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MONY
하프시코디스트 이은지 & 베아트리스 마르탱
오래된 대화가 건반 위로 흐를 때
제6회 인천국제고음악제를 앞둔 스승과 제자,
하프시코드를 놓고 주고 받을 음악의 문답을 살펴보다


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는 ‘바로크 음악’이라는 장르 속에서 쉬이 예상하기 힘든 조합을 기발하게 엮어낸다. 그간 17세기 조선에 표류한 하멜의 여정을 바로크 음악과 국악의 교차로 그려내거나(2021), 18세기 작곡가 요한 크리스토프 페첼(1639~ 1694)의 ‘알파벳 소나타’ 중 일곱 곡을 발췌해 ‘B-A-R-O-Q-U-E’라는 음악 기호를 연주로 엮어 무대에 올렸다(2022). 수백 년 전의 음악을 다루면서도 21세기 무대에 올리는 발상만큼은 능청스럽다.
그렇다면 이 유쾌한 기획력은 제6회 인천국제고음악제라는 캔버스 위에서 어떤 밑그림을 완성할까. 오는 10월 29일, 아트센터인천에서 열리는 개막 공연은 고음악에서 가장 익숙한 이름인 ‘바흐’를 다룬다. ‘더 바흐 패밀리(The Bach Family)’라는 부제 아래 바흐와 두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C.P.E 바흐의 음악을 한자리에 모은다. 바흐 가문의 음악적 계보를 훑는 이 공연을 시작으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아망딘 베예와 남성 소프라노 브루누 지 사(1989~)가 차례로 인천을 찾는다.
음악제를 이끄는 예술감독 이은지가 축제의 첫 장을 함께 넘길 파트너로 초청한 이는 줄리아드 음악원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베아트리스 마르탱이다. 과거 뉴욕의 한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수다의 협연을 펼쳐내던 두 사람이, 두 대의 하프시코드를 사이에 두고 한바탕 음악의 수다를 떨어볼 참이다. 설레는 재회를 앞둔 두 연주자에게 서면으로 먼저 안부를 물었다.
스승을 닮은 손으로, 스승과 나란히 서다
베아트리스 마르탱의 공식 홈페이지 한구석에는 ‘제자에서 동료로(From Student to Colleague)’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은지의 헌사가 가장 첫머리에 놓였다. 그는 마르탱을 “진정성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음악가이자 지성적인 교육자”라 칭하며, 스승의 꼿꼿한 가르침이 자신의 손끝과 후학을 기르는 방식에까지 뿌리내려 있다고 고백한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자 ‘이은지’는 어떤 모습인가. 유독 기특했거나 놀라웠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마르탱 은지가 줄리아드 음악원의 고음악 앙상블 ‘줄리아드415’와 함께 링컨센터 무대를 위해 준비했던 토머스 아른의 협주곡이 떠오른다. 굉장한 해석의 자유와 과감함, 화려한 장식음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평소 은지는 악보를 충실히 존중하는 연주자인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음악을 완전히 체화시키더니 보기 좋게 날아다녔다. 당시 받은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줄리아드 음악원 시절, 선생님과 커피 마시고 싶어서 카페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졌다는 고백이 무척 귀엽다. 그때를 회상한다면?
이은지 선생님은 빈틈없고 정확한 분이셨다. 통찰력이 탁월하셔서 레슨 전에 벌벌 떠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나는 선생님이 정말 좋았다. 선생님이 뉴욕에 계신 동안에는 첫 스케줄 시간을 확인하고 아침에 학교 앞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어김없이 만난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여는 게 내 기쁨이었다. 아마 선생님은 알지 못하셨을 테지만.(웃음) 음악과 인간적인 대화를 깊게 나누면서 사제지간이자 잘 통하는 친구 사이가 됐다.
오랜 시간 수많은 연주자를 길러냈다. 좋은 음악가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관이 궁금하다.
마르탱 스물두 살 무렵부터 교육을 시작했으니 늘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온 셈이다. 내가 학생일 때 워낙 큰 관심과 세심한 가르침을 받았기에, 어린 학생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레슨할 때 세 가지에 집중한다. 첫째, ‘손’이라는 도구를 완벽히 다루는 장인 정신(테크닉). 장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동작의 완벽함과 확실성을 탐구한다. 둘째, 감정을 받아들이고 관객을 매료시키는 순수한 예술성이다. 셋째는 다른 예술 분야와 연계해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두 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BWV1061(바흐)으로 스승과 한 무대에 선다. 연습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재미있는 비하인드가 있었다고 들었다.
이은지 얼마 전 선생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리딩을 했는데, 둘 다 제2파트를 준비해 왔다. 통화했을 때 서로에게 제1하프시코드 파트를 미루고 각자 제2파트를 연습해 온 거다. 기가 막히게 통한다! 리허설 때 그대로 만났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웃음) 선생님께서 공연 일정이 너무 많아서 제1파트를 새로 익힐 시간이 없다고 하시길래 내가 맡기로 했다. 원래 선생님 독주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을 구상했는데, 선생님이 먼저 “같이 협주곡 연주하자”고 제안해 주셨다. 부담은 크지만, 무대 위에서 대화할 생각에 가슴이 뛴다.
음악 안에는 여전히 스승의 지문이 짙게 남아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돌아볼 때는 어떤가.
이은지 내 음악 안에는 베아트리스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다. 터치·테크닉·음악적 결정 등 모든 면에서 선생님을 떠올린다. 최근 내 제자가 베아트리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뒤 “선생님 티칭과 똑같아서 ‘리틀 베아트리스’ 같다”고 연락이 왔더라. 내가 어떻게 선생님을 따라가겠냐마는, 더욱 닮아가길 원한다.
‘하프시코드’라는 소울메이트, 바로크의 샘에 풍덩!
하프시코드는 거짓말에 서툴다. 피아노처럼 서스페인 페달 뒤로 은근슬쩍 숨지 못하며, 음량을 키워 세를 과시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오직 찰나의 터치와 미세함 차이로 승부해야 한다. 이 솔직한 악기 앞에서 연주자는 우아하고 꼿꼿한 격식을 슬그머니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준 악기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수많은 악기 중, 하프시코드를 선택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은지 부전공 악기로 만났다. 그저 피아노의 뿌리를 알아가자는 마음이었는데, 첫 레슨에서 건반을 누르는 순간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매우 직접적으로 반응해 주는 악기였고, 마치 소울메이트를 만난 기분이었다. 첫 선생님이었던 요닛 코소브스키는 늘 내게 “너는 쳄발로로 ‘개종’해야 한다”고 하셨고, 어머니 같은 엘리자베스 라이트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이 길로 들어섰다. 내 성정과 딱 맞는 악기였다.
마르탱 아주 어릴 때부터 고음악은 늘 내 삶의 일부였다. 기타 교수였던 아버지는 류트도 연주하셨는데,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칸타타를 경건한 마음으로 듣곤 했다. 나는 구스타프 레온하르트(1928~2012)가 연주한 바흐의 음반도 무척 좋아했다. 여덟 살 무렵, 그의 연주로 듣는 바흐의 ‘영국 모음곡’에 맞춰 쉴 새 없이 춤을 추었던 기억이 난다. 소녀 시절부터 이 악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 섬세한 음색과 듣는 이를 자연스럽게 사로잡는 생동감 넘치는 리듬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하프시코드는 온습도에 워낙 민감해서 연주자가 직접 조율하고 다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은지 늘 어렵고 민감한 일이다. 농담조로 ‘대충 조율하라’고 말하곤 한다.(웃음) 조율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면, 그사이 공연장의 온도와 습도에 악기가 적응하면서 소리가 또 틀어지기 때문이다. 중간 옥타브를 공들여 맞춰놓고 다음으로 넘어갔더니 이미 앞서 맞춘 음이 틀어져 있으면 난감하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조율을 끝내고 공연장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피치에 따라 음악의 인상도 달라진다. A=415Hz, A=392Hz 등 고음악의 피치(기준음)에 대한 소견은?
이은지 현대 악기 연주에서는 기준음을 440Hz보다 높여 443Hz까지 올려 팽팽하고 화려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반면 415Hz로 내려가면 조였던 텐션이 풀어지며 한결 편안해진다. 앙상블에서는 415Hz가 현실적이지만, 독주라면 프랑스 바로크의 392Hz를 사용하는 럭셔리를 누릴 수도 있다. 피치의 높고 낮음이 작품의 인상을 통째로 바꾸기도 하니까.
텅 빈 객석에서, 국경 너머의 합주로
코로나19가 세계를 멈춰 세웠던 2021년, 무관중 공연과 크라우드 펀딩으로 외로운 닻을 올렸던 인천국제고음악제는 어느덧 6회를 맞았다. 1회부터 4회까지는 국내 연주자들과 고음악 레퍼토리를 다지는 시간이었다면, 5회를 기점으로 해외 아티스트들을 초청하며 어엿한 국제음악제의 뼈대를 세웠다. 올해는 솔로와 앙상블은 물론, 오페라 아리아와 합창에 이르기까지 음악제의 스펙트럼이 폭넓어진 점이 눈에 띈다. 옛 기보법에 묻혀 있던 보석 같은 작품을 캐내어 관객 앞에 올리는 ‘발굴의 묘미’는 이 축제를 지탱하는 분명한 정체성이다.
인천국제고음악제만의 고유한 색깔을 스스로 정의해 본다면?
이은지 우리가 진짜 좋아하고 매력을 느끼는 바로크 음악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데, 여기에 한국 초연이나 세계 초연 작품들도 여러 곡 포함된다. 관객분들이 음악제가 열릴 날짜를 기억하고 예매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음악제가 점점 자리를 잡고 있다고 느꼈고, 책임감도 커지고 있다.
10월 29일 개막 공연 부제가 ‘The Bach Family’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와 그의 두 아들 C.P.E 바흐(1714~1788),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를 한데 묶었다.
이은지 처음부터 마르탱과 구상했던 그림이다. 바흐와 아들들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듣는 건 바로크의 정점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발걸음을 함께 따라가는 것이니까. 같은 음악적 뿌리 안에서도 세대와 양식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음악 언어가 드러난다. 세대 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과 조화, 그 안의 유기적인 대화를 들려주고 싶었다.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아망딘 베예(11.1)와 남성 소프라노 브루누 지 사(11.13) 등 개성적인 연주자들과의 조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은지 아망딘 베예(1974~)는 뛰어난 솔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앙상블 전체를 이끄는 디렉터로서의 역량이 탁월한 연주자다. 바로크 음악은 연주자 사이의 긴밀한 호흡과 무대 위 영감 속에서 생명력을 얻는데, 그와 함께 만들어갈 자유로움과 생동감을 가장 기대 중이다. 남성 소프라노 브루누 지 사는 성악가를 물색하던 중, 파트를 막론하고 내 마음에 깊이 들어왔던 연주자였다. 그의 학구적인 레퍼토리 접근도 인상적이었다. 꼭 한국 청중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제자가 성장해 자신이 주조한 음악제에 스승을 초청했다. 감회가 남다를 듯 한데.
마르탱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부모가 자식이 제 발로 당당히 서는 걸 바라는 것처럼, 스승 역시 제자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때 감탄하고 행복하다. 이번 개막 무대는 프랑스의 ‘레 폴리 프랑세즈’ 동료 연주자들과 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가 함께하는데, 언어나 문화가 완전히 달라도 음악 안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무대가 될 거다.
글 유내리 기자 사진 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인천아트센터
베아트리스 마르탱(1973~)
프랑스 안시 출생으로, 제네바 음악원과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다. 1998년 브뤼헤 하프시코드 콩쿠르에서 1위와 청중상, 베렌라이터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크리스티가 이끄는 고음악 앙상블 ‘레자르 플로리상’과 오랫동안 협업했으며, 2000년 고음악 앙상블 ‘레 폴리 프랑세즈’를 공동 창단했다. 현재 제네바 고등음악원 교수이자 줄리아드 음악원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은지(1983~)
인디애나대학교에서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를 전공하고, 고음악 건반악기 박사과정을 거쳐 줄리어드 음악원 전문연주자과정을 졸업했으며, 현재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다. 2016년 쥬로 하프시코드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뉴욕 링컨센터와 보스턴 고음악 페스티벌등에서 연주했다. 현재 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 음악감독이자 인천국제고음악제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제6회 인천국제고음악제(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10월 29일 오후 7시 30분 베아트리스 마르탱X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
11월 1일 오후 5시 아망딘 베예X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
11월 13일 오후 7시 30분 브루누 지 사X코리안 바로크 소사이어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