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전하려는 오랜 기록, 피아니스트 안종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7월 26일 9:00 오전

ARTIST’S ESSAY

마음을 전하려는 오랜 기록

피아니스트 안종도

©임주희

때로는 소통을 위해 언어는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 다음날 있을 첫 연주 투어를 앞두고 도무지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두 눈을 퀭하게 뜨고 한참을 뒤척였다. 20시간 넘는 비행 때문에 아직도 온몸이 쑤시는 걸까, 전날 첫 연주를 앞두고 긴장한 탓일까. 더는 누워있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불을 켜고 TV를 틀었다. 남아공 방송 프로그램도 독일과(겉으로 봐서는) 꽤 비슷한 내용의 채널들이 나왔다. 뉴스·영화·다큐멘터리·드라마·코미디 등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 비슷한가 보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한 채널에서 멈췄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알고 보니 줄루어였다)의 음률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이 처음 듣는 언어의 음률에 취해 멍하니 한 시간을 넘게 봤다. 한 현지인과 나눈 인터뷰였는데, 그의 몸짓과 말소리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대략 유추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니다. 나는 확실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화자의 기쁨과 슬픔이, 그가 말하는 동안 내 마음으로 온전히 전달됐다. 어떤 언어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그의 언어를 듣는 순간, 그저 그의 삶을 이해한 것 같았고 그의 감정에 더 동화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AUTUMN 2017 함부르크 바흐와 굴드의 위대함

낙엽이 소복이 쌓이던 가을이었다. 나는 산책 때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글렌 굴드(1932~1982)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자주 듣곤 했다. 한창 하프시코드를 전공하고 있던 나는 바로크 시대의 전통과 당대 연주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연주에 의문이 들었다(당시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저기는 왜 스타카토를 하는 거야?’ ‘저기는 왜 저렇게 빨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이끌리는 그의 연주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내 모교인 함부르크 음대 근처에 발걸음이 닿아있었다. 괜히 아는 사람을 만나 이어폰 속 굴드가 한참 열연하는 중요한 부분을 끊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그 순간, 우연히 내 뒤에 걸어오시던 한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함부르크 음대에서 하프시코드를 지도하고 계신 분이었다. 음대 재학시절 그분의 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내가 음대에서 교직원으로 재직할 때도 같이 회의 한번 한 적이 없었지만,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있어 간단한 안부 정도를 묻는 사이였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나요?”

“네, 고마워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네, 잘 지내요. 저는 요즘 하프시코드를 배우고 있어요. 하프시코드를 통해 배운 바로크의 음악적 표현을 어떻게 현대 피아노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가방에 주섬주섬 넣으며 대답했다.

“그거 엄청난 소식이네요.”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가려는 순간, 선생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는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바로크 음악의 정수는 피아노로 표현될 수 없어요.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되었으니 그 악기로 표현했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나타나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는 왜 그의 말에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번졌던 쓴맛은 무엇일까. 그의 의견에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은 피아니스트로서 지켜야 할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가을의 끝자락에서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바흐의 위대함이 그의 연주에서 느껴졌다. 그의 연주는 세상 온갖 때 묻은 내 영혼을 최첨단 공기청정기보다 더 맑게 정화했다. 굴드가 표현한 바흐의 아름다움에 눈물이 흘렀다.

 

February 2021 함부르크 피아노의 터치감, 하프시코드의 건반

늦은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12월까지 비교적 온화했던 함부르크의 겨울은 갑자기 돌변해 알스터 호수를 얼리고 심지어 항구의 바닷물까지 죄다 얼려버렸다. 이 추위를 뚫고 시 외곽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연습을 마치고 시내 중심부의 성 캐서린 교회로 하프시코드 연습을 하러 갔다.

두 달 뒤에 한국에서 있을 하프시코드와 피아노 독주회 준비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회에 도착해 2층 합창대석 앞에 자리한 하프시코드의 뚜껑을 열었다. 세상에. 여기도 얼마나 추운지 건반이 꼭 얼음장 같았다. 아니지, 추위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2시간 뒤에 미사가 시작돼 그전까지 연습을 마쳐야 한다. 이윽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움직여본다. 하지만 하프시코드에서 울리는 내 소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흐도 연주했던 유서 깊은 교회에서 나는 왜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형편없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아까 피아노 연습을 너무 과하게 해서 터치가 너무 세졌나?’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건반의 터치가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각각의 악기에 맞는 터치를 빠르게 익힐 수 있을까?

 

March 2021 암스테르담 오직 마음의 표현만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토마스 공방’이라는 유명 하프시코드 제작자의 작업실에서 리처드 이가(1963~) 선생님께 수업을 받았다. 선생님은 늘 특유의 열정적인 몸짓으로 음악을 설명해 주셨다. 이탈리아인도 저리 가라 할 정도 온몸을 휘젓는 열정이다(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사람이다).

악기 공방 특유의 나무 향이 내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타고 코끝에 진동했다.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몸짓에 힘입어 하프시코드에서 나오는 내 소리도 안정을 찾아갔다. 다음 날은 선생님 댁에서 피아노 수업을 받는 날이다. 선생님 댁에는 1840년도산 플레이엘 그랜드 피아노(쇼팽이 즐겨 쳤던 피아노 브랜드다)가 있다고 해 한편으로는 기대되면서도 새로운 악기에 적응해야 할 내 터치가 걱정되었다. 다음날 찾아간 선생님 댁에는 기대했던 것처럼 19세기 유화에서나 볼 법한 멋진 피아노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이 화려한 건반 앞에 앉아 이날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을 레슨받을 예정이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지도가 이어졌다. 새로운 악기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잊은 지 오래다. 그저 쉼 없이 건반을 두들겼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까. 더는 새로운 악기도, 건반의 터치감도 중요하지 않았다. 슈만의 자아 분열적인 감정이 내 마음을 끝없이 휘저었다.

“지난 며칠간 선생님과 하프시코드만 치다가 오늘 처음 피아노를 치는 날인데 왜 제 터치의 어색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죠?”

“글쎄, 네 질문이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만, 예술에 생명을 부여하는 사람이 똑같은데 터치가 어떻게 됐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 마음이 표현되고 전달되면 그걸로 끝이지.”

 

April 2021 무대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랴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무대(4.24) 위에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와 금박으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하프시코드가 나란히 서 있다. 아름다웠다. 이번 무대에서는 현대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를 번갈아 연주하며 두 건반악기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줄 예정이었다.

객석이 차고 조명이 어두워진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무대 위로 나선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연주회에서 두 악기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탄식과 기쁨, 고통과 희열 그리고 아쉬움 등의 감정이 내 마음을 마구 휘저었다. 작곡가가 악보에 적어놓은 고통이, 그의 기쁨이 내 마음을 통해 청자에게 전달되는 그 한순간을 느끼기 위해 연주를 이어간다. 여기서 악기 존재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연주가 끝나고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 뒤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조금 터치가 거칠면 어떠하리, 조금 틀리면 어떠하리, 그저 작곡가의 영혼이 내 마음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면 그것으로 족할 뿐. 내가 이외에 무엇을 더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공연 정보

브런치콘서트 뉴아티스트시리즈 II- 피아니스트 안종도 클래식 내레이션 in 안동

7월 7일 오전 11시 안동문화예술의전당 백조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K570, 포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Op.28, 라벨 ‘치간느’(바이올린 김유경) 외

 

글 안종도

피아니스트 안종도(1986~)는 서울예고 재학 중 유학하여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독일 함부르크 음대 연주학 박사과정을 거쳤고, 브레멘 음대에서 카르스텐 로프에게 하프시코드를 사사했다. 현재 북독일 클랑아카데미를 설립해 예술감독으로 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로버트 맥도널드를 사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에세이 속 음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Sony Classical 88725411822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과 1981년, 총 두 차례 녹음됐다. 두 앨범 모두 그가 남긴 걸작으로 손꼽힌다. 1955년 발매된 앨범의 연주 시간은 35분이었으나, 그가 별세하기 1년 전 녹음한 앨범의 연주 시간은 총 50분이었다. 모든 것을 비워낸 말년의 굴드의 무게 있는 음악적 해석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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