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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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사용 설명서
미래의 예술에 창의적 영양소를 공급하는 새로운 영양분, K팝. 다른 공연예술분야에선 어떻게 쓸 수 있을까?
K팝이 발산하는 힘이, 날로 강렬해진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K팝이란 무엇이며, 과연 이 흐름은 공연 예술계와 어떤 방식으로 얽혀 들어가게 될까? 공연예술을 위한 K팝 사용 지도를 그려본다
총괄 허서현 기자
STEP ONE 오늘날 K팝의 위상은? _김윤하
STEP TWO 연극·뮤지컬·영상물 속 K팝 활용의 흥망성쇠 _배선애·정수연·최재훈
STEP THREE 품격 있는 콘텐츠가 돼보자! _허서현
STEP FOUR 한류의 최전선에 나서다 _허서현
STEP ONE
꿈을 현실로 만들기까지의 15년
세계를 뒤흔든 K팝의 태동과 발전
현재 K팝에 대한 인식과 변화는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크게 다르다. ‘천지가 개벽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변화다. 국경을 넘으며 더 빠르게 퍼져 나간, 오늘날의 K팝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K팝을 모르는 사람에게 K팝은 그야말로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땅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K팝 아이돌과 그를 따르는 팬을 향해 쏟아진 사회적 시선만 살펴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녹음된 목소리에 맞춰 입만 벙긋댄다며 가수도 아니라는 손가락질을 받던 ‘10대 아이돌 그룹’과 그를 따르는 ‘빠순이’들. K팝을 모르는 또는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무릇 그렇듯 무지에 의한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했는지도 모른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 춤과 노래로 전 세계를 사로잡는 ‘케이팝 아이돌’과 그들의 영향력 있는 ‘팬덤’이라고 불리는 팬들의 일상을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변화다.
오늘날 K팝의 흐름은 BTS로부터
개벽은 국경을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이를 깨달은 건 BTS가 미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접수한 2017년 쯤이었다. 그해 BTS의 활약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2017년 5월 미국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거둔 BTS의 톱 소셜 아티스트 상 수상은, 단언컨대 몇 년 뒤 이들이 싱글 ‘Dynamite(다이너마이트)’로 거둔 빌보드 100 싱글 차트 1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자랑했다. 이들이 새로운 수상자가 되기 전까지 그 자리는 시대의 팝 아이콘 저스틴 비버가 따 놓은 당상이었다. 2011년 이래 무려 6년 동안이나 같은 상을 받은 그는 그러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보이밴드에게 문득 왕관을 빼앗기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실에 놀란 건 저스틴 비버와 그의 팬들 빌리버(Beliber)뿐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이 끝난 후 미국 언론은 분주해졌다. 이름조차 낯선, 심지어 영어도 아닌 한국어로 노래하는 저 7인조 그룹이 누군지 당장 알아야만 했다. 이들의 발 빠른 움직임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BTS는 이후 실제로 승승장구하며 한국 대중 음악계는 물론 미국 팝 시장에서도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자리 잡았다. 브리티시 인베이전(1960년대에 비틀스를 비롯한 영국 록밴드와 팝음악가들이 미국 시장을 점령하면서 벌어진 문화 현상)에 빗댄 ‘코리안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이라는 단어가 미국 언론을 수놓기 시작했다. 더불어 세계는 궁금해했다.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 미국을 뒤흔들 정도로 커져 버린 BTS라는 그룹, 그리고 그들이 속해 있는 K팝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해 말이다.
흥행하는 K팝의 공식?
아직 K팝의 역사는커녕 단어 자체도 낯설던 시절, 해외에서 짚은 K팝의 가장 큰 특징은 퍼포먼스였다. 음악은 오히려 익숙했다. K팝은 오랫동안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팝 트렌드에 그 어떤 필드보다 민첩하게 반응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 있던 힙합, 전자 음악, R&B, 이외에도 다양한 장르 음악의 문법이 팝적으로 풀려 퍼포먼스 위에 사뿐히 앉았다. 짧으면 3년, 길면 10년에 가까운 연습 기간과 데뷔 후에도 같은 숙소에 동고동락하며 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예사롭지 않은 팀워크를 바탕으로 다듬은 K팝 퍼포먼스는 때로는 음악을 압도했다. 특유의 강렬한 퍼포먼스를 효과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갈수록 복잡하고 과격해지는 K팝 음악은 한 때 K팝의 가장 큰 개성이자 동시에 대중화 및 세계화를 막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었다.
K팝의 글로벌화와 함께 이와 같은 흐름의 반작용으로 ‘케이팝 이지리스닝’이 등장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뛰어난 퍼포먼스, 세계 제1의 음악시장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조직화한 팬덤, 가수와 팬 사이를 가족이라 불러도 좋을 남다른 유대감 등 K팝의 주요 동력으로 언급되는 요소들로 영혼까지 끌어 모은 인기가 한계에 달했다는 평가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보유한 팬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내부 발언이 힘을 얻었다. 실제로 2022년 이후, BTS나 블랙핑크를 제외하고 빌보드 100 싱글 차트에 오른 곡은 대부분 이지리스닝 곡이었다. 뉴진스의 ‘Ditto(디토)’, 피프티 피프티의 ‘Cupid(큐피드)’, 아일릿의 ‘Magnetic(마그네틱)’ 같은 곡들 말이다.
매체도 변하고, K의 맛도 변한다
재미있는 건 이후 다시 한번 유행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한동안 K팝에서 K를 떼어야 살 수 있다며 줄기차게 팝과 플레이리스트를 외치던 이들은 다시 중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에스파의 ‘쇠 맛 3부작’이, 제니의 ‘like JENNIE(라이크 제니)’가, 캣츠아이의 ‘Gnarly(날리)’의 히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견이 없는 한 2025년을 대표하는 K팝이 될 예정인 그룹 헌트릭스(‘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한 걸그룹)의 ‘Golden(골든)’이 쐐기를 박았다. 압도적인 보컬 차력을 선보이는 노래는 비록 미국 자본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부른 곡이었지만, 최근 발표된 그 어떤 K팝보다 그 특성을 진하게 녹인 수작이었다.
‘K팝 교수님들이 만든 조별 과제’라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의 별명은 해당 작품이 K팝 팬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준다. K팝은 이미 ‘교수님’이 등장할 정도로 무르익었으며, 그들이 합심해 만든 조별 과제는 담당 과목의 기가 막힌 요점 정리 그 자체다. 청량의 정석 ‘Soda Pop(소다 팝)’, 섹시 카리스마의 이해 ‘Your Idol(유어 아이돌)’ 모두 100점이다. 더불어 그것은 바깥에서 전해진 심도 높은 이해였다.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펼쳐질 것이라는 신호탄이었다.
1996년, K팝 아이돌의 조상님 H.O.T.가 데뷔한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전 기준으로도 강산이 3번 바뀔 시기이니, 지금의 시계로 환산하면 적어도 강산이 수십 번은 바뀌었을 테다. 그동안 K팝은 물론, 세계 음악시장도 많이 변했다. 사람들은 음반 대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TV나 라디오 대신 유튜브가 사람들의 정신과 여론을 지배한다.
한국 대중음악가들의 목표는 국내 음악차트나 음악방송 1위에서 빌보드 차트 1위로 체급을 바꿨고, K팝 아이돌은 어느새 4세대를 넘어 5세대를 넘보고 있다. 한국과 K팝을 주요 소재로 다룬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K팝과 K드라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국으로 여행과 어학연수를 오는 외국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가끔 이 모든 것들이 꿈인가 싶다가도 꿈을 현실로 만든 이들의 땀과 노력을 떠올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시대와 세대, 세계와 호흡하며 모습을 바꿔온 K팝은 앞으로도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로 앞장서 걸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춤, 가수와 팬, 국내와 해외 이외에도 수많은 것들의 정반합으로 데굴데굴 굴러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글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STEP TWO
연극·뮤지컬·영화 속 사례 찾기
K팝 활용의 흥망성쇠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K팝 콘텐츠에 한 번 더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 뮤지컬 같기도, 영화 같기도 한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사실 도전은 꾸준히 있어 왔다. K팝 활용 콘텐츠로 그럴싸한 성공을 거둔 김에, 연극·뮤지컬·영화로도 녹아든 그간의 노력과 성공 현상을 돌아본다
K-POP 연극
외부자의 시선으로 공감 더하기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연극의 공통점은?

메기 강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팝과 우리나라의 연극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화려함 그 자체인 K팝과 화려함보다는 그 이면에 더 집중하는 연극은 얼핏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사실, K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과 아이돌, 팬덤 등을 보자면 연극은 음악을 적극 활용하지 않는 데다가 아이돌 혹은 아이돌 출신들은 뮤지컬에는 출연하지만 연극배우로는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 팬덤 또한 연극의 팬들은 K팝의 팬들과는 성향이 매우 달라서 활동 내용과 방법도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K팝과 연극은 접점이 없는 것일까?
현재 K팝의 인기 정점은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K팝을 소재로, 한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들이다. 감독이 매기 강과 크리스 아펠한스인데, 매기 강은 한국계 캐나다인이고, 크리스 아펠한스는 부인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1세대가 아닌 이후 세대들이다.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이기에 한국은 끊임없는 관찰의 대상이며 비교적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고, 1세대가 아니기에 다양한 문화의 감각과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한국적 요소가 절대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화적 특징들로 작품 속에 층층이 어우러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K팝에 대한 인기는 물론 한국에 대한 관심도 최고치로 올라가고 있다.
연극이 아닌 애니메이션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이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이 연극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K팝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은 ‘사랑Ⅱ’(국립극단, 2021년)가 있다. 재밌는 점은 ‘사랑Ⅱ’의 작가 및 연출을 맡은 박본이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라는 점이다. 독일의 시각에서 한국 문화는 관찰의 대상이었고, 그중 K팝은 흥미로운 소재였다.
아이돌을 준비하다가 죽은 네 명이 모여 지구의 핵에서 혼성그룹을 만드는 연극의 설정은 K팝이라는 화려함 뒤에 가려진 어두운 이면들을 드러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실패한 아이돌 연습생들. 사후에도 아이돌에 대한 염원으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연습생들의 모습은 K팝의 인기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그 속에 수많은 연습생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는 뢰셀러 벤이 작곡했는데, 이 작품을 위해 K팝을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만든 노래들이다. 그러나 노래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쉽지 않았고, 당시에는 혼성 아이돌이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후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국내 연극인들이 화려함과 엄청난 상업성 때문에 별개의 영역이라고 치부했던 K팝을 연극으로 발화하고자 한 태도와 목적이다. 박본의 시선은 외부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K팝 속에 깔려 있는 한국의 특징-무한경쟁, 완벽에 대한 강박적 추구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배우들을 통해, 노래와 춤을 통해 관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K팝을 비롯한 한국의 현실을 직관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듯 연극의 역할은 주목받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집중하면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 무대화하는 것이다. 외부자의 시선인 박본은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자였기 때문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외부자였기 때문에 연극 ‘사랑Ⅱ’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K팝의 전 세계적 인기 때문에 앞으로 연극에서도 K팝을 다루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제작되어 관객과 만날 것이다. 그럼에도 외부자적 시선은 놓치지 않을 듯한데, 그것이 바로 연극이라는 장르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K-POP 뮤지컬
아직은 먼 우리 사이
서사에는 상상이, 형식에는 도전이 필요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KPOP’
뮤지컬과 팝은 원래 가까운 사이다. 뮤지컬 넘버가 팝의 중요한 취향이었던 시절도 있었고, 팝은 뮤지컬 넘버가 되어 주크박스로 재탄생되기도 했을 만큼 팝과 뮤지컬은 친연성이 높다. 하지만 K팝과 뮤지컬의 관계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K팝은 장르를 넘어 문화의 개념에 가깝다. 아이돌·팬덤·스타일·시스템·세계관·정체성·영향력 등등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K팝의 범주는 넓고도 복합적이다. 그래서 K팝을 뮤지컬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려하고 중독적인 음악과 퍼포먼스는 K팝의 표면일 뿐 전부는 아니기에 그렇다.
K팝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할 때 소위 ‘K팝 뮤지컬’은 기존 주크박스 뮤지컬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드림하이’가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K팝 뮤지컬로 정의했다. 아이돌 출신의 배우, 유명한 아이돌 안무가 등이 참여해서 K팝다운 음악과 퍼포먼스를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 방식. K팝 뮤지컬에 대한 가장 쉬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른이 된 예술고 출신들이 추억의 힘으로 서로의 꿈을 찾는, 옛날 주크박스에나 어울릴 만한 이야기에 K팝의 문화적 감성은 담기기 어렵다. K팝에 대한 역량의 부족 이전에 이해의 부족이 드러난 기획인 셈이다.

뮤지컬 ‘드림하이’
그런 면에서 보자면 브로드웨이에서 2022년에 초연된 뮤지컬 ‘KPOP’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K팝 소재 뮤지컬이 품은 성공의 가능성과 실패의 원인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 훈련하는 연습생의 이야기는 사실 새로울 게 없지만, 브로드웨이 외곽으로 중·소극장이 펼쳐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이 선택한 전략은 이머시브(관객 참여형 콘텐츠)였다. 2층 구조의 극장에 마련된 연습실·녹음실·숙소 등을 관객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연습생들의 훈련 과정을 보고, 그들 각각이 마주하는 여러 상황과 고민을 듣는 방식이다. 서사의 내용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집중하는 공연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K팝의 표상과 심층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경험한 관객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그런데 정작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은 실패를 맞는다. 이머시브의 입체성을 제거하고 주인공 중심의 경쟁과 갈등의 드라마로 바꾸었을 때 작품의 에너지는 납작한 이야기 속에서 증발해 버렸던 거다. 이동식 스크린을 갖춘 콘서트형 극장에 토니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완성도 있는 넘버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 K팝 뮤지컬에 기대하는 것은 현실 속의 진부한 갈등과 위기의 서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일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K팝 뮤지컬’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주목해야 할 것은 K팝을 바라보는 시선과 접근방식의 일관성이다. 아시다시피 이 작품은 K팝이 소재인 외국 작품인바, 만드는 당사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외부자의 자리에서 포착한 K팝의 정체성은 판타지다. 만화적 영웅서사와 마음껏 캐릭터를 과장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틀은 이런 판타지를 구현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이고. ‘케·데·헌’은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K팝과 K-뮤지컬도 이렇게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까? K팝은 이미 세계적이고 K-뮤지컬 역시 토니상을 받았지만, K팝과 K-뮤지컬이 극장에서 만나기 위한 거리는 아직 멀다.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서사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공연 형식에 대한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K팝이기보다 뮤지컬이기에 재미있고, 뮤지컬이라서 가능한 작품이 되는 게 먼저다.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K-POP 영화
결합을 망설이지 않는 속성
빈 잔 축배를 경계하고, 미학적 영화로 안착하길

애니메이션 ‘터닝 레드’
최근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된 K팝의 확장성은 영화와 닮았다. 영화는 음악·연극·무용·시각예술·문학 등 기존 예술과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필름·카메라·디지털 등)과 결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예술적 창의성과 자본, 대중문화로서의 확산성에 과학기술까지 모든 장점을 포괄, 흡수하면서 산업이자 새로운 예술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걸어온 길을 K팝이 따르는 것 같기도 하다.
K팝은 세계의 트렌드를 이끄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브랜드 음악 예술로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여전히 K팝을 예술의 영역으로 포괄하는 것이 불편한 장르 애호가도 있겠지만, K팝이 세계를 이끄는 문화라고 본다면 문화의 관점에서 K팝의 확장성을 예술적 관점에서도 들여다봐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더불어 K팝이 최근 영화와 OTT 등의 영상 채널에 미친 영향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2017)에 블랙핑크의 노래가, ‘이터널스’(2021)에 BTS 노래가 단순히 담겼던 것에 비해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K팝은 그 자체가 주인공이다. 갑자기 찾아온 현상 같지만, K팝은 방송계는 물론 영화계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자신의 입지를 찾아가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
2018년 BTS 다큐 영화 ‘Burn the Stage’, 2020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4부작 다큐멘터리 ‘BLACKPINK : Light up the Sky’ 외에도 빅뱅·NCT 127·에스파·아이유·세븐틴·트와이스 등 아이돌들의 성장, 투어, 음악, 콘서트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은 소규모 팬덤을 위한 극장 개봉 후 OTT로 안착하면서 영화계의 또 다른 장르가 되었다.
K팝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있었다.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터닝 레드’(2022)는 빅뱅·2PM 등 K팝 보이그룹에서 영감을 받은 가상의 보이밴드가 등장하는 성장 영화다. 2023년 브라질에서 제작된 시리즈 ‘옷장 너머로’는 한국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등학생이 옷장에서 K팝 아이돌을 만나면서 겪는 성장 시리즈다.
이때까지만 해도 K팝은 브라질 자국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하나의 뜨거운 소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지형도를 변화시켰다. K팝은 단순한 음악이나 아이돌을 소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한국의 문화를 탐구하고 그 문화를 예술적 가치로 확장하는 대중문화의 허브가 되었다.
개봉을 앞둔 흥미로운 기획도 눈에 띈다. ‘인터스텔라’를 제작한 린다 옵스트와 CJ가 공동 제작한 ‘케이팝_로스트 인 아메리카’는 뉴욕에서 데뷔를 앞둔 보이그룹이 텍사스에 잘못 도착해서 겪는 성장 코미디로 기획되었다. 하이브 아메리카와 파라마운트가 공동 기획, 제작하는 제목 미정의 영화는 2027년 개봉을 목표로 K팝 걸그룹을 꿈꾸는 한국계 미국 소녀의 오디션 도전을 그린다. 2025년 가을부터 한국에서 전편을 촬영할 예정이다.
문화를 넘어 다시 예술로, 영화로 그 장르를 확장하는 K팝은 다층적 산업 콘텐츠를 넘어,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다. 하지만 또 우후죽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에 숟가락을 얹어보려는 정치, 행정 쪽의 섣부른 혹은 서툰 기획들이 자꾸 빈 잔 들고 축배를 권하려 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로벌 문화 시장에서 K팝이 별똥별이 될지 영원히 빛나는 별로 남을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K팝이 영화로서의 미학적인 완성도까지 갖춰 영화계에서 소동이 아니라 단단한 현상이 되길 기대해 본다.
글 최재훈(영화 평론가)
STEP THREE
K팝과 공연예술의 공존을 위한 노력들
품격 있는 콘텐츠가 돼보자!
오늘날 K팝은 먹성 좋은 잡식성 동물 같다. 자신을 살찌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씹고 찰떡같이 소화한다. 그리고 K팝은, 이제 공연예술계에 신선한 영양소를 공급해 줄 ‘먹잇감’이 되었다. 대중성과 예술성의 진정한 공존을 위한 아이디어를 들여다본다
K-POP 클래식 음악
① 클래식 음악을 활용한 K팝
‘요즘 K팝’은 샘플링도 남달라
대중가요에 클래식 음악이 활용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파헬벨의 ‘캐논’은 마로니에가 1994년에 부른 ‘칵테일 사랑’에도, 1999년 god가 어머니와 짜장면을 찾던 ‘어머님께’에도, 2017년 악뮤의 ‘오랜 날 오랜 밤’에도 등장했다. 작품의 제목은 모르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선율과 화성이 익숙하므로 즐겨 활용된다.
오늘날 K팝에서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하는 이유도 같다. 때문에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오는 도입부로 애용되는 사례가 가장 많지만, 어설픈 샘플링은 K팝의 강렬한 리듬 등에 어울리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 K팝의 청취 폭이 넓어지면서, 전 세계인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클래식 음악 활용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졌다.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 » 블랙핑크 ‘Shut Down’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의 선율이 바이올린 독주 음향 그대로 사용된다. 블랙핑크는 아이돌 중에서도 힙합 음악을 주요 장르로 선보이고 있기 때문에, ‘라 캄파넬라’의 선율은 매우 짧게 발췌되어 노래의 반복적인 후킹 요소로 사용된다. 악구의 매력적인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2023년 프랑스 영부인이 주최한 자선 콘서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로자코비치가 함께 무대에 올라 ‘라 캄파넬라’를 실시간으로 연주하며 두 장르의 공존을 재현하기도 했다.
블랙핑크 2016년에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했다. 로제·지수·제니·리사가 소속된 4인조 걸 그룹. 대표곡은 ‘휘파람’ ‘뚜두뚜두’, 단일 뮤직비디오에서 20억 뷰를 돌파한 K팝 최초 그룹이고, 북미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에 K팝 그룹 최초 주요 출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비제 ‘카르멘’ 중 ‘하바네라’ » 아이들 ‘Nxde’
멤버 중 소연이 직접 작사와 작곡, 콘셉트를 프로듀싱하기로 잘 알려진 그룹답게, 클래식 음악 샘플링에서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하바네라’의 주요 선율이 후렴구 부분의 전체를 감당한다. ‘Nxde(누드)’는 매릴린 먼로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로, 고정된 걸 그룹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아이들 특유의 정체성이 반영됐다. 오페라 속 파격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카르멘’이 노래의 주제와도 어울린다.
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2018년 데뷔했다. 매 음반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당당한 여성상을 말하는 독창적인 색깔이 있다. 소연·미연·민니·우기·슈화가 멤버이며, ‘TOMBOY’ ‘퀸카’ 등의 대표곡을 가지고 있다.
바흐 ‘G선상의 아리아’ » 레드벨벳 ‘Feel My Rhythm’
바흐의 생일인 3월 21일에 맞춰 곡을 발매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꽤 많은 영감을 받은 노래다. 레드벨벳의 MV는 발매할 때마다 장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것이 팬덤 문화일 정도로 메타포를 적극 활용하는데, 이 노래의 MV는 바흐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만큼 명화를 오마주한 장면들로 시작된다. ‘G선상의 아리아’로 시작할 뿐 아니라, 곡 전체에 오케스트라 음향이 적극적으로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레드벨벳 2014년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 아이린·슬기·조이·웬디·예리가 멤버인 5인조 걸그룹이다. ‘Dumb Dumb’ ‘빨간 맛’ 등 음반마다 독특한 콘셉트를 선보이는 팀이다.
② SM클래식스 집중 취재
엔터테인먼트에 클래식 음악 레이블이 있는 이유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
서울숲 앞에 자리한 고층 건물. 1층에 들어서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화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려하고 트렌디한 영상미를 장착한 K팝 가수들의 모습이 연이어 지나간다. 우리나라 대형 기획사로, K팝의 정체성 중 하나로 손꼽히는 SM엔터테인먼트의 사옥 전경이다. 대중문화의 선두에 서 있는 이 엔터테인먼트 건물 18층에, 클래식 음악을 위한 공간이 있다. 바로 SM엔터테인먼트의 사내 레이블 ‘SM클래식스’를 위한 장소다.
SM클래식스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서울시향과의 MOU 소식이었다. 2020년, 이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클래식 음악과 K팝의 협업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굳이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과 의문이 컸다. 하지만 5년 사이, K팝에 대한 인식이 꾸준히 향상되며 이 두 장르의 효과적인 결과물이 빛을 보고 있다. 지난 2월, SM엔터테인먼트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며 클래식 음악 전용홀인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을 가졌고, 그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꾸준히 편곡해 선보여온 작품을 더해 17곡의 오케스트라 버전 K팝 음악을 선보였다. SM사옥에서 작업을 담당하는 실무진(SM클래식스 김남영 책임)을 직접 만나, 그 상세한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엔터테인먼트사 내에 클래식 음악 레이블이 생겼다는 것이 참 생소하네요.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산하 레이블로 SM클래식스, 스크림 레코즈, 크루셜라이즈가 있고요, 그중 SM클래식스는 클래식 음악·재즈를 다루고 있습니다. 장르는 영화 OST, 월드뮤직까지도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CAO와, 현 SM클래식스 문정재 대표님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죠.
SM클래식스에서 일하는 분의 정체(?)도 궁금해요. 어떻게 엔터테인먼트 내의 클래식 장르를 담당하게 되신 건가요?
저는 부서 내에서 음악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A&R(Artist and Repertoire)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대학에선 클래식 음악 작곡을 전공했고요, 원래는 NGO 단체 내에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8년 정도 하다가, 제가 가진 전문성을 바탕으로 조금 더 확장된 범위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이곳까지 오게 됐네요.
기존의 산업 구조와 달리, 수익성이 높지 않은 분야인데 SM클래식스의 운영 목적이 무엇일까요?
올해 SM엔터테인먼트가 30주년을 맞았어요. 그간 쌓여온 SM 오리지널 IP의 우수성을 알리는, 다양한 확장의 사례가 되겠죠. 원래 SM에서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한 노래들이 많긴 했지만, 아예 편곡을 한 버전을 제공한다면 기존의 팬분들께도 색다른 청취 경험을 드릴 수 있고요. 사실 저희는 엔터테인먼트 사내 레이블로서, 저희 자체로 ‘클래식 음악 레이블’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음악 레이블이니까,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죠.
편곡할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우선 어떤 곡을 편곡할 건지 결정합니다. 물론 팬분들이 많이 듣고 좋아하는 곡들로 선정해야겠지만, 편곡 시 얼마나 효과적일지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요. 가끔은 오케스트라 편곡이 전혀 상상되지 않는 작품을 고르기도 합니다.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으로요. 여러 작곡가님의 작업을 모으는 편인데, 어려운 부탁을 드리며 열심히 작업을 하는 거죠.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기존의 클래식 음악과 비교하자면, 결과물에 대한 반응도 매우 다를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가들에게도 단순한 느낌의 편곡이 아니라, 정말 ‘연주’를 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음악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K팝 내 팬덤의 반응은 정말 좋습니다.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새로운 형태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요.
올해 8월엔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인 ‘SM클래식스 타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9월엔 일본에서 뉴 재팬 필하모닉이, 내년 2월엔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빈 심포니커가 SM클래식스의 오케스트라 곡들을 연주할 예정이라고요.
빈 심포니커는 지난 2월, 한국에서의 공연을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이 직접 참석해서 보기도 했습니다. 전통의 오케스트라들도 계속 새로운 것, 실험적인 것들에 도전하니까요. 그중 하나로 SM클래식스의 레퍼토리가 잘 맞았던 것 같고요. SM클래식스의 오리지널 IP는 앞으로도 계속 확장될 겁니다. 기존에 없던,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이 도전을 계속해나가고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일을 해나가고 있는 그 자체가,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글 허서현 기자
편곡의 비밀!
K팝이 오케스트라를 타고 ‘새로운 클래식’으로
K팝 대표 엔터테인먼트답게, SM클래식스에선 오케스트라 편곡에도 다양한 편곡자가 참여한다. SM클래식스 소속의 직원은 다섯 명이지만, 조인우· 이광일·강한뫼·강상언·김영상·이나일· 박인영·정재민 등이 그 작업에 함께하는 이들이다. 한 작품에 여러 명의 작곡가가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K팝의 관현악화는 아직 그 사례가 없다.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얼마나 적용할 지를 고민하는 것이 이들의 몫. 결국에는 “선율이 뚜렷한 음악을 어떻게 기악적으로 바꿀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작업 후 실무자로부터 ‘이 포인트나 선율은 살려주셨으면 좋겠다’와 같은 피드백을 받으면, 반영해서 함께 수정해나가는 과정도 거친다.
HOW TO LISTEN
어크로스 더 뉴 월드
지난 1월 발매된 SM클래식스 X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반. SM의 노래들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한 14개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SM클래식스 유튜브
SM클래식스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그간 서울시향과 작업한 MV들을 모두 볼 수 있다.
K-POP 무용/전통
K팝 영상물의 핫 아이템
정체성을 담은 콘텐츠를 지향하다
K팝의 예술적 위상은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내수 시장에서 소비되는 대중가요 혹은 유행의 역할을 넘어 우리나라 문화의 정체성과 수준을 증명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완성도’를 추구하게 된 것. 그중에서도 영상물은 음악과 더불어 춤, 미장센, 연출 등을 모두 보여주는 K팝의 절정이다. 공연예술의 활용은 이를 위해 영상물 곳곳에서 활발히 협업한다.
BTS의 예술 활용법

BTS ‘블랙 스완’ 아트 필름
K팝 가수로 독보적인 팬덤과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BTS는 전통을 활용한 콘텐츠에 가장 적극적이다. 2018년 발매한 ‘IDOL’이 대표적인데, 노래를 듣자마자 ‘지화자’ ‘얼쑤’와 같은 한국식 추임새가 귀에 꽂힌다. 안무에도 사물놀이·탈춤 등이 결합했으며, MV에도 한국 전통 양식이 떠오르는 세트, 북청 사자놀이 등이 등장한다. 2020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이 노래를 부르는 BTS의 모습이 방영됐는데,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을 무대로 해 한층 더 한국의 멋을 살린 퍼포먼스를 선보여 ‘레전드 무대’로 회자된다.
BTS의 각 멤버가 가진 특징도 예술과 연결된다. RM(알엠)은 미술 애호가로도 잘 알려져 있고, 슈가가 솔로 활동 예명으로 선보인 Agust D(어거스트 디)의 노래 제목은 ‘대취타’. ‘명금일하 대취타 하랍신다’라는 외침으로 시작해 전통의 요소들을 과감하게 활용한다. 지민은 부산예고 무용과에 진학해 현대무용 경험을 쌓기도 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2020년에 발매된 ‘블랙 스완’은 아트 필름으로 MV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현대무용의 대모인 마사 그레이엄(1894~1991)의 명언, ‘무용수는 두 번 죽는다. 첫 번째 죽음은 무용수가 춤을 그만둘 때다. 그리고 이 죽음은 훨씬 고통스럽다’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BTS는 이 영감을 슬로베니아 현대무용단과의 협업으로 확장했다. 엠엔 댄스 컴퍼니와의 협업으로, 아트 필름에는 BTS 멤버들이 등장하는 대신 한 편의 현대무용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
BTS 2013년 데뷔한 빅히트 뮤직 소속 7인조 보이그룹. RM·정국·제이홉·뷔·지민·진·슈가가 멤버다. ‘21세기의 비틀스’로 불리는 이들은 K팝 새로운 세대의 분기점이 됐다. 76회 유엔 총회 연설자로 설 정도로 우리나라와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의 침투력
K팝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 중 하나는 ‘칼군무’로 불리는 춤이다.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K팝 내 댄스 크루들이 가지는 영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개성 넘치는 댄스 크루들이 전통을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영상물들 또한 K팝의 일부로 소비된다.
국가유산청에서 기획한 ‘탈, 춤으로 잇다’에선, 탈춤의 재해석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중 봉산탈춤을 댄스 크루 HOOK(훅)의 리더 아이키가 표현한 영상은 K팝의 에너지와 전통이 만난 시너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에 방영된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팀 코리아로 댄스 크루의 리더들이 결성한 ‘범접’이 메가 크루 미션에서 저승사자 등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K-POP 무대
예술 장르의 실력 있는 횡단자들
극장의 동시대를 책임지는 신선한 아티스트 소개
K팝과 순수예술의 협업은 결국, 이 양자를 모두 오가는 ‘사람’에 방점이 찍힌다. K팝은 높은 완성도를 갖춘 종합예술 콘텐츠로서 소비된다. 상업 예술의 최전선에 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한 곳. 결국 다양한 예술적 요소가 이들의 작업에 영향을 주고, 그렇게 재탄생한 새 감각의 K팝 신의 전문가들은 다시 공연예술에 신선한 바람을 공급한다.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인지에 대한 정답이 없듯, 이들 영감의 원천은 순서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아트디렉터 신호승
지난 4월, 국립무용단의 신작 ‘미인’의 무대 디자인에 새로운 이름이 떠올랐다. 아트 디렉터 신호승. 자신의 비주얼 아트팀 ‘로 하우스(ROH HAUS)’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K팝 스타들이 활동하는 프로젝트에 다양한 공간을 만든다. 처음부터 세계 무대에 내세울 작품을 기획한 국립무용단의 신작에 걸맞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K팝과 관련된 대표작으론 에스파 ‘Whiplash(위플래쉬)’, 아이브 ‘해야’ MV 속 3D 작업이다. ‘Whiplash’에선 기계 장치가 느껴지는 공간을, ‘해야’에선 ‘가마’ 같은 한국적 요소를 새로운 비주얼로 재해석했다. 국립무용단의 ‘미인’에선 달을 중심으로 순환의 흐름을 표현하는 무대를 구상했다. 공간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원래 무대에 관심이 많았다”라며, “영국의 무대 디자이너 에스 데블린의 무대를 본 것이 디자인 일을 시작한 계기였다. 궁극적으로 무대에서의 비주얼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에스파 2020년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일명 ‘쇠맛’이라 불리는 강렬한 음악 스타일과 가상현실 등을 활용한다. ‘Next Level(넥스트 레벨)’ ‘Supernova(슈퍼노바)’가 대표곡이며, 카리나·지젤·윈터·닝닝이 멤버다.
아이브 2021년 데뷔,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Z세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장원영을 비롯 안유진·가을·레이·리즈·이서가 소속된 팀으로, ‘LOVE DIVE’ ‘After LIKE’ 대표곡으로 사랑받았다.
비주얼 디렉터 메이킴

메이킴 ‘장면들’
뉴욕의 디자인 스튜디오 ‘2X4’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메이킴은 2D, 3D를 모두 오가는 작업을 선보인다. ‘프라다’의 패션쇼 공간을 디자인하는 회사에서 시작해 각종 명품과의 협업부터 패션 잡지 작업, 그리고 다수의 K팝 아티스트까지 모두 그의 협업 대상이다.
지난해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의 ‘비주얼 디렉터’로 등장한 그는 축제 전체의 이미지를 구상했다. 국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활용해 포스터를 만들고, 공연 ‘장면들’의 미디어 아트를 맡아 직접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가 점점 더 극적으로 대조되는 가운데, LED 스크린부터 무대 바닥까지 역동적인 영상이 연출됐다.
세종문화회관 ‘싱크 넥스트’
‘싱크 넥스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획하는 컨템퍼러리 플랫폼으로, 2022년부터 시작해 매년 여름에 열린다. 장르에 경계가 없어서 참신한 아티스트 선정은 물론 새로운 조합들도 만나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중가요’에 속해서 활동하는 동시에 예술성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발굴이 꾸준하다.
2024년에는 싱어송라이터 ‘유라’, 2025년에는 ‘수민&슬롬’ 등 한국대중음악상 알앤비&소울 부문에서 음반상을 받은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선보였다. 2023년에는 댄서 모니카가 안무를 맡고, 댄스팀 프라우드먼이 참여한 공연도 선보였다. K팝 그룹 뉴진스의 음악을 다수 프로듀싱하며 화제가 되었던 프로듀서 250도 2023년 싱크 넥스트의 라인업 중 한 명이었다. “K팝이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지금, ‘그래서 진짜 너희만의 음악은 뭔데’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250의 음반을 들려주면 된다”(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권석정)는 평으로 설명되는 인물로, 우리 고유의 정서부터 최신 트렌드까지를 모두 오가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뉴진스 2022년 하이브 산하 레이블 어도어 소속의 5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민지·하니·다니엘·해린·혜인이 멤버로, ‘뉴트로 감성’으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Attention’ ‘Hype Boy’ ‘Ditto’ ‘Super Shy’ 등 다수의 대표곡을 발표했으나, 2024년부터 소속사 갈등을 빚고 있다.
글 허서현 기자
STEP FOUR
문화 교류와 K팝의 역할
한류의 최전선에 나서다
이제 K팝은 콘텐츠 생산의 중심이자, 국가 교류의 효과적인 아이템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을 중심으로 K팝 콘텐츠의 활성화 방법과 해외 교류 현황을 알아보자

K-엑스포 캐나다
2000년대 중반까지, ‘한류’라는 단어에서 먼저 연상되는 것은 드라마였다. ‘겨울연가’ ‘대장금’ 등이 끼친 영향력을 설명하기에 쉬운 단어였다. 당시는 TV가 중요한 전달 매체였고, 아시아권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K팝의 강세가 시작됐다. 무엇보다 개인용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SNS의 활용이 활발해지면서 K팝 특유의 팬덤 문화가 확산했다. 여기에 가수 싸이 ‘강남스타일’이 기폭제 역할을 하면서 한류는 이른바 ‘한류 3.0’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흐름의 변화를 이끄는 K팝을 따라 예능·패션·웹툰·게임까지 범위가 확장됐다.
한류 4.0으로 불리고 있는 지금의 K팝 시장을 한 번 더 끌어올린 것은 단연 BTS였다. 2020년대, 전 세계를 ‘아미(BTS의 팬덤 이름)’로 만들었던 이들의 영향력은 오늘까지 유효하다. K팝의 성공 흐름이, 국제 교류의 발전 가능성을 닦는 시초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K팝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교류의 최전선에 선 K팝을 따라 한국의 문화 교류 실태를 따라가 보자.
세계가 보는 K팝의 얼굴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은 ‘해외한류실태조사’를 통해 한류에 대한 각 국가의 인식과 이용 현황을 조사한다. 2003년에 출범한 이 기관은,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국제문화교류진흥 전담기관으로 운영된다. K팝을 통한 교류는 물론 드라마·예능·영화를 비롯, 웹툰·게임·음식까지 교류 전반을 아우른다.
진흥원의 가장 최근 조사(2024)에 따르면, 해외 수용자들이 한국에 대한 연상 이미지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을 K팝(17.2%)이 차지한다. 음식·드라마·제품·뷰티가 그 뒤를 잇는다. 음악 콘텐츠에 대한 경험률이 가장 높은 국가는 인도네시아(90.2%). K팝이 과거에 소수의 마니아가 좋아하는 장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중적인 인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50%에 가깝다. 또한 ‘가장 좋아하는 해외 음악’으로 미국 음악 다음 한국 음악이 꼽힌다. ‘팬덤’이 아니어도 즐기는 문화라는 점은 K팝에 대한 인식 변화이자, K-컬처에 대한 가능성을 확장한다.
K팝에 대한 호감 요인으로 아시아/태평양은 ‘외모나 스타일이 매력적이어서’의 응답률이 높은 데 비해 중동은 ‘가사가 전달하는 뜻이 좋아서’를 평균보다 높게 선택한다거나, 호감 저해 요인에 대해 유럽이 ‘음악 장르가 획일적이어서’를 많이 대답했다는 분석 등도 흥미롭다. 10명 중 9명이 온라인/모바일로 음악을 접하며, 5개 대륙 모두에서 ‘유튜브’가 가장 많이 사용된 플랫폼이다.
진흥원에서 제공하는 모든 조사와 연구는 홈페이지(한류조사연구아카이브)에서 전부 확인할 수 있다. 음악 외에도 영화나 음식 등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가진 해외 수용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올해 진흥원이 주최한 한류 종합 축제 ‘2025 마이케이 페스타’(6.19~22)에는 4만 6천여 명의 한류 팬이 모여들었다. K팝 콘서트를 필두로 K-콘텐츠 산업전시, 수출 상담회, 글로벌 컨퍼런스 등 한류의 영역을 확장하는 축제다. 올해 축제의 첫 포문을 연 마이케이 페스타는 내년 6월에도 개최를 예정하고 있다.
교류로 산업의 미래를 연다

K-뮤직 나이트
한편, 2009년 5개 기관을 통합하며 설립된 한국콘텐츠진흥원도 K팝을 활용한 사업에 앞장서는 기관이다. 올해 8월만도 미국과 북미에서 K팝 무대가 이어졌다. 링컨센터에서 주최한 여름 야외 공연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며 ‘2025 K-뮤직 나이트’(8.6) 공연이 열렸고, 연관 산업과 함께 북미 시장 공략을 목표로 ‘2025 K-엑스포’(8.9~12)가 캐나다에서 열렸다. K팝 공연을 앞세워 진행된 엑스포는 음식 교류는 물론, 기업 간의 실질적 수출 상담회가 활발히 진행됐고, 현장을 찾은 누적 방문객은 3만 1,200명을 기록했다. ‘K-엑스포’는 9월에 스페인, 11월에 아랍에미리트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 고유의 콘텐츠 IP를 발굴, 육성하는 동시에 산업 환경 조성에 대한 지원을 계획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는 K팝의 미래 발전을 유지하기 위한 사업도 활발하다. 지난 6월에 주최한 ‘2025 콘텐츠 산업포럼’에서는 ‘Next K’를 향한 다양한 콘텐츠 산업들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진행됐다. K팝의 글로벌 마케팅·사업 기획에 대한 발제뿐 아니라, K팝의 팬덤을 위한 신규 플랫폼 전략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
글 허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