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20년 전에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처음 만났어요.
그때 우리는 성도, 나이도 다른데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시간이 흐르고 더 가까워지면서 우린 서로가 정말 닮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서로의 빈 곳을 채워줄 수는 없지만, 이런 친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죠.
친구는 나의 명예로움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없었어도 나름대로는 잘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인생에 들어온 뒤에 ‘나는 시시하지 않구나’ 느낄 수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예술가와 기자가 밀실에서 진행해온 인터뷰를 모든 이들 앞에 드러내어 홀딱 벗기고 깨고 반하게 만드는 시간, 오픈인터뷰 ‘홀딱’ 여덟 번째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오늘 진행을 맡은 월간객석 기자 김선영입니다. 오늘 ‘홀딱’의 주인공은 연극배우 박정자 선생님과 ’GQ’ 편집장 이충걸 씨입니다. 그럼 먼저 박정자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박정자가 조명 아래로 나와 관객을 마주보고 섰다.)
오늘 감기가 무척 심하게 들었어요. 저는 원래 감기 잘 안 앓거든요. 연극배우가 연습이나 공연 중에 감기 걸리면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배우 자격이 없어!” 근데 오늘 여러분을 만나는 이 시간에 제가 이런 상태로 나왔네요. 그런데 감기가 한 번 왔다 나가면 더 좋은 에너지가 생긴데요. 쓸데 없는 것들을 다 죽이고. 근데 남성분이 눈에 띄네요.
(박정자가 앞 줄에 홀로 앉은 남성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춘다.)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박정자를 만나러 오셨어요, 아니면 제 친구 이충걸 씨를 만나러 오셨어요?
“박정자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정답!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서 오셨어요? 누구세요? 궁금해요. 제가 연극하면서 극장에 오는 관객들을 보면, 어떻게 이 극장까지 왔을까 항상 궁금했어요. 감사한 거야 말할 것도 없고요. 때마침 오늘 갤러리에 멋진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전시도 관람하시고, 연극배우도 만나시고, 연극배우의 친구 ‘GQ’ 편집장 이충걸 씨도 만나보시면 좋겠어요. 오늘은 참 특별해요. ‘홀딱’에 연주자들이 나와서 연주는 많이 했지만, 연극배우는 제가 처음이죠?
네. 연극배우로서는 선생님이 처음이고요. 그래서 더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선생님, 준비한 것이 있으시죠?
그래요. 제 목소리가 워낙 좀 섹시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감기가 들어서 더 섹시해졌어요. 오늘은 여러분 앞에서 낭독하는 시간을 먼저 가지려고 해요. 낭독할 작품은 ‘GQ’ 편집장 이충걸 씨가 쓴 작품이에요. 제가 오늘 낭독할 ‘이멜다 마르코스의 항변’은 그의 다섯 번째 책에 있는 내용이에요. 오늘은 25분 남짓,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여러분께 영상, 음악과 함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분위기 정말 좋네요. 오늘 이 공간, 이 시간은 저와 여러분만의 것이에요. 아주 비밀스러운. 다들 집에 가셔서 일기에 쓰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이야기 더 길어지기 전에 ‘이멜다 마르코스의 항변’ 들려드리겠습니다.
(박정자가 자리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안경을 끼고, 보면대에 올려둔 희곡집을 응시하는 사이 새초롬한 음악이 갤러리 안에 울려 퍼지고, 고급스럽게 치장된 여인의 방이며 구두 진열장들이 화면에 오르내렸다.)
선생님, 낭독 감사합니다. 저는 순간 ‘이멜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이 책으로 나왔을 때 이건 내가 그냥 눈으로만 읽을 게 아니라 낭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활자로 보는 것과 목소리로 듣는 것은 정말 다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몰입해서인지, 낭독을 들으면서 선생님이 약간 얄미워보이기도 했어요. 그럼 이쯤에서 오늘 홀딱의 또 다른 주인공 ‘GQ’ 편집장 이충걸 씨를 모셔보겠습니다. (이충걸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장했다.) 두 분을 한자리에 모셨으니 먼저 ‘이멜다 마르코스의 항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처음에 박정자 선생님께 ‘홀딱’ 출연 제안을 드렸을 때, 이충걸 씨 작품을 낭독하고 싶다고 얘기해주셨어요. 이 작품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처음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쉴 새 없이 웃었어요. 무엇보다 작가가 실제 이멜다보다 그녀를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쩜 이렇게까지 이멜다를 표현할 수 있을까? 거기에 감동했고, 저는 만날 ‘안티고네’ 같은 작품에서 트레시아스 같은 예언자 역만 하기는 좀 아쉽다는 생각도 했고요. 또 저의 낭독은 이 글을 쓴 이충걸 편집장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고, 오늘 오신 분들에게 대한 저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박수로 화답했다.) ‘이멜다 마르코스의 항변’에서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이야기를 솔직하고 과감하게 풀어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멜다가 실존인물인데, 특히 낭독을 들으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가 좀 헷갈리더라고요.
내용 중 숫자나 정치적인 상황들은 모두 다 사실이고, 그 외의 진술들은 모두 지어낸 거예요.
방탄용 브라와 같은 것들은 이충걸 씨가 다 생각해낸 것들이란 말이죠?
네 그렇죠.
그런데 진짜 방탄용 브라가 있을까?
(폭소를 터뜨리는 관객.) 오늘 이 자리에 많은 분들이 ‘GQ’ 편집장 이충걸, 연극배우 박정자의 팬으로 와주셨지만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박정자 선생님이 공연하셨던 ‘11월의 왈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내사랑 히로시마’는 모두 이충걸 씨가 희곡 작업을 했을 정도로 두 분이 매우 각별한 관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계기로 지금 같은 사이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1991년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라는 작품을 할 때 전화가 왔어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근데 그 목소리가 굉장히 떨렸어요. 내가 그 전화로 진동을 느낄 정도였어요. 그러고 인터뷰를 했죠. 우리 인터뷰는 하루에 끝나지 않았어요. 세 차례 정도 만났죠. 나중에 인터뷰가 실린 잡지가 나왔는데, 난 그런 기사는 처음 봤어요. 황홀했거든요. 어떻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식간에 깊숙이 들어왔다가 나간 느낌이라고 할까. 인터뷰 글을 보고 기자에게 제가 먼저 전화를 한 거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차 한 잔 하자고 말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만나고 있어요.
선생님은 제 첫 번째 취재원이었어요. 그때 제가 준비한 질문이 육십 개가 넘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제가 베테랑 기자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지금도 느끼시겠지만, 저는 베테랑으로 보일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곳곳에서 동의한다는 뉘앙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성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데 어쩜 우리는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우린 더 친해지면서 서로가 정말 닮았다는 걸 느꼈어요. 물론 서로의 빈 곳을 채워줄 수는 없지만, 이런 친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죠. 전 언제나 친구는 나의 명예로움이라고 생각해요. 박정자 선생님이 제 인생에 없었어도 나름대로는 잘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이 제 인생에 있어서 ‘아 내가 시시하지 않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고요. 제 인생에 두 명의 여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저희 엄마고 다른 한 사람은 박정자 선생님이에요.
(객석의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전 이충걸 편집장 어머니와 라이벌 관계예요.
그렇다면 평생의 라이벌이시겠어요. 박정자 선생님이 보는 이충걸 씨는 어떤 글쟁이자 친구인가요?
내가 이충걸의 글을 읽으려면 머리카락을 다 세워야 해요. 긴장해서 봐야 돼요. 그래서 오금이 저려. 늘 어떻게 하면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제가 ‘GQ’ 정기구독자거든요. 책을 받으면 편집장 레터를 제일 먼저 봐요. 그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책을 만들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또 자주는 아니지만 압구정 커피 볶는 집에서 만나곤 해요. 그냥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거죠.
(두 사람의 우정 이야기는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를 회상하던 이충걸은, 이따금 박정자의 목소리를 흉내 냈고 관객 모두 “꺽꺽”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목소리도 비슷하세요.
저희가 만나는 건 세상에서 목소리 제일 좋은 여자와 세상에서 목소리 제일 나쁜 남자가 만나는 거에요. 참고로 한국의 미인 중에는 목소리 좋은 사람이 없어요.
목소리 얘기가 나왔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박정자 선생님이 유명하신 이유 중 하나는 진중한 목소리 때문이기도 한데요.
후음성이 깊숙한 맛이 있는 목소리.
예전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더빙도 하셨고요, 언젠가는 보일러 CF 내레이션도 더빙하셨죠. 이 자리에서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인어공주에 나오는 바다 문어마녀 우르슬라까지는 좋아요. 라라랄라라랄라라.
(7초 가량, 우르슬라의 흥겨운 노래가 이어졌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동아방송 전속 성우로 들어갔을 때는 얼마나 많이 홀대받았는지 몰라요. 그때 왜 그분들이 박정자의 목소리를 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죠. 제 목소리가 알려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아마 누구나 연극배우 박정자를 설명할 때 목소리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보일러 TV CF는 제가 아르바이트 한 거예요. 연극배우는 정말 가난해요. 정말로. 나도 뭐 가난하다는 얘기는 하기 싫어요.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려워요. 예를 들어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올리려고 두 달 동안 매일 연습해요.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매일매일. 그런데 사람들은 연극하는 사람들 아이큐가 한 자리냐는 얘기를 해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매일 연습할 수 있느냐고요. 하지만 나중에 공연을 보면 연습한 것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죠. 누군가 저에게 ‘안티고네’ 출연료가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는데,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슬쩍 넘겼어요. 광고 내레이션 녹음은 그나마 가끔 하지만, 그마저도 정말 아르바이트예요.
(이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연출됐다. 객석에 앉아있던 음악평론가 윤중강이 불쑥 질문을 던진다.) “박정자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어요. 연극배우로 많은 작품을 하셨지만, 저는 대중적으로 선생님을 알린 사람은 선생님의 남편이자 TV CF 감독이신 이지송 씨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엄청 유명했던 헬레나 루빈스타인 화장품 광고가 기억나서요.”
남편과 저는 각자의 노선을 가요. 그 당시에 남편이 저한테 헬레나 루빈스타인 화장품 광고 더빙 얘기를 했는데, 그때 제 대답은 정말 간단했어요. “화장품 광고 내가 하면 안 팔려.” 제 목소리가 좀 무서우니까요. 보통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목소리는 간드러져야 하잖아요. 그래도 한번 와보라고 해서 결국엔 녹음까지 했죠. 그게 1980년 초예요. 지금도 광고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은 절 보고선 “헬레나 루빈스타인?”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음악평론가 윤중강이 다시 끼어든다.) “보통 화장품 광고는 예쁘고 젊은 여성이 소모된다는 느낌인데, 그때 선생님 광고를 보면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이렇게 사람을 제압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요.”
이거 사서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느낌인가?
(박정자의 짙은 후음을, 순식간에 관객 웃음소리가 뒤덮었다.) 목소리 얘기를 하다 보니 화장품까지 오게 됐네요. 그런데 목소리 하면, 실례되지만 이충걸 씨도 독특한 편에 속하는데요.
저는 독특한 게 아니라 미성숙해서 어렸을 때 에디터 일을 할 때, 섭외가 안 된 적이 잘 없어요. 박약해보이기도 하는데 얍삽해보이지도 않으니까 취재원들이 이 사람이랑 인터뷰해서 내가 특별히 손해 볼 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최고의 인터뷰어라는 수식어를 갖고 계세요. 지금까지 정말 많은 명사들을 인터뷰하셨고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인터뷰의 핵심은 듣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한 사람의 방송국이 됐잖아요. 끊임없이 자기만의 언어를 송출하고 있는데, 사실 이야기는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오천 배는 더 중요해요. 그런데 포인트는 잘 공명(共鳴)해야 한다는 것,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터(inter)-관통해서, 뷰(view)-관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잘 들을 수 있으면 상대방 마음도 잘 읽을 수 있어요.
공감하고 깨닫는 바가 큽니다. 말씀을 듣다가 문득 두 사람의 묘한 공통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외모가 아닐까 싶은데요. 사전 관객 질문 중에는 젊음의 비결이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젊음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그런데 저희가 늙었나요? 젊었느냐, 늙었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100세가 되어도 우리 모두 우주의 어린이라고 생각해요. 우주의 역사는 147억 년인데 고작 30~40년 살고선 젊고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리고 늙음과 젊음을 외관적인 부패로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젊음의 비결은 우주의 어린이로 사는 것이군요. (이때 갑자기 음악평론가 윤중강이 다른 질문을 던진다.) “박정자 선생님은 20~30대 시절, 젊은 배역보다는 무녀나 악역을 주로 하셨던 것 같아요. 50대가 되어서도 더 나이 많은 역을 하셨는데, 그게 또 어울렸고요. 그런 캐릭터를 하게 되신 이유가 굉장히 궁금해요.”
저는 어떤 역을 해도 다 어울려요. 그리고 전 연극배우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여러 배역을 넘나들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적역이라는 건 이미 적역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요. 말 그대로 적역이니까. 저는 적역이 싫어요. 적역이 아닌 걸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다른 것에 도전하고 싶어요. 저는 적역을 거부합니다.
데뷔작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 역을 맡으셨는데….
난 20, 30대 초반에 노역을 했고, 조역을 했던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줬다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오필리어나 성춘향을 했으면 지금의 박정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주름살 하나 없는 20대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고 분장을 하고.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도 그런 시절이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에요.
그래도 어린 배우로서는 나이에 맞는 배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그때 아쉽거나 섭섭하지 않으셨어요?
물론 서운하고 섭섭했죠. 그걸 내가 이겨낼 수밖에 없었어요. 어찌 보면 미련하고 둔한 거죠….
이번에는 이충걸 씨께 질문 드릴게요. ‘GQ’는 다른 라이선스 잡지와는 다르게 영어 사용을 지양하고 있잖아요. 창간호 때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지켜오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전적으로 편집장님 뜻인 건가요?
네. 패션을 다루는 라이선스 잡지들은 영어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요. 잡지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복식이 서양에서 온 것이고, 물론 추석이나 구정 때는 한복을 다루지만요. 그래서 상당수 명칭이 다 영어거든요. 어쩔 수 없는 명사는 그렇다 해도 형용사는 한국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심플한’이면 단정한 혹은 완고한, 엄격한.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는 독창성. ‘인디언 핑크’는 돼지분홍. ‘다크 블루’는 남청색… 이런 식으로 한국어를 써야죠.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를 써야 하고, 또 한국어가 예쁘잖아요. 사실 오렌지색이랑 귤색은 달라요, 그래도 오렌지 빛인 것인 귤색이라고 써요. 오렌지 중에서도 귤처럼 조금 짙은 색이 있겠죠. 꼭 반드시 외래어를 써야 한다면 작은따옴표를 붙여요. 굳이 영어를 제목으로 쓸 때는 타이포로 기능할 때만. 본문 안에는 잘 넣지 않아요.
좀 다른 질문을 드릴게요. 두 분은 각각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자기 분야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바라보고 있는 일을 하시잖아요. 일상에서 어느 때 아름다움을 느끼는지요?
오늘 자리 같은 곳이 정말 좋고, 아름다워요. 서로 더 꾸밀 것도 없고, 다같이 스티로폼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웃는 얼굴로 서로 교감할 수 있고. 지금 여기는 여러분과 저하고의 비밀스러운 공간이고 시간이잖아요. 함께라면 그저 고구마를 삶아먹기만 해도 아름답고 행복한 거죠. 아름다움은 거창하지 않아요.
저는 사실 이런 자리가 거북해요. 그렇지만 고고장에 가고선 거기서 춤 못 춘다고 하면 안되잖아요. 저는 이런 자리에 와서 분위기가 산만하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을 때릴 수도 있어요. 저는 흘러가는 시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순간과 다시는 바꿀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시간. 오늘처럼 다시는 대신할 수 없는 이런 시간에 있을 때 기쁘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건 친구들하고 술 마실 때예요. 어제 저희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들 불러서 술 좀 마시고 싶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올라오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귀 기울여 듣던 관객들이 반전에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도 엄마가 친구들 불러서 마시라고 했어요. 집에 있으면 가끔 엄마는 친구들 만나러 어디 안 나가냐고 물어보세요.
최근에 나온 에세이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에서 이충걸 씨가 저녁에 밖에 나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어디를 나가느냐”라고 매번 물어본다는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네요.
제가 오후 5시에 나가든, 12시에 나가든 엄마는 항상 “이 시간에 어딜 가니?”라고 말해요. 그럼 전 “내가 이 나이에, 이 시간에 어딜 못 나가?”하고 나가죠.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는데, 저를 걱정하는 게 엄마의 인생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저만 걱정하는 건 싫어요.
이때 박정자의 요청으로 책 한 권이 두 사람 앞에 도착했다.
잠깐 책 얘기가 나왔는데.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이충걸 편집장의 여섯 번째 에세이예요. 그 책이 무슨 책인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제가 주최 측에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이충걸 편집장이 엄마 얘기를 듬성듬성 꺼냈는데. 이충걸 편집장이 결혼을 안 한 관계로 엄마와 보내는 많은 시간, 삶의 이야기를 이 책 속에 담았어요. 사실 여자들이 엄마들이 하는 게 상식인데…
저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는데, 엄마가 저와 더불어 여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생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전 계속 누워 있는 엄마를 보면서 가슴 아픈 건 싫고, 항상 엄마에게 말을 걸고 엄마를 모시고 김연아 아이스 쇼도 보고 싶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싶어요. 책에는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엄마가 아닌, 나와 같이 발맞춰 걸어가는 친구로서의 엄마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지금부터는 관객 분들이 사전에 보내주신 질문 위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이영심 씨께서 여러 질문을 보내주셨는데요. 그중 박정자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작품 가운데 다시 한 번 다른 느낌으로 서보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저는 다시 꼭 하고 싶은 작품은 없어요.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 대답이 저를 자랑하는 거 같지만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같은 작품들은 지금 하면 그때만큼 못할 것 같아요. 그때가 최선이고 최고였어요. 지금은 원도 없고 한도 없어요. 앞으로 나한테 주어지는 배역에 충실하게 만족하게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어요.
다음은 윤종현 씨가 이충걸 씨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서 ‘슬픔의 냄새’에서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 혹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박정자요. 왜냐면….
브라보!
제가 언젠가 ‘GQ’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올해의 여자는?’ 하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대부분 그 해에 이슈가 됐던 톱스타들을 말했는데, 전 ‘죽어도 박정자’라고 썼어요.
어머니가 섭섭해하지 않으실까요?
아마 어머니라고 했으면 내가 샘냈을 거야.
다음은 김동호 씨 질문입니다. 역시 두 분께 각각 드리는 질문인데요. 박정자 선생님께는,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즐기며 살 수 있을까요?” 이충걸 씨께는, “오로지 혼자 술을 마실 땐 무엇을 하면서 드시나요?”
난 참 지루하다는 소리를 잘해요. 제가 “어우 지루해” 이러면 친구들이 깜짝 놀래요. 그렇게 매일 연극 연습하면서 바쁘게 사는데 지루할 틈이 있느냐고 물어보죠. 그런데 참 지루하거든요. 이제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더 곤란하고 골치 아파요. 100세까지 살고 싶지도 않고요. 전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 계속 공연을 해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면 스스로 내가 아닌 것 같아요. 나한테 너무 실망하게 되요, 그래서 전 무언가를 계속해야 돼요, 날 지루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요.
이충걸 씨는, 혼자서 술 잘 마시나요?
혼자 술 마시는 거 좋아해요. 와인 마실 때는 명란이 좋고요. 아, 짜지 않은 구운 명란이 있으면 훌륭합니다. 책을 펴놓고 취해가면서 책 읽는 게 재밌어요.
그럼 현장 질문을 받아볼까요? (한 여성관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진다.) “오늘 박정자 선생님을 보면서 느낀 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우아할 수 있는가’였어요. 제가 아는 여성 중에 가장 우아하신 것 같아요. 나이를 떠나서 여성이 어떻게 하면 우아할 수 있는지 여기 모여 있는 여성들에게 알려주시면 좋겠고요. 이충걸 편집장이 느끼는, 여성이 가장 우아하게 보일 때는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그런 칭찬을 들으니 내가 붕 뜨는 기분이네요. 고맙고요,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이게 평소의 제 모습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우아함의 비밀은 결국 비밀에 부쳐두시는군요.
저는 자주적인 여자에게 우아함을 느껴요. 자기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또 여자가 일상에서 젠틀한 매너를 보여줄 때. 누가 지나갈 때 문을 잡아준다거나, 혹은 먼저 지나가라고 양보하는 그런 우아함이 굉장히 섹시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의존하지 않는 여자를 좋아해요. 젖은 낙엽처럼 남자한테 찰싹 달라붙는, 그렇게 의존적인 모습은 굉장히 거북해요. 왜냐면 결국엔 그 남자에게서 떨어지니까.
(여성들만 일제히 제각기 다른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이제 ‘홀딱’의 마지막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입니다. 그동안 보도자료나 기사를 통해 알려진 닳고닳은 프로필이 아닌, ‘홀딱’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 시작하겠습니다.
박정자 이충걸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대신, 나는 왜 태어났다.
연극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하기엔 그 대답이 너무 궁색한 거 같아요. 그러나 연극을 하면서 사는 이유를 깨닫게 되요.
저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죠. 그리고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비굴하고 얍삽하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아요.
박정자의 데뷔작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다 대신, 내가 마지막 무대에서 하고 싶은 작품은 이것이다.
’19 그리고 80’의 모드. 모드는 정말 무공해예요. 그리고 가진 것도 하나도 없어요. 나의 롤모델이죠. 인생을 살면서 닮고 싶은 사람을 꼽는다면 나는 모드예요. 80세 할머니 모드.
이충걸은 2001년 창간한 남성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GQ’ 편집장직을 10년 넘게 맡고 있다 대신, 내가 ‘GQ’로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사실 그런 질문이 난감해요. 저는 거룩한 생각을 가지고 책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제 직업이자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거기에 충실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거룩한 생각을 갖고 책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정자는 지난 2012년 데뷔 50주년을 맞이했다 대신, 내가 무대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이것이다.
요즘 연습하는 ‘백조의 노래’에서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그때 프롬프터가 말해요. “관객이 있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홀딱’ 객들.)
제 말에 긍정하지 마세요. 전 반대예요. 이런 대사가 있어요. “관객? 관객이 어딨어? 관객은 극장 문을 나서면 자기의 어릿광대에 대해선 다 잊어버려.” 최근 국립극장에 클루지 헝가리 극장 배우들이 공연한 ‘외침과 속삭임’을 보러 갔어요. 모든 좌석이 다 매진될 정도로 연극 마니아들이 참 많이 왔어요. 저는 그때 혼자 갔어요. 입장하려고 로비에서 한참 서 있는데 아무도 나한테 아는 체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나는 무대 위에서 한 해도 쉰 적이 없어요.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예요. 그럼 그날 그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 로비에 줄을 선 사람들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가요? 나는 그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내가 인기가 있어서 뽐내려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눈으로 웃어주면 나도 눈으로 대답할 것이고, 입으로 웃어주면 나도 입으로 화답할 거예요. 손을 내밀면 나도 손을 잡아줄 거예요. 그런데 연극을 보러 왔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극 배우를 보고서 그리 무감각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감동이 없을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존재일까요? 너무너무 배신감을 느꼈어요. 이게 제가 가장 최근에 느꼈던 감정이에요.
네,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솔직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최근 발간된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외 다수의 저서를 낸 이충걸은 지금까지 대중과 기자들에게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신, 지금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너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사실 제가 그렇게 괜찮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꼬마 친구들이 앉아서….
(관객 모두가 “내가 꼬마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충걸을 바라본다.)
다들 공감하면서 들어주니까, 오늘 참 뜨겁고 고역스러운데 나중에라도 모두의 얼굴이 다 생각날 것만 같아요.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주신 관객 여러분, 그리고 박정자 선생님, 이충걸 씨께 감사…
제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친구가 책을 낼 때마다 100권씩 책을 삽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에요. 물론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파는 가격으로 삽니다만.
(일동 큰 웃음.)
그래서 제가 오늘 오신 여러분들께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박수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럴 때 또 하나의 미션이 있어요. 제가 여러분들께 선물할 책은 이미 도착했어요. 가실 때 한 권씩 다 받아가시고요. 그리고 내가 오늘 이 책 한 권만 받아가는 건 너무 부끄러워. 그 대신 내가 한 권 살 거야.
(박정자의 애교 섞인(?) 입담에, 객석 곳곳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래서 한 권은 받으시고, 한 권은 사세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역시 저자에게 파는 가격으로. 잔돈은 뚝 자르고. 이러니까 내가 약장수 같네. 우리가 1만 원에 행복해질 수 있고 거룩해질 수 있어요. 저 문을 나갈 때 떳떳할 수 있어요. 오늘 여러분이 사시는 책에는 이충걸 편집장이 사인해줄 거예요. 제가 드리는 책에는 사인 없어요. 대신 구입한 책에는 너무나 다정한, 사인이 생길 겁니다. 박정자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멋있는 친구인지 마음껏 부러워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정자가 모두에게 전해준 뜻밖의 선물. 갤러리 안은 누군가 불을 지펴놓은 듯, 한여름 밤처럼 달아올랐다. 사인을 받기 위해 사이 좋게 줄을 서는 풍경도 순식간에 그려졌다. 행복하게, 그리고 행복하고도 거룩하게 문 밖을 나서는 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우정. 추억. 비밀….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아홉 번째 홀딱은 발레리나 김주원과 의상디자이너 정구호, 그리고 우리가 만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6월 13일까지 이메일 friends@gaeksuk.com으로 이름·연락처·참석인원과 두 사람에게 궁금한 질문을 보내주십시오. 당첨자는 6월 14일 개별통보합니다. 문의전화 02-3673-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