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10년 만에 짚어보는 ‘그날’의 성공 원인
뮤지컬 ‘그날들’
7월 12일~9월 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마이크 한 개와 기타를 들고 소극장을 다니던 가객(歌客)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2012년, 자신의 노래가 ‘복고’라는 유행을 타고 수많은 젊은 가수의 목소리로 리메이크될 줄은.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현상이다. 10년이 더 지나 그 가객, 김광석(1964~1996)의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그날들’의 창작 10주년이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날들’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2013년과 지금도,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7월 13일 공연 관람)
‘그날들’은 뮤지컬 ‘맘마미아!’의 공식을 따른다. 잘 알려진 가수의 노래를 넘버로 활용하되,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 대본은 철저히 노래 가사가 이어지도록 쓰인다. 노래 가사가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게 이 형식의 취약점이다. ‘그날들’은 일면의 성공을 거둔 편이다. 대통령 경호실을 둘러싼 타임루프물은 무대 전환이 가능한 뮤지컬에서 활용이 용이하다. 거기에 더해 정성 들여 김광석의 음악을 만진 티가 나는 편곡, 화려한 무대 변화, 10년을 꽉 채운 스타 배우들의 열연은 여전히 즐겁다. 언제나 관객의 박수를 받아 마땅한 몇몇 뮤지컬 배우들의 실력은 이 긴 흥행의 행렬 이유를 설명해 주는 보루다. 스토리와 이어지는 ‘이등병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르는 ‘무영’(이건명 분)의 장면이나, 대통령 전담 요리사 역을 맡은 고창석의 ‘서른 즈음에’는 그 자체로 공연 만족도를 채운다.
그런데도 공연 내내 기시감이 마음을 괴롭힌다. 무대와 안무, 동선 모두 화려하지만,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측 불허하거나 세련되지 않다. 속도감 있게 흘러가던 스토리가 갑자기 멈추고 주인공이 감상적인 대사를 뱉어내면, 여지없이 기타 혹은 피아노 반주와 함께 대사와 이어지는 김광석의 시적인 첫 소절이 나온다. 아름답게 편곡된 그의 노래는 감동적이지만, ‘리메이크 된 김광석’은 2023년에 관람하기에는 지나치게 익숙하다. 김광석의 노래 리메이크가 ‘유행’이던 시절은, 아쉽지만 지났다.
물론 유행이 지나도 고전은 영원하기에, 여전히 ‘그날들’은 아름답고 즐겁다. 그러나 세련된 감각이 계속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날’은 흘러간 ‘옛날’이 될 뿐이고 뮤지컬은 효도 관광 상품이 될 뿐이다. 추억하고 싶은 것은 ‘그날들’의 흥행 요소가 아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대립이 공존으로 향해야 하는 시대
여우락 페스티벌
‘종이 꽃밭: 두할망본풀이
7월 1·2일 국립극장 달오름
무대에는 관객을 전통 신화 속으로 초청하기 위한 장치가 가득하다.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인 정연락의 지화(紙花, 굿에 쓰이는 종이 장식) 작품이 관객과 무대 사이를 한번 가르고, 무대 위에 하얀 공간을 두어 양옆의 악단과 한가운데 소리꾼의 공간을 다시 나눴다. 작게 꾸며진 정사각형의 흰 무대와 벽, 그리고 그 벽에 띄우는 창의 가사는 마치 하얀 종이 위에 쓰인 신화를 읽어 내려가는 듯하다.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석 뒤쪽에서 지화를 나눠주며 내려오는 소리꾼 박인혜가 무대 안으로 들어가니 이야기 밖 서술자가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빙의되는 판소리가 무엇인지 생생하다.
공연의 원작은 제주무속신화 ‘생불할망본풀이’로, 생명을 점지(생불)하는 여신(할망)의 탄생 설화(본풀이)라는 뜻이다. 용왕인 아버지에게 버려져 육지에서 생불신이 되려 하는 ‘동이’와 옥황상제에게 부탁받아 생불신의 일을 하려 하는 ‘명이’의 대립이 중심 내용이다. 한 가정의 아이를 서로 받아내려고 했던 둘은 옥황상제에게 진짜 생불신을 가려달라 청한다. 옥황상제는 둘에게 한 땅을 주며 그 땅에 더 많은 꽃을 피워내는 이가 생불신이 되리라 정한다.
두 인물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는 마지막의 연속된 창이 공연의 절정이었다. 동이는 억세고 미움이 많으며, 명이는 밝고 친절하다. 다양한 꽃을 피워낸 명이를 질투해 한밤중에 악을 쓰며 꽃밭에 불을 내는 동이의 창은 기구한 운명으로 인한 한(恨)이 생생했고, 불길에 둘러싸여 죽을 뻔한 동이를 구해내며 생명 귀한 것을 알라고 슬퍼하는 명이의 창은 삶을 바라는 정(情)이 가득했다. 생사를 함께 오간 둘이 공존을 노래하니 무대의 하얀 벽이 치워지고, 다양한 지화와 등이 무대로 가득 내려왔다. 설화 속에만 있던 둘의 공존을 향한 의지가 종이를 뚫고 현실로 옮겨지는 듯했다.
전통의 색채로만 표현하지 않은 음악은 이야기를 현실과 연결하는 데에 한몫했다. 더블베이스와 기타, 베이스, 피아노는 임신 과정이 얼마나 고생인지 의학정보가 나열되는 창에 잘 어울렸고, 공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꽃 심으러 간다, 꽃 피우러 간다”라는 가사를 잊지 못하도록 친숙한 반주를 넣어주었다. 지화로 만든 설화적 환상, 소리로 분리해 낸 탄탄한 인물의 개성, 동·서양이 잘 섞인 음악. 삼박자의 흥이 가득한 무대였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국립극장
끝나지 않은 전쟁
연극 ‘나무 위의 군대’
6월 20일~8월 5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우거진 가지와 땅으로 내린 나무뿌리가 어두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거대한 가쥬마루 나무 사이로 보이는 몽환적인 달의 움직임은 나무 위에 숨어 지내는 두 군인의 시간을 그린다. 이들이 약 2년의 세월 동안 그곳에서 지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일본 문학의 거장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가 태평양 전쟁 막바지, 오키나와의 한 나무 위에서 2년을 보낸 두 일본군 병사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한 작품으로, 극작가 호라이 류타와 연출가 쿠리야마 타미야가 합작해 2013년 일본 도쿄에서 초연한 바 있다.
극은 잔잔한 파도 소리, 평화로운 새 소리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자(최희서 분)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두 병사에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하는 해설자 역할의 여자는 외부에 들키지 않아야 하는 상관(김용준·이도엽 분)과 신병(손석구 분)의 상황을 대변한다. 전쟁 경험이 많은 본토 출신의 상관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의명분을 중시하지만,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신병은 그저 소중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어느새 총성이 멈추고, 둘만 남은 나무 위에서 대척점에 있는 서로의 민낯을 직면한 이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뒤엉킨 나무줄기처럼 얽히고설킨다.
이 숨죽인 전쟁은,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전쟁의 모순을 그리는 주제와 달리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객석 곳곳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전쟁 중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보여주듯, 두 사람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극의 후반부에서 나무 위의 두 병사는 “전쟁은 2년 전에 끝났습니다. 어서 거기서 나오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 극한의 상황을 겪으며 전쟁의 무익함을 깨달은 이들은 나무에서 내려오고, 나무 아래의 두 병사는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들에게 남은 일상이 과연 전쟁 이전과 같은 일상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품은 여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통해 다시금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던진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닌 ‘일상’이라고.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주)엠피앤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