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연출가 정선영, 난세를 건너는 세 개의 수수께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7월 15일 7: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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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연출가 정선영

난세를 건너는 세 개의 수수께끼

올여름 화제작, 푸치니의 ‘투란도트’가 건네는 수수께끼 앞에 한국 대표 성악가들이 모여 답한다

 

 

유럽 전역에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던 시대,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인류의 참혹한 현실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 그려지는 막연한 옛 중국이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동화는 어쩌면 푸치니가 마주한 전쟁의 상흔을 외면한 채 눈을 돌린 거대하고 정교한 ‘비현실’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투란도트를 앞세워 묻는 세 가지의 수수께끼는 결국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남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함

연출가 정선영의 여정 역시 바로 그 아픔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이 참 아팠어요.” 표면적인 동화와 묵직한 음악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이질감은 정선영에게 또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이에 화려한 볼거리를 과감히 걷어내자, 1막의 웅장한 합창 속에서 전쟁과 갈등에 미쳐 버린 군중의 통렬한 통곡이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사건들이 극 중의 희생과 죽음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와닿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흔히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가 칼라프에게 제시한 ‘수수께끼를 못 맞히면 처형당한다’는 잔혹한 규칙에만 집중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푸치니가 왜 하필 이 세 가지 수수께끼를 선택했는지 의문이었어요. 그가 숨겨둔 수수께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제가 마주한 답은 결국 ‘인간’이더군요.”

인간 정신이 추구하는 이상인 ‘희망’, 육체라는 물질적 실체인 ‘피’, 그리고 존재를 부여하는 ‘이름’(투란도트)까지. 세 가지가 결합할 때,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완성된다는 서사다. “세 수수께끼의 정답과 그 의미까지 닿고 나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너와 나’의 존재론적인 윤리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동등하게 마주 섰을 때, ‘당신의 생명이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죠. 누가 누구의 생명의 가치를 재단할 수 있겠나요?”

하지만 전쟁의 논리는 나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의 가치를 말살하고 제거하는 것. 정선영은 ‘투란도트’를 통해 인간과 인간이 평등하게 마주 앉아 본질을 논하는 대토론의 장, 아고라를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2026년 현재, 정선영이 다시 ‘투란도트’를 꺼내든 이유는 명백하다.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무모한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자본과 경제 논리만이 날뛰는 황량한 지금. 그는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시대의 비극을 무대 위에 날카롭게 투영하기로 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무모한 전쟁 뉴스를 매일처럼 접해요. 이 난세(亂世)에 ‘전쟁’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 전쟁이 얼마나 무모하고 처참하고 비참하고 비극적인지, 또 모든 이들의 삶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고 있는지, 황량하게도요.”

 

폭력의 대물림을 끊는 ‘교감’을 위해

정선영의 치열한 고뇌는 오랜 시간 동안 구체적인 시각 연출로 진화해 왔다. 2014년 대구오페라하우스 공연에서는 고통의 먹구름이 허망하게 걷히는 해결의 서사를 썼고, 2019년 대전예술의전당 공연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원에 벌어진 틈새(상처)를 시각화했다.

능욕당했던 선대 공주의 부당한 아픔을 대물림받아 남성들에게 복수를 하며,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스스로 갇혀버렸던 투란도트는, 결코 왕자의 무력이나 남성성에 정복되어 승복할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기존의 연출에서 반복되어 온, 칼라프가 투란도트의 베일을 벗기고 강압적인 키스로 그녀를 굴복시키는 결말은 정선영에게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사랑으로 투란도트를 해방시키는 순간이 아니라, 결국 선대 공주가 당했던 잔인한 폭력의 역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무대에서 정선영이 해석한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키스’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다. 그 장면은 물리적인 남녀의 입맞춤으로만 제시되지 않는다. 칼라프가 근엄하고 힘 있게 다가와 잠시 멈춰 서는 순간,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진다. 오롯이 단둘만의 정적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교감의 찰나가 이어진다. “느껴보세요. 나와 당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 짧은 정적 후, 둘은 비로소 입술을 포갠다.

 

야만을 거스르는 숭고함, ‘지는 논리’에 대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모두 맞춘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 약속대로라면 투란도트를 차지할 자격을 얻었으나, 강요된 승리 대신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원했다. 칼라프는 날이 밝기 전,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기꺼이 죽겠다는 역제안을 던지고, 공주는 그의 이름을 밝혀내기 위해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칼라프를 남몰래 사랑하며 그의 이름을 끝까지 숨겼던 시녀 류가 눈앞에서 자결하는 비극을 목격한 후, 극은 두 남녀의 팽팽한 대치로 치닫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교감의 키스. 공주의 얼어붙은 마음에 일렁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 칼라프는 승리자의 위치를 과감히 내려놓고 마지막 선택을 내린다.

“내 이름은 칼라프다!(Il mio nome è Calaf!)”

투란도트에게 이름이 밝혀지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잔혹한 규칙 속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폭로하는 이 행위는 칼라프 역시 자신의 목숨을 상대의 손에 기꺼이 맡기는 희생이라는 해석이다.
정 연출가는 이를 ‘지는 논리’라고 표현한다. 류도 칼라프를 위해 희생했고, 칼라프도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것을 먼저 내어주려는 이러한 이타적인 태도는, 나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전쟁 상황이나 냉정한 정세 속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논리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는 논리로 지는 사람이 더 행복한 거죠. 칼라프는 물론 류의 희생을 슬퍼했지만, 그것으로 더 힘을 얻어 투란도트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꺼이 지는 논리를 택한 겁니다.”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 속에서 핑·팡·퐁이 그토록 평화를 그리워하고 군중들이 광기 뒤에 지쳐 평온한 현실을 갈망했던 숨은 복선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해 낸 정선영 연출가.

이번 무대에는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 중인 성악가들이 함께한다. 칼라프 역의 백석종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도이치오퍼 등 주요 극장에서 존재감을 넓혀왔으며, 이번 작품으로 국내 첫 오페라 무대에 선다. 투란도트 역의 에바 프원카 역시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같은 배역을 노래해 온 대표적인 소프라노다.

그는 “제가 풍부하게 알고 있으면 관객에게 자꾸 설명하려 들기 때문에, 그저 생각의 광주리를 펼쳐 둔 채 관객과 같은 직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뿐”이라며 웃었다. 황량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건 희생과 교감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묻는 정선영의 치열한 아고라는, 이제 막을 올릴 준비를 마쳤다.

유내리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정선영(1985~) 이화여대 성악과를 거쳐, 인디애나 음대에서 오페라연출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국립오페라단 ‘돈 조반니’를 비롯, ‘토스카’ ‘운명의 힘’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텔로’ 등을 연출했다. 오페라의 한국화 공적으로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표창상을 받았으며, 공연예술창작소 ‘예술은 감자다’의 예술감독 및 대표로 활동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
7월 22·23·25일 오후 7시 30분, 26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로베르토 아바도(지휘)/정선영(연출)/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노이 오페라 코러스·CBS소년소녀합창단/에바 프원카·서선영(투란도트)/백석종·김영우(칼라프)/황수미·신은혜(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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