호평받아 재연을 앞두고 있다. 도르트문트 극장 소속 가수로 활약 중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페라 무대 전면에 메조소프라노가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희극 오페라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와 ‘신데렐라’의 두 여주인공은 메조소프라노의 낮고 풍성한 음성을 통해 대담히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때로는 묵직하고 어두운 빛깔의 목소리로, 베르디 ‘아이다’의 암네리스나 ‘나비부인’의 스즈키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기도 한다. 김효나는 지난 13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2년 전 독일행을 결심했다. 자신이 원하는 배역의 작품들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온 것이었다. 글 박찬미

주 무대였던 미국을 떠나온 이유는. 도르트문트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이 새로 부임해 대대적으로 소속 가수를 새로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극장에서 제작할 작품 목록을 살펴봤는데, 내가 꼭 하고 싶은 작품들을 다수 올릴 계획이더라. 때마침 내 음역대인 드라마틱 메조소프라노도 오디션 대상이었다. 미국에서의 일정 때문에 3일을 내어 독일에 오디션을 보러 다녀왔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도르트문트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2년이 됐다.
어떤 작품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인가. 바그너의 오페라에 드라마틱 메조소프라노 역이 다수 등장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브랑게네, ‘로엔그린’의 오르트루트, ‘파르지팔’의 쿤드리 등. 특히 도르트문트 극장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한 시즌에 한 작품씩 올리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내가 독일행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다. 다음 시즌에 그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의 프리카 역으로 무대에 선다.
현재 도르트문트 극장에 유일한 메조소프라노로 활약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린이 오페라에도 한 시즌에 한 작품 정도 출연하고 있다. 전 시즌에는 사자 역이었고, 올 시즌에는 낙타 역을 맡았다. 꽤 재미있게 일했다. 그러고 보니 나만 매번 동물이었다.
프리랜서 계약이 흔한 미국에서도 활동해봤기 때문에 유럽 오페라계와의 차이를 더 선명히 느꼈을 것 같다. 극장에 소속되었을 때의 큰 혜택은 역시 안정감이다. 아무래도 프리랜서로 10년 이상 일해 봤기 때문에 이 안정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미국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땐 매니지먼트도 없는 상태였는데, 혼자 이메일을 얼마나 돌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오페라 가수가 갖춰야 할 자질이 있다면. 자신을 잘 아는 것. 몸을 악기로 사용하는 성악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악기를 잘 알아야 한다. 그 악기가 가진 음역과 특색에서부터, 식사나 수면 습관, 적절한 습도 등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있을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는 방법까지도. 자신을 알면 수많은 ‘선택’을 하는 데 있어 훨씬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를 극장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독일 극장에서는 한 가수가 여러 장르 혹은 파트를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때 자신과 맞지 않는 음역이나 파트의 역할을 무리해서 노래하게 되면 목이 상할 것이다. 그 책임은 누구도 져주지 않는다. 본인이 잘 판단해서 극장과 절충해나가야 한다.
강한 자립심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차이콥스키 ‘오를레앙의 소녀’의 잔 다르크.

송성민 테너
송성민(1982~)은 2014년 독일 뮌헨 방송교향악단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을 맞아 제작한 오페라 ‘사라진 불’ 무대에 올라 전 유럽에 그 목소리를 각인시켰다. 2020/21 시즌에는 베를린 코미셰 오퍼, 바젤 극장 등에서의 데뷔를 앞두고 있다.

평범한 듯 보였던 컴퓨터 공학도가 촉망받는 테너로 탈바꿈한 데 걸린 시간은 단 7개월이었다. 2004년 봄, 목소리가 좋다는 지인의 말에 그 길로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해, 같은 해 겨울 연세대 성악과에 입학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과연 타고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학부 졸업 직후, 독일로 떠난 그는 3개월 만에 뮌헨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에 합격했다. 석사 학위의 중간 과정도 건너뛴, 놀라운 결실이었다. 마치 세상은 테너 송성민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글 박찬미

현재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극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뮌헨 음대를 졸업한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에이전시의 추천을 통해 자르브뤼켄 극장에 발탁돼 2017년부터 무대에 서고 있다. 자르브뤼켄 극장은 독일 서쪽에 위치해 프랑스와 국경을 공유한다. 룩셈부르크, 벨기에와도 가깝다. 프랑스 국경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어서 주말이면 시내에서 프랑스인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극장은 프랑스 오페라 작품도 자주 올린다. 자막도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병기한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도시다. 한국 음악가가 활동한 전례가 있는가? 2000년대 초, 동양인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던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이 테너 배재철과 전속 계약을 맺고 주역을 맡겼다. 그가 테너로서 전성기를 맞은 곳이다. 정명훈은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에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소속 극장에서 주로 어떤 역할을 맡는가? 리릭 테너 역할을 주로 맡는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코지 판 투테’,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돈 카를로’, R.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구노 ‘파우스트’, 로시니 ‘윌리엄 텔’ 등에서 주역을 노래하고 있다.
한 해에 참여하는 작품의 개수는? 자르브뤼켄 극장에서는 4~5개의 작품으로 총 30회 정도 공연한다. 다른 오페라극장에서 1~2개의 프로덕션에도 참여한다. 콘서트도 30회 정도 소화하고 있다. 예정된 공연은 최소 6개월에서 최대 2년 전에 미리 공지 받아 준비를 시작한다.
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면 어떤 장점이 있나? 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 등의 오페라극장에서는 극장 소속으로 1~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거나 프로덕션 단위로 계약하는 두 가지 방법이 혼용된다. 반면 이탈리아·프랑스·미국·영국 등은 주로 프로덕션 단위로만 가수를 채용해 오페라를 제작한다. 전자의 경우엔 한 도시에 정착하기 쉽고, 수년간 안정적으로 가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에 맞지 않는 배역을 맡거나 너무 많은 공연 횟수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성향에 맞게 극장과 계약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장과 소속 가수들 사이 관계는 어떠한가?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갑을 관계인 경우가 많다. 극장장이 바뀌면 새로운 팀이 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존 가수들이 설 자리를 잃곤 한다.
독일 에이전시에 소속되는 과정이 궁금하다. 에이전시와 인연을 맺는 경로는 다양하다. 콩쿠르 결과로 에이전시로부터 제안을 받는 경우도 있고, 오디션에 참여해 자리를 따낼 수도 있다. 오페라 관계자로부터 추천되어 연결될 때도 있다. 보통 오페라 가수는 10~15%의 커미션을 에이전시에 지불한다.
해외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오페라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의 오페라를 경험해 본 바가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연습 시간·임금·역할 분담 등의 근무 조건과 관련해 통일된 형식이 갖추어진다면 제작환경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류지상 베이스
류지상(1982~)은 연세대와 독일 쾰른 음대에서 공부했다.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 에른스트 헤플리거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현재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노버에서 기차로 50분 정도를 이동하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소도시의 시내에는 오래된 건물도 남아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도시 중심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가 재건된 극장. 외관은 소박하지만 우아하다. 종전 후 독일에서의 첫 공연은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에서 이뤄졌다. 당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초연됐는데, 음악의 고장인 독일에서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류지상은 2014년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심사위원 크리스티안 칼슈테트에게 발탁되어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극장에서 활동하다가, 현재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글 장혜선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다가 독일로 가게 된 계기는? 2018년 독일 볼프스부르크에서 베르디 ‘레퀴엠’의 독창자로 무대에 섰다. 그 공연을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의 관계자가 봤다. 그분에게 캐스팅되어 현재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2016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자라스트로 역이 가장 인상 깊다.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의 나라다. 모차르트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모차르트 오페라의 대사와 가사 내용을 알고 있더라. 큰 부담을 느끼며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박수를 받을 때 감동적이었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은 1년에 많은 공연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맞다. 1년에 약 120여회 오페라를 공연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멘델스존이나 베를리오즈, 리스트, R. 슈트라우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들이 지휘자로 활동한 곳이다. 지금은 지휘자 스르바 디니치가 음악감독으로 있다.
극장 소속 가수는 1년에 몇 회 정도를 무대에 서나? 정기적으로 오른다. 나는 1년에 평균적으로 50~60회를 선다. 1년이 약 52주인 점을 감안하면 매주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셈이다.
쉬는 시간엔 무얼 하나? 브라운슈바이크는 골목마다 운치가 참 좋은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좋아하는 배역은? 현재 주어진 역할을 가장 좋아하려고 노력한다. 이번 시즌에는 ‘나부코’의 자카리아 역, ‘예브게니 오네긴’의 그레민 역을 맡았다. 다음 시즌에는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 역과 ‘루살카’의 보드닉 역이 예정됐다.
극장과의 소통은 원활한가?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질문을 많이 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라운슈바이크 외에도 유럽 여러 극장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새로운 지휘자나 연출자를 만나는 첫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 첫 연습 때 작품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자주 보지 못해 아쉽다.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극장에 소속되어 일하면 미리 계약된 공연들을 소화하느라 바쁘다.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의 공연 제의가 들어와도 포기해야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생긴다.
유럽에서 이루고픈 작은 소망이 있다면? 유럽에서 한국 오페라를 꼭 해보고 싶다.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이 한국 오페라를 매우 궁금해 한다. 기회가 된다면 유럽 관객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소개하고 싶다.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색깔. 자기만의 색이 분명해야 한다.

김효종 테너
김효종(1982~)은 연세대 졸업 후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대, 뤼벡 음대, 하노버 음대에서 순차적으로 공부를 마쳤다. 2012년부터 브레멘 극장 소속 가수로 활약 중이다.

독일 브레멘 극장은 흔히 말하는 레지테아터 극장이다. 레지테아터(Regie-Theater)란 연출가가 시대와 배경 설정을 자유로이 바꾼 무대를 말한다. 따라서 오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연출가의 힘이 막강하다. 테너 김효종은 2012년부터 브레멘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브레멘에서 일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접했다고. 현재 국내에선 점차적으로 독일의 레지테아터 연출을 주목하고 있는데, 정작 레지테아터 메카에서 활약하는 김효종은 오히려 이곳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전통 오페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 장혜선

브레멘 극장의 특징은? 브레멘 극장은 유한책임회사(GmbH)이다. 오페라·연극·무용·학생을 위한 네 개의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접하지 못하는 특별한 연출 기법을 선호한다(*유한책임회사는 운영재원은 지방정부가 대부분 안정적으로 지원해주되 예술적 자유를 보장과 기업으로부터의 펀드레이징 및 자체 수입원의 개발을 위한 문화시설).
연출이 실험적이고 기법도 다양해지면 성악가들의 동선과 움직임, 새로운 시도도 다양했을 텐데. 처음 브레멘 극장에서 일했을 때 혼란스러웠겠다. 브레멘에서 데뷔 후 첫 시즌은 많이 힘들었다. 실험적인 연출을 많이 접하며 8년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생각하는 오페라 기준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음악을 듣는 취향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바뀌더라. 오페라는 16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여러 실험적인 연출이 많아지면서 ‘오페라의 오페라다운’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극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무조건 응하는 분위기인가? 가끔 가수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 배역, 본인이 가진 소리보다 무거운 배역을 맞곤 한다. 충분한 연습 기간을 두고 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무리하면 안 된다. 극장에서는 가수의 평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현명하게 판단하길 바란다.
주로 무슨 역할을 맡는지? 리릭 테너로 서정적인 목소리의 배역을 주로 맡는다. 목소리와 성격이 밝은 편이어서, 밝은 느낌의 로시니 오페라를 선호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도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백작 역이다.
도전하고 싶은 작품도 로시니인가?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를 해보고 싶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는데, 이 이야기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처음 대학 입학은 실용음악으로 했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란 걸 금방 깨달았다. 대학을 다니며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한 뒤 큰 감동을 받았고, 성악에 입문했다.
브레멘 극장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2012년 5월부터 함께 일했다. 이전에는 뤼벡 음대의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2년간 장학생으로 있었다. 최대 2년까지 장학생으로 머물 수 있는데, 2년째 되는 해에 브레멘 극장 오디션에 합격했다.
극장 소속 가수의 가장 큰 장점은? 극장에 소속되면 좋은 레퍼토리가 쌓이게 된다. 많은 레퍼토리는 성악가의 가장 큰 자산이다.
오페라 활동을 하면서 음악관이 바뀐 게 있다면. 지금까지 다양한 무대에서 수많은 음악가를 만났다. 그러면서 깨닫는 점은 단순히 테크닉만 가진 가수는 오래갈 수 없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삶 자체에 인격이 묻어 나와야 한다.
지난해 국립오페라단 ‘윌리엄 텔’로 한국 데뷔 무대를 가졌다. 계획된 다른 국내 공연은 없나? ‘윌리엄 텔’ 이후 일정이 안 맞아서 다른 국내 활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좋은 작품으로 다시 한국 관객을 만나고 싶다.
국내 오페라계가 본받았으면 하는 해외 오페라 시스템은? 대관을 통한 수익 창출이 아닌, 유럽 극장이 가진 전속 계약 시스템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연주가 없을 땐 주로 축구 게임을 즐긴다고. 축구 게임을 하면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요즘은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게임을 못하고 있다. 주로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차정철 베이스바리톤
차정철(1981~)은 서울대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 바드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커네티컷 오페라 콩쿠르, 게르다 리스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다.

차정철은 늘 뉴욕을 꿈꿨다. 성악을 배우던 학생 시절부터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막연히 동경했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지루한 연습으로 하루를 채운다. 그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1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차정철은 매일이 결정적 순간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뉴욕 중심부에 위치한 줄리아드 음악원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들어가기 위해 차근차근 자신을 발전시켰다. 마침내 꿈을 이뤘지만 여전히 성장을 원한다. 우물은 깊이 팔수록 깨끗한 물이 나오고, 나무는 뿌리가 깊으면 더욱 크게 자란다. 그는 오늘도 성악가로서 깊이를 더하고 있다. 글 장혜선

줄리아드 음악원 입학은 기적적으로 이뤄졌다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의 활동을 꿈꿨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줄리아드 음악원에 합격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준 높은 영어 점수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일하는 한 오페라 관계자가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줄리아드 음악원에 꼭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계속 어필했다. 그 관계자는 교수들과 논의했고, 마침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이 허가됐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선 어떻게 활동하게 됐나? 뉴욕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때 심사위원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캐스팅 감독이었다. 그분이 나를 눈여겨 본 뒤 오디션을 제안했다.
왜 그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꿈꾼 건가? 그냥 어릴 때부터 뉴욕 중심에 있는 이 극장을 열망했다.
주로 무슨 역할을 맡는지? 바소 칸탄테(basso cantante)에 해당하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베이스의 특성상 왕이나 아버지 역할이 많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베이스로서 주역을 할 수 있는 ‘돈 조반니’를 가장 좋아한다.
미국의 국민 가수인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과도 재밌는 인연이 있다고. 2013년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돈 파스콸레’를 공연했다. 공연 중 가발을 벗는 장면이 있는데, 계획보다 너무 빨리 벗겨져 관객이 즐거워했다.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도 그 공연을 보러 왔었다. 이후 그녀가 제작에 참여한 오페라 ‘벨 칸토’의 주인공 역을 제안 받았고, 2015/16 시즌 시카고 세계 초연에 서게 됐다. 이 작품은 2018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배우 줄리안 무어와 켄 와타나베가 참여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미국에서도 이탈리아처럼 매니지먼트가 필수적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객원 가수인 경우 매니지먼트가 있으면 더 많은 오디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극장 소속 가수라면 굳이 필요 없다.
미국 오페라 시스템 중 한국에 착안됐으면 싶은 건 무엇인지? 이전 한국 오페라는 프롬프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찾기 힘들다. 프롬프터는 오페라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토록 원하던 뉴욕에서의 삶은 만족하는가? 평소엔 어떠한 일상을 보내나? 극장이 맨하탄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덕분에 허디슨 강변을 따라서 자주 산책한다. 시간이 나면 새로운 요리에 도전한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역할은? 대부분의 베이스가 그렇듯, 베르디 ‘돈 카를로’의 필립왕을 하고 싶다. 아마 저음 파트 성악가의 최종 목적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부코’에 나오는 자카리아도 꼭 해보고 싶다.
극장에서 활동하면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느껴본 경험은 없는지?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동양인이 서양에서 작품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마당놀이에 서양인이 주인공을 맡는다면 어색할 테다.
10년 후 차정철은 어떠한 가수가 되어있을까? 대나무처럼 단단하지만 은은한 향기를 지닌 음악가로 성장하고 싶다.

심윤성 테너
심윤성(1981~)은 경북대를 거쳐 트로싱겐 음대 전문연주자·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하고, 고음악 전문연주자과정을 수료했다. 슈투트가르트 음대 오페라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한 그는 2011/12 시즌부터 뮌스터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파사우 콩쿠르 등에서 우승했고, 유럽 전역의 페스티벌에 초청받고 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다. 그가 슈투트가르트 극장으로, 또 다시 뮌스터 극장으로 갈 수 있었고, ‘마태 수난곡’의 중요한 선율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준비’의 자세 때문이었다. 심윤성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전과 긍정의 마인드로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레 주변을 움직였고, 기회를 만들었다. 그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쟁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글 이미라

트로싱겐 음대에서 성악으로 전문연주자·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하고, 고음악 전문연주자과정까지 수료했다. 공부를 하며 나의 장단점을 먼저 파악했다. 내 성량과 음색에는 오페라보다 오라토리오와 리트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리트와 고음악을 공부했고.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라 보엠’에 오르며 오페라의 매력에 빠졌다.
우연한 기회라니. 슈투트가르트 음대 오페라학교에서 ‘라 보엠’의 테너 역할을 외부에서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을 봤다. 합격해 공연을 잘 마쳤고, 오페라학교 학장과 지휘 교수의 추천으로 슈투트가르트 극장 오펀스튜디오에 지원했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오디션이었는데, 그중 첫 번째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결국 합격했는데. 마음이 상해서 두 번째 오디션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지휘자가 마감 당일 전화를 해왔다. 본인이 면접비도 송금하고 지원서도 작성했으니, 서명만 하라는 거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다시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1년간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일했다.
준비되었기 때문에 기회도 따른 것이 아닐까. 한번은 구스타프 쿤의 지휘 아래 합창단원으로 ‘마태 수난곡’ 공연에 참여했다. 무대에 오른 유명 테너 솔리스트가 준비되지 않은 모습에 지휘자는 화가 났고, 테너의 아리아 파트를 외워두었던 내게 극적인 기회가 왔다. 결국 그 공연에서 내가 솔로 파트를 불렀고, 그것을 계기로 다음 해에는 솔리스트 정식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또 그것을 계기로 아우디 100주년 기념음악회에 솔리스트로 초청받았다.
현재는 뮌스터 극장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데. 뮌스터 극장 주역이었던 테너 신상근(현 경희대 교수)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난 자리였다. 뮌스터 극장은 연간 약 600회의 공연이 열리고, 20만 명의 관객이 찾는 곳이다. 안정된 재정 상태와 잘 구축된 홍보팀으로 많은 학생들이 극장을 찾고 있으며. 연간회원도 많다.
극장장 교체로 한차례 위기도 있었다고. 2012년에 극장장이 울리히 페터스로 교체되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첫 작품에서 함께했던 연출가가 연습에 성실히 임했던 나를 좋게 보았고, 극장장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더라. 결국 극장장과 함께 오기로 한 테너가 뮌헨에 남아있겠다고 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재계약이 이뤄졌다. 그렇게 8년째 함께하고 있다.
주로 어떤 무대에 서고 있나. 주로 목소리에 잘 맞는 리릭 역할과 바로크 오페라에 오른다. 오라토리오 공연도 많아서 그 연습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가곡 파트너와 함께 일주일에 2~3시간씩 가곡 연습도 하고. 1년에 4회 정도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콘서트도 열고 있다.
현재 극장과 에이전시 모두에 속해있는데. 에이전시를 통해 계약할 경우 2년 계약이면 대략 5%, 1년 계약이면 10% 정도를 월급에서 지불한다. 하지만 해외인력의 독일취업을 지원하는 해외전문인력중개센터(ZAV)를 통해 오디션을 보고 통과할 경우, 그 비용 없이 계약이 가능하다.
독일에서 바라본 오페라의 미래는. 독일 역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두 극장이 합병되기도 하고, 젊은 가수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목하에 중견급 가수들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출연료가 낮은 젊은 가수와 계약한다. 물론 뛰어난 이들도 많지만, 공연의 질이 낮아질 것이란 우려는 어쩔 수 없이 따른다.

이호철 테너
이호철(1980~)은 서울대 음대와 함부르크 음대를 졸업했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2007~2009)·만하임 극장(2009~2017)에서 소속 가수로 활동했다. 2017년부터 다름슈타트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 중이며, 독일·프랑스·스위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낡은 아파트에 가난한 청년 예술가들이 둘러앉았다. 예술은 무엇이니, 사랑은 무엇이니 하더니 이내 생활을 걱정한다. 푸치니 ‘라 보엠’이 아닌, 2005년 봄, 베를린이 배경인 이야기다. 베테랑 오페라 가수 이호철을 키운 것은 8할이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버텨온 청춘 시절이다. 글 박서정


유학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많은 성악가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던 때였다. 나 역시 이탈리아어학원도 다니면서 정보를 얻으려 애썼다. 하지만 비자 취득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다.
독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인가.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선배들과 같이 베를린으로 발을 디뎠다. 마치 오페라 ‘라 보엠’ 속 주인공들처럼, 남자 셋이 한집에서 지내면서 독일 학교 입시를 준비했다. 돌이켜보면 음악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함부르크 음대에 합격한 뒤에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입학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다시 독일로 나왔다. 그런데 미리 예약해두었던 집에 2주 뒤에나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메뚜기처럼 이집 저집을 왔다갔다하며 버텼다.
독일어도 익숙지 않았을 텐데. 잘 못 하는 독일어 실력으로 보낸 첫 학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영어와 독일어를 섞어가며 수업을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을 모두 버텨내고, 극장에 입성했다. 2007년 뮌헨의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소속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의 세계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더라. 그래도 근면 성실하고 즐겁게 활동하려 했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다름슈타트는 현대음악의 산실과도 같은 곳이다. 작곡가 윤이상은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를 통해 유럽 음악계에 데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도시 극장처럼 자본과 인프라가 풍부하지는 않다. 대신 실험정신만은 정말 뛰어나다. 40대의 젊은 극장장을 등용한 것부터 그렇다. 그는 극장의 재정적 한계를 과감한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돌파하고 있다.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젊은 연출자를 등용하고, 극장에 갖춰진 시설을 백 퍼센트 이상 활용해낸다.
실험적인 무대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본다면. 지난 시즌에 메시앙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올렸다. 5시간이 넘는 대작이었다. 전부 극장 소속가수로 이뤄졌고, 극장장이 직접 연출했다. 오케스트라를 과감히 무대 위로 올려 배경으로 사용하고, 대형 프로젝터 3개를 사용해 극장 전체를 무대처럼 꾸몄다. 창의적인 연출로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고, 추가공연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름슈타트 극장이 코로나19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도 궁금하다. 역시 아이디어다. 독일의 모든 극장은 3월부터 관객이 있는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다름슈타트 극장은 ‘오페라의 뮤직비디오’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 극장뿐 아니라, 코로나19는 오페라계 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실험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럽, 특히 독일의 오페라 시스템이 전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독일 극장은 드라마투르그의 권한이 막강하다.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향을 제시하며, 때로는 과감하게 내용을 바꾸기도 한다. 현시점에 오페라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극장 소속가수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해준다면. 오페라는 협업의 예술이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작품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극장 생활에서 동료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일 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대화를 통해 극장 관계자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 역시 가수로서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훌륭한 성악가도 될 수 있다.
국내 활동 계획은. 2015년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마술피리’로 국내 데뷔 무대를 가졌다. 국내에서 자주 활동하고 싶지만, 독일 극장의 스케줄 때문에 쉽지 않다. 언젠가는 후학을 양성할 기회가 오기를 항상 기대하고 있다.

정승기 바리톤
정승기(1979~)는 중앙대 성악과에서 공부한 후 독일 카를스루에 음대에서 석사를 공부 했다. 퀸소냐 콩쿠르, 툴루즈 콩쿠르, 빌바오 콩쿠르, 오타비오 지노 콩쿠르에서 1위했다.

그를 성악으로 이끈 건 ‘라 보엠’이다. 고교 시절, 우연한 기회로 푸치니의 ‘라 보엠’을 접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내려앉은 ‘라 보엠’ 선율. 그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며칠을 보냈다. 몇 달 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였다. 정승기는 스스로 ‘라 보엠’을 예매해 극장을 찾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와 낭만적인 아리아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후 오페라 가수의 꿈이 움텄고, 독일 카를스루에 극장에서 활약하는 바리톤으로 성장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캐릭터를 마주하면 가슴이 뛴다고 한다. 글 장혜선

원래 감정적인 편인가? 그런가?(웃음) 2016년에 했던 프란체스코 칠레아의 오페라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미쇼네 역이 기억에 남는다. 무대감독인 미쇼네가 오페라 가수 르쿠브뢰르를 짝사랑하는 내용이다. 고백하려 하지만 연인이 있는 걸 알게 되고 실망한다. 하지만 그녀가 늙어 죽을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준다. 캐릭터가 와 닿아서 할 때마다 가수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생긴다.
군대 전역 직후 국내 콩쿠르에서만 8번의 입상 기록을 세웠다. 운 좋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노래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군악대에 입대하니 하루 종일 노래 생각만 나더라. 휴가 때마다 국내 유명 콩쿠르를 관람했고, 오페라 스타 가수들의 음반을 사왔다. 제대를 하자마자 국내 콩쿠르에 도전했다.
카를스루에 극장에 오기까지는 해외 콩쿠르의 역할이 컸을텐데. 해외 콩쿠르 심사위원이던 각 극장장들과 인연을 맺어 유럽 극장 캐스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9년부터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에서 소속 가수로 활동했고, 그곳에서 카를스루에 극장 관계자가 내 노래를 우연히 듣고 캐스팅을 제안했다. 2011년부터 카를스루에 극장 소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카를스루에 극장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위치했다. 슈투트가르트 극장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독일 극장은 등급이 나눠져 있다. 1A-2A-A-1B-B-C-D 순이다. 카를스루에 극장은 2A 등급에 속한다. 많은 레퍼토리를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장 전속 솔리스트는 28명이다.
처음 계약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위한 바리톤으로 했다고. 벨칸토 오페라부터 드라마틱 오페라까지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 위주로 많이 하고 있다. 음역대나 음색이 어울리면 바그너 같은 독일 오페라나, 프랑스 오페라도 맡는다.
가장 즐기는 배역은?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쿠르베날 역.
극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을 주면? 처음에는 잘 하고 싶다는 욕심에 극장에서 제안하는 모든 배역을 다 하고자 했다. 어려운 역이어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아무리 멋진 역이어도 나와 맞지 않는다면 극장과의 신용이 떨어진다는 걸 알았다. 즉 완벽히 소화할 수 없는 배역이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탈리아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탈리아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다. 독일에서의 시즌 중 여유가 생기면 이탈리아에서도 공연한다. 점차 극장과 신뢰가 쌓였고 추후 시즌은 오디션 없이 캐스팅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점검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좋은 성악가가 되려면 자기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최고의 스승이다. 자존감은 가지고 있되 자신을 한없이 낮춰야 한다고나 할까. 나를 낮출수록 올라갈 곳이 더 많이 생기더라.
10년 후 어떤 가수가 되어 있을까? 딱 10년만큼의 연륜이 더해져 있길. 연륜이 그대로 음악에 묻어 나오길. 외모는 그대로이길 바랄 뿐이고.(웃음)

이상민 바리톤
이상민(1977~)은 연세대를 거쳐 드레스덴 음대에서 석사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체코 안토닌 드보르자크 콩쿠르(2004)·컴페티션 델 오페라 콩쿠르)(2007) 등에서 우승했다. 드레스덴 젬퍼오퍼와 도르문트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뉘른베르크 극장 소속 가수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친숙한 도시 뉘른베르크. 이곳의 국립극장에서 이상민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주역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그가 맡을 한스 작스 역은 사랑을 포기하는 인물이지만, 현실에서 이상민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꿈꾸며 명가수가 되기를 결심한 기사에 더 가깝다. 뉘른베르크 극장의 주역을 도맡는 가수가 되기까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은 바로 아내라고 말한다. 글 박서정

아내 역시 성악가라고. 아내(소프라노 강경해)가 나보다 먼저 오페라 가수의 길을 걸었다. 시즈오카 오페라 콩쿠르(2002)에 3위로 입상하며, 곧장 드레스덴 젬퍼오퍼에 스카우트됐다. 바로 옆에서 아내를 지켜보며 막연했던 오페라 가수의 꿈에 확신을 가졌다.
결국 부부가 같은 극장에서 활동하게 됐다. 아내를 따라간 독일에서 주어진 선택지가 얼마 없었다. 독일어라곤 “구텐 탁”밖에 못했는데, 다행히도 드레스덴 음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학장이셨던 위르겐 하르트피엘 교수님의 주선으로 젬퍼오퍼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극장장이었던 게르트 워커에게 발탁되어 독일 오페라극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도르문트와 뉘른베르크로 주 무대를 옮겼다. 영화에서 ‘페르소나’라 하여 한 명의 감독과 배우가 계속해서 연을 이어가는 것처럼, 극장장의 페르소나가 되어 같은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극장장이 바뀌면 대부분의 소속 솔리스트가 교체된다. ‘15년간 근속하지 않은 솔리스트는 새로운 극장장 취임 시 어떠한 사유 없이 사임을 요구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극장법 제61조를 통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권리다. 나는 도르문트 극장에서 뉘른베르크의 극장장이 된 젠스 다니엘 헤어초크와 함께 자리를 옮긴 경우다.
뉘른베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이 도시와 바그너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딴 오페라가 있을 정도로 바그너의 사랑을 듬뿍 받은 도시다. 바그너에 특출난 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어느덧 15년 차 오페라 가수다. 극장 소속 가수의 장점은 많은 레퍼토리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맡았던 여러 배역 중 베르디 ‘나부코’의 나부코 역과 R. 슈트라우스 ‘아라벨라’의 만드리카 역을 좋아한다. 둘 중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나부코 역은 절정에 다다랐던 교만과 폭주를 내려놓고 회개하는 장면을 표현해낼 때 희열이 굉장하다. 만드리카 역은 까다로운 음정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가사가 어렵지만, 한번 매료되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오랜 세월 오페라극장에 몸담으며 체감하는 변화도 있을 것 같다. 오페라극장의 재정난 문제다. 중·소규모 극장은 게스트 가수를 부르지 않고, 극장 내에서 자체적으로 프로덕션을 꾸리는 경우가 늘었다. 극장 입장에서는 경력이 풍부한 가수보다, 경험은 부족해도 젊고 신선한 가수가 ‘가격경쟁력’면에서 뛰어난 것이다. 어찌 보면 젊은 성악가들에게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활동하는 동안 슬럼프에 빠진 적은. 오페라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유사한 무대·연출·의상으로 관객과 만나왔다. 그래서 지금의 연출가들은 파격적일 만큼 독특한 연출을 요구하곤 한다. 지시대로 대사와 전혀 다른 파격적인 행동을 하면서 괴리감까지 느꼈다. 연출가와 합의점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면서부터 차츰 극복할 수 있었다. 사전에 음정·박자·가사를 정확하게 숙지하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가. 나의 바람은 죽을 때까지 노래하는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박성규 테너
박성규(1977~)는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후 레오카발로 콩쿠르·잔도나 콩쿠르·마르세유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후 이탈리아 극장은 물론, 프랑스·스페인·룩셈부르크 등 유럽 주요 무대에도 올랐다. 최근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체코 프라하 극장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칼라프로 출연했다.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고 생활한 지 어느덧 15년. 성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주로 해외에서 활동을 이어온 박성규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국립오페라단 무대였던 ‘메피스토펠레’(2010)와 ‘시몬 보카네그라’(2011)를 꼽은 것. 국내 공연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단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성악가로서 이따금씩 만나는 국내 관객에게 최고의 무대를 선물하고 싶은 애정 어린 사명이다. 그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당시의 공연은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까지 전해져 크게 호평 받았다.
글 박찬미

이탈리아에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음악원에서 바르바치니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음악적 가르침을 주면서도, 내 매니저가 되길 자처하셨다. 모데나 극장에 직접 전화해 나를 추천하고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할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그렇게 로마 국립오페라·피렌체 국립오페라·나폴리 산카를로 국립오페라 등 이탈리아 곳곳의 극장에서 주역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내 뒤에는 항상 스승이자 매니저인 바르바치니 교수님이 계셨다.
프로덕션 마다 계약을 이어간 것인가? 맞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도 2005년부터 약 15년 간 프리랜서로 활동해오고 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항상 새롭다. 프로덕션마다 계약을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때도 있고, 지금처럼 코로나 사태로 모든 극장이 문을 닫으면 수입이 거의 없다.
이탈리아 극장의 프로덕션 제작 특징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에서는 새로운 프로덕션을 준비하는 데만 6~7주가 소요된다. 그리고 7~8개월로 이어지는 한 시즌 동안 10~15회 정도의 공연을 나누어 올린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경우 좀 더 밀도 있게 진행된다. 첫 연습에 돌입해 마지막 공연의 막이 내리기까지 대략 6~7주. 공연은 7~8회 정도하고, 이를 두 명의 캐스팅이 나누어 소화한다.
활동 중에 출신으로 인한 부당한 처우를 받은 적이 있는가? 최근에 오히려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극장 근처 광장을 걷고 있는데 이탈리아인 몇 명이 내게 다가와 테너 이원준을 아냐고 묻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트리에스테 극장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출연한 이원준의 음성을 잊지 못한 팬들이었다. 내게 혹시 한국 사람인지, 이원준을 아는지 물었다. 나중엔 내 공연에도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국의 성악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해외에서 수많은 무대에 서 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국립오페라단 공연을 꼽았다. 2010년 국립오페라단에서 한국 초연으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를 올렸다. 소프라노 임세경이 마르게리타 역, 내가 파우스트 역이었다. 이 공연 후기가 이탈리아로 전해지더니 현지 신문에 기사까지 실렸다. “좋은 메피스토펠레 공연을 보려면 한국에 가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로, 2011년 정명훈과 바리톤 고성현이 함께했던 ‘시몬 보카네그라’. 나는 가브리엘레를 노래했다. 사실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한국에 와 있다가 우연히 들어온 역할이었다. 당시 국립오페라단장이었던 이소영의 제안, 그리고 정명훈 앞에서 갑작스럽게 치룬 오디션을 거쳐 참여하게 됐다. 3일 만에 오페라 전체를 공부하고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참여한 아찔한 기억이 있다.
10년 뒤 나의 모습은. 지금처럼 이곳저곳을 누비는 오페라 가수이길 바란다.

 

【 인포그래픽 】

세계 무대에 서기까지
성악가 75인 리포트

유럽에서 태어난 오페라. 그래서 해외에서 동양인 성악가로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뜻밖에도 많은 성악가가 “특별히 한계를 느낀 적은 없다”고 답했다. 예를 들어 소프라노 박재은은 “나는 ‘동양인이라 차별한다’는 식의 사고를 하지 않으려 한다”며 “실제로도 독일인 동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동양이라서 받았다고 생각한 불이익을 그들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라고 했다.
좋은 성악가들을 고국의 무대로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무대’였다. 가장 많은 답변을 차지한 오페라 극장 설립과 시즌제 도입 모두 오페라 공연의 양적 증가를 위한 장치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인상적인 답변은 어린이 오페라를 위시로 한 예술 교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페라를 접하게 해 극장을 친숙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베이스바리톤 김병길은 “유럽 극장은 관객이 고령화되는 현상을 ‘하얀 파도’에 비유하며 온라인 홍보와 어린이 오페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라고 했다. 베이스 여신영 또한 독일 극장의 ‘어린이 오페라’ 시스템을 거론했고, 메조소프라노 김효나는 “한 시즌에 어린이오페라의 역할을 하나씩은 맡는다”라고 했다. 정리 박서정·박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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