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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COVER STORY _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자하로바가 한국에 온다. 2005년 볼쇼이 발레의 ‘지젤’…

남북 음악교류의 첫 문이 열리기까지 -2

공산권의 빗장 풀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일본과의 서양음악 교류가 본격화되었다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중국과 같은 공산권과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1980년대는 동구권 음악의 개방, 남북음악교류 추진과 월북음악인 및 북한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 등으로 인해 견고했던 냉전의식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최초로 분단의식을 음악계 내부에서부터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특히 대한민국음악제와 그 후신인 서울국제음악제, 1986년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서울올림픽, 그에 따른 대규모 문화예술행사 등은 이러한 흐름이 외형적으로 가시화되는 결정적 국면으로 작용하였다. 박용구(음악평론)도 두 스포츠행사가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문화예술축전을 제공하는 계기로서 국가적 근대화의 물적 수단이 총동원되는 양상을 띠었다’라며, 이로 인해 ‘아시아 인접 국가들의 음악이 대거 소개되고, 소련과 동구권이 참여한 올림픽으로 그간 금기시되어온 공산권 국가의 음악에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폐쇄적이던 우리 음악사회에 열린사회로의 기운을 불어넣’었다.21)    중국과 시작된 교류의 물꼬 중국과의 음악적 교류에 있어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국과 소련, 동구권과 ‘정치·경제적 문화적 접촉을 시도했으며 그 상당 부분이 알게 모르게 진척’22)되었다.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개최된 1986년 서울국제음악제와 서울국제민속축제를 통해 양악과 전통음악 분야의 아시아권의 음악이 집중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23) 언론은 ‘지금까지 우리의 음악은 구미지역과의 관계에 편중되어 이번처럼 아시아권 음악을 한 자리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24)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스포츠 교류가 국민들 눈앞에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중국과 동유럽의 연주자들이 몇 차례의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25) 또한 1960년대에 한국음악계에 조명된 NHK교향악단의 튜바 단원 이원구의 사례처럼 중국 내 교포와 조선족 음악가들의 활동이 조명되기도 했다. 중국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항일운동을 진행한 조선인들의 또 다른 활동지이기도 했는데, 조명되는 음악가들은 그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았다. 1989년 중국교포 유수송과 그의 아들 유승남 부자가 나란히 KBS교향악단의 트럼펫 단원으로 선발되어 중국교포 음악인의 국내정착 첫 사례로 조명된 적이 있는데, 유수송은 김구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유평파의 자녀였다.26) 1989년에는 중국 교포지휘자 김정평27)이 조명되기도 했다. 서양음악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이듬해인 1989년부터이다. 하지만 소련·헝가리·체코·폴란드 등 동구권을 포함한 국가들이 대(對)공산권 국가와의 음악적 교류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황에 비하면 중국과의 교류는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이 되면서 여러 중국음악가들의 내한이 예정되었지만, ‘공연예술계의 관계자들은 대(對)중국교류는 지금까지 북한의 입김이 강해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럽다’28)라고 하였고, 1989년 천안문 사태는 중국 음악가들의 출국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29) 문화공보부의 사회주의권 예술단 초청과 관련하여 초청 주체 1개사에 1단체의 쿼터를 할당하는 등의 규제를 하기도 했다.30)  공산권 음악교류와 월북예술가 해금 조치  중국과의 음악교류가 가져온 파급은 남북관계의 개선이었다. ‘공산권 중에서 양대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이 올림픽을 계기로 서로 경쟁적으로 한국에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국제현실’인 시점에서 ‘북한의 가장 강력한 지원세력의 한국 접근은 앞으로 한반도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31)를 가늠하였고, 이러한 정세 변화 가운데 음악에서도 남북 교류 및 분단음악의 극복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주의권 음악들이 개방되면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음악적 사고와 연주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88년, 남한의 해금(解禁) 조치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9년 7·7선언32)의 후속 조처로 미수교국 예술작품의 국내 개방, 월북 작가 문학작품의 출판 허용, 북한자료 개방 등과 함께 해금이 단행되어 정부는 납·월북 작가의 문학작품에 대해서 대폭적인 해금(解禁) 조치를 내렸고 이어서 음악·미술 작품에 대해서도 규제조치를 풀었다. 이에 따라 ‘국제화에 맞춰 내부의 닫힌 문을 개방하여 해금된 납·월북 음악인들의 작품 연주 및 연구가 보다 활발해질 것’을 기대하게 했다. 당시 해금조치와 관련된 음악인은 김순남, 안기영, 이건우, 이면상 등 71명이었고, 해금 대상은 음악인의 전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월북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김순남의 가곡 ‘산유화’, 이건우의 ‘금잔디’ 등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연초부터 ‘남북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예술제가 개최될 것으로 전망’되었고,33) 윤이상이 3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윤이상음악제가 기획되기도 했다. ‘반공’을 넘는 연습.중국과의 음악교류 1988년 서울올림픽과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공산권 국가의 붕괴에 따라 1990년부터 국내에 공산권 음악가들의 스카우트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34) 중국과 서양음악 교류는 보다 활발해진다. 게다가 중국은 1990년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음악교류는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의 관광이나 친지방문형식에 의한 비공식적 공연 형태를 탈피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35)  1990년 중국 내의 교포음악가들이 함께 모여 아리랑교향악단을 결성하였고36) 서울국제음악제에 슈웨이(바이올린)가 초청되기도 했다. 1991년에 서울대 음대에 재학 중인 양고운(바이올린)이 국내 최초로 북경 중앙교향악단 및 상하이 교향악단과 현지에서 협연 무대를 갖기도 하였다. 37)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었고, 이를 계기로 그해 말에 중국 예술단체들의 내한 공연이 잇달아 계획·발표되었다.38) 일본 및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던 KBS교향악단은 1992년에 중국 교포 전성해(바이올린)의 입단을 허락하여 KBS교향악단의 수석이 되었다.39) 1993년 북경 중앙교향악단이 첫 내한 공연을 가졌고40) 서울시교향악단은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기념하는 특별정기연주회로 중국의 피아노 협주곡 ‘황하’와 한국의 정윤주가 작곡한 교향곡 ‘마라도’를 연주했다. 1994년에는 북경중앙교향악단과 함께 양대산맥으로 거론되던 상하이교향악단이 첫 내한 공연41)을 가져 김남윤(바이올린)과 협연했는가 하면, 황병기가 작곡한 ‘새봄’을 이지영(가야금)의 협연으로 함께 선보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의 여파로 음악가들에게 서방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던 중국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이에 따른 개방화를 통해 세계무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42)…

남북 음악교류의 첫 문이 열리기까지 -1

해방 이후, 일본과의 음악교류 국내의 음악계가 ‘아시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과의 수교가 있던 1965년 전후이다. 물론 수교 전에도 일본과 음악 교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류라기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한 이들이 해방 이후 남한음악계의 중요 세력이 되면서 음악계의 재건과 선진화를 위해 자신들의 수학지였던 일본음악계를 전범(典範) 삼아 진행한 부분적 교류에 불과하다. 따라서 재립과 재건의 의지로 팽배하던 1960년대 국내 음악계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의 끝과 잔재로부터 시작한 것이었고, 해외 교류의 범위가 넓지 않았던 한국은 아시아 내의 서양음악 선진국이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국내 음악계를 성장시켰다. 해방 이후 반일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이른바 ‘굴욕외교’라 불린 1965년 한일조약을 전으로 민간 차원에서의 진행된 음악 교류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소극적이지 않다. 1963년 지휘자 임원식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지휘01), 한·일 합작 오페라 ‘가면무도회’02), 1964년 첼리스트 박국록의 일본 교향악단 협연03), 안익태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객원지휘로 선보인 베토벤 ‘합창’ 교향곡 공연04) 등의 교류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1965년 한일 조약  그러다가 1965년에 한일조약에 맺어졌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국군부대가 주둔하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게 된다. 양국은 여러 분야의 협력을 체결하는데, 이중 유일하게 문화분야의 체결은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조치였다. 찬반의 논의와 소음이 있었지만 협정 후에도 한국과 일본의 음악교류는 이전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1965년에 조약이 타결될 것을 예상했는지 언론은 1965년 벽두부터 그해 3월에 있을 서울시교향악단의 일본 공연을 수개월 앞당겨 보도하기도 했다.05) 같은 해 12월에 음악계의 한해를 뒤돌아보며 김형주(음악평론)는 ‘한일국교에 앞서 민간외교의 일환으로 초청되어 도일(渡日) 연주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호평은 아니었다할지라도 일본에 앞질러 처음으로 일본에서 연주하여 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해준 사실은 기억할 일’이라고 평했다.06) 교류를 통해 일본음악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음악가의 활약이 보도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브라스앙상블과 일본 NHK브라스앙상블이 자매관계를 맺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NHK교향악단에 튜바 단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원구의 매개 역할이 컸고, 그런 그가 일본의 교향악단 내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수차례 보도되기도 했다.07) 음악외교관이었던 지휘자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일본음악가들이 점진적으로 내한 공연을 가졌다. 1966년 오마치 요이치로(大町陽一郞)의 KBS교향악단 객원지휘는 ‘8·15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본의 지휘자’라며 보도되었고,08) 1967년에는 서울음대 교향악단이 오사카 등지에서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동공연을 갖기도 했다.09)같은 해인 1967년에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유학을 마친 신수정(피아노)이 귀국길에 일본 쇼팽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10) 이처럼 1960년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립 격의 교향악단과 상임지휘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는 타국에서의 객원지휘를 위한 지휘자들의 이동만으로도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향공동체를 중심으로 두 나라의 문화적 수교가 성대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음악가의 개인적 인맥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학생으로 구성된 서울음대 교향악단과 프로페셔널 교향악단인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교환 연주가 가능했던 원인으로는 당시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이던 임원식과 오사카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아사히나 다카시의 사제 관계나 그들만의 전설 같은 일화가 큰 작용을 했으리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1960년대에는 개인의 인맥이 국가적 차원의 교류에 십분 동원되었다. 광고 하나로 불발된 임원식의 지휘  일본과의 교류가 순탄대로만은 아니었다. 1966년 ‘한·일 국교 만 1년 얼마나 변했나’ 기사에는 ‘지나치게 일본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 세’운 가운데 ‘문화예술계의 교류란 한일국교정상화 후 황무지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성싶’을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임원식과 대정양일랑(오마치 요이치로)이 서로 상임된 교향악단을 교체지휘한 일이 유일한 교류’로 손꼽힐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2) 또한 한·일의 교류가 양국의 국립 격에 준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놓고 진행되다보니 지휘자 ‘개인’의 입장이 ‘국가’의 입장이 되거나 이로 인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68년 7월 임원식은 일본 요미우리 교향악단에 객원지휘를 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뜻밖의 감정이 불거져 나와 임원식은 ‘연주회를 이틀 앞두고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고 17일 밤 돌연 NWA기편으로 귀국’했다. 그의 갑작스런 귀국은 연주회에 앞서 요미우리 교향악단이 인쇄, 배포한 프로그램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임씨는 정재계 인사와 교제가 넓고 대통령과도 포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가’라고 소개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의 소개란은 일본의 음악평론가 겸 지휘자인 대정양일랑(大町陽一郞)씨 기명으로 돼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임씨와 포커를 한 사실이 없고 국가원수의 권위와 위엄을 손상시켰다고 판단되어 말썽이 된 것’이었다.13)임원식은 이에 대해 ‘나는 선위의 피해자’라며 ‘광고에 그런 구절이 포함됐던 것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 국가원수에 대해 누를 끼치게 됐는데, 그 광고문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주최자인 요미우리 신문은 ‘임씨가 급한 병으로 지휘를 취소했다’고 보도했다.14) 이러한 가운데 같은 달에 홍종철 문화공보부 장관은 “쇼나 대중가요 가수 등 대중예술의 교류는 당분간 허용치 않겠다”라며, ‘일본과의 문화교류는 언론인, 예술인, 문인 등의 친선방문’과 ‘문화영화나 교향악단과 같은 순수문화예술에 한해서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5) 한·일 교류를 바라본 양면의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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