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ce REVIEW |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연출
바흐솔리스텐서울 ‘아치스와 갈라테아’
5월 9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1718년에 초연된 헨델의 오페라로 ‘아치스와 갈라테아’가 바흐솔리스텐서울(음악감독 박승희)의 연주로 국내 초연됐다. 양치기 아치스와 요정 갈라테아의 사랑, 그리고 이들을 방해하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의 갈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영어 작품으로, 오페라지만 발표 당시 큰 무대가 아닌 작은 저택에서 연주되곤 했던 소규모 목가극이다.
공연은 콘서트 오페라 형식으로 진행됐으나, 넓지 않은 무대 공간에서도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3단으로 이루어진 5개의 작은 층계가 무대 전체를 둘러쌌고, 중앙에 위치한 오케스트라는 가수들의 동선을 고려해 가운데로 통로를 만들었다.
서곡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흰색 눈가리개를 두른 합창단이 서서히 등장하며 층계를 메웠고, 이어서 등장한 데몬(테너 위정민 분)은 익살스러운 마임을 선보이며 무대를 활보했다. 갈라테아(소프라노 김제니 분)와 아치스(테너 유종훈 분)는 별도로 등장하지 않고, 합창단 사이에서 데몬에 의해 선택됐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1막은 화사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무대와 싱그러운 배경 이미지, 그리고 두 가수의 청아한 음성이 빛났다.
분위기는 2막에서부터 반전됐다. 합창단은 검은색 눈가리개를 두른 채 등장했고, 용암이 솟구치는 화산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무대 위에서 불행해질 연인의 미래를 탄식했다. 이어서 폴리페모(바리톤 나건용 분)는 합창단의 정중앙에서 나타났는데, 힘 있는 목소리로 악마적인 분위기를 과시하며 단숨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극이 진행될수록 아치스와 폴리페모의 갈등이 심화되며 결국 아치스는 죽임을 당하지만, 갈라테아의 능력을 통해 강물로 다시 태어나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무대 공간은 한정적이었지만 그 공간을 최대치로 활용한 연출에는 여러 재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으며, 자칫 정적이고 지루해지기 쉬운 흐름에 꾸준한 생동감을 부여했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눈가리개가 풀리며 이른바 ‘해제’된다는 설정은 갈라테아가 합창단 모두의 눈가리개를 풀어내는 피날레에서 빛을 발했다.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몬을 극 전반에 내세운 시도도 신선했다. 극 초반부터 무대를 누비며 아치스와 갈라테아를 선택하고 인형을 다루듯 두 인물의 손과 팔을 조종하는 모습은 마치 데몬이 극의 판을 설계한 전지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2막에서는 폴리페모가 연적 아치스와의 관계를 넘어서 데몬의 세계관 전반에 맞붙는 듯한 입체적인 구도를 부여하기도 했다.
네 주역과 합창의 역량도 만족스러웠지만, 바로크 음악을 긴 시간 전문적으로 탐구해온 바흐솔리스텐서울 바로크오케스트라는 누구보다도 이 작품을 일품으로 구현해 낸 공신이었다.
글 최성혁 기자 사진 바흐솔리스텐서울
그럼에도 계속되어야만 하는 생의 의지
연극 ‘바냐 삼촌’
5월 7~13일 LG아트센터 서울 LG 시그니처홀
2024년 연극 ‘타인의 삶’(LG아트센터)으로 주목받은 손상규가 두 번째 연출작 ‘바냐 삼촌’을 무대에 올렸다. 1899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초연된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지식인 사회의 무기력을 비판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인물들을 통해 인생의 공허를 담담히 그린다.(5월 12일 관람)
공연 시작 전 객석에 흐르는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6월 ‘뱃노래’의 서정적이면서도 쓸쓸한 선율이 관객을 극 속으로 이끌었다. 작품은 시골 영지에서 살아가는 바냐와 조카 소냐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평생을 바쳐 대학교수 세레브랴코프의 재산을 관리하며 살아왔지만, 은퇴한 교수가 젊은 아내 엘레나와 함께 영지로 돌아오면서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늙은 교수와 젊은 아내,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시골 저택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사랑과 욕망, 상실과 좌절 속에서 각자의 삶이 지닌 허무를 마주하게 된다.

안톤 체호프(작), 손상규(연출)/이서진(바냐), 고아성(소냐), 양종욱(아스트로프), 이화정(엘레나), 김수현(세레브랴코프) 외
안톤 체호프는 당시 러시아 지식인 계층의 이면을 세레브랴코프와 바냐라는 두 인물을 통해 드러냈다. 대도시를 동경하며 학문적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허영과 자기연민에 머무는 세레브랴코프, 허상을 위해 평생을 바쳤음을 깨닫고도 끝내 권태와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냐의 모습은 지식인 사회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손상규는 체호프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보다, 배우들의 호흡과 일상의 리듬 안에서 풀어냈다. 배우들에게 “단순하고 가볍게, 생기 없이” 연기할 것을 주문했던 체호프의 의도처럼, 전원극의 생활감과 희비극적인 정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불쑥 터져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순간들은 비극적 상황 이면에 숨어 있는 희극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번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서진은 회의와 체념, 분노가 뒤섞인 바냐를 특유의 담백한 연기로 풀어냈다. 고아성 역시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는 소냐의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독백으로 여운을 남겼다. 그중 아스트로프 역의 양종욱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무심한 호흡과 능청스러운 리듬감으로 인물이 지닌 권태감을 극대화 했다.
‘바냐 삼촌’은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삶의 반복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허무와 체념, 그럼에도 계속되어야만 하는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공연이 끝난 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위로와 쓸쓸함이 남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석탄빛 유년 위로 올라선 토슈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4월 12일~7월 26일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
조용했던 탄광촌은 극심한 혼돈에 빠졌다.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일어난 1984년의 영국. 마거릿 대처 정부가 탄광 폐쇄와 급여 삭감, 동시에 2만 명 규모의 해고 정책을 추진하자 일어난 반발은 탄광 노조 내부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작품 속 빌리의 아버지와 형이 파업에 앞장서며, 가족의 분위기가 늘 팽팽하고 거칠게 그려지는 이유다.(5월 12일 관람)
사회의 균열은 11살 어린 빌리의 일상에도 침투한다. 우연히 발레 수업에 발을 들인 그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그 천재성은 곧 발레 교사 윌킨슨 부인의 눈에 띈다. 하지만 빌리가 재능을 보이는 발레는 노동자 계급에게 낯설다. 발레 교습 비용도 만만치 않다.

리 홀(작), 스티븐 달드리(연출)/김승주·박지후·김우진·조윤우(빌리), 최정원·전수미(윌킨슨), 조정근·최동원(아버지) 외
그럼에도 춤처럼 흘러가는 빌리의 이야기는 경직된 사회와 그의 가정에 조금씩 따스함을 부여한다. 결국 소년의 꿈을 지지하게 된 빌리의 아빠와 형, 마을 탄광촌 사람들의 애정 어린 응원이 바로 그 방증. 빌리가 런던 로열 발레 학교의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비용 역시, 한 근로자가 그에게 내놓은 수백 파운드 덕분이었다.
마냥 어둡고 추운 현실인 탄광촌과 발레리노를 꿈꾸는 빌리의 간극은 무지막지하게 크다.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넘버들과 투명한 벽을 돌파하려는 듯 크게 발을 구르는 빌리의 몸부림은 마치 내 손에도 응원봉 하나를 쥐어주는 것만 같았다. 현재 노동자계급 공동체를 찾아가 소년들을 발레의 세계로 이끄는 왕립발레학교의 아웃리치 프로그램 역시, 어쩌면 빌리의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영화의 편집이 뒤따르지 않는 무대는 어린 배우에게 훨씬 가혹한 공간이다. 그만큼 ‘빌리’의 역할은 독보적이다. 대사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감정을 춤과 노래로 설득해야 하며, 그의 역량이 곧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출중한 기량의 ‘빌리’를 탄생시키기 위해 공연 전 50주간의 ‘빌리 스쿨’을 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장 150cm 이하, 변성기 이전의 소년 배우들은 발탁 이후 탭댄스·발레·아크로바틱과 노래, 연기를 총체적으로 지도받는다.
2막에서 런던 로열 발레 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은 빌리와, 그런 빌리를 위해 탄광 아래로 한없이 내려가는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자발적으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이 착용한 광부용 랜턴의 불빛이 빌리를 비추며, 언제까지나 추운 이 현실에 투쟁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였다.
커튼콜이 올라가고 돌아오는 길, 이상하리만치 벅찬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작품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꼭 발레 무용수와 음악가가 되지 않더라도 어떠한 삶에서든 진정한 깊이와 창의력을 가진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 한계를 거두고 앞으로 정진할 수 있는 희망을 언제든 잊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글 유내리 기자 사진 신시컴퍼니
CLASSICAL MUSIC
진솔/말러리안 오케스트라
폭포처럼 쏟아진 소리와 도전의 열정
4월 3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진솔(지휘)/국립합창단·부천시립합창단·위너오페라합창단·김포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윤정·김수정·장혜지(소프라노), 김세린·정수연(알토), 박승주(테너), 이승왕(바리톤), 전태현(베이스)/말러리안 오케스트라·일본 타쿠티카트 오케스트라
여성·남성·어린이합창단이 층층이 들어찬 콘서트홀 합창석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말러 교향곡 8번 2부의 막바지, 우측 여성합창단에서 아름다운 독창이 들렸다. ‘오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소프라노 장혜지가 부른 ‘영광의 성모’가 한줄기 빛처럼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테너 박승주가 ‘구원의 시선을 바라보라’며 시작한 마리아누스 박사의 노래는 마음을 움직였다. ‘모든 덧없는 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일 뿐.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 모두를 이끌어올린다’라는 괴테의 시가 담긴 ‘신비로운 합창’은 순수한 감동만을 담백하게 남긴,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 정적을 깨는 박수가 잠시 울리다 물러갔지만, 말러 교향곡의 여러 피날레 가운데 2번 ‘부활’과 더불어 가장 찬란한 결말로 꼽히는 8번 ‘천인 교향곡’의 마무리다웠다.
진솔(1987~)이 지휘하는 말러리안 오케스트라의 말러 프로젝트는 2016년 창단 이후, 2017년 ‘말러리안 시리즈 1’로 본격화됐다. 민간 오케스트라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한 지 10년째를 맞은 올해, 4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오른 아홉 번째 작품은 교향곡 8번이었다. 합창석 좌우 끝에 배치된 금관 주자들은 반다(별도 공간에 배치된 금관군)처럼 공간감을 더했다. 인터미션 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분량의 연주를 앞두고 객석에도 일종의 비장함이 흘렀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로 1부가 시작되자마자 삼면에서 객석을 향해 폭포수처럼 합창이 쏟아졌다. 합창단의 두꺼운 벽을 뚫는 듯한 소프라노 이윤정의 가창이 돋보였다. ‘적을 멀리 쫓아 주시고 언제나 평화를 주소서’ 부분에서 강렬함이 고조됐다. 때로 껑충껑충 뛰면서 열정적으로 지휘한 진솔은 ‘기쁨의 열매를 내려주시고’에서 몸을 최대한 낮추며 극적인 다이내믹의 대비를 이끌어냈다. 어린이 합창단과 소프라노가 교차한 ‘글로리아’에 이어 1부 마지막에 이르자, 무대에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범람했다.
괴테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텍스트로 삼은 2부는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성령의 강림을 노래한 1부가 압도적인 집단적 에너지였다면, 2부는 사랑과 구원이라는 보다 내면적인 감정으로 향했다. 고즈넉한 밤의 음악같이 시작한 2부는 가곡과 오페라가 섞인 듯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말러의 음악이 주는 탄탄하고 웅숭깊은 감동은 여느 작품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확고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규모의 확장감에 세밀한 디테일이 새겨진 작품인 만큼 옥에 티도 있었다. 솔리스트 간 기량 차가 감지됐고, 합창 앙상블의 순도도 고르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합창에 오케스트라가 가려졌으며, 목관과 오르간 등 악기들의 부진도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모든 연주자들을 한 선로에 태우고 종착역까지 달려가도록 독려하는 지휘자 진솔의 리드에 관객들은 생생하게 말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진솔과 말러리안이 꿈을 벼리며 달려온 지난 10년 동안 한국 클래식 음악의 지형도도 역시 조금씩 달라졌다. 말러 감상의 지평도 이전보다 더욱 넓고 깊어졌다. 연주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은 늘 있었지만 프로젝트의 성사 자체만으로도 K-클래식 음악의 눈높이를 끌어올렸다고 평가하고 싶다. 오는 10월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예정된 말러리안 시리즈의 10번째 공연인 교향곡 2번 ‘부활’에 귀추가 주목된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플래직
제15회 부산사람이태석기념음악회
인류를 향한 사랑, 울림으로 피어나다
5월 2일 오후 7시 30분 부산콘서트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웅장한 서사가 된다. 숭고한 발자취를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품어낸 ‘부산사람이태석기념음악회’가 지난 5월 2일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렸다. 모차르트·도니체티·구노·바그너까지 폭넓은 오페라의 정수를 선보였고,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삶의 가치와 맞닿는 감동으로 이어졌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한 이번 음악회는 한 사람을 기리는 자리를 넘어, 부산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2027년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앞두고 필요한 것은 어쩌면 소중한 그릇을 채울 우리만의 내실 있는 콘텐츠일지도 모른다. 오충근 예술감독의 정교한 지휘 아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악가들과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BSO)가 함께한 시간은, 부산의 예술적 역량과 정신적 가치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감동을 여실히 증명했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은 홀의 공기를 단번에 깨우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부산의 딸’ 소프라노 박소영은 서정적인 아리아에서 섬세한 피아니시모와 폭발적 성량을 넘나드는 완급조절로 객석을 숨죽이게 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은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에서 능청스러운 연기와 소품의 활용으로 유쾌한 웃음을 퍼뜨리며 1부의 정점을 찍었다. 위로가 필요한 이와 이 무대를 나누고 싶어질 만큼 따뜻한 생기가 번졌다.
2부는 BSO의 화려한 구노 ‘파우스트’ 왈츠로 다시 한번 몰입을 이끌었다. 촘촘히 맞물린 현악 위로 객석 곳곳에서 고갯짓이 일었다. 박소영은 흔들리는 내면을 한 계단씩 고조되는 크레셴도에 실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음색으로 고향 무대를 수놓았다. 특히 바그너 연주에서는 BSO의 비약적 성장이 돋보였다. ‘발퀴레의 기행’에서 금관의 거침없는 돌파와 앙칼진 현의 질주는 압도적 음향을 완성했고, ‘보탄의 이별’에서 사무엘 윤은 묵직한 저음으로 홀을 울리며 절망과 체념 사이를 오가는 비통함을 끝까지 붙들었다.
대미를 장식한 ‘탄호이저’ 서곡은 고난을 넘어 구원으로 향하는 이태석 신부의 여정을 상징하듯 장엄한 울림을 선사했다. 금관이 첫 테마를 꺼낼 때의 긴장은 이내 안도로 바뀌었다. 단단히 중심을 잡아가는 사운드는 다독이듯 따뜻한 질감이었다. 반복되는 주제를 치밀하게 풀어낸 오충근의 노련한 해석도 돋보였다. 마침내 전 단원이 빚어낸 환희가 홀을 가득 채웠고, 곁에 있던 관객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연주자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빚어낸 선율이 누군가의 가슴에 어떻게 닿았는지를. 뜨거운 갈채에 화답한 앙코르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의 찬란한 선율은 공연을 끝내 희망으로 이끌었다.
‘이태석기념사업회’의 정신이 스며든 현장에는 지역 오피니언 리더와 기업인들도 마음을 보탰다. 특히 이태석 신부의 제자이자 한국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는 존 마옌 루벤이 객석에 함께한 모습은 고결한 뜻이 우리 곁에 살아있음을 실감케 했다. 남수단의 도시 톤즈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여주었던 ‘스승 이태석’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부산의 예술적 위상과 신부의 사랑이 교차한 이 밤은, 부산 클래식 음악의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글 정연지(작곡가) 사진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OPERA
대구오페라하우스·중국국가대극원 ‘리골레토’
압도적 시각 효과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음악
4월 24·25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다비데 리베르모어(연출)/김광현(지휘)/디오오케스트라·대구오페라콰이어/이동환·김한결(리골레토)/장원친·이혜정(질다) 외
베르디 ‘리골레토’가 ‘2026 한·중·일 문화교류의 해’의 일환으로 대구오페라하우스·중국국가대극원에 의해 공동제작됐다. 라 스칼라 극장 개막작을 4년 연속 연출한 유일한 연출가이자, 현재 제노바 국립극장 감독으로 재직 중인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모어(1966~)의 연출로 아시아 초연된 공연을 24일 관람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리골레토’가 공연됐지만, 이번 공연은 한·중 공동제작이라는 점과 연출가의 명성·아이디어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더욱 특별했다. 그동안 미디어아트를 무대장치나 배경으로 활용한 오페라를 종종 봐왔으나, 이번 작품처럼 압도적 시각 효과가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무대는 처음인 듯했다.
1막 배경인 만토바 공작의 궁정은 요지경 속 이미지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로 채워졌다. 초대형 LED 디지털 캔버스와 3D 매핑으로 구현된 영상은 세련된 색감과 섬세한 화면 구성으로 16세기 이탈리아 궁정 건축의 질감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질다의 첫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온 벽면을 덮어나가는 이미지도 작품의 맥락과 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으로 다가왔다.
연출의 시각적 영향력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성악가 중심의 오페라가 강렬한 무대 장치가 주동하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재편되는 인상을 받았다. 호화롭고 웅장한 배경 아래, 인물들은 하잘것없는 존재처럼 묘사돼 숙명의 거대한 힘에 좌우되는 인간군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성악가들의 존재감은 뛰어났다. 바리톤 이동환은 중후하고 풍성한 성량으로 리골레토의 비극적 운명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의 고급스러운 음색은 강한 자존심과 억눌린 현실에 대한 울분을 품은 궁정 광대의 한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중국 소프라노 장원친은 티 없는 음색과 빼어난 기교로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을 노래해 큰 갈채를 받았다. 이동환과 장원친은 복수의 2중창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극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만토바 공작을 노래한 테너 유준호 또한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한 좋은 가창을 선보였고, 스파라푸칠레 역할의 베이스 류지상은 묵직하면서도 선명한 음색과 개성으로 한국 오페라계에 또 한 명의 뛰어난 베이스가 있음을 알렸다. 이날 성악가들은 시각적 미학이 지배하는 무대에서 밀리지 않는 기량으로 오페라를 빛냈다.
김광현이 이끈 디오오케스트라·대구오페라콰이어 역시 디테일을 살린 연주로 작품의 한 축을 든든하게 담당했다. 다만, 음악의 극적 효과에 치우쳐 감정적 조절이 부족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1막 전주에서부터 지나치게 높았던 감정의 파고는 성악의 영역까지 침범해 때때로 전체적인 균형을 흔들었고, 성악가와의 호흡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강약을 안배했더라면 한층 완성도 높은 공연이 되었을 듯하다.
대형 LED 스크린으로 미디어아트의 몰입감을 높인 것도 이날 오페라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출자의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본다. 고전과 첨단 기술이 창조적으로 융합해 새롭게 거듭난 모습을 통해, 작품과 치밀하게 조응하는 미디어아트가 구현될 때 오페라가 얼마나 풍성해지고 수준이 높아지는지 생생하게 체험한 프로덕션이었다.
글 손수연(오페라평론가) 사진 대구오페라하우스
PERFORMANCE INFORMATION
대구오페라하우스·중국국가대극원
공동제작 ‘리골레토’
9월 16~20일 베이징 중국국가대극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