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황수미, 다시 돌아, 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4월 5일 9:00 오전

SPOTLIGHT
소프라노 황수미

 

다시 돌아, 봄

소프라노 황수미

시간과 계절이 내려앉은 노래

 

“인간의 일생을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빗대어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 음악이 황수미라는 악기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잘 익은 음악으로 나오면 좋겠네요.”

봄의 절정에서, 황수미(1986~)는 디르크 카프탄/KBS교향악단과 R. 슈트라우스(1864~1949)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협연한다. 이 작품은 그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처음 서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 무대, 그리고 헬무트 도이치의 피아노와 호흡을 맞춘 첫 음반(DG 4818777)에서 모두 함께했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의 가곡은 연주는 물론 독일어 가사를 해석하기도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말년의 그가 죽음 직전 작곡한 이 곡은 화려한 교향시와 웅장한 오페라 작법의 정수만을 녹여 넣었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까지 표현해내야 하는 난곡이다. 황수미는 자신을 대표할 작품으로 대담하게 선택했고, 곡 데뷔 무대였던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뒀다.

“슈트라우스의 ‘저녁노을(Im Abendrot)’은 사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에서 처음 데뷔한 곡인데요. 그때는 이 곡이 가지고 있는 깊이를 완전히 이해했다기보다는 겁 없이 용감하게 적어냈던 것 같아요. 굉장히 떨렸지만, 가장 자신 있었던 도니체티 ‘돈 파스콸레’ 아리아로 시작하면서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그냥 내 연주를 들어주시는 분들에게 기분 좋은 선물을 드린다는 생각으로 진심을 담아 노래했고 그 마음이 많은 분께 닿았던 것 같아요. 음반을 녹음하고 몇 번의 연주를 올리면서 ‘네 개의 마지막 노래’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의미를 하나씩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저녁노을 앞에 남긴 유서 같은

황수미는 이 작품이 “슈트라우스가 스스로에게 남기는 유서” 같다고 했다. 작품의 출발점이자, 네 곡의 정서를 아우르는 구심점은 아이헨도르프(1788~1857)의 시에 음악을 붙인 ‘저녁노을’이다. 슈트라우스는 인생의 황혼에서 ‘넓고 고요한 평화(weiter, stiller Friede)’를 노래하는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구상을 시작했다. 마지막 순서로 작품을 닫지만, 가장 먼저 작곡된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을 부를 때면 슈트라우스가 저녁노을에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빗댄 것처럼 느껴져요. 지난 환희와 역경 모두 깊은 노을에 맡긴 채 영원한 평화의 안식을 취하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것 같아요.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롭게 느껴지죠. 고요 속에서 들리는 종달새의 지저귐(피콜로의 트릴)은 이 곡의 이미지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가 오케스트라 반주로 작곡했고, 후에 막스 볼프(1·2·3곡)와 에른스트 로스(4곡)에 의해 피아노 반주 버전으로 악보에 옮겨졌다. 원곡에서 세 번째 곡인 ‘잠자리에 들 때’에 나오는 바이올린 독주는 소프라노의 목소리와 선율을 공유하며, 주고받는다. 이 부분을 부를 때 황수미는 “세상 무엇도 줄 수 없는 기쁨과 깊은 위로를 얻는 기분”을 느낀다. 한편 원곡이 워낙 대편성의 오케스트라 곡이라 피아니스트에게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음반과 공연을 통해 두 버전을 불러낸 그는 각각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을 피아노 반주로 노래했을 때 긴 프레이즈를 피아노 반주가 현악기처럼 나타내기는 어렵다는 점이 아쉽더라고요. 하지만 명확하게 화성을 들을 수 있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 반주는 피아노보다 풍성한 음향으로 입체감 있게 성악을 받쳐주기 때문에 마치 양탄자를 타고 나는 기분이랄까요.”

 

노래로 인생을 배우고, 노래로 인생을 사는

독일 뮌헨 음대에서 리트 오라토리오 및 오페라과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한 황수미는 현재 가곡 레퍼토리로 활발히 활동한다. 가곡집 ‘송스(Songs)’는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1945~)와 2019년 발매한 데뷔 앨범이다.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후기 낭만 독일가곡과 함께 벤저민 브리튼(1913~1976), 알반 베르크(1885~1935) 등 한국에는 낯선 20세기 가곡이 수록됐다. 여기에는 백전노장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도이치는 신예 소프라노로 발돋움한 황수미에게 “슈베르트·슈만과 같은 유명 독일 가곡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반이 나와 있으니, 새로운 레퍼토리로 녹음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1960년대부터 가곡 전문 반주자로 활동한 도이치는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안 보스트리지,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등 스타 성악가의 파트너로 통한다. 황수미와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참가자와 심사위원으로 만나, 먼저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건넸다. 이후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함께 리허설하면서 선생님의 음악과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돼요. 40년이 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제게 ‘음악 파트너’라고 말씀하시며 기꺼이 함께 음악을 만들어주시니 늘 감사할 따름이죠.”

헬무트 도이치와 황수미는 2015년 독일에 이어 한국과 영국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한 바 있다. 2019년 앨범 발매를 기념한 한국 공연에서는 작곡가 김효근의 ‘첫사랑’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이번엔 황수미의 제안이었다. 황수미는 한국 공연을 할 때면 프로그램과 연관된 한국가곡을 앙코르로 준비한다. 한 시간 넘게 생소한 외국어 가사의 음악을 경청한 관객에게 보내는 감사의 인사다. 때로는 수개월을 바쳐 준비한 본무대의 음악보다 뜨거운 반응에 놀라곤 한다고. ‘첫사랑’은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연주한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분위기를 이어갈 곡으로 선곡했다. 안경을 끼고 악보를 훑어본 도이치는 “흠, 유행가네!”라고 했지만, 공연 당일 관객의 호응에 감명했다는 후문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를 뛰어넘은 음악적 교감을 오는 5월 독일 암베르크 리사이틀에서 이어간다. 슈만과 리스트의 프로그램으로 꾸밀 예정이다.

 

다시 만나고, 다시 부를 수 있는

비단 헬무트 도이치뿐만 아니라, 황수미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 번 공연한 음악가와 지속적으로 작업하는 점이 눈에 띈다. 예컨대, 2018년 서울시향과의 협연을 지휘했던 마르쿠스 슈텐츠와는 그가 상임지휘자로 있었던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후 2020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콘서트형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함께했다. 오는 5월 KBS교향악단을 객원지휘하는 디르크 카프탄은 황수미가 전속가수로 있었던 독일 본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재임 중이다. 황수미가 극장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에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특별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3년 전 여름, 독일 라인강변에서 있었던 야외연주회에서 카프탄의 지휘로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어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짧은 곡 설명과 함께 독일처럼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통일이 되길 소원한다고 말했죠. 독일 관중으로부터 동병상련(?)의 진심 어린 박수가 쏟아졌고, 한국어 가사를 모두 이해하진 못해도 마음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왔어요. 음악이 주는 무한한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번 연주회는 작년 2월로 예정됐다가, 코로나로 취소된 후 다시 열리는 공연이다. 독일에 거주하는 황수미와 디르크 카프탄은 한국 땅을 밟았다가 나란히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황수미는 “카프탄과 함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연주가 꼭 다시 열리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말로 다시 한국에서 만나게 되었네요!”라고 밝게 말했다. 돌고 돌아 다시 봄이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아트앤아티스트

 

 

✽ 봄 ✽

나의 모든 몸은 기쁨에 찬 너의 존재로부터 떨린다

 

✽ 9월 ✽

여름은 천천히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 잠자리에 들 때 ✽

나의 영혼은 아무 의식 없이 자유로운 날개로 날아오르길 원한다, 신비로운 밤을 깊고 오래 살기 위해

 

✽ 저녁노을 ✽

우리는 얼마나 방랑에 지쳐있는지. 어쩌면 이것은 죽음일까?

 

–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노래’ 중

 

 

디르크 카프탄/KBS교향악단(협연 황수미)

5월 1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브루크너 교향곡 4번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