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음악가들의 문화주택

서구식 문물과 부(富)를 대변한 스위트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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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17일 12: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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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음악가들의 집은 늘 화제를 낳았다

잡지 ‘신여성’ 7권 7호(1933년 7월)

지금도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 가면 홍난파가 살던 가옥이 있다. 2004년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이 집은 지어질 당시 ‘문화주택’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다. 이 가옥은 홍난파가 1935년부터 1941년까지 7년간 살았던 집이다. 지하 1층 지상 1층의 붉은색 벽돌건물로 원래 독일의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헐리고 현재 이 집만 남아 있다.

개항 이후 전통주택의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많은 지식인을 통해 제기되었다. 문명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근대적 신식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생적인 주거공간과 도시공간의 실천이 절대적이었다. 위생에 대한 관념은 ‘비위생=미개, 위생=문명’이라는 주거의식이 지식인 사이에 공유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주거와 위생 관념은 박람회를 통해 더욱더 필요성을 갖추게 된다. 1922년 도쿄 박람회에 출품된 서구식 외관과 구조를 갖춘 14개의 주택이 조선에 소개되었고, 서울에서는 문화주택 도안전람회와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1929년 경성에서 개최된 조선대박람회에선 부엌과 화장실이 개량된 3동의 주택이 출품되기도 하였다. 전통주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였고, 이후 진행된 주택개량의 근간은 이른바 서양주택을 모범으로 삼았다.

당시 지어진 문화주택은 전통적 주거방식의 비기능성, 비경제성, 비위생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자 대안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선의 지식인과 조선 내 거주 외국인들을 통해 간헐적으로 공급되던 문화주택은 1936년 인구급증으로 인한 거주와 주택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경성 내에 확장되면서 대대적으로 개발되었다. 상기한 홍난파의 가옥과 후암동의 조선은행사택 그리고 장충동과 신당동의 무학 주택지와 서대문밖 충정로에 위치한 금화장 문화주택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에는 서구식 주거방식을 따른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탓에 문화주택보다는 일본식주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주택은 부의 상징이었다. 박태원의 소설 ‘채가’에는 문화주택 단지에 대한 부러운 시선이 잘 표현된다.

 

안 초시는 돈의 긴요성을 날로날로 더욱 심각하게 느꼈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심심해서 운동 삼아 좀 나다녀 보면 거리마다 짓느니 고층 건축들이요, 동네마다 그림 같은 문화주택들이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물에서 갓 튀어나온 메기처럼 미끈미끈한 자동차가 등덜미에서 소리를 꽥 지른다. 돌아다보면 운전수는 눈을 부릅떴고 그 뒤에는 금시곗줄이 번쩍거리는, 살찐 중년신사가 빙그레 웃고 앉았는 것이었다.

“예순이 낼 모레···· 젠-장할 것.”

초시는 늙어가는 것이 원통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더 늙기 전에 적게 돈 만원이라도 붙들어 가지고 내 손으로 다시 한 번 이 세상과 교섭해보고 싶었다. 지금 이꼴로서야 문화주택이 암만 서기로 내게 무슨 상관이며 자동차, 비행기가 개미떼나 파리떼처럼 펴지기로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냐, 세상과 자기와는 자기 손에서 돈이 떨어진, 그 즉시로 인연이 끊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문화주택에 대한 선풍적인 인기는 1930년 조선일보의 만평에서도 잘 나타난다.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결혼적령기의 여성, 은행으로부터 무리하게 빚을 얻어 지은 문화주택을 짓는 가정에 대한 만평이 실리기도 했다.

서구식 문화주택에 대한 높은 선호도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전후(戰後) 복구 사업 중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된 공공주택은 서구식 거실공간과 동선을 고려한 구조로 지어졌고, 이것들은 예외없이 문화주택이라 불리기도 했다. 문화주택에 대한 인식은 새마을 운동 시기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러한 문화주택의 ‘문화’에는 한국사회가 지향한 모범 답안이 곧 ‘서구문화’라는 의미가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화의 선상에서 최상의 단계, 최후에 도달할 목적지는 서구식의 도시화라는 것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성 밑을 지나 최신식 문화주택으로

1933년에 ‘신여성’ 잡지에는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 교수로 재직 중인 윤성덕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당대 여성인 생활 탐방기’라는 제목이 붙은 시리즈물로 그 첫 번째를 윤성덕이 장식한 것이다.

개벽사는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미래의 여성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잡지 창간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1922년에 발행하여 운영하던 ‘부인’ 잡지의 제호를 1923년에 ‘신여성’으로 바꾸고 새 잡지를 창간했다. 잡지 ‘신여성’은 지식 계층의 여성만이 아니라 여학생과 가정부인을 독자층으로 설정하며 여학생 잡지인 동시에 일반적 가정 잡지라는 지향점을 강조했다. 잡지는 무엇보다 근대적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신여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기사는 크게 두 가지로 방향으로 구분된다. 인터뷰나 경험담을 통해 여학생과 성인 여성의 새로운 생활상을 보여 주는 기사, 그리고 육아·위생· 연애·결혼·부부 문제 등 당시 첨예하게 논의되던 사회적 주제를 다룬 기사였다.

윤성덕은 윤심덕(1897~1926)의 동생이다. 김우진과의 정사(情死)로 조선반도를 뜨겁게 달군 여인, 윤심덕. 그녀는 1926년 7월 일본 오사카의 녹음실에서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사(死)의 찬미’를 녹음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루마니아 작곡가 이온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직접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는 염세적 정서로 큰 인기를 누렸다. 윤성덕은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 이화여전의 피아노 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언니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는 ‘윤심덕의 동생’으로 통했다.

1933년 7월에 발행된 ‘신여성’ 7권 7호에는 윤성덕의 생활상을 담은 기사가 나온다. 기자는 윤성덕이 사는 집을 방문한다. 이른바 당시 높은 지위나 상당한 재력을 갖춘 조선인들만이 살 수 있었던 문화주택이다.

 

그 유명한 성악가 윤성덕의 누이동생으로-아니다 조선여자의 최고학부 이화여전의 피아노 교수로 유명하신 윤성덕 씨의 생활하시는 근황을 살펴보고자 기자는 어느 무덥던 날 저녁 기슭에 홍파동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무너져가는 성 밑 길을 더듬어 올라가 소위 송월동 골목을 거쳐 인왕산을 바라고 가다가 내가 찾는 홍파동에 이르렀다. 새로 지은 문화주택들이 저녁 사양(斜陽)에 비춰 그 색채가 더욱 선려(鮮麗)한 반사를 하고 있는 그 사이에 조그만 언덕 위에 야트막한 검은 판장이 강렬한 대조를 던져주고 있었다.

지나가든 마나님의 손가락질하는 곳은 바로 그 검은 판장!

“저 집이요. 거기 뒷문이 있소.”

기자는 그 조그만 언덕을 달음질쳐 올라가서 판장문을 사르르 밀었다.

첫 눈에 띈 것은 뒷마당에 놓여 있는 시커먼 구들장 조각과 익혀놓은 황토와 헤벌려 놓여 있는 호미와 가래 등의 연장들이었다.

“아하 택(宅)을 수리하시는구나”하고 주춤거리니 낯 모르는 여인 한분이 나와서 응접실로 나를 인도해주었다.

주택은 조그만 검은 기와 입히고 흰 시멘트로 벽을 붙인 2층집인데 내부설비는 조선식은 물론 화양 각풍이 혼합되어 설계되고 장식되어 있었다. 즉 외모와 현관은 일본 집인데 유리창과 걸쳐 있는 커튼은 분명코 양식이다. 그런데 온돌방과 부엌에 부뚜막돌은 또 명백히 조신식인 것이다.

기다란 골마루(안방이나 건넌방에 딸린 골방처럼 좁은 마루)를 거쳐 앞 현관으로 돌아서 접견실로 들어갔을 때 상냥한 웃음을 띤 윤성덕 씨가 나를 맞아주었다.

약간 거무스름한 얼굴과 가뿐한 단발, 자그마한 키에 블루 빛 얄팍한 스웨터-를 입은 호리호리한 몸맵시 어디로 보든지 퍽 우아하고 티 한 점 없어 보이는 그녀다.

“하- 오래간만이로구려. 어서 거기 앉으시오”하고는 자기도 한편 의자에 걸쳐 앉으면서 맞은쪽 안락의자를 가리킨다. 그의 어조는 부드럽고 다정하였다.

“요새 집을 좀 고치느라고 온통 뒤숭숭해요.”

“그럼 이사 오신지가 얼마 안 되십니까?”

“그렇다오. 그래서 집에 세간들도 함부로 쌓아놓기만 하고 정리를 못하고 있다오. 동무들이 놀러오겠다 새집 구경을 하겠다고들 하나 집을 다 고치거든 오라고 하고는 일체 공개금지를 하고 있다오. 하하”하고 이야기는 이사오기까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은 조그마하나 피아노 한 개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고 건너편 방에는 어여쁜 침대와 연두 빛나는 엷은 이불이 개켜 놓인 것이 보였다.

 

이러한 윤성덕의 삶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없이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었다. 민태원의 소설 ‘음악회’에 등장하는 전통/근대(=서구)의 도식을 인용해서 당시의 문화주택의 삶을 보면 “양복, 자동차 탄 젊은 내외, 양옥집, 앞뒤로 둘린 정원” 등과 함께 낙관적 희망을 대변해주는 서구의 기호이고, “갑갑한 단간살이집, 손수 밥 짓느라고 연기에 눈물 흘리는 여자, 경황없는 얼굴, 무색한 의복”은 구습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근대의 대조는 위의 기사 속 “무너져가는 성 밑 길(구습)”과 “새로 지은 문화주택들이 저녁 사양(斜陽)에 비춰 그 색채가 더욱 선려(鮮麗)한 반사(신식)”의 대조적인 풍경과도 같다.

무엇보다 윤성덕의 집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다. 피아노는 서양에서도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였다. 특히 19세기에는 오페라 관람과 비견하는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 당시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를 넘어 상류 계급의 필수품으로, ‘잘 사는 가정’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서구에서도 상류계층의 가정은 거실에 고가의 그랜드피아노를 놓고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딱히 귀를 단련하려 하는 것도 아니고 최고급 피아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은 저녁식사 후에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딸이 치는 피아노에 귀를 기울이면서 ‘스위트홈’의 낭만을 만끽했다.

 

문화주택에서 만난 피아노와 서양음악

피아노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귀한 물건이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방문한 문학평론가 김팔봉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방문하고 쓴 ‘문학과 음악의 전당 이화여자전문학교-기숙사의 여러 가지 로-맨스 등’의 기사(1931년 12월 ‘삼천지’ 3권 12호)를 보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정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피아노의 멜로디는 오정의 사이렌과 한 가지로 이화려전의 앞날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만큼 피아노는 문화주택과 함께 ‘서구식 근대화’의 상징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윤성덕의 문화주택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셈이었다.

 

피아노와 유리창의 커-튼과는 아주 딴판으로 색다른 고풍의 병풍이 침대 뒤로 보이는 것이 눈에 이상한 감을 던져주고 있었다. 벽에는 둘러가며 초상화가 걸려 있고 한쪽에 놓인 책장에는 음악서류가 가지런히 서 있고 아래 창에는 악보 책이 차곡차곡 가득하게 쌓여있었다. (···)

“저 벽에 걸린 사진은···?”

그는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반가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첫 번에 걸린 것은 다 잘 아는 베토벤이고 그 다음은 지금 미국에 있는 나의 브라더인데 성악가라오. 내년에 귀국 할테라오. 그리고 그 다음은 호프만 그 다음은 모차르트 그 다음은···”

자세자세 가르쳐주었으나 하도 많아 나중에는 하나도 기억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설명이 끝난 뒤에 그는 레코드 한 장을 축음기에 걸어주었다. 창 너머로는 넘어가는 석양이 점점 엷어지는데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곱다란 멜로디는 나의 마음까지를 석양햇볕처럼 점점 가라앉혀주었다. (···) 윤성덕 씨의 맏형님 윤심성 씨는 수년 전에 불행 과택(과부댁)이 되신 분인데 외따님을 데리고 이 집에 동거하시며 살림을 보아 주시는 중이시며 그 따님은 이화여고에 재학 중인데 역시 어머님과 이모님의 재질을 본받아 장래 피아니스트로서의 출세를 바라는 바이다.

“학교는 매일 몇 시에 가십니까?”

“대개 아침 여덟시에는 학교로 가고 저녁 4시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회합이 있는 때면 조금 늦게 집엘 온다오.”

“집에 오시면?”

“집에 오면 다른 일이라고는 별로 없고 저녁 후에 피아노 연습도 하고 축음기도 틀고 그렇지. 참 화조를 좋아하니까 조카를 데리고 화단을 꾸미고 할 뿐이라오.”

“구경은 무엇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음악회에 가는 것이지요. 가끔 영화도 음악 좋은 것이 들었으며 가끔 가본다오.”

“저녁에 외출하시기에는 교통이 퍽 불편하시겠습니다.”

“그러게.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는 특별한 사정 외에는 나가지를 않는다오.”

“취미는?”

“화조 가꾸는 것 외에 운동을 퍽 좋아한다오. 그중에도 테니스와 스케이팅을 좋아한다오.”

(···) 집안 식구는 전부 베드 생활을 하며 음식도 양식이 주라고 하시는 데는 이 가정은 아주 서양풍이 깊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금년 29세. 그러나 아직도 씨에게는 처녀다운 공상이 엿보이고 있음을 기자는 그 말 가운데서 보았다.

아카시아 잎사귀들이 유리창 사이를 너풀대는데 윤성덕 씨의 사랑하는 조카의 피아노소리가 황혼의 저녁 하늘을 울리고 흘러나왔다. 기자는 남양의 야자수 그늘을 연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심방을 끝맺었다.

길거리로 나왔을 때는 어느 새 전등불이 거리에 번쩍이었고 으릉대는 전차 소리가 새삼스럽게 귀 거슬리는 소음처럼 들리었다.

 

피아노, 유리창과 커튼, 침대, 모차르트·베토벤·호프만, 미국에 있는 남동생, 축음기·레코드, 음악회, 테니스·스케이팅 등을 접한 윤성덕의 문화주택. “아주 서양풍이 깊은 것”이라며 이 방문기의 기자는 마무리 짓고 있지만, 문화주택에서의 여운은 그 집을 나온 길거리에서 “황혼의 저녁 하늘”를 달리 보이게 하고, “남양의 야자수”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경성의 현실로 대변되는 “전차 소리”가 “귀 거슬리는 소음”처럼 들리게 한다.

당시 성악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한 현제명,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과 피아니스트 이애내 부부 등의 가정은 대개 이와 같은 신문물로 가득한 가옥이었다. 따라서 잡지 기자들의 인기의 취재물이기도 했다. 계정식의 집을 방문한 기자는 계정식의 음악과 예술보다 그의 집에 더욱 관심이 많다(1937년 9월 ‘조광’ 23호 ‘음악가 계정식씨 주택-금화산 아래 깃들인 비둘기’).

1937년 ‘조광’에 소개된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의 주택

서대문밖 연희장 주택지 중에서도 가장 아담한 곳-뒤로는 금화산의 송림을 배경으로 하고 옆으로는 애기릉의 울림을 벗으로 하여 장차 날려는 비둘기 같이 아담한 주택은 음악가 계정식 씨의 주택이다. (···) 기자는 대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섰다. 네 귀를 잠자리 날개 같이 바싹 들고 남향한 문화주택 전면은 모두 분합을 드리고 유리창을 하여 창만 여러 젖히면 바람과 일광이 맘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부엌은 뒤로 부쳐서 보이지 않고 망만이 순백의 커튼 아래 조용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 기자는 “이 집터가 몇 평입니까?”하고 좀 복덕방 사람 같은 말을 건넸으나 “72평인데 도합 18칸으로 방은 셋입니다”하고 부인은 친절이 대답하여 주신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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