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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 ‘카 맨’ 7.28~9.29
매튜 본의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난 ‘카르멘’
고전을 비틀고, 1950년대의 미국 중서부를 배경으로, 카르멘에 발레의 옷을 입혔다

©Johan Persson
주목받는 무용 작품들이 한데 모이는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은 일찌감치 매튜 본(1960~)의 ‘카 맨’을 이번 시즌 주요 작품으로 내세웠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영감을 받아 2000년 초연한 작품으로, 매튜 본의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에너지 넘치고 관능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25년 넘게 여러 차례 재공연되며 인기를 누렸지만 왜 한국에서는 만나기 어려웠을까? 공연을 보고 나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욕망과 대담한 성적 표현을 거리낌 없이 무대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카 맨’은 ‘카르멘’에서 출발하지만 오페라의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제임스 M. 케인(1892~1977)의 소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와 이를 각색한 동명의 필름 누아르 영화들에서 불륜과 살인, 파국의 서사를 가져왔다. 매튜 본이 먼저 매료된 것은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1932~2025)이 비제의 음악을 현악과 타악 중심으로 재구성한 ‘카르멘 모음곡’이었다. 약 40분의 음악을 장편 무용극으로 확장하기 위해 작곡가 테리 데이비스가 새로운 음악을 더했다. 익숙한 ‘하바네라’의 선율은 관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춤과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날카로운 현악과 강렬한 타악은 정비소의 거친 분위기와 맞물리고, 음악과 춤이 서로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무대에 욕망과 긴장을 채운다.
욕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맺다
‘카 맨’은 1950년대 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 ‘하모니’를 배경으로 한다. 자동차 정비소와 식당을 중심으로 디노와 젊은 아내 라나, 정비공과 연인들이 살아가는 폐쇄적인 공동체다. 육중한 자동차 사이에서 공구를 다루는 일상의 동작은 춤이 되고, 기름과 땀에 젖은 남성들의 몸은 정비소의 거친 분위기를 살린다. 일을 마친 정비공들의 단체 샤워 장면은 이를 유쾌하고 도발적으로 보여준다. 이들 사이에는 왜소하고 순진해 늘 괴롭힘을 당하는 안젤로와 그에게 마음을 둔 리타가 있다.
어느 날 배낭 하나를 멘 낯선 남자 루카가 나타난다. 거칠고 매력적인 그는 정비소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의 등장과 함께 평온했던 ‘하모니’의 조화에 금이 간다. 남편 디노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소유물처럼 취급받던 라나는 루카에게 이끌린다. 디노가 집을 비운 사이 두 사람은 격정적인 관계를 맺지만, 그가 예상보다 일찍 돌아오면서 루카는 라나의 방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 잠시 뒤 무대 위 자동차 한 대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옷을 추스르며 루카가 차에서 나온다. 그런데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안젤로다. 조금 전까지 라나와 사랑을 나눴던 루카와 안젤로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 객석에서도 놀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루카를 둘러싼 욕망과 질투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라나와 루카는 자신들의 관계를 알게 된 디노를 죽이고, 안젤로에게 누명을 씌운다. 감옥에 갇힌 안젤로는 면회 온 리타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다. 교도관의 성적 폭력에 맞서 그를 제압하고 탈옥한 안젤로는 더이상 순진했던 청년이 아니다. 복수를 위해 하모니로 돌아온 안젤로는 자신을 배신한 루카와 다시 마주한다. 두 남자는 배신감과 분노, 미련과 원망 속에 뒤엉켜 격렬하게 싸운다. 안젤로는 루카에게 입을 맞추며 두 사람의 관계를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낸다. 결국 욕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또 한 번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디노의 다이너 앞에 모인 하모니 마을의 주민들 ©Johan Persson
모두에게 분산된 카르멘의 캐릭터
무대 위에는 실제 자동차를 비롯해 정비소와 식당, 숙소를 오가는 화려한 세트가 펼쳐지고, 1950년대 미국을 연상시키는 복고풍 의상과 분장도 볼거리를 더한다. 여성들의 플레어스커트는 움직일 때마다 크게 퍼지며 춤에 율동감을 더하고, 남성들은 청바지와 흰색 민소매 차림 혹은 상의를 벗은 채 근육질의 몸을 드러낸다. 무용수들은 춤뿐 아니라 대사 없이 욕망과 질투, 두려움과 배신을 표현하는 연기까지 소화한다. 특히 리타와 안젤로의 조심스럽고 순애보적인 사랑과 루카와 라나의 육체적이고 충동적인 사랑이 대비된다. 머뭇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리타와 안젤로와 달리 루카와 라나는 서로를 거침없이 유혹하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루카를 양성애자로 설정한 것이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처럼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튜 본에게 성별을 뒤집는 것이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백조의 호수’부터 그랬다. 전통적으로 여성 발레리나의 영역이었던 백조를 근육질의 남성 무용수들로 바꾸면서 우아하고 연약했던 백조의 이미지를 강하고 야성적인 존재로 뒤집었다.
‘카 맨’의 변화는 좀더 다층적이다. 카르멘이라는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카르멘을 규정하던 욕망과 자유, 매혹을 여러 인물에게 분산시킨다. 남편의 눈을 피해 자신의 욕망을 좇는 라나에게서도, 남녀 모두를 매혹시키는 루카에게서도 카르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백조의 호수’가 성별을 뒤집어 익숙한 고전을 낯설게 만들었다면, ‘카 맨’은 성별뿐 아니라 욕망의 관계까지 새롭게 짜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카르멘’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카 맨’은 지루할 틈 없이 질주한다. 욕망과 질투, 살인과 누명, 탈옥과 복수가 반전을 거듭하고, 귀에 익은 ‘카르멘’의 음악에 강렬한 안무와 실제 자동차가 등장하는 화려한 무대, 배우 못지않은 무용수들의 연기가 더해진다. 매튜 본의 파격적인 해석을 어렵게 따라가지 않아도 한 편의 스릴러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매튜 본이 설립한 무용 극단 ‘뉴 어드벤처스’는 ‘카 맨’을 비제의 ‘카르멘’을 재해석(reimagined)한 것이 아니라 다시 불붙인(re-ignited)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매튜 본은 150년 된 ‘카르멘’의 익숙한 선율에 전혀 다른 이야기와 인물, 관계를 불어넣었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성별을 뒤집었던 것처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전을 과감하게 비틀어 새로운 무대로 만들어내는 것은 매튜 본의 특기다. ‘카 맨’은 그 파격적인 상상력이 가장 뜨겁고 에너지 넘치게 발휘된 작품이다.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힌 루카를 그린 2막 ©Johan Persson

디노의 차고를 배경으로 펼쳐진 하모니 주민들의 군무 ©Johan Persson
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새들러스 웰스 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