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18년 11월
‘더 스퀘어’
조롱이다. 영화는 줄곧 사회와 예술과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고, 희화화하며 조롱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유럽 최고의 복지 국가 스웨덴, 그럼에도 빈민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제70회 칸 영화제는 예술을 조롱하는 이 ‘고급’ 예술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며 찬사를 보냈지만, 어지럽게 뒤섞인 사회적 함의와 파편적 블랙 코미디의 요소는 영화 ‘더 스퀘어’를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이 영화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예술을 조롱하는 대상과 조금도 교감하지 않고 그저 관찰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다. 관찰하고 조롱하되 개입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더 스퀘어’가 현대예술을 읽는 태도이기도 하다. 빈민의 시대, 예술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레에스 방)은 새로운 전시 프로젝트 ‘더 스퀘어’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설정된 사각형의 구역 안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도와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전시의 목적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인의 태도를 반성하고 성찰하자는 것이다. 전시 준비를 하는 크리스티안에게 문제가 생긴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하고, 이를 찾기 위해 벌인 일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다. 그 사이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전시를 홍보하고자 하는 홍보업체의 광고를 인지하지 못한 그는 모든 논란을 책임지고 수석 큐레이터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는 것보다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긴 하다. 영화의 시작은 난해한 미술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인터뷰를 진행하는 미국인 기자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더 어려운 언어로 답변을 하는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의 불편한 인터뷰로 시작한다. 기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는 외스틀룬드가 ‘더 스퀘어’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예술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난해한 언어를 당신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질문하고 있는가. 영화는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 풍경처럼 무시당하는 노숙자를 배경처럼 전시한다. 신뢰와 배려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가 함의하고자 하는 선언이며, 의식이다. 미술관을 둘러싼, 이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누구도 이 전시의 의미를 실천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도 ‘더 스퀘어’라는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이 우아한 선언적 전시가 행동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배려하거나 돕지 않는 실제 광장의 풍경과 거창한 의미를 담은 전시장의 풍경을 어지럽게 나열한다. 잘난 체하는 지식인으로 포장된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은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를 위협하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구했다는 일종의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소매치기였다. 인간에 대한 호의는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 위치추적으로 핸드폰이 있는 아파트를 찾아낸 그는 부하직원을 시켜 ‘협박 편지’를 아파트 집집마다 밀어 넣는다. 자신은 유명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하직원을 시키는 것이다. 편지의 효과로 그는 지갑과 핸드폰을 돌려받지만, 이 편지 때문에 오해를 받은 소년이 찾아오면서 일은 더 복잡해진다. 소년은 사과를 원하지만, 그는 핑계만 늘어놓을 뿐이다. 크리스티안처럼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위선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전시장에 초청받은 소위 사회 인사들은 전시보다는 음식에 집착하고,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클럽으로 변한 미술관과 왕궁에서 아는 체 위선을 떤다. 영화의 중간, 청소부가 전시작품인 자갈더미를 무너뜨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지만, 사진을 보고 직접 다시 쌓아올리자는 큐레이터의 지시는 미술작품의 의미를 훼손하고 가치를 폄하하는 모순 그 자체이다. 야만의 시대, 예술 영화 속 전시 ‘더 스퀘어’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주목을 얻기 위해 부랑인 소녀가 폭파되는 광고 동영상을 만든다. 논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언론도 덩달아 흥분하지만, 정작 이들은 기삿거리만 취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사람들은 들어야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은 정작 거리에서 죽어가는 부랑자를 챙기지 않는다. 이런 위선적인 장면은 전시장 내부에서도 벌어진다. 유려한 수사로 가득한 전시 소개말을 묵묵히 듣던 사람들은, 요리사가 준비한 요리를 설명하는 순간 무시하며 케이터링 장소로 이동한다. 요리사는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버럭 화를 낸다. 평등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 말만 듣고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는 현실을 담아낸 장면이다. ‘더 스퀘어’에는 오랑우탄 행위예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가장 힘주어 이야기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야만적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연회장에 모인 소위 지식인들은 오랑우탄의 퍼포먼스가 점점 과격해지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폭력적인 상황에 침묵한다. 공포심을 보이는 자에게 해를 가한다는 주의사항을 인지한 사람들은 오랑우탄 역할을 맡은 배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가 여자를 성추행하는 순간에 이르지만, 사람들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끔찍하고 숨 막히는 장면이다. 한 노신사가 용기를 내어 나서자, 그제야 일어선 사람들은 오랑우탄을 연기하는 배우를 거칠게 폭행한다. 이 장면에 등장한 배우는 ‘혹성탈출’에서 유인원 역할을 직접 연기한 스턴트맨이자 연기자인 테리 노터리이다. 그는 흔히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오랑우탄이 야만적인 행동을 하리라 설정하고 폭력적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반려용 오랑우탄이 실제로 등장한다. 미국인 기자 집에서 함께 하는 이 오랑우탄은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용히 앉아 화장을 하는 등 사람보다 더 우아하고 얌전한 모습을 보인다. 감독 루벤 웨스틀룬드는 ‘모든 이들이 함께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영화 ‘더 스퀘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문제와 그 모순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설정한 영화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시 쌓아올리면 그럴듯하게 다시 복원이 되어버리는 작품 속 ‘돌무더기’처럼, 영화 ‘더 스퀘어’가 직조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현대 예술에 대한 조롱이다.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지도 그 의미를 전파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토록 선명하게 설파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지루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순이며 동시에 핵심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캐서린 던햄 ‘사우스랜드’
이 춤의 운명이라니 _5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리고 단점을 보았을 때 자신의 자유나 생명을 걸고서라도 규탄할 수 있어야 한다 -캐서린 던햄, ‘사우스 랜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①
우리에게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어떠한 의미일까? 그가 울고 웃었던 그의 나라 소련은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정보일까? 아마도 이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이 질문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가 겪은 과거의 고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그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통해 그 신음을 듣는 귀를 열게 될 것이며, 그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시작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에서 폴란드 이민 3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쇼스타코비치는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1월 봉기’ 이후 시베리아로 이주했고, 아버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재원으로서 근대적인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연구팀에서 일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한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뀐다. 1924년 레닌그라드로 다시 한번 이름이 바뀌고,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은 것은 1991년이 되어서였다)에 입학했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가로서의 성공은 빨리 찾아왔다. 19세 때인 1925년에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교향곡 1번이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로 큰 찬사를 받은 것이다. 이전 쇼팽 콩쿠르에 참여했을 때 만났던 적이 있는 브루노 발터 역시 이 곡에 큰 흥미를 느끼고 베를린에서 연주했으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필라델피아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음반까지 발매했다. 그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럽을 거쳐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교향곡 2번 ‘10월’(1927)과 교향곡 3번 ‘5월 1일’(1929)은 소비에트 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수십 회 공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명성, 혼란을 야기하다 하지만 소련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은 곧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단 통치자보다 더 많은 이목이 쏠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세를 얻으면 통치자에게 쉽게 노출되어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통치자로부터 좋은 평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바로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다. 1936년 1월 26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참석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에 직접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즉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달려가 스탈린이 관람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하얗게 질렸다. 스탈린은 금관과 타악기가 큰 소리를 낼 때마다 부르르 떨었고, 주인공의 러브 신에서는 비웃기도 했다. 그리고 3막 도중에 나가버렸다! 이틀 후, 관제신문 ‘프라우다’에 실린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읽었다. “이것은 난해한 것들을 가지고 노는 장난이며, 몹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프라우다’지의 익명 사설은 곧 통치자의 말이었으며, 공식적인 비판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는 그의 발레 음악 ‘맑은 시내’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작은 여행 가방을 챙겨두고 밤잠을 설치며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후 딸 갈리나가 태어났고, 그는 이제 가족을 지켜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적인 음악 언어를 사용한 교향곡 4번을 완성하고 리허설까지 진행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초연을 취소했다. 그리고 1937년에 새로운 교향곡 5번을 내놓았다. 자신의 아픔뿐 아니라 소리 없이 사라진 친구들을 기리는 것이 진의였지만, 겉으로는 소비에트 정부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갖추었다. 다행히 정부는 작품을 좋게 해석했고,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영웅이 됐다. 1938년에 아들 막심이 태어났고, 1939년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정식 임용되었다. 그리고 교향곡 6번의 초연은 비평가들의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정부의 비판 없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의 위기는 지나간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음의 평정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피폐해진 내면의 치유가 필요했다. 교향곡이 외향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면, 그는 내면과의 대화로서 현악 4중주를 택했다. 교향곡 5번 완성 직후 현악 4중주를 구상하여 1938년 7월에 1번을 완성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봄과 같은 분위기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그렸다.” 15분 남짓의 짧은 연주 시간 동안 곡에서는 다양한 표정이 감지된다. 평정과 불안, 그리고 꿈과 현실의 공존. 곧 쇼스타코비치의 마음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운 작품 소련은 1930년대 말 독일과 혹독한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북부 전선이 레닌그라드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레닌그라드에 있었던 쇼스타코비치도 여느 젊은이들과 같이 징집되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시력도 좋지 않았던 그는 후방에서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소방수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소방수 모자를 쓴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1942년 7월 20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고, 이러한 그의 모습은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을 상징했다. 전 세계 대중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얻게 된 국외에서의 높은 인지도는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부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에 조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곡 중 가장 규모가 큰 곡 중 하나로, 나치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사실 전쟁 전에 구상되었으며, 스탈린의 포악한 정치로 인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곡’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마이크로필름 악보로 미국에 전해져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에게 연주되었으며,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 연주의 녹음을 듣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943년 여름에는 교향곡 8번이 완성되었다. 교향곡 7번이 전쟁에 대한 외면적인 혹은 공식적인 표현이었다면, 8번은 전쟁에 대한 슬픔과 희생자를 추모한 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적들은 승리를 노래해야 할 때에 비극적인 작품을 작곡한 것을 두고 파시스트를 지지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정부는 국민의 단합을 위해 이 곡에 ‘스탈린그라드’(현재 모스크바 남쪽 카스피해 부근의 볼고그라드를 지칭하던 말)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가장 치열하고 피해가 컸던 스탈린그라드 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곡이라고 두둔했다….
한국 현대무용단 LDP 이탈리아 밀라노를 넘다
WORLD HOT _글 문애령(무용평론가) 사진 LDP 전통을 넘어선 만남으로 관점의 교차를 경험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현대무용가를 주축으로 한 LDP(Laboratory Dance Project)가 밀라노 엘포 푸치니 극장(Teatro Elfo Puccini)에서 열린 무용축제 ‘밀라놀트레(MILANoLTRE)’에 참가했다. 밀라놀트레는 밀라노(Milano)와 올트레(Oltre)의 합성어로 ‘밀라노를 넘어’라는 의미다. 밀라노의 빛나는 발레 역사에 빗댄다면 ‘스칼라 극장의 고전을 넘어’로 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현대무용 축제다. 엘포 푸치니 극장에는 공연장 세 개가 있는데, 대극장은 ‘셰익스피어’, 중극장은 ‘파스빈더’, 소극장은 ‘바우쉬’로, 연극·영화·무용의 대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LDP가 선보인 6일간의 데뷔무대 제32회 밀라놀트레는 9월 1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진행되었고, LDP는 셰익스피어 홀에서 장장 6일간 공연했다. 9월 27·28일은 ‘룩 룩(Look Look)’과 ‘노 코멘트(No Comment)’, 29·30일에는 ‘바우(Bow)’, 10월 1·2일에는 ‘노 필름(No Film)’과 ‘노 코멘트’가 무대에 올랐다. LDP 레퍼토리는 기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각 작품의 개성은 뚜렷한 편이다. 밀라노 관객은 서울보다 연령대가 높았고, 작품 감상의 연륜도 깊어 보였다. 특히 로비에서 예술가들을 기다렸다가 감동을 전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동규 작 ‘룩 룩’은 화려한 문양의 의상 덕에 올해 밀라놀트레 포스터 모델로도 빛을 발했다. 의상은 요란하지만 정작 얼굴은 천으로 가린 군무가 객석을 누비며 누군가를 집중적으로 쳐다보는 해프닝이 익명성의 용기를 강조한다. 요란한 굉음, 규칙적 박자, 손가락을 던지는 리듬감, 반복적인 행진, 상처를 주고받는 이미지 등이 줄곧 ‘보기(look)’를 강조한다. 전 출연진이 중앙에 모여 질주할 때 관객은 그들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키고,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안무가의 고민을 나눠 갖는다….
국립현대무용단 ‘쓰리 스트라빈스키’
HOT STAGE _2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안성수, 정영두, 김재덕과 코리안심포니. 그의 음악에서 춤을 깨운다. 2017년 안성수 예술감독 취임 이후 국립현대무용단은 음악과 함께 진화 중이다. 취임 후 첫 신작인 ‘제전악-장미의 잔상’(2017년 7월)은 창작국악과 함께 했다. 이를 위해 작곡가 라예송은 새로운 국악을 빚었다. 안무가 로렁스 야디와 니꼴라 껑띠용을 초빙하여 만든 ‘슈팅스타’(2017년 11월)에서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월드뮤직 그룹 블랙스트링이 함께 했다. ‘스윙’(2018년 4월)에서는 스웨덴 스윙재즈밴드 젠틀맨 앤 갱스터즈와 함께 했다. 무대에는 무용가와 음악가들이 공존했고, 연주와 안무가 몸을 섞었다. 음악의 뼈대를 올곧이 드러내며, 춤의 살을 붙이는 작업으로 일관해온 안성수의 전력이 무용단의 기획력으로 녹아들어간 것이다. 지난 9월, 라벨의 ‘볼레로’를 놓고 김용걸, 김보람, 김설진이 함께 한 ‘쓰리 볼레로’를 지나 국립현대무용단은 11월에 ‘쓰리 스트라빈스키’를 선보인다. 스트라빈스키의 세 곡에 맞춰 세 안무가 함께 하는 형식으로, 안성수는 ‘봄의 제전’, 정영두는 ‘심포니 인 C’, 김재덕은 ‘아곤’를 선보인다. 음악도 정치용 예술감독과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올라 무용과 함께 실연이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코리안심포니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존 애덤스의 ‘셰이커 룹스’이라는 동일한 음악을 놓고 이해준과 정수동이 각기 다른 선보였던 ‘오케코레오그래피’ 이후 2년 만이다. 안성수의 첨예, 김재덕의 경쟁, 정영두의 자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그는 바흐나 헨델처럼 자신의 작품을 ‘춤곡’이라 명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춤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1910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출세작 ‘불새’부터 마지막 발레음악이라 할 수 있는 1957년 초연작 ‘아곤’에 이르기까지, 춤의 음악을 빚던 이 시기에 대해 본인 스스로도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세 배나 많은 음악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라고 한다. 그의 고향도 마린스키 발레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춤의 지기(地氣)를 받고 태어났던 것이다. 안성수는 ‘봄의 제전’을 선보인다. 1913년 5월의 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가득 찬 관객들의 야유와 소동 속에서 태어난 곡이다. 사실 그 소동은 음악에 대한 반응이었다기보다는 발레에 대한 통념을 뒤엎은 니진스키(1890~1950)의 안짱다리 위주의 파격적인 안무가 야기한 관객들의 거부감과 혼란이었다. 그런 결과를 뻔히 내다보고서 공연을 강행한 디아길레프(1872~1929)의 흥행 전략도 녹아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무용음악에는 복잡다단하고 강렬한 리듬이 두드러진다. 5박자, 7박자, 11박자 등 스트라빈스키 이전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은 변박들이다. ‘봄의 제전’에서 해방된 리듬은 온갖 기묘하고 복잡한 형태로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영역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여러 악기로 형성된 육중한 오케스트라는 ‘초대형 타악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리와 박자를 ‘중첩’한 특징도 도드라진다. 악보에 ‘현자의 행차’라고 적혀 있는 대목의 클라이맥스에선 서로 다른 두 가지 리듬 패턴이 중첩되어, 소리들은 서로 몸을 섞으며 협화음으로, 또 서로 밀어내며 불협화음을 만든다. 안성수는 학창 시절에 ‘봄의 제전’을 처음 접했다. 음악이 준 충격이 커서 찾아보니 유명 안무가의 작품영상이 나왔는데, 그 때에도 “음악이 너무 좋아서 작품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안무작에는 ‘봄의 제전’의 음악적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춤과의 결구를 치밀하게 끼워 맞을 예정. 즉, “음악에서 느껴지는 관념에 기대기보단 음악이 춤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게 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김재덕은 ‘아곤’을 맡았다. ‘아곤’이란 고대 그리스어로 갈등, 대결, 경기 등을 뜻한다. 이 음악은 1957년에 발란신(1904~1983)의 안무로 뉴욕 시티발레단이 초연하였다. 표제의 특징은 음악에 잘 잘 배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오케스트라’이지만, 청각의 초점을 맞춰보면 그냥 ‘여러 악기가 한 자리에서 연주한다’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악기들의 대비와 갈등이 돋보인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에 맞춰 김재덕도 ‘아곤’적인 질문으로 춤의 재료를 모았다고 한다. “살다보면 두 사람이 만나는 때가 있을 텐데, 이땐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할까? 좁은 길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들을. 안성수와 김재덕에 비해 ‘심포니 인 C’를 맡은 정영두는 보다 자유롭다. ‘C조 교향곡’ 혹은 ‘심포니 인 C’라 불리는 이 음악은 1940년, 스트라빈스키의 지휘로 시카고에서 초연되었다. 4개의 악장으로 1악장은 드라마틱한 전개, 2악장은 서정적인 명상, 3악장의 활기, 4악장 힘찬 집약과 해결이 돋보인다. 춤의 작곡가였던 스트라빈스키가 ‘발레음악을 너무 작곡하여 이젠 음악만을 위한 곡을 남겨야지’라는 생각으로 작곡한 작품인 만큼, 음악은 춤과 거리를 두려 한다. 하지만 그 ‘거리’는 정영두에게 상상력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간극으로 다가갔다. 그는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음악으로 빚어낸 춤의 정경을 펼치고, 관객들은 그것을 통해 마음껏 자신만의 정경을 상상하고 즐기게 될 것”이라 한다. 이와 함께 “메시지가 없을 때에도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안무작 ‘심포니 인 C’의 특징이다. 국내에서 실연으로 접하기 힘든 ‘아곤’과 ‘심포니 인 C’을 실연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번 공연만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