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가락
가야금 연주자 이지영
‘모든 음악’을 거쳐 ‘나의 음악’으로 가다 정악·민속악·창작곡이 담긴 전집에는 이지영의 개인사와 가야금의 현대사가 숨 쉰다 “가야금의 현은 명주실로 되었으니 ‘비단’이 떠올랐고, 가야금을 배울 때마다 나비가 허물을 벗듯 한 겹 한 겹 껍질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에 ‘나비’가 떠올랐습니다.” 이번에 출시된 전집의 제목이 ‘비단나비’가 된 이유다. 여섯 장의 CD 전집과 두 장의 LP 버전으로 발매된 ‘비단나비’는 영산회상, 도드리, 만년장환지곡(실황),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허튼가락, 그리고 창작곡이 수록되어 있다. 손에 들린 음반의 무게와 함께 이것을 위해 그녀가 그간 벗어던진 허물들의 무게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국음악의 영역을 크게 정악, 산조, 창작음악으로 나눌 때 이지영의 이름은 세 분야에서 균형을 맞추며 등장했다. 산조에 골몰한 연주자가 창작곡을 곁가지로 생각하거나, 창작에 매진한 이가 전통음악에 곁눈질 한번 안 주는 것과는 달랐다. 이지영은 모든 것을 아울렀다. 그래서 정악의 정통을 일구는 정농악회에서도, 뉴욕 산조페스티벌에서도, 국악·양악기가 혼재되어 현대음악을 일삼는 현대음악앙상블(CMEK)에서도 이지영의 존재와 이름을 늘 빛났다. 발 빠르게 장르를 횡단하는 유동성과 적응력이었다. 때론 현대음악을 연주할 때, 풀리지 않던 문은 손에 밴 정악이나 산조의 주법을 통해 열리기도 했다. “외국에서 산조를 탈 적에는 외국작곡가가 자신이 원하는 초현대적인 기법이 다 녹아 있다며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었어요.” 이러한 주법을 체계화하여 ‘작곡가를 위한 현대가야금기보법’(2011)을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비단나비’는 이지영의 복합적인 연주세계를 단번에 접할 수 있는 앨범이자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앨범이다. 현재 재직 중인 서울대의 음악동 연구실에서 이지영을 만났다. 한 여름의 매미소리가 창밖에서 밀려오던 때였다. 정통과 전승의 기운을 담다 정악은 “풍류음악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나 음악 애호가들이 즐기던 음악”이다. 이지영은 김정자(전 서울대 교수), 양연섭(전 한양대 교수), 최충웅(국립국악원 원로사범)으로부터 정악을 전수받았다. 26세 때는 정농악회에 최연소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른바 정악계의 거장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번 앨범에는 ‘영산회상’과 ‘도드리’(CD1), ‘만년장환지곡’(CD2)이 수록되었다. 영산회상은 거문고·대금·피리·해금 등과 함께 하거나, 악기별로 연주하는 독주곡이기도 하다. 이지영은 자신만의 소리를 담았다. 소리 하나하나를 줄에서 골라내어 한 점 한 점 수놓는다. “독주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은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연주자는 선율을 떠올리며 음들을 다듬어 나가요. 한 폭의 동양화가 떠오르곤 합니다. 한국음악과 미술은 이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영산회상을 튼다. 음과 음 사이, 여백으로 창밖의 매미소리가 파고든다. 그 울음은 같은 음반에 동봉된 ‘도드리’ 같기도 하다. 숲에 맹렬히 맴도는 매미의 소리처럼 ‘도드리’도 첫 머리를 물고 물며, 돌고 돈다. ‘만년장환지곡’(CD2)은 전통 가곡(歌曲)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가곡은 거문고·해금·대금·피리 등의 악기와 남창·여창이 함께 한다. 음반에는 가야금과 대금 소리만 담겼다. 20여 년 전인 1997년, 그녀가 이화여대 박사과정 때에 남긴 실황이다. 그 사이 정악대금의 명인 김응서(1947~2008)는 고인이 되었다. 산조는 김병호류 가야금산조(CD3)와 서공철류 가야금산조(CD4)가 수록되었다. 산조(散調)란 느리게 시작하여 빠르게 흐르는 속도의 음악이자, 여러 가락이 모이고 섞인 이합집산의 음악이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이 형식에 선조들은 삶과 인생관을 녹여 넣었다. 그래서 특정 누군가의 산조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그의 삶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이지영은 각 음반마다 김병호류와 서공철류의 긴 산조와 짧은 산조를 담았다. 장구 반주는 이태백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