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신 작·연출 ‘나에게 불의 전차를’

불의 전차를 품은 이들의 뜨거운 이야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 정의신
사진 박진호(studio BoB)

재일교포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의신의 신작이 무대에 오른다. 1920년대 남사당패와 일본인의 우정을 그려내고 있는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한국과 일본의 스타 배우가 출연한다는 단순한 이유를 넘어, 전통 연희를 재현하는 무대의 스펙터클과 정의신 작가가 지향하는 주제의 선량함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큰 작품이다. 도쿄 공연에 이어 서울 공연을 앞두고 정의신을 직접 만나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월 30일~2월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924년 경성, 혼종과 절합의 가능성
한일 합작 연극인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서울 공연에 앞서 2012년 11월 7일부터 12월 1일까지 도쿄의 아카사카 ACT극장에서 먼저 공연되었다. 영화나 TV드라마와 같은 대중예술에 비해 화제성이 떨어지는 것이 연극인데, 이 작품은 차승원이라는 스타의 무대 데뷔작이라는 점이 이슈가 되어 제작 단계부터 한국 관객의 관심을 끌었고, 일본을 거쳐 국내 공연을 기다리게 만든 작품이다.
일본 공연에서 전회 매진과 전회 기립박수라는 적극적 호응을 받은 이 작품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우정을 전면화하고 있다. 남사당패의 이순우(차승원 분)와 우연히 마주친 야나기하라 나오키(구사나기 쓰요시 분)는 조선 백자를 매개체로 하여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메인 플롯에 얽혀 있는 서브 플롯으로는 순우가 속해 있는 남사당패의 꼭두쇠 고대석(김응수 분)과 그의 오랜 친구인 나이트클럽 불야성의 사장 오무라 기요히코(가가와 데루유키 분)가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되는 것, 나오키의 여동생이자 기요히코의 후처인 오무라 마쓰요(히로스에 료코 분)에 대한 의붓아들 오무라 아키히코의 일방향적 애정관계, 남사당패의 막내 양남성을 사랑하는 홍순과 양남성의 비극적 결말 등이 있다.
비교적 작품 내용을 자세히 서술한 것은, 이것이 곧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같은 식민지 시기를 다루었다고 하지만 전작인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식민지 말기, 즉 일본의 폭압과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집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작품 말미에 위치한 조선인 여성과 일본 헌병의 결혼은 그 인과관계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관객에게 감정적 불편함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평단과 연극계에서 꽤나 논란이 되었다. 이를 의식한 듯 정의신은 이번 작품의 시기를 더 앞으로 당겼다. 바로 1924년으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는 매우 역동적인 시대에 해당하는데, 봉건적 관습이 일상을 지배하면서도 일본을 통한 서구의 근대문명과 문물이 서서히 스며들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문화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충돌하고 절합하며 혼종하던 시대였다. 작품에서는 이 시대의 묘미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남사당패의 공연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불야성이라는 일본인 나이트클럽이 공존하고 있으며,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삶에 지독한 회의를 느끼는 청춘도 있고,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의 문화에 애착을 갖는 사람도 있는 기묘한 시대. 순우와 나오키의 우정을 근간으로 하면서 동시에 풍부하게 구성되어 있는 서브 플롯은 문화적 혼종과 절합의 1920년대이기에 가능한 상상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이너리티 인생에 대한 애정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는 정의신의 정체성은 태생적으로 주변인 혹은 경계인의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하층민과 주변인이 주인공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심이 되어본 적 없는 주변인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이쪽과 저쪽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되며, 그 구체적인 실체는 절대로 중심(메이저)이 될 수 없는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하층민(마이너리티)을 통해서 입체화된다.
이 작품에서 정의신이 주목한 것은 바로 남사당패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는 남사당패는 전문 연희집단임에도 같은 민족인 조선인에게조차 천대받는 신분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그는 설명한다. 제도적으로 신분 철폐가 이루어졌음에도 생활 속에서는 아직도 견고한 신분제 속에 살고 있던 당대의 현실 속에, 남사당패는 하층민의 삶을 살아가는 집단이었다. 비록 장터를 떠돌며 온갖 편견과 비난 속에 밑바닥 인생을 살아도 자신들만의 법규를 꼿꼿하게 지키며 예인의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는 남사당패의 삶은 하층민의 삶을 따뜻하게 품어내는 정의신에게 매력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 작품에서는 남사당패의 삶과 기예를 복원하는 데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남기문 악장(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예능보유자 고 박계순 여사의 차남)의 공연을 통해 남사당패 전체 레퍼토리를 관극했다는 정의신은 공연 시간이 비교적 긴 덧뵈기(탈춤)를 제외한 버나(접시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덜미(꼭두각시극)·풍물을 남기문 악장의 도움을 받아 작품 곳곳에 배치하여 무대화하고 있다. 특히 줄타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양남성의 원혼을 풀어주는 역할로 작품 속에서 매우 의미가 크기 때문에 어떠한 안전망도 설치하지 않은 채 지속적인 훈련과 연습으로 완성도 높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지금의 한국인들조차 남사당패의 공연을 본 사람이 드문 현실에서 재일교포 작가의 손을 통해 만나는 남사당패의 모습은 놀라움과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의신이 마이너리티의 삶을 중심 화두로 삼는 목적은 화해와 상생에 대한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서로 중심이길 욕망하는 논리는 상대방과 경쟁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기에 극단적 갈등은 필연적이다. 주변인이자 경계인인 정의신이 지향하는 바는 삶이라는 커다란 궤적 아래에서 서로 화해하고 같이 살아가는 따뜻한 휴머니즘이다. 일본인 교사 나오키와 남사당 순우가 국경과 신분을 초월하여 서로를 가슴깊이 이해하며 우정을 나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혈아인 나이트클럽 사장 기요히코와 꼭두쇠 고대석이 오랜 세월 우정과 의리로 서로를 보듬는 과정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반드시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데, 이것은 정의신 작품의 돋보이는 매력이다. 즉, 인물들 간의 화해가 판타지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우정을 쌓았어도 남사당패의 순리대로 순우는 나오키를 떠나며, 기요히코와 고대석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된다. 추문에 휩싸이면 파문시키는 남사당의 생존논리에 따라 남사당패를 가장 사랑한 양남성은 무리에서 쫓겨나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서로를 보듬는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를 가로지르고 있는 현실과 삶의 논리. 정의신 작품이 무턱대고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이유, 따뜻하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 1 일본인 교사 나오키와 남사당 순우는 국경과 신분을 초월해 서로를 가슴깊이 이해하며 우정을 나눈다


▲ 2 풍물을 비롯해 다양한 남사당놀이를 작품 곳곳에 배치해 남사당패의 삶과 기예를 무대화 한 것이 눈에 띈다

화려한 배우진과 전통 연희로 펼쳐내는 역동적인 무대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매우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무대이다. 남사당패의 공연이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관객에게 조선다운 장면을 보여준다면, 나이트클럽 불야성은 이국적인 장면이 되어 일본과 서구의 문물이 혼종하는 1920년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실제 남사당놀이를 복원하듯 섬세하게 연출한 것처럼 불야성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댄서들 역시 공들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 외에도 나오키가 일하는 학교·공터·성곽 주변·도자기 공방 등 공간의 변화가 빈번하기 때문에 무대장치는 필요에 따라 공중에서 내려오는 장치를 활용한다. 아무래도 주력하는 바는 남사당놀이이기 때문에 무대장치를 간소화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우들이다. 한국과 일본의 이만한 스타들을 같은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싶을 만큼 화제를 몰고 다니는 배우들이다. 국내 배우로는 차승원과 김응수가 대표적이고, 일본 배우로는 구사나기 쓰요시(초난강)·히로스에 료코·가가와 데루유키 등을 꼽을 수 있다.
캐스팅 명단을 보고 가장 먼저 우려했던 바는 배우들 간의 의사소통이었고, 두 번째는 남사당의 기예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였다. 첫 번째 문제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밑바탕으로 통역을 활용하여 서로 의견 교환을 했으며, 그로 인해 연습 시간은 두 배로 걸렸지만 다른 언어를 쓰는 배우와 깊이 교감하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두 번째 부분은 배우들의 프로정신을 보여주는 부분인데, 스타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낮은 자세로 열심히 훈련을 반복하면서 제대로 된 남사당의 모습을 구현해냈다. 정의신 연출도 배우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아서 그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210분이었다. 정의신 연출은 한국 공연에서는 시간을 조금 줄이려고 하지만 그다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무려 세 시간 반에 육박하는 작품을 촘촘히 무대 위에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배우들-스타가 아니라-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줄타기 연습에도 안전망 설치를 거부한 채 맨몸으로 줄에 오른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불의 전차’를 나에게, 우리에게 주시오
작품의 제목이자 극중 순우의 대사에 나오는 ‘불의 전차’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예루살렘’의 일부분이다.
내 불타는 전투 마차를 주게/결코 마음의 전투를 멈추지 않아/나의 검을 무의미하게 쉬게 하지는 않아.
정의신은 ‘불의 전차’에 대해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세, 혹은 무모하지만 과거와 만나면서 미래를 향해 살아가겠다는 의지로 설명한다. 나오키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도공의 삶을 선택한 것, 순우가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끄는 것, 마쓰요가 기요히코의 빈자리를 대신해 불야성을 지키는 것. 평온하고 안락한 삶 대신 자신이 만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듬겠다는 삶의 태도가 바로 ‘불의 전차’이다. 정의신 스스로도 한국의 역사를 끊임없이 호출하여 과거와 만나면서도 상생과 화해의 미래를 지속적으로 무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미 불의 전차를 가슴에 품었다.
극심한 경쟁 속에 점점 인간이 소외되고 파편화되는 현실을 놓고 볼 때, 불의 전차는 지금 우리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화려한 스타와 볼거리가 풍성한 무대를 보며 한국의 관객은 어떤 불의 전차를 상상할 것인지, 혹은 불의 전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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