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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음악교류의 첫 문이 열리기까지 -1

해방 이후, 일본과의 음악교류 국내의 음악계가 ‘아시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과의 수교가 있던 1965년 전후이다. 물론 수교 전에도 일본과 음악 교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류라기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한 이들이 해방 이후 남한음악계의 중요 세력이 되면서 음악계의 재건과 선진화를 위해 자신들의 수학지였던 일본음악계를 전범(典範) 삼아 진행한 부분적 교류에 불과하다. 따라서 재립과 재건의 의지로 팽배하던 1960년대 국내 음악계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의 끝과 잔재로부터 시작한 것이었고, 해외 교류의 범위가 넓지 않았던 한국은 아시아 내의 서양음악 선진국이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국내 음악계를 성장시켰다. 해방 이후 반일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이른바 ‘굴욕외교’라 불린 1965년 한일조약을 전으로 민간 차원에서의 진행된 음악 교류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소극적이지 않다. 1963년 지휘자 임원식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지휘01), 한·일 합작 오페라 ‘가면무도회’02), 1964년 첼리스트 박국록의 일본 교향악단 협연03), 안익태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객원지휘로 선보인 베토벤 ‘합창’ 교향곡 공연04) 등의 교류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1965년 한일 조약  그러다가 1965년에 한일조약에 맺어졌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국군부대가 주둔하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게 된다. 양국은 여러 분야의 협력을 체결하는데, 이중 유일하게 문화분야의 체결은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조치였다. 찬반의 논의와 소음이 있었지만 협정 후에도 한국과 일본의 음악교류는 이전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1965년에 조약이 타결될 것을 예상했는지 언론은 1965년 벽두부터 그해 3월에 있을 서울시교향악단의 일본 공연을 수개월 앞당겨 보도하기도 했다.05) 같은 해 12월에 음악계의 한해를 뒤돌아보며 김형주(음악평론)는 ‘한일국교에 앞서 민간외교의 일환으로 초청되어 도일(渡日) 연주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호평은 아니었다할지라도 일본에 앞질러 처음으로 일본에서 연주하여 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해준 사실은 기억할 일’이라고 평했다.06) 교류를 통해 일본음악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음악가의 활약이 보도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브라스앙상블과 일본 NHK브라스앙상블이 자매관계를 맺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NHK교향악단에 튜바 단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원구의 매개 역할이 컸고, 그런 그가 일본의 교향악단 내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수차례 보도되기도 했다.07) 음악외교관이었던 지휘자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일본음악가들이 점진적으로 내한 공연을 가졌다. 1966년 오마치 요이치로(大町陽一郞)의 KBS교향악단 객원지휘는 ‘8·15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본의 지휘자’라며 보도되었고,08) 1967년에는 서울음대 교향악단이 오사카 등지에서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동공연을 갖기도 했다.09)같은 해인 1967년에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유학을 마친 신수정(피아노)이 귀국길에 일본 쇼팽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10) 이처럼 1960년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립 격의 교향악단과 상임지휘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는 타국에서의 객원지휘를 위한 지휘자들의 이동만으로도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음향공동체를 중심으로 두 나라의 문화적 수교가 성대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음악가의 개인적 인맥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학생으로 구성된 서울음대 교향악단과 프로페셔널 교향악단인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교환 연주가 가능했던 원인으로는 당시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이던 임원식과 오사카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아사히나 다카시의 사제 관계나 그들만의 전설 같은 일화가 큰 작용을 했으리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1960년대에는 개인의 인맥이 국가적 차원의 교류에 십분 동원되었다. 광고 하나로 불발된 임원식의 지휘  일본과의 교류가 순탄대로만은 아니었다. 1966년 ‘한·일 국교 만 1년 얼마나 변했나’ 기사에는 ‘지나치게 일본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 세’운 가운데 ‘문화예술계의 교류란 한일국교정상화 후 황무지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성싶’을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임원식과 대정양일랑(오마치 요이치로)이 서로 상임된 교향악단을 교체지휘한 일이 유일한 교류’로 손꼽힐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2) 또한 한·일의 교류가 양국의 국립 격에 준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놓고 진행되다보니 지휘자 ‘개인’의 입장이 ‘국가’의 입장이 되거나 이로 인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68년 7월 임원식은 일본 요미우리 교향악단에 객원지휘를 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뜻밖의 감정이 불거져 나와 임원식은 ‘연주회를 이틀 앞두고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고 17일 밤 돌연 NWA기편으로 귀국’했다. 그의 갑작스런 귀국은 연주회에 앞서 요미우리 교향악단이 인쇄, 배포한 프로그램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임씨는 정재계 인사와 교제가 넓고 대통령과도 포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가’라고 소개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의 소개란은 일본의 음악평론가 겸 지휘자인 대정양일랑(大町陽一郞)씨 기명으로 돼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임씨와 포커를 한 사실이 없고 국가원수의 권위와 위엄을 손상시켰다고 판단되어 말썽이 된 것’이었다.13)임원식은 이에 대해 ‘나는 선위의 피해자’라며 ‘광고에 그런 구절이 포함됐던 것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 국가원수에 대해 누를 끼치게 됐는데, 그 광고문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주최자인 요미우리 신문은 ‘임씨가 급한 병으로 지휘를 취소했다’고 보도했다.14) 이러한 가운데 같은 달에 홍종철 문화공보부 장관은 “쇼나 대중가요 가수 등 대중예술의 교류는 당분간 허용치 않겠다”라며, ‘일본과의 문화교류는 언론인, 예술인, 문인 등의 친선방문’과 ‘문화영화나 교향악단과 같은 순수문화예술에 한해서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15) 한·일 교류를 바라본 양면의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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