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18 11월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COVER STORY _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자하로바가 한국에 온다. 2005년 볼쇼이 발레의 ‘지젤’…

‘더 스퀘어’

조롱이다. 영화는 줄곧 사회와 예술과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고, 희화화하며 조롱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유럽 최고의 복지 국가 스웨덴, 그럼에도 빈민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제70회 칸 영화제는 예술을 조롱하는 이 ‘고급’ 예술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며 찬사를 보냈지만, 어지럽게 뒤섞인 사회적 함의와 파편적 블랙 코미디의 요소는 영화 ‘더 스퀘어’를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이 영화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예술을 조롱하는 대상과 조금도 교감하지 않고 그저 관찰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다. 관찰하고 조롱하되 개입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더 스퀘어’가 현대예술을 읽는 태도이기도 하다. 빈민의 시대, 예술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레에스 방)은 새로운 전시 프로젝트 ‘더 스퀘어’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설정된 사각형의 구역 안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도와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전시의 목적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인의 태도를 반성하고 성찰하자는 것이다. 전시 준비를 하는 크리스티안에게 문제가 생긴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하고, 이를 찾기 위해 벌인 일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다. 그 사이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전시를 홍보하고자 하는 홍보업체의 광고를 인지하지 못한 그는 모든 논란을 책임지고 수석 큐레이터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전시를 준비하는 것보다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긴 하다. 영화의 시작은 난해한 미술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인터뷰를 진행하는 미국인 기자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더 어려운 언어로 답변을 하는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의 불편한 인터뷰로 시작한다. 기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는 외스틀룬드가 ‘더 스퀘어’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예술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난해한 언어를 당신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질문하고 있는가. 영화는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 풍경처럼 무시당하는 노숙자를 배경처럼 전시한다. 신뢰와 배려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가 함의하고자 하는 선언이며, 의식이다. 미술관을 둘러싼, 이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누구도 이 전시의 의미를 실천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도 ‘더 스퀘어’라는 전시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이 우아한 선언적 전시가 행동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배려하거나 돕지 않는 실제 광장의 풍경과 거창한 의미를 담은 전시장의 풍경을 어지럽게 나열한다. 잘난 체하는 지식인으로 포장된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은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를 위협하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구했다는 일종의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소매치기였다. 인간에 대한 호의는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 위치추적으로 핸드폰이 있는 아파트를 찾아낸 그는 부하직원을 시켜 ‘협박 편지’를 아파트 집집마다 밀어 넣는다. 자신은 유명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하직원을 시키는 것이다. 편지의 효과로 그는 지갑과 핸드폰을 돌려받지만, 이 편지 때문에 오해를 받은 소년이 찾아오면서 일은 더 복잡해진다. 소년은 사과를 원하지만, 그는 핑계만 늘어놓을 뿐이다. 크리스티안처럼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위선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전시장에 초청받은 소위 사회 인사들은 전시보다는 음식에 집착하고,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클럽으로 변한 미술관과 왕궁에서 아는 체 위선을 떤다. 영화의 중간, 청소부가 전시작품인 자갈더미를 무너뜨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지만, 사진을 보고 직접 다시 쌓아올리자는 큐레이터의 지시는 미술작품의 의미를 훼손하고 가치를 폄하하는 모순 그 자체이다. 야만의 시대, 예술  영화 속 전시 ‘더 스퀘어’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주목을 얻기 위해 부랑인 소녀가 폭파되는 광고 동영상을 만든다. 논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언론도 덩달아 흥분하지만, 정작 이들은 기삿거리만 취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사람들은 들어야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은 정작 거리에서 죽어가는 부랑자를 챙기지 않는다. 이런 위선적인 장면은 전시장 내부에서도 벌어진다. 유려한 수사로 가득한 전시 소개말을 묵묵히 듣던 사람들은, 요리사가 준비한 요리를 설명하는 순간 무시하며 케이터링 장소로 이동한다. 요리사는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버럭 화를 낸다. 평등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 말만 듣고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는 현실을 담아낸 장면이다. ‘더 스퀘어’에는 오랑우탄 행위예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가장 힘주어 이야기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야만적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연회장에 모인 소위 지식인들은 오랑우탄의 퍼포먼스가 점점 과격해지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폭력적인 상황에 침묵한다. 공포심을 보이는 자에게 해를 가한다는 주의사항을 인지한 사람들은 오랑우탄 역할을 맡은 배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가 여자를 성추행하는 순간에 이르지만, 사람들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끔찍하고 숨 막히는 장면이다. 한 노신사가 용기를 내어 나서자, 그제야 일어선 사람들은 오랑우탄을 연기하는 배우를 거칠게 폭행한다. 이 장면에 등장한 배우는 ‘혹성탈출’에서 유인원 역할을 직접 연기한 스턴트맨이자 연기자인 테리 노터리이다. 그는 흔히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오랑우탄이 야만적인 행동을 하리라 설정하고 폭력적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반려용 오랑우탄이 실제로 등장한다. 미국인 기자 집에서 함께 하는 이 오랑우탄은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용히 앉아 화장을 하는 등 사람보다 더 우아하고 얌전한 모습을 보인다. 감독 루벤 웨스틀룬드는 ‘모든 이들이 함께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영화 ‘더 스퀘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문제와 그 모순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설정한 영화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시 쌓아올리면 그럴듯하게 다시 복원이 되어버리는 작품 속 ‘돌무더기’처럼, 영화 ‘더 스퀘어’가 직조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현대 예술에 대한 조롱이다.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지도 그 의미를 전파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토록 선명하게 설파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지루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순이며 동시에 핵심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사우스랜드’ 모든 것을 잃더라도 바꿀 수 있다면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리고 단점을 보았을 때 자신의 자유나 생명을 걸고서라도 규탄할 수 있어야 한다  -캐서린 던햄, ‘사우스 랜드’ 프롤로그- 취기가 오른 젊은 백인 남녀 렌우드와 줄리가 목련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눈다. 줄리의 장난스러운 놀림에 렌우드가 발끈하여 그녀를 흠씬 구타하고는 달아난다. 정신을 잃었던 줄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치욕과 분노, 절망이 교차하던 순간 그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아내어 눈을 번뜩인다. 그리고 외친다. “깜둥이(Nigger)!” 무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흑인 노동자 리처드는 백인 폭도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뒤 목련 나무에 목이 매달린다. 코러스가 시체를 수습하여 애도의 행진을 하는 동안 리처드의 연인 루시가 목련 꽃을 들고 나타나 절규하고, 줄리는 시체의 불탄 옷자락을 찢어 전리품으로 챙겨 들고 빠져나간다. 린치 댄스   캐서린 던햄(Katherine Dunham, 1909~2006)의 ‘사우스랜드(Southland, 1951)’ 1막은 남녀의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다음 순간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젠더와 인종의 위계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백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폭행한 것은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으나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폭행한 것은 사회적 갈등으로 탈바꿈한다. 게다가 성폭행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서구사회에서는 흑인 남성의 성적 능력이 우월하다는 우생학적 믿음이 만연했고, 백인 남성은 그들(흑인 남성)이 우리의 소유물(백인 여성)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두려움은 잔혹한 복수를 정당화한다. 린치(lynch)는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혹은 그렇다고 여겨진) 흑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백인 남성의 집단 폭력행위이다. ‘사우스랜드’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빌미로 한 린치의 발생과 결과를 다룬 댄스 드라마다. 1막의 엔딩에서 루시가 바닥을 나뒹굴며 절규하는 동안 코러스 가수가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를 노래한다. 아벨 미어폴(a.k.a. 루이스 앨런)의 시를 바탕으로 빌리 할리데이가 불러 유명해진 곡이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가 매달린 채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멋진 남부 풍경에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 그리고 어디선가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 까마귀가 뜯어 먹고 비를 맞고 바람을 빨아들이면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네.” 성기가 훼손되고 나무에 매달려 불타버린 린치 희생자의 이미지는 흑인인권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우드랜드’에서 ‘이상한 열매’ 노래에 맞춰 루시가 애도하는 장면은 펄 프리머스(Pearl Primus)의 동명 무용작품인 ‘이상한 열매’(1943)를 연상케 한다. 프리머스의 작품은 흑인 여성의 짧은 솔로 작품으로 직설적인 제목과는 달리 나무나 시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우스랜드’의 1막은 프리무스의 ‘이상한 열매’에 인과 관계와 내러티브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2막이다. 2막은 1막의 시공간에서 분리되어 어디에나 있음직한 나이트클럽을 배경으로 한다. 한 무리의 흑인이 춤추고 노래하며 무언가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1막에서 극을 해설했던 코러스가 리처드의 시체를 들고 천천히 입장한다. 군중들은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얼어붙었다가 서서히 일그러진다. 울음을 터뜨리는 여성, 바닥에 끊임없이 칼을 던지는 남성, 바닥을 나뒹구는 커플 사이로 눈먼 거지가 홀연히 무언가를 바라본다. 모두가 느끼지만 형언할 수 없던 진실, 직접 겪지 않더라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차별을 직시하는 것이다. ‘사우스랜드’는 노골적이고 불편한 방식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무대 위의 폭력을 안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액자 틀이 부서지자 린치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이 점에서 ‘사우스랜드’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이다. ‘N 단어’를 내뱉는 고통  ‘사우스랜드’의 주인공 커플인 줄리-렌우드, 루시-리처드는 실제 무용수의 이름에서 따왔다. 루시는 루실 엘리스가, 리처드는 리카르도 아발로스가 맡았고, 줄리는 던햄무용단의 유일한 백인 단원인 줄리 로빈슨 벨라폰테가, 렌우드는 렌우드 모리스가 붉은 가발과 화장으로 분했다. 작품에서 백인폭도는 무형의 존재로 처리되기에 실제 무대에 등장하는 백인은 줄리-렌우드이고 실제 백인은 줄리 뿐이다. 그런데 줄리가 연기하는 줄리는 인종적 위계를 악용해서 참사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비극의 발단은 성폭행한 렌우드이겠지만 비난의 타겟은 줄리가 된다. 특히 자기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리처드의 불탄 옷자락을 전리품으로 챙겨 든 줄리와 억울하게 연인을 잃은 루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1막이 끝나는 던햄의 연출은 젠더보다는 인종 문제를 부각하며 줄리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킨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①

우리에게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어떠한 의미일까? 그가 울고 웃었던 그의 나라 소련은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정보일까? 아마도 이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이 질문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가 겪은 과거의 고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그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통해 그 신음을 듣는 귀를 열게 될 것이며, 그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시작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에서 폴란드 이민 3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쇼스타코비치는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1월 봉기’ 이후 시베리아로 이주했고, 아버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재원으로서 근대적인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연구팀에서 일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한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뀐다. 1924년 레닌그라드로 다시 한번 이름이 바뀌고,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은 것은 1991년이 되어서였다)에 입학했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가로서의 성공은 빨리 찾아왔다. 19세 때인 1925년에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교향곡 1번이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로 큰 찬사를 받은 것이다. 이전 쇼팽 콩쿠르에 참여했을 때 만났던 적이 있는 브루노 발터 역시 이 곡에 큰 흥미를 느끼고 베를린에서 연주했으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필라델피아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음반까지 발매했다. 그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럽을 거쳐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교향곡 2번 ‘10월’(1927)과 교향곡 3번 ‘5월 1일’(1929)은 소비에트 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수십 회 공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명성, 혼란을 야기하다  하지만 소련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은 곧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단 통치자보다 더 많은 이목이 쏠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세를 얻으면 통치자에게 쉽게 노출되어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통치자로부터 좋은 평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바로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다. 1936년 1월 26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참석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에 직접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즉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달려가 스탈린이 관람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하얗게 질렸다. 스탈린은 금관과 타악기가 큰 소리를 낼 때마다 부르르 떨었고, 주인공의 러브 신에서는 비웃기도 했다. 그리고 3막 도중에 나가버렸다! 이틀 후, 관제신문 ‘프라우다’에 실린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읽었다. “이것은 난해한 것들을 가지고 노는 장난이며, 몹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프라우다’지의 익명 사설은 곧 통치자의 말이었으며, 공식적인 비판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는 그의 발레 음악 ‘맑은 시내’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작은 여행 가방을 챙겨두고 밤잠을 설치며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후 딸 갈리나가 태어났고, 그는 이제 가족을 지켜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적인 음악 언어를 사용한 교향곡 4번을 완성하고 리허설까지 진행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초연을 취소했다. 그리고 1937년에 새로운 교향곡 5번을 내놓았다. 자신의 아픔뿐 아니라 소리 없이 사라진 친구들을 기리는 것이 진의였지만, 겉으로는 소비에트 정부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갖추었다. 다행히 정부는 작품을 좋게 해석했고,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영웅이 됐다. 1938년에 아들 막심이 태어났고, 1939년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정식 임용되었다. 그리고 교향곡 6번의 초연은 비평가들의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정부의 비판 없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의 위기는 지나간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음의 평정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피폐해진 내면의 치유가 필요했다. 교향곡이 외향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면, 그는 내면과의 대화로서 현악 4중주를 택했다. 교향곡 5번 완성 직후 현악 4중주를 구상하여 1938년 7월에 1번을 완성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봄과 같은 분위기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그렸다.” 15분 남짓의 짧은 연주 시간 동안 곡에서는 다양한 표정이 감지된다. 평정과 불안, 그리고 꿈과 현실의 공존. 곧 쇼스타코비치의 마음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운 작품  소련은 1930년대 말 독일과 혹독한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북부 전선이 레닌그라드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레닌그라드에 있었던 쇼스타코비치도 여느 젊은이들과 같이 징집되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시력도 좋지 않았던 그는 후방에서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소방수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소방수 모자를 쓴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1942년 7월 20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고, 이러한 그의 모습은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을 상징했다. 전 세계 대중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얻게 된 국외에서의 높은 인지도는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부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에 조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곡 중 가장 규모가 큰 곡 중 하나로, 나치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사실 전쟁 전에 구상되었으며, 스탈린의 포악한 정치로 인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곡’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마이크로필름 악보로 미국에 전해져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에게 연주되었으며,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 연주의 녹음을 듣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943년 여름에는 교향곡 8번이 완성되었다. 교향곡 7번이 전쟁에 대한 외면적인 혹은 공식적인 표현이었다면, 8번은 전쟁에 대한 슬픔과 희생자를 추모한 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적들은 승리를 노래해야 할 때에 비극적인 작품을 작곡한 것을 두고 파시스트를 지지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정부는 국민의 단합을 위해 이 곡에 ‘스탈린그라드’(현재 모스크바 남쪽 카스피해 부근의 볼고그라드를 지칭하던 말)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가장 치열하고 피해가 컸던 스탈린그라드 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곡이라고 두둔했다.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44년 2월, 친구였던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친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피아노 3중주 2번에 착수했다. 큰 슬픔으로 여러 차례 작곡을 잇지 못하던 그는 8월이 되어서야 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를 추모하는 또 다른 작품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다. 이 두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요청으로 그해 11월 14일 솔레르친스키가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대공연장에서 베토벤 4중주단과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남북 음악교류의 첫 문이 열리기까지 -2

공산권의 빗장 풀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일본과의 서양음악 교류가 본격화되었다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중국과 같은 공산권과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1980년대는 동구권 음악의 개방, 남북음악교류 추진과 월북음악인 및 북한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 등으로 인해 견고했던 냉전의식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최초로 분단의식을 음악계 내부에서부터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특히 대한민국음악제와 그 후신인 서울국제음악제, 1986년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서울올림픽, 그에 따른 대규모 문화예술행사 등은 이러한 흐름이 외형적으로 가시화되는 결정적 국면으로 작용하였다. 박용구(음악평론)도 두 스포츠행사가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문화예술축전을 제공하는 계기로서 국가적 근대화의 물적 수단이 총동원되는 양상을 띠었다’라며, 이로 인해 ‘아시아 인접 국가들의 음악이 대거 소개되고, 소련과 동구권이 참여한 올림픽으로 그간 금기시되어온 공산권 국가의 음악에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폐쇄적이던 우리 음악사회에 열린사회로의 기운을 불어넣’었다.21)    중국과 시작된 교류의 물꼬 중국과의 음악적 교류에 있어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국과 소련, 동구권과 ‘정치·경제적 문화적 접촉을 시도했으며 그 상당 부분이 알게 모르게 진척’22)되었다.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개최된 1986년 서울국제음악제와 서울국제민속축제를 통해 양악과 전통음악 분야의 아시아권의 음악이 집중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23) 언론은 ‘지금까지 우리의 음악은 구미지역과의 관계에 편중되어 이번처럼 아시아권 음악을 한 자리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24)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스포츠 교류가 국민들 눈앞에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중국과 동유럽의 연주자들이 몇 차례의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25) 또한 1960년대에 한국음악계에 조명된 NHK교향악단의 튜바 단원 이원구의 사례처럼 중국 내 교포와 조선족 음악가들의 활동이 조명되기도 했다. 중국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항일운동을 진행한 조선인들의 또 다른 활동지이기도 했는데, 조명되는 음악가들은 그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았다. 1989년 중국교포 유수송과 그의 아들 유승남 부자가 나란히 KBS교향악단의 트럼펫 단원으로 선발되어 중국교포 음악인의 국내정착 첫 사례로 조명된 적이 있는데, 유수송은 김구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유평파의 자녀였다.26) 1989년에는 중국 교포지휘자 김정평27)이 조명되기도 했다. 서양음악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이듬해인 1989년부터이다. 하지만 소련·헝가리·체코·폴란드 등 동구권을 포함한 국가들이 대(對)공산권 국가와의 음악적 교류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황에 비하면 중국과의 교류는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이 되면서 여러 중국음악가들의 내한이 예정되었지만, ‘공연예술계의 관계자들은 대(對)중국교류는 지금까지 북한의 입김이 강해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럽다’28)라고 하였고, 1989년 천안문 사태는 중국 음악가들의 출국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29) 문화공보부의 사회주의권 예술단 초청과 관련하여 초청 주체 1개사에 1단체의 쿼터를 할당하는 등의 규제를 하기도 했다.30)  공산권 음악교류와 월북예술가 해금 조치  중국과의 음악교류가 가져온 파급은 남북관계의 개선이었다. ‘공산권 중에서 양대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이 올림픽을 계기로 서로 경쟁적으로 한국에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국제현실’인 시점에서 ‘북한의 가장 강력한 지원세력의 한국 접근은 앞으로 한반도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31)를 가늠하였고, 이러한 정세 변화 가운데 음악에서도 남북 교류 및 분단음악의 극복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주의권 음악들이 개방되면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음악적 사고와 연주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88년, 남한의 해금(解禁) 조치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9년 7·7선언32)의 후속 조처로 미수교국 예술작품의 국내 개방, 월북 작가 문학작품의 출판 허용, 북한자료 개방 등과 함께 해금이 단행되어 정부는 납·월북 작가의 문학작품에 대해서 대폭적인 해금(解禁) 조치를 내렸고 이어서 음악·미술 작품에 대해서도 규제조치를 풀었다. 이에 따라 ‘국제화에 맞춰 내부의 닫힌 문을 개방하여 해금된 납·월북 음악인들의 작품 연주 및 연구가 보다 활발해질 것’을 기대하게 했다. 당시 해금조치와 관련된 음악인은 김순남, 안기영, 이건우, 이면상 등 71명이었고, 해금 대상은 음악인의 전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월북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김순남의 가곡 ‘산유화’, 이건우의 ‘금잔디’ 등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연초부터 ‘남북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예술제가 개최될 것으로 전망’되었고,33) 윤이상이 3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윤이상음악제가 기획되기도 했다. ‘반공’을 넘는 연습.중국과의 음악교류 1988년 서울올림픽과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공산권 국가의 붕괴에 따라 1990년부터 국내에 공산권 음악가들의 스카우트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34) 중국과 서양음악 교류는 보다 활발해진다. 게다가 중국은 1990년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음악교류는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의 관광이나 친지방문형식에 의한 비공식적 공연 형태를 탈피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35)  1990년 중국 내의 교포음악가들이 함께 모여 아리랑교향악단을 결성하였고36) 서울국제음악제에 슈웨이(바이올린)가 초청되기도 했다. 1991년에 서울대 음대에 재학 중인 양고운(바이올린)이 국내 최초로 북경 중앙교향악단 및 상하이 교향악단과 현지에서 협연 무대를 갖기도 하였다. 37)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었고, 이를 계기로 그해 말에 중국 예술단체들의 내한 공연이 잇달아 계획·발표되었다.38) 일본 및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던 KBS교향악단은 1992년에 중국 교포 전성해(바이올린)의 입단을 허락하여 KBS교향악단의 수석이 되었다.39) 1993년 북경 중앙교향악단이 첫 내한 공연을 가졌고40) 서울시교향악단은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기념하는 특별정기연주회로 중국의 피아노 협주곡 ‘황하’와 한국의 정윤주가 작곡한 교향곡 ‘마라도’를 연주했다. 1994년에는 북경중앙교향악단과 함께 양대산맥으로 거론되던 상하이교향악단이 첫 내한 공연41)을 가져 김남윤(바이올린)과 협연했는가 하면, 황병기가 작곡한 ‘새봄’을 이지영(가야금)의 협연으로 함께 선보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의 여파로 음악가들에게 서방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던 중국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이에 따른 개방화를 통해 세계무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42)…

남북 음악교류의 첫 문이 열리기까지 -1

해방 이후, 일본과의 음악교류 국내의 음악계가 ‘아시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과의 수교가 있던 1965년 전후이다. 물론 수교 전에도 일본과 음악 교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류라기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한 이들이 해방 이후 남한음악계의 중요 세력이 되면서 음악계의 재건과 선진화를 위해 자신들의 수학지였던 일본음악계를 전범(典範) 삼아 진행한 부분적 교류에 불과하다. 따라서 재립과 재건의 의지로 팽배하던 1960년대 국내 음악계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의 끝과 잔재로부터 시작한 것이었고, 해외 교류의 범위가 넓지 않았던 한국은 아시아 내의 서양음악 선진국이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국내 음악계를 성장시켰다. 해방 이후 반일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이른바 ‘굴욕외교’라 불린 1965년 한일조약을 전으로 민간 차원에서의 진행된 음악 교류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소극적이지 않다. 1963년 지휘자 임원식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지휘01), 한·일 합작 오페라 ‘가면무도회’02), 1964년 첼리스트 박국록의 일본 교향악단 협연03), 안익태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객원지휘로 선보인 베토벤 ‘합창’ 교향곡 공연04) 등의 교류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1965년 한일 조약  그러다가 1965년에 한일조약에 맺어졌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국군부대가 주둔하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게 된다. 양국은 여러 분야의 협력을 체결하는데, 이중 유일하게 문화분야의 체결은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조치였다. 찬반의 논의와 소음이 있었지만 협정 후에도 한국과 일본의 음악교류는 이전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1965년에 조약이 타결될 것을 예상했는지 언론은 1965년 벽두부터 그해 3월에 있을 서울시교향악단의 일본 공연을 수개월 앞당겨 보도하기도 했다.05) 같은 해 12월에 음악계의 한해를 뒤돌아보며 김형주(음악평론)는 ‘한일국교에 앞서 민간외교의 일환으로 초청되어 도일(渡日) 연주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호평은 아니었다할지라도 일본에 앞질러 처음으로 일본에서 연주하여 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해준 사실은 기억할 일’이라고 평했다.06) 교류를 통해 일본음악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음악가의 활약이 보도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브라스앙상블과 일본 NHK브라스앙상블이 자매관계를 맺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NHK교향악단에 튜바 단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원구의 매개 역할이 컸고, 그런 그가 일본의 교향악단 내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수차례 보도되기도 했다.07) 음악외교관이었던 지휘자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일본음악가들이 점진적으로 내한 공연을 가졌다. 1966년 오마치 요이치로(大町陽一郞)의 KBS교향악단 객원지휘는 ‘8·15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본의 지휘자’라며 보도되었고,08) 1967년에는 서울음대 교향악단이 오사카 등지에서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동공연을 갖기도 했다.09)같은 해인 1967년에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유학을 마친 신수정(피아노)이 귀국길에 일본 쇼팽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10) 이처럼 1960년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립 격의 교향악단과 상임지휘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는 타국에서의 객원지휘를 위한 지휘자들의 이동만으로도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향공동체를 중심으로 두 나라의 문화적 수교가 성대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음악가의 개인적 인맥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학생으로 구성된 서울음대 교향악단과 프로페셔널 교향악단인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교환 연주가 가능했던 원인으로는 당시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이던 임원식과 오사카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아사히나 다카시의 사제 관계나 그들만의 전설 같은 일화가 큰 작용을 했으리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1960년대에는 개인의 인맥이 국가적 차원의 교류에 십분 동원되었다. 광고 하나로 불발된 임원식의 지휘  일본과의 교류가 순탄대로만은 아니었다. 1966년 ‘한·일 국교 만 1년 얼마나 변했나’ 기사에는 ‘지나치게 일본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 세’운 가운데 ‘문화예술계의 교류란 한일국교정상화 후 황무지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성싶’을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임원식과 대정양일랑(오마치 요이치로)이 서로 상임된 교향악단을 교체지휘한 일이 유일한 교류’로 손꼽힐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2) 또한 한·일의 교류가 양국의 국립 격에 준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놓고 진행되다보니 지휘자 ‘개인’의 입장이 ‘국가’의 입장이 되거나 이로 인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68년 7월 임원식은 일본 요미우리 교향악단에 객원지휘를 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뜻밖의 감정이 불거져 나와 임원식은 ‘연주회를 이틀 앞두고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고 17일 밤 돌연 NWA기편으로 귀국’했다. 그의 갑작스런 귀국은 연주회에 앞서 요미우리 교향악단이 인쇄, 배포한 프로그램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임씨는 정재계 인사와 교제가 넓고 대통령과도 포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가’라고 소개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의 소개란은 일본의 음악평론가 겸 지휘자인 대정양일랑(大町陽一郞)씨 기명으로 돼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임씨와 포커를 한 사실이 없고 국가원수의 권위와 위엄을 손상시켰다고 판단되어 말썽이 된 것’이었다.13)임원식은 이에 대해 ‘나는 선위의 피해자’라며 ‘광고에 그런 구절이 포함됐던 것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 국가원수에 대해 누를 끼치게 됐는데, 그 광고문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주최자인 요미우리 신문은 ‘임씨가 급한 병으로 지휘를 취소했다’고 보도했다.14) 이러한 가운데 같은 달에 홍종철 문화공보부 장관은 “쇼나 대중가요 가수 등 대중예술의 교류는 당분간 허용치 않겠다”라며, ‘일본과의 문화교류는 언론인, 예술인, 문인 등의 친선방문’과 ‘문화영화나 교향악단과 같은 순수문화예술에 한해서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5) 한·일 교류를 바라본 양면의 시선 …

플루티스트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 Andrea Lieberknecht

클래식 음악계를 뜨겁게 달군 젊은 음악가들의 스승을 만나다 “물 흐르듯이 연주하라.” “바라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0세기 독일 최고의 플루티스트로 일컬어지는 파울 마이젠이 그의 제자,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두 문장이다. 연주자로서 소리에 대한 연구는 물론 중심 잡힌 마음가짐 또한 강조했던 그의 철학은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의 음악에 크나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스승의 철학에 자신만의 경험을 덧붙이며 친구이자 어머니, 멘토로서 제자들에게 음악적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리버크네히트의 교육은 음악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족한 자리와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제자 대부분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중이다. 올해 초 쾰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수석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플루티스트 조성현 또한 그녀의 제자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1965~)는 열 살의 나이에 처음 플루트와 만났다. 이후 파울 마이젠을 만나 음악가로서 중요한 성장의 시기를 거쳤으며, 대학 재학 중 뮌헨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으로 발탁되고, 3년 후에는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연주자로서 뛰어난 행보를 이어왔다. 솔리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서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유수의 페스티벌에 초청받는 등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 뮌헨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음악가들의 스승이 되고 있는 그녀는 더 나은 연주를 위해,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쾰른 음대, 하노버 음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뮌헨 국립음대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28살에 처음으로 쾰른에서 강의했을 때에는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WDR)의 활동이 더 주를 이루었다. 하노버로 옮기고 처음 3년간은 하노버와 쾰른을 왕래하며 두 가지를 병행했지만, 2002년부터는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하노버로 완전히 넘어왔다. 하노버 음대는 목관악기과가 일원화되어 있었고 시스템도 굉장히 잘 갖춰져 있었다. 열린 분위기는 물론, 학생들의 수준도 굉장히 높았다. 이후 2011년에 바순 연주자인 남편 다그 옌센(Dag Jensen)과 함께 뮌헨 음대로 자리를 옮겼다. 유럽은 학사 시스템이 일원화되어 있어서 시스템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학교마다 분위기의 차이는 있다. 뮌헨 음대는 굉장히 규모가 큰 학교이고,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하노버보다 악기당 교원 수도 많다. 도시도 매우 아름다울 뿐더러 내 음악 작업에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세 개가 이곳에 있어 학생들에게도 좋은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함께 공부할 학생은 어떻게 선발하는가? 학생의 성격·기질·음악적 열망 및 직관력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러한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음악적 기술 또한 중요하게 보고 있다. 나이나 학력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석사 과정은 2년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테크닉이 너무 부족하면 곤란하다. 현재 내 학생들은 매우 어린 편이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16세 학생 2명과 학부생 5명이 있다. 어린 학생들의 경우 이들이 어떻게 발전할지, 어려운 연습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악기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도록 하고, 호흡법 등 신체를 다루는 방법을 중심으로 가르친다. 이미 학사를 거치며 실력을 쌓은 석·박사 학생에게는 콩쿠르나 연주를 위한 정신적인 준비가 더 중요하다. 많은 학생을 가르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음악적 상상력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를 위해 학생들의 개인적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여러 해를 거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내 스승들의 영향은 물론, 다른 음악가들을 통해 영감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 연구하면서 깨닫기도 했고, 학생들의 성공이나 실패를 통해서 교육방식을 수정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학생에게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나? 지금까지 다섯 명의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봤고, 다음 학기에도 한국 여학생이 또 들어올 예정이다. 한국 학생들의 공통점은 음악적 기술성이 굉장히 높고, 똑똑하고, 착하고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친 한국 학생들 모두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특히 그중 세 명은 독일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는데,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겠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손가락을 사용하는 테크닉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하더라. 그래서 나도 젓가락 사용을 시도해봤는데, 오히려 경련이 와서 더 나빠지기만 했다.(웃음) 얼마 전 음악적 두뇌에 대한 신경학 논문을 읽었는데, 한국인의 두뇌는 유럽인의 두뇌와는 다르게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 음악과 관련된 두뇌 영역들이 한국인의 경우 서로 가깝게 있어서 더 빠르게 작동을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면. “넌 무엇을 연주하고 싶니?”라는 질문이 가장 많을 것 같다. 하지만 학생이 설명하려 하면 “음악으로 보여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잘 표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네 마음속 귀로 듣기에 어땠니?”라고 묻는다. 스스로 상상하면서 동시에 그대로 연주가 되고 있는지 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로 하면 단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힘들고 복잡한 과정이다.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며 어떤 고민을 했을지 궁금하다. 연주자로서는 대중에게 어떻게 하면 내 감정과 음악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동시에 가능한 한 완벽한 연주를 들려드리려 한다. 스승으로서는 학생들의 실패를 연구한다. 교수직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어떻게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관찰하고, 경험을 더 쌓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성공은 학생과 교수의 협력과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당신과 플루트의 첫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처음 음악을 접한 건 네 살, 플루트를 시작한 것은 열 살 때부터였다. 악기를 시작할 때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안과의사이자 쳄발리스트였던 부모님의 친구 덕에 무대에서 연주했고, 이레나 그라페나우어 선생님도 알게 됐다. 굉장히 자상하고 열린 마음을 지닌 그라페나우어 선생님은 나와 자주 듀엣을 해주셨다. 13세 때부터는 어린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고, 그 영향으로 17세 때에는 9번을 제외한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파울 마이젠 교수님을 만난 것은 16세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마이젠 교수님의 어시스트였던 일본의 히데아키 사카이 선생님에게도 함께 수업을 받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굉장히 감정적이고 혼란스러운 아이였고,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형편없었다. 히데아키 사카이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테크닉 연습을 지루하지 않게 가르쳐주셨고, 그 과정에서 편안하면서도 다채로운 음색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후부터는 전적으로 파울 마이젠 교수님께 배우며 8년간 함께했다. 교수님은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연주를 가르쳐 주셨다. 어린 시절부터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마이젠 교수님과 함께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곧이어 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우수한 목관 5중주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생 때 뮌헨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WDR에 들어갔다. 이런 큰 오케스트라의 솔로 플루티스트로 활동함과 동시에 고베와 프라하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우승도 하며, 많은 무대에서 솔리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쉬웠고,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다 하노버 음대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연 모든 것이 쉬웠던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쉬웠다면 내 학생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줘야 하니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많았던 것 같다. 음악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연주했던 때도, 그래서 예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한국 현대무용단 LDP 이탈리아밀라노를 넘다

만남으로 관점의 교차를 경험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현대무용가를 주축으로 한 LDP(Laboratory Dance Project)가 밀라노 엘포 푸치니 극장(Teatro Elfo Puccini)에서 열린 무용축제 ‘밀라놀트레(MILANoLTRE)’에 참가했다. 밀라놀트레는 밀라노(Milano)와 올트레(Oltre)의 합성어로 ‘밀라노를 넘어’라는 의미다. 밀라노의 빛나는 발레 역사에 빗댄다면 ‘스칼라 극장의 고전을 넘어’로 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현대무용 축제다. 엘포 푸치니 극장에는 공연장 세 개가 있는데, 대극장은 ‘셰익스피어’, 중극장은 ‘파스빈더’, 소극장은 ‘바우쉬’로, 연극·영화·무용의 대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LDP가 선보인 6일간의 데뷔무대  제32회 밀라놀트레는 9월 1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진행되었고, LDP는 셰익스피어 홀에서 장장 6일간 공연했다. 9월 27·28일은 ‘룩 룩(Look Look)’과 ‘노 코멘트(No Comment)’, 29·30일에는 ‘바우(Bow)’, 10월 1·2일에는 ‘노 필름(No Film)’과 ‘노 코멘트’가 무대에 올랐다. LDP 레퍼토리는 기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각 작품의 개성은 뚜렷한 편이다. 밀라노 관객은 서울보다 연령대가 높았고, 작품 감상의 연륜도 깊어 보였다. 특히 로비에서 예술가들을 기다렸다가 감동을 전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동규 작 ‘룩 룩’은 화려한 문양의 의상 덕에 올해 밀라놀트레 포스터 모델로도 빛을 발했다. 의상은 요란하지만 정작 얼굴은 천으로 가린 군무가 객석을 누비며 누군가를 집중적으로 쳐다보는 해프닝이 익명성의 용기를 강조한다. 요란한 굉음, 규칙적 박자, 손가락을 던지는 리듬감, 반복적인 행진, 상처를 주고받는 이미지 등이 줄곧 ‘보기(look)’를 강조한다. 전 출연진이 중앙에 모여 질주할 때 관객은 그들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키고,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안무가의 고민을 나눠 갖는다. 신창호의 ‘노 코멘트’는 전쟁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2002년에 초연하여 가장 많은 초청공연을 기록했다. LDP의 특징을 확정한 작품으로 남성 출연진 10명에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요구하고 그 탁월함을 즐긴다. 군무가 발을 구르고, 물구나무서기로 이동하고, 격렬하게 몸을 치고 흔들며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다. 분위기를 누르는 암전과 다시 절정을 향하는 몸짓의 활력이 충돌하는 구도다. 전 출연진이 객석을 활보할 때 관객의 호응도가 절정에 달하며, 이번에도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전미숙의 ‘바우’는 영국·독일·한국·스위스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작을 거쳤다. 이번 축제에서는 67분간 단독 공연했는데, 안무가의 섬세하고 전문적인 재능이 돋보였다. 서양 노인의 모습이 연상되는 가면을 착용한 출연자가 돗자리 앞에서 절을 하고, 잔걸음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소녀가 그와 대무한다. 차를 마시고, 돗자리를 굴려 접거나 펴고, 두 손 모아 공손히 인사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부채를 활짝 펼치며 날고, 걷다가 살짝 뛰어 앉으면 큰절 자세가 만들어진다. 제사·혼례·사교, 심지어는 인생이나 죽음에 대한 상념까지도 불러일으키는 동작의 이미지가 무용 예술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아크람 칸 무용단에서 다년간 활동한 김성훈의 ‘노 필름’은 독재자 이야기다. 무대 색감을 흑백영화처럼 단순화시키고, 히틀러의 육성과 환호하는 민중의 반응을 그대로 들려주며 과거의 한순간에 집중한다. 하지만 안무자는 그 장면이 현실일 수 있다는데 방점을 두었다. 한 남자의 폭력을 강조하고, 군무가 일상복이나 군복으로 등장해 순응과 항거 분위기를 전개 시킨다. 흰 바닥에 검정 물감을 쏟아 그 위에서 고통을 겪는 패배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마무리하며 ‘노 필름’으로 명명했다. 드라마와 절도 있는 기교가 균형을 이룬 전개다.   파스빈더에서 펼쳐진 두 개의 이야기 중극장 파스빈더에서는 같은 기간에 두 개의 공연이 있었다. 솔로 ‘나’는 기억이다(‘I’ Is Memory)’를 공연한 루이즈 르카발리에는 아마도 올 축제에서 가장 주목받은 무용가 중 하나일 것이다. 캐나다 무용단 ‘라라라 휴먼 스텝스’ 영상으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그녀가 환갑을 맞이해 등장한 무대는 경이로움과 감동의 대상이었다. 18세에 직업단체에 입단한, 아마존의 여전사를 연상시키던 그녀의 공중 도약은 전무후무한 활력을 과시했었다. 이번 작품은 브누아 라샹브르와 루이즈 르카발리에가 2006년 공동 안무했다. 한 평론가는 “내면의 충동이 뼈·근육·장기·관절 같은 신체 전체를 움직인다. 변형으로 가득한 준명상적인 춤”이라고 묘사했다. 2006년 현대무용단 푸 글로리외(Fou Glorieux)를 창단해 현재까지 깊이 있는 움직임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자 하나와 그 뒤에 놓인 바를 활용한 느리고 집요한 동작 전개는 그녀의 몸이 곧 기억임을, 몸과 함께 생존하는 예술이 곧 무용임을 설명했다. 그녀의 최근 수상 경력이 화려해 놀랐고, 극장을 찾은 캐나다 공무원들의 공개적 축사에 더욱 놀랐다. 또 다른 안무가 안토니오 몬타닐은 카롤린 칼송의 격려로 안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며, 아카데믹한 기교보다는 일상적이고 충동적인 움직임을 구사했다. ‘빔비(Bimb(y)i)’는 인간처럼 변해가는 부엌 로봇을 연상시키는 희극적 작품이고, ‘세도 알루사르미(Cedo all’usarmi)’는 조명과 인체의 접촉과정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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