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 Bayreuth Festspielhaus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8월 18일 10:05 오전

WORLD HOT | GERMANY World of the Theater

 

Bayreuth Festspielhaus

개관 150주년 맞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혁명가 바그너가 꿈꾼 오페라의 성지, 150년의 영광과 위기를 지나 다시 미래를 묻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혁명가였다. 1849년 5월 드레스덴, 당시 왕이던 아우구스트 2세의 제국 헌법 거부로 시민들이 무장봉기하자, 궁정악장은 귀족제 폐지를 외치며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약 일주일 만에 봉기가 진압되자 궁정악장 앞으로 지명수배령이 떨어졌다. 리스트가 마련해 준 위조 여권으로 스위스로 달아난 바그너는 이후 10년 넘게 독일 땅을 밟지 못했다.

망명 중 그는 또다른 혁명을 준비했다. ‘예술과 혁명’(1849) ‘미래의 예술작품’(1850) 등을 집필하며 기존 오페라 산업을 고발했다. 이때의 구상은 20여 년 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으로 실현됐다. 극장은 1876년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프로그램으로 한 첫 축제와 함께 문을 열었다. 드레스덴에서 실패한 혁명은, 외딴 소도시 바이로이트에서 오페라 혁명으로 되살아났다.

 

 

박스석을 없애고 오케스트라를 숨기다

오늘날 인구 7만의 바이로이트를 택한 것부터 하나의 선언이었다. 바그너에게 당대 대도시의 오페라는 귀족들이 발코니석에서 서로를 구경하는 사교와 오락의 장에 불과했다. 이런 ‘오페라 비즈니스’로부터 자기 작품을 떼어내려면, 다른 볼거리라곤 없는 소도시야말로 최적의 입지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일상을 멈추고 연극에 몰두했던 것처럼, 그는 바이로이트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와 오직 작품에만 며칠을 바치는 순례의 성지가 되길 바랐다.

지정학적 이점도 있었다. 바이로이트는 후원자 루트비히 2세의 바이에른 영토 안에 있어 막대한 자본을 지원받는 데 유리했다. 동시에 궁정과 언론이 간섭하는 뮌헨에서는 충분히 떨어져 있어 혁명을 실현할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72년, 자신의 59번째 생일에 주춧돌을 놓고 4년 뒤 축제극장이 완성됐다. 객석은 고대 원형극장처럼 계단식으로 설계됐고, 말발굽형 박스석을 없애 약 2천 석 모두가 무대만 바라보도록 했다. 여기에 당대로서는 혁명적이었던 객석 암전을 더해 극장 안 사교의 가능성을 철저히 제거했고, 모든 관객이 평등하게 무대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대 신화와 전설, 영웅담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바그너의 총체 예술에 흠뻑 빠질 시간이 도래했다. 무대 위 환상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바그너는 오케스트라마저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객석과 무대 사이에 굴을 파고, 많게는 120여 명을 수용하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앉혔다. 여섯 단의 층이 무대 아래로 깊숙이 파고들고 그 위를 나무 차양으로 덮어, 지휘자의 손끝조차 관객에게 보이지 않게 했다. “기술 장치가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는 역겨운 방해”를 없애고 관객을 “열광적인 투시의 상태”로 데려간다는 그의 논리는 이렇게 실현되었다.

➊ 축제 극장 전경

➋ 극장 내부

 

 

 

순례의 성지에서 히틀러의 궁정극장까지

1876년, 첫 개막에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를 비롯해 리스트·브루크너·그리그·차이콥스키·니체 등 굵직한 이름들이 바이로이트를 찾았다. 이토록 열띤 주목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는 대참사였던 탓에 다음 축제는 6년 뒤에나 열렸다. 1882년, 바그너가 극장의 음향을 고려해 작곡한 유일한 작품 ‘파르지팔’이 초연되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축제가 됐다.

바그너가 떠난 뒤, 극장은 성지로 거듭났다. 미망인 코지마 바그너(1837~1930)는 남편의 작품들을 성물처럼 보존했고, 1913년까지 ‘파르지팔’의 독점 상연권을 쥐어 ‘순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얻었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코지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1923년부터 가족과 가까웠던 히틀러에게 축제극장을 내주었고, 바이로이트는 작가 토마스 만의 표현대로 ‘히틀러의 궁정극장’이 된 것이었다. 축제의 단골손님이자 최대 후원자였던 히틀러는 2차 대전 중 극장에 전시 축제를 올렸고, 나치 조직 ‘기쁨을 통한 힘(KdF)’은 객석을 부상병과 군수노동자들로 채웠다.

전후의 재발명은 손자들의 몫이었다. 1951년 빌란트와 볼프강 바그너 형제가 극장을 다시 열었다. 특히 빌란트는 장식이 많은 무대장치를 걷어내고 텅 빈 공간과 빛만 남겼는데, 이른바 ‘신(新) 바이로이트’라 불린 이 미학은 세계 연극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나치와의 과거를 추상화된 예술로 지워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1966년부터 40여 년간 극장을 이끈 볼프강(1919~2010)은 문제적 연출가들을 불러들이는 데 과감했다. 100주년이던 1976년,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하고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반지’ 시리즈는 세기의 명작으로 남았지만, 사실 야유 속에 막을 올렸다가 5년 만에 걸작으로 공인되었고, TV 중계를 타고 전 세계 거실로 유통됐다. ‘링 사이클’ 티켓 한 장을 위해 10년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했던 이 시기는 바이로이트 신화의 정점이었다.

2015년부터 극장을 이끄는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1978~)의 시대는 ‘개방’으로 요약된다. 시내 광장의 공개 상영과 스트리밍 등으로 관객층 확장에 힘쓰는 한편, 2017년에는 축제 사상 최초 ‘유대인’ 연출가 배리 코스키를 기용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담긴 반유대주의를 정면으로 비틀었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풍경도 바뀌었다. 2021년 옥사나 리니우가 축제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선 데 이어, 2024년에는 여성 지휘자가 남성보다 많았고 시모네 영이 ‘여성 최초’로 ‘링 사이클’을 지휘했다. 2023년에는 AR 안경을 쓰고 관람하는 ‘파르지팔’로 테크놀로지 실험의 물꼬를 텄다.

15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축제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이어진다. 축제 사상 처음으로 ‘리엔치’(지휘 나탈리 슈투츠만)가 무대에 오르고, AI 영상으로 채워지는 틸레만 지휘의 새 ‘링 사이클’을 만날 수 있다.

➌ 오케스트라 피트 ©Enrico-Nawrath

➍ ‘반지’ 사이클을 기다리는 관객들

바이로이트 신화는 계속될까

바이로이트 신화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있다. 스트리밍으로 언제든 공연을 볼 수 있고 유럽의 여름 축제들이 관객을 두고 경쟁하는 시대에, 에어컨 없는 공연장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대여섯 시간을 버텨야 하는 이 ‘보호 문화재’는 더 이상 매진을 장담하지 못한다. 닿을 수 없는 성지였던 곳은 이제 패키지 할인 혜택으로 관객에게 구애하는 처지다.

150년 된 목조 건물은 총 1억 7천만 유로(한화 2,900억 원) 규모의 대형 문화재 보수 사업 대상이 되었다. 재정 압박은 무대 위까지 올라왔다. 당초 올해 열한 작품 상연이 공언됐지만 예산 문제로 일곱 작품으로 축소됐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의 혁명으로 태어나, 전시 축제로 전락한 위기를 후대 예술가들의 혁명으로 극복해 왔다. 바뀐 시대가 바이로이트에 묻는다. ‘지금 필요한 혁명은 무엇인가?’

박찬미(독일 통신원) 사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PERFORMANCE INFORMATION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8월 3~26일 ‘리엔치’ 8월 1~16일 ‘니벨룽의 반지(Ring 10010110)’
8월 6~23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8월 10~25일 ‘파르지팔’

‘니벨룽의 반지-하이라이트’
8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4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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