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티스트 김유빈, 새 역사를 틔우는, 바로크의 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7월 26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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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티스트 김유빈

새 역사를 틔우는, 바로크의 숨

김유빈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제네바 콩쿠르와 프라하 봄 콩쿠르를 석권하고,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역사상 최연소 플루트 수석으로 입단해,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주인공이니. 그런 그가 ‘블루밍 바로크’(8.2/롯데콘서트홀) 공연을 통해 ‘바로크 수호자’로 거듭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알던 바로, 그 김유빈의 또 한 번의 도약이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헤어/메이크업 도도아카데미 청량리 캠퍼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뵘 시스템 우드 플루트를 연주하는 김유빈

 

 

 

 

 

 

 

김유빈(1997~)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종관은 충남교향악단의 더블베이시스트이다. 자연스럽게 피아노, 바이올린도 배워봤지만 그의 손엔 영 붙지 않았다고. 그러다 잡아본 플루트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귀로 포착한 소리를 이 악기로 표현해내며 ‘운명’임을 직감했다. 곧 연주력에 두각을 드러내더니 예원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입학했고 이어 프랑스 리옹 음악원에 진학했다.

그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건 2014년이다.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제네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한 것이다. 소식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2015년 프라하 봄 콩쿠르에서도 우승기를 들었다.

쉼을 모르던 발걸음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열아홉의 나이에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이하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플루트 수석으로 입단했다. 이 사건은 김유빈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2013년 뉴욕 필하모닉에 입단한 손유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카라얀 아카데미에 입단한 조성현이 보여준 한국 플루트계의 행보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기도 했다.

프랑스 유학기와 베를린 악단 생활기를 거쳐 그의 곡간에 다채로운 플루트 음악이 쌓여갔다. 2018년 국내 첫 리사이틀에서는 19~20세기 프랑스와 독일 음악을 선보여 독주자로서 신고식을 치렀다. 이듬해부터 현대음악을 쥐락펴락하는 면모도 보였다.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수석으로서 도시오 호소카와, 파질 사이의 작품을 아시아 초연했고, 이외에도 윤이상의 ‘영상(Images)’, 앙리 뒤티외의 플루트 소나타 등에서도 탁월함을 발휘했다. 그의 무대가 독주든, 실내악이든, 관현악이든 ‘역시 김유빈이다!’라는 감탄사가 나돌았다.

8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릴 리사이틀 ‘블루밍 바로크’는 그의 또 다른 캐릭터를 만나는 자리다. 이번엔 바로크 시대 독일과 프랑스의 음악을 연주한다. J.S. 바흐, C.P.E. 바흐, 헨델의 플루트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가 1부를 채우고, 2부에서는 브와모르티에의 모음곡 6번 Op.35, F. 쿠프랭의 ‘왕정의 콩세르’ 1번, 자크 마르탱 오트테르의 모음곡 3번 Op.2이 이어진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후대에 개량된 ‘뵘 시스템 우드 플루트’를 든다. 바로크 시대에 쓰인 가로 플루트인 트라베소의 유전자가 짙게 남아 있는 악기다. 또,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 출신의 하프시코디스트 아렌트 흐로스펠트가 함께 무대에 나선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만 스물넷의 한국의 젊은 음악가, 그것도 플루티스트가 더욱 날카로운 평가가 도사리는 바로크 당대연주에 도전한다니. 이뿐인가, 바로크 음악회를 기획하는 데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회와는 또 차별화된 관객층 설정, 레퍼토리 선정 기준이 필요할뿐더러, 좋은 하프시코디스트를 찾고 그에게 동반자로 함께해달라는 설득의 과정도 거쳐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헤쳐나갈 만큼 김유빈은 이 음악에 진심이란다. 확신에 찬 그 목소리는 한 질문을 떠오르게 했고, 그와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됐다. “바로크 음악이 그에게 대체 무엇이길래!”

김유빈은 “바로크 음악과의 만남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했다. 리옹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만 열여섯의 나이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곳이다.

어린 시절의 김유빈

어쩌다, 바로크

프랑스의 플루트 자원에 놀랐습니다. 플루티스트이자 작곡가, 교육자였던 폴 타파넬(1844~1908), 필리프 고베르(1879~1941), 마르셀 모이즈(1889~1984)가 악기의 발전을 견인했죠. 작곡가 드뷔시·라벨·이베르는 플루트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썼고요. 이들이 뿌린 양분을 흡수하고 플루티스트 장 피에르 랑팔(1922~2000), 미셸 드보스트(1934~), 알랭 마리옹(1938~1998)  등이 등장해 시대를 풍미했어요.

어릴 때 프랑스 출신의 랑팔과 에마뉘엘 파위(1970~)의 음반을 많이 들었어요. 랑팔의 주체할 수 없는 재능은 다소 거친 음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그게 매력이었죠. 그 이후로, 보다 정제된 길을 밟은 파위는 누가 들어도 좋아할 만한 팔방미인 같은 음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플루트 음악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안개 속의 무지개’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안개 속에 있어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지개와 같은 다양한 색채가 펼쳐져 있는 것 같아요.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처럼요.

19~20세기의 향취가 진하게 남아 있는 이곳에서 유빈 씨는 바로크 음악을 만났고요. 이 음악과 처음 조우한 순간을 기억하나요?

처음으로 하프시코드와 호흡을 맞춰봤어요. 말로만 듣던 트라베소도 실제로 접했죠. 트라베소는 바흐와 헨델 시대까지 사용된 나무 재질의 가로 플루트인데요. 이런 악기들을 통해 바로크 음악에 빠졌어요. 그 길로 트라베소를 구입해 본격적으로 연주법을 익히고 작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라베소는 음량도 작고 음정도 불안해요. 모차르트가 이 악기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정확한 음을 내는 것조차 어려워서 호흡으로 소리를 만들어야 하니, 사실 악기의 기능적인 면은 말도 안 되죠. 그런데 그 불안정함에 감정이 채워지더라고요. 나무의 따뜻한 음색도 어우러져 매력으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어요.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은 특히 언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성악은 가사로 감정을 분명히 전달하죠. 저는 플루트 음악에도 가사를 심어 넣으며 연구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중 훈련

이번 호 ‘객석’에는 마침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위도 함께했다(82쪽참조). 그는 인터뷰 중 김유빈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도 “흥미로운 연주자”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독일에서 오케스트라 경험을 쌓은 ‘이중 훈련’을 해왔다는 점에서다.

김유빈은 올해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석 5년 차다. 그간의 악단 생활은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도 존재감을 또렷이 드러내는 ‘알찬 음색’도 이곳에서 거둔 결실이다.

“셈여림에 감정을 더할 수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어요. 예를 들면 ‘안 들릴 것 같은 피아니시모’나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은 메조포르테’ 같은 거요.(웃음) 음량의 크고 작음으로도 다양한 색채를 보여줄 수 있게 됐죠.”자신의 목소리를 향한 갈망도 깊어졌다. 진지함이 특징인 악단의 현 상임지휘자인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와, 가공할 만한 독특함을 지닌 이전 수장 이반 피셔 등 개성 강한 지휘자들과의 협업이 자극제가 됐다.

악단 내에서도 자신의 길을 고민하도록 이끈 것이다. 그는 다시 바로크를 손에 들었다.

독일의 공연장들이 다시 관객을 맞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콘체르트하우스는 어떤가요?

며칠 전, 이 무대에 다시 섰어요. 7개월 만이었죠. 지휘자 이반 피셔와 말러 교향곡 3번을 연주했습니다. 지난해 3월 처음 베를린에 도시봉쇄령이 내려졌을 땐 절망적이었어요. 공연이 이틀 전에 취소됐거든요.

올해 콘체르트하우스는 개관 200주년을 맞았죠. 이를 기념하는 여러 프로젝트로 지난 시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개관 당시 이곳에서 세계초연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리코딩했습니다. 같은 작품을 공연장 앞 겐다르멘마르크트 광장에서 선보이기도 했고요. 공연장 내부 리모델링도 진행됐어요.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성대한 축제가 열렸을 텐데, 여전히 아쉬워요.

베를린의 7개 악단 가운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바로크와 고전시대의 음악에 집중하는 듯 보여요. 요즘 연주 레퍼토리가 어떤가요?

특정 시기에 주력하기보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소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휘자 필리프 헤레베허나 라인하르트 괴벨, 안드레아 마르콘, 조반니 안토니니, 장 크리스토프 스피노지 등 바로크 스페셜리스트가 자주 초청되는 편이긴 합니다.

바로크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악단에서 발휘할 기회가 있나요?

18세기까지의 레퍼토리는 제 우드 플루트로 연주하고 있어요. 의무적인 건 아니고 제가 좋아서 하고 있습니다. 이 악기도 프랑스 유학 중에 구매한 건데요. 앞서 이야기한 트라베소는 음량도 작고 음정도 불안정해서 현대 오케스트라에서는 연주하기 어려워요. 영감을 얻기 위해 불곤 하죠. 이 우드 플루트는 트라베소를 후대에 개량한 버전입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연주할 악기이기도 하죠?

맞아요, 진짜 이름은 ‘뵘 시스템 우드 플루트’입니다. 트라베소의 골격은 그대로 가져오되 재질을 메탈로 바꿔 음색을 더욱 반짝이게 했고, 키를 장착해서 정확한 운지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이 악기를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고전음악 연주할 때 써봤는데, 공연장의 목재 바닥과도 잘 어우러져 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너무 튀지도 않고요. 오보에·클라리넷·바순 모두 목관악기잖아요. 플루트가 유독 금관악기 아니냐는 오명을 듣곤 했는데 그로부터도 탈피한 거죠.

 

너무 다른 바로크 음악

이번 리사이틀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바로크 음악을 연구해온 지난 시간을 처음으로 기록하는 자리다. 1부의 독일곡으로 J.S. 바흐, 그의 아들인 C.P.E. 바흐, 그리고 헨델을 택했고, 2부 프랑스곡으로 브와모르티에, F. 쿠프랭, 자크 마르탱 오트테르를 선정했다.

두 나라의 음악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음악학자 클라이브 웅거 해밀턴은 “프랑스 작곡가들은 햇볕을 내리쬔 듯 밝고 명랑한 이탈리아풍 선율을 따라잡기 바빴고, 라인강 너머 교회 곳곳에서 직조해내던 지적이고 박식한 음악 유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라고 썼다.

그것은 그가 유학한 파리의 아기자기한 골목과, 베를린의 넓은 광장의 차이만큼 크다. 김유빈은 그 서로 다른 매력에 흠뻑 빠진 모습이다. 그런데 독일의 바로크 음악에 관해서는 말을 아낀다.

“두 바흐와 헨델… 독일의 바로크를 이야기하는 데 이들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세 작곡가가 차지한 위치는 이미 공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에 이르러서다. 그 이전을 견인한 나라는 프랑스다. 김유빈은 국내에서 덜 주목받아온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아 보였다.

어떻게 다른 것 같아요, 두 나라의 바로크 음악?

쉽게 말하자면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은 자유로워요. 또, 귀걸이, 코걸이, 목걸이까지 다 걸친 느낌이에요. 꾸밈음이 정말 많거든요.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펼쳐놓은 꾸밈음이 이미 너무 많아서 제가 뭔가를 더할 수가 없더라고요.

쿠프랭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곡마다 어울리는 꾸밈음을 신중하게 표시해두었는데, 내 지침을 무시하고 곡을 익히는 이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내키는 대로 아무 꾸밈음이나 넣으면 되는 자의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하프시코드 모음집 제4권 서문)”라고요. 유빈 씨는 작곡가의 마음을 잘 헤아린 것 같네요.

하지만 악보에 쓰인 그대로 연주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17~18세기 프랑스에서 특히 발달한 음악 개념 중 하나로 ‘노트 이네갈(Notre Inegales)’이 있는데요, 동일한 음표가 반복돼도 메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연주하기보다 그 길이를 조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니 악보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리듬을 좀 더 뒤로 보내준다거나, 소리에 성격을 부여해야 합니다.

또, 바로크 시대의 기악은 이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주를 이룬 ‘성악’이 악기로 옮겨진 결과이기도 해요. 이 점에 있어서 유의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은 특히 언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성악은 가사로 감정을 분명히 전달하죠. 전 플루트 음악에도 가사를 심어 넣으며 연구합니다. 바로크 음악은 묵직하고 진지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요, 이런 재치를 잘 살린 바로크 음악을 이번 리사이틀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묵직하고 진지하다는 수식은 독일의 바로크 음악에 해당할 테고요.

맞아요, 무척 학구적이죠. 또, 자연스러운 미학이 녹아 있습니다. 독일의 바로크 음악엔 반대로 꾸밈음이 적어서 임의로 무언가를 더하기가 조심스러워요. 특이한 점이 있어요. 지금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는데요. 학업 분위기에 있어서는 두 나라가 정반대예요. 독일이 오히려 자유롭고, 자유로울 것 같은 프랑스는 공부에 대한 압박이 엄청나요.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프랑스 작품으로는 브와모르티에와 쿠프랭, 오트테르 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해요. 특히 오트테르는 목관악기 제작자이자 플루티스트였죠. 악기의 초기 개량에도 큰 몫을 했고요.

트라베소를 배울 때 오트테르의 입문 교본은 필수적이에요. 저도 그 책으로 공부했고요.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는 그의 ‘플루트의 원리’인데요, 아티큘레이션, 꾸밈음 등의 트라베소 주법과 당대음악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에 좋은 자료입니다. 사실 브와모르티에와 오트테르는 당시 음악계의 주류였어요. 지금은 그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이들의 명곡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객석’과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원전 연구의 중요성을 늘 언급했어요. 여전히 그 가치를 중심에 두고 있는 것 같네요.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어요! 건반악기 연주자였던 쿠프랭이 쓴 책도 읽고 있는데요, 이번 리사이틀에서 함께하는 하프시코드에 관해 더 탐구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건 작품의 ‘콘텍스트’에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서입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겠다는 뜻인가요?

‘완벽’은 없어요. 현대음악을 연주하면서 진은숙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작곡가와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는데요, 그들마저도 ‘정답’을 정해두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원전 연구는 물론, 많은 음악가의 해석을 들어보며 ‘내가 원하는 소리’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 트라베소 음악을 세상에 알린 바르톨드 쿠이켄(1949~)의 연주를 많이 들었습니다. 당대연주계 개척자로 불리는 플루티스트 겸 리코더 연주자이죠.

오트테르 ‘플루트의 원리’

뵘 시스템 우드 플루트

트라베소

바로크 음악에 담은 확신

“물론 도전적이었어요, 이 음악이 요하는 연주력, 음악회 기획도 까다로웠거든요.” 바로크에 대한 열정으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길이 평탄하기만 한 직선도로라는 뜻은 아니다. 이외에도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서다.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수석을 ‘홀로’ 맡고 있죠?  

맞아요. 그래서 거의 모든 공연과 리코딩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원래 두 명이 맡을 역할이라 ‘불공평할 정도’로 바쁘게 일해야 해요. 새롭게 익히고 연구해야 할 작품도 방대하고요. 그래도 지금 스펀지처럼 작품을 흡수해두면 앞으로 좋은 레퍼런스가 되겠죠.

지난 인터뷰에서 악단 내 목관 5중주단을 꾸려보고 싶다고 했어요. 이루어졌나요?

아직이요. 그래도 ‘콘체르트하우스 체임버 시리즈’의 일환으로 다른 플루티스트들과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어요. 플루트 2중주부터, 하프시코드가 합세한 3중주, 작곡가 쿨라우의 플루트 4중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성의 곡을 연주했죠.

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고민도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게 요즘 제 최대 고민입니다. 마라톤도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잖아요. 사실 마라톤을 해본 적은 없지만요.(웃음) 제가 가진 능력을 오래 유지하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연습을 늘 꾸준히 하는 것 이외에도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조깅을 종종 합니다.

베를린의 풍성한 음악 자산을 누리며 ‘힐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곳에만 7개 대형 악단이 있잖아요.

여러 공연을 즐겨 보러 다녀요. 음악가에겐 좋은 공부가 되죠. 더욱이 7개 악단 간에 교류가 활발해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바순 수석인 (유)성권이 형도 저희 악단에 객원으로 초청된 적이 있고, 반대로 제가 방송교향악단에서 연주한 적도 있습니다. 엄청난 소식이 있는데요! 최근에 제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처음 객원연주했어요. 지휘자는 수잔나 멜키였고요. 제 음악인생에 단연 정점을 찍은 경험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역할이 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크 수호자’를 자청하며 ‘바로크 순례’에 나서는 그에게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젊은 음악가의 초상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나의 목소리’를 갖는 게 정말 중요하단 걸 배웠어요. 요즘 새로운 실험을 하는 또래 음악가도 많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건 바로크 음악이었습니다. 물론 이 음악이 요하는 연주력도 높고, 음악회 기획도 까다로워 도전적이었어요. 그러나 이게 제 소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00여 년 전 꽃핀 바로크 음악은 김유빈에게 그런 존재다. 제 목소리를 찾게 해준 이정표라고나 할까. 한편, 제 길을 찾아 나가는 김유빈의 존재는 한국 플루트계 흐름에 변곡점으로 남을 사건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콩쿠르 석권’이나 ‘세계적 명망의 오케스트라 입단’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해, 스스로 원하는 음악을 선보이는 플루티스트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김유빈은 ‘바로크 수호자’로 피어난다. 그가 앞으로 맺을 결실에 더욱 주목해야 할 이유다.

 

김유빈의 ‘블루밍 바로크’를 위한 노트 ①

독일과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차이

이번 리사이틀(8.2/롯데콘서트홀)의 1, 2부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으로 채워진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역사를 되짚고, 두 나라에서 발전한 바로크 음악의 선명한 매력 차이를 살펴보자. 글 유선옥(서울대 음악학 박사)

 

① ‘바로크’한 바로크 음악

‘바로크’가 1600~1750년에 이르는 한 시대를 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되었듯이, 본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술·건축·문학 분야에서는 ‘바로크’를 지나친 장식에 대한 혹평을 가할 때 썼는데, 이는 음악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1733년 초연된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가 일관성 없는 선율과 이상한 화음이 가득하다며, “바로크하다(du barocque)”고 비평했다.

 

② 강조와 대조의 음악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무엇이 그리도 ‘바로크’했던 것일까? 이 시대의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혹자는 “바소 콘티누오의 시대”라고, 혹자는 “콘체르타토의 시대”라고 부른 것처럼, 음악학자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소 콘티누오가 있는 ‘단선율 노래(모노디)’와 대비의 조화를 내세운 ‘콘체르타토’는 이전의 르네상스 시대와 구별 지어주는, 이 시대의 중요한 음악적 특징임이 틀림없다. 단선율 노래는 내성보다는 베이스와 선율선인 외성을 강조함으로써, 음악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음악이 억양을 모방하고, 가사를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슬픔·기쁨·분노·사랑·공포·흥분·경이의 정서를 나타냄으로써, 우리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더욱이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해 여러 가지 정서를 경험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김에 따라, 상반된 분위기의 곡들을 대조시켰다.

이러한 대조는 한번은 세게 그다음은 여리게 연주하는 셈여림이나, 전체악기와 솔로군의 악기가 교대로 연주하는 음량,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악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연주하는 음색으로도 나타났다. 이처럼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극적(dramatic)’이었다.

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아마도 오페라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오페라의 탄생을 바로크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다. 오페라는 1600년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후 이탈리아는 성악에서는 ‘오페라’로, 그리고 기악에서는 대비를 전면에 내세우는 ‘협주곡’으로 바로크 시대를 견인했다.

 

③ 프랑스의 고상한 취향

프랑스는 막강한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력 가운데에서도 고유한 취향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프랑스 음악은 태양왕 루이 14세에 의해 발전됐다. 루이 14세는 예술의 최고 후원자로 프랑스적 취향을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예술이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었다.

루이 14세는 예술을 권력 강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당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음악가들, 륄리·샤르팡티에·프랑수아 쿠프랭·자크 마르탱 오트테르 등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더욱이 륄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하는 프랑스 오페라를 창안해 냄으로써, 왕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프랑스의 국가적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는 장엄한 붓점 리듬과 유연한 선율,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장식음, 불균형한 리듬 등을 통해 고상한 프랑스적 취향을 이룩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당대 엄청난 위세를 떨치던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양식을 확립한 륄리뿐 아니라, 쿠프랭과 오트테르, 그리고 브와모르티에 등은 프랑스의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에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과 밝고 분명한 양식을 혼합함으로써, ‘취향의 융합(Les gout reunis)’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취향의 공존은 특히 서로 다른 성격의 춤음악으로 구성되는 모음곡(Suite)에서 두드러졌다. 루이 14세가 훌륭한 무용수였듯이, 프랑스에서는 궁정 춤의 인기가 높았다. 따라서 모음곡은 프랑스 기악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했다. 프랑스 작곡가들은 엄격한 규칙을 지닌 독일 모음곡과는 달리, 서로 다른 박자와 템포, 리듬, 그리고 분위기와 정서 등을 지니고 있는 춤곡들을 자유롭게 배치했다.

 

④ 독일의 바로크 음악이 사랑받는 이유

우리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J.S. 바흐나 헨델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들의 두드러진 활동은 1700년경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 사실 그 이전까지 독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밀린 변방국에 불과했다. 뒤늦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그 이후의 서양음악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지가 됐다.

독일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발전한 음악적 특징들을 독창적으로 종합시켰다. 그 여러 음악 요소를 독일 전통과 결합하고자 했다. 이러한 유연한 태도 덕분에 18세기 독일 음악은 광범위한 호소력을 갖게 됐다. 즉, 다양한 취향의 혼합은 이후 보편적인 ‘고전’ 양식을 확립하는 바탕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텔레만을 비롯해, 바흐와 헨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의 작품에는 독일 양식의 단단한 기초 위에 이탈리아 음악의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선율과 프랑스 음악의 우아함이 독창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의 음악에서 서로 조화롭게 뒤섞인 다양한 나라의 음악적 양식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김유빈의 ‘블루밍 바로크’를 위한 노트

②플루트 악기 변천사

김유빈이 연주한 ‘뵘 시스템 우드 플루트’는 바로크 시대에 사용된 가로 플루트인 ‘트라베소’를 현대에 와 개량한 것이다. 트라베소가 모던 플루트로 변모하기까지의 과정을 만나보자. 리사이틀에서 소개되는 작곡가들이 악기의 발전에 미친 영향도 놓치지 말 것! 글 유선옥(서울대 음악학 박사)

 

① 우리가 알던 플루트

오늘날 플루트는 니켈·금·은 등과 같은 금속으로 제작되어 반짝이는 음색을 뽐내지만, 본래에는 단단한 밝은 갈색의 회양목으로 만들어진, ‘목’관악기이다. 그러나 클라리넷·오보에·바순 등의 다른 목관악기와는 달리, 플루트는 ‘리드(reed)’라 불리는 얇은 진동판이 없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보다 민첩한 연주가 가능하다. 경쾌하면서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소리를 지니는 플루트는 다른 관악기에 비해 쉽게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플루트는 피아노만큼이나 아마추어 사이에서도 사랑받는 대중적인 악기다.

 

② 세로와 가로의 대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성악이 주를 이루고 악기는 그저 이를 보조해주는 도구로 여겨졌다. 기악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플루트의 발전도 이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플루트는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한 악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 플루트는 ‘가로 플루트’(트라베소, traverso flute)라고 불렸다. ‘플루트’라는 명칭은 대부분 세로 플루트인 ‘리코더’를 가리켰다. 가로 플루트가 리코더를 밀어내고 그 이름을 독차지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르러서다. 이는 가로 플루트가 더 큰 음량과 화려한 기교를 선호하는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③ 그 시작은, 나무에 뚫린 여섯 개의 구멍

초기 플루트의 모습은 이러했다. 둥근 나무관에 온음계 배열의 구멍이 6개 뚫려 있었으며, 취구가 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키가 없었기 때문에 반음계 선율을 정확히 낼 수 없었을뿐더러 높은 음역 또한 연주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단점은 프랑스의 목관악기 제작자이자 플루티스트였던 자크 마르탱 오트테르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는 우선 관을 원통형 대신 원추형으로 만들어 이전보다 훨씬 맑고 부드러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연주하기 힘들었던 D#/E♭키를 처음으로 부착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 개의 관으로 되어 있던 것을 세 부분으로, 즉, 취구가 있는 윗관(Head), 6개의 구멍이 있는 본관(Body), 그리고 키가 부착된 아랫관(Foot)으로 나누었다. 특히 본관은 긴 것과 짧은 것이 있어, 선호하는 음역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④ 늘어난 길이와 넓어진 음역

바로크 시대에 가로 플루트는 왕이나 귀족, 그리고 중산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1740년 즉위하며 건반악기 연주자였던 C.P.E. 바흐와 자신의 플루트 선생이었던 요한 요하임 크반츠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C.P.E. 바흐는 6개의 가로 플루트 소나타를, 그리고 크반츠는 300여 개의 가로 플루트 협주곡을 대제에게 헌정했다. 더욱이, 크반츠는 악기 개량에도 힘썼다. 그는 연주자들이 쉽게 조율할 수 있도록 윗관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취구도 입 모양에 맞추어 타원형으로 바꾸었다. 또한 높은 음역을 선호하는 북독일의 취향에 따라, 본관을 또다시 나눠 세 부분으로 되어 있던 플루트를 네 부분으로 만들었다.이외에도 그는 “일부 음정에 도사리고 있는 미세한 오차는 결국 두 번째 키를 부착하는 것 외에는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1726년  두 번째 키를 새로이 달았다”라고 밝힌 것처럼 키를 하나 더 추가했다. 키는 보다 명확한 음정과 원활한 반음계 연주를 가능케 했기 때문에, 이후 고전시대에는 8개에 이르는 키가 부착되기도 했다.

 

⑤ 대대적인 혁신을 이루다

©sebastian_runge

플루트의 대대적인 혁신은 19세기 독일인 테오발트 뵘(1794~1881)에 의해 이루어졌다. 뵘은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금 세공인이었다. 그는 “나는 1841년 런던에서 유럽의 어느 플루트 연주가보다 잘했다. 하지만 니콜슨의 강한 음은 따라갈 수가 없더군. 그래서 나는 플루트를 재구성하기 시작했어. 내가 그의 연주를 듣지 못했다면 뵘 플루트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야”라고 편지에 적은 바 있다. 연주자로서의 아쉬운 점들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뵘은 1847년 현대 플루트의 기본이 되는 체계를 완성했다.

우선, 그는 관 모양을 원추형에서 다시 원통형으로 만들었고, 악기 재질을 나무에서 금속으로 바꿔 보다 강한 음을 낼 수 있게 했다. 또한 연주자에게 편리하도록 취구의 모양, 크기, 각도 등을 표준화했고, 반음계 체계를 정립했다. 이에 따라 구멍의 크기가 달라서 거의 모든 음마다 다른 음색을 내던 오트테르의 플루트와 달리, 뵘의 플루트는 거의 모든 음이 균일한 소리를 갖게 됐다.

더욱이 뵘은 금속으로 된 키를 장착했는데, 오늘날 뵘 체계의 콘서트 C 플루트는 키의 개수가 17~23개 혹은 그 이상에 달한다. 특히 그는 링키를 통해 연주자가 한 손가락으로 동시에 한 개 이상의 키를 누를 수 있게 함으로써, 다양하고 화려한 테크닉, 그리고 풍부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뵘 이후에도 플루트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이는 ‘가로 플루트’가 세로 플루트인 리코더와는 다르게 사양 되지 않고 지금까지 사랑받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김유빈이 플루트 수석으로 있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200년 역사 돌아보기 ①
1821~1980년

‘객석’ 2020년 3월호에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국 음악가 5인의 ‘추천 베를린 문화공간’이 실렸다. 당시 김유빈의 ‘원픽’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자신이 속한 악단의 상주 공간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관객이 악단 사이사이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미텐드린’(Mittendrin)이나, VR 체험존 등의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펼치면서도, 도시의 2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연장이라는 점에서다. 올해 건립 200주년을 맞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 통일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어 온 동반자다.

1821년, 도시의 중심인 겐다르멘마르크트 광장에 세워진 이 건물은 연극 상연을 주목적으로 해 1970년대까지 ‘왕립 연극 공연장(Königliches Schauspielhaus)’으로 불렸다. 개관 기념 공연에 괴테의 희곡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카를 폰 메클렌부르크의 발레 ‘장미의 요정’ 등이 올랐고, 개관 한 달 후인 6월 18일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세계 초연됐다.

1820~1840년대에는 도시의 예술계 거점으로 역할 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 이곳에서 베를린 초연됐다.그러던 극장은 양차 세계대전의 직격탄을 맞았다. 두 차례에 이은 공습으로 건물과 광장은 잿더미가 됐지만, 음악을 통한 화해의 노력이 피어나기도 했다. 1948년, 당시 베를린을 분할 통치하던 4개국이 합심해 ‘베를린 평화 콘서트’를 개최한 것이다.

1976년 무렵, 20여 년간 전쟁의 잔해만이 가득했던 광장에서 극장을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1963년 서베를린에 베를린 필하모니가 개관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동독 정부가 발벗고 나선 것이다. 기존 극장 내부를 콘서트홀로 탈바꿈시키는 한편, 싱켈의 건물 외관 디자인은 그대로 유지해 역사와 전통을 보존했다.

또, 동독 정부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응해 정책적으로 정상급 음악가를 모아 1952년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출범시켰다. 상주 공간 없이 활동하던 악단은 폐허로 남아 있던 공연장이 1984년 ‘겐다르멘마르크트 콘체르트하우스’라는 새 이름으로 재개관하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재개관 기념 공연에서는 이곳에서 세계 초연된 카를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다시 선보였고, 재건축에 힘써준 노동자들을 위한 건설 현장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1948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Alexandrow-Ensemble, Credit Pisarek,
Abraham (Fotograf), Deutsche Fotothek

김유빈이 플루트 수석으로 있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200년 역사 돌아보기 ②
1990~2021년

1989년 11월 베를린을 나누던 장벽이 무너지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한 달 뒤인 12월 25일 이곳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며 통일의 기쁨을 시민들과 나눴다. 그는 같은 곡을 서베를린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도 지휘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되새겼다.

공연장과 악단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라는 오늘의 이름을 얻은 건 각각 1994년, 2006년의 일이다. 2014년에는 메인 홀인 그레이트홀의 전면 개조가 이루어졌다. 객석과 무대 사이 단차를 없애고 좌석을 모두 들어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당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이었던 이반 피셔는 개조된 무대를 적극 활용해 관객이 오케스트라 사이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미텐드린’(Mittendrin)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악단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2019년부터는 이반 피셔(2012~2018년 재임)에 이어,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악단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의 임기를 시작하며 “이 악단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베를린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 건물에 크게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콘체르트하우스 건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1821년 건물의 개관과 1984년 재개관을 장식했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마탄의 사수’를 다시 한번 음반(Alpha)으로 담아 지난 5월에 발매했고, 6월 겐다르멘마르크트 광장에서도 연주했다.

또, 도시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공연장의 생애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위촉한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작품도 선보였다. 작곡가 마크 바든, 시각예술가 줄리앙 보네퀴의 협업으로 완성된 작품은 음악과 시각예술, VR·AR 기술을 아우른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탐구한다. 2016년부터 디지털 가상공간에서의 클래식 음악을 실험해온 악단의 미래지향적 면모를 보여준다.

©konzerthausberlin_felixloechner_sichtkreis

©sebastian_runge

 

김유빈 플루트 리사이틀 ‘블루밍 바로크’
8월 2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C.P.E.바흐 플루트 소나타 A장조 Wq.83, 헨델 플루트 소나타 5번 G장조 HWV363b, F. 쿠프랭 ‘왕정의 콩세르’ 1번 외

 

김유빈

음악저널콩쿠르·이화경향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원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을 졸업한 뒤 프랑스 리옹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2014년에 제네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와 청중상을 수상하는 쾌거에 이어, 2015년 프라하 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입단해 활동하면서도 국내외 무대에서 독주와 실내악도 활발히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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