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9월 21일 1:00 오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오디세이

신화 속 인간, 인간이라는 신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음악 루트비히 괴란손

출연 맷 데이먼,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로버트 패틴슨 외

 

[OST] 음악감독 루트비히 괴란손 | Back Lot Music

압도적인 이미지의 스케일에 신비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루트비히 괴란손(1984~)의 음악이다. 기존 오케스트라 편성의 전형성을 벗어나 달라는 감독의 주문에 괴란손은 기원전 5~6세기의 고대 악기 아울로스와 리라, 그리고 35개의 청동 징을 조합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거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완성한다. 청동의 차갑고 육중한 울림으로 구현된 오디세우스의 테마, 그리고 팽팽한 활시위 소리와 감각적으로 교차하는 리라의 연주는 고대의 음향과 현대적 사운드가 어우러지는 최상의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SET-LIST
① Zeus’s Law ② Ithaca ③ Penelope ④ Telemachus ⑤ Calypso/Agamemnon ⑥ Let’s Go Home ⑦ Cyclops ⑧ Menelaus, Husband of Helen ⑨ Troy ⑩ Laestrygonians ⑪ Circe (feat. Samantha Morton) ⑫ Hades ⑬ Loyal to the Future ⑭ Sirens⑮ Apollo’s Island ⑯ 7 Years ⑰ Another Name ⑱ Bringing It All ⑲ Welcome Home Stranger ⑳ Odysseus ㉑ The Trial of the Bow/Vengeance ㉒ Chasing the Escaping Sun ㉓ When I’m Home

 


 

일상의 작은 선택 앞에서도 번번이 후회하고 좌절하곤 한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삶이 조금은 더 또렷한 얼굴로 다가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작은 오해에 마음을 베이고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비겁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모나고 아프고 때로는 하염없이 약해질지라도, 완벽하지 않기에 헤매고 상처받으며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끝내 인간이라는 존엄함만은 지켜내려 애쓰는 삶. 어쩌면 그 간절한 번민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신화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는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 분)와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 분)가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포세이돈을 비롯한 신들의 분노로 거친 폭풍과 장애를 만나면서 10년간의 표류를 겪는다. 그 사이 왕의 부재를 틈타 왕위를 노리는 안티노오스(로버트 패틴슨 분)는 페넬로페와 왕국을 집요하게 압박하는 와중에, 텔레마코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기원전 8세기경 서양 문학과 문명의 서막을 열었던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지난 3천 년 동안 수많은 예술의 근원이자 원천이었으나, 현대의 예술 안에서 그 본질적인 웅장함과 철학적 정수를 완벽하게 시각화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란(1970~) 감독은 이 거대한 고전을 영화화하면서, 신화의 외피를 그저 답습하기보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신화 속 직선적 시간 순서를 해체하고 회상 장면과 병행 서사,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의 층위가 얽히는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영화적 긴장감과 밀도를 높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에서 보여준 인물의 도덕적 균열과 ‘인셉션’(2010)의 다층적 시공간, 그리고 ‘덩케르크’(2017)에서 보여준 시한폭탄 같은 서스펜스를 집대성한 것 같다.

작품은 신화를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서 결국 ‘사람’을 발견하고 사람의 가치를 발견한다. 감독에게 오디세우스는 신에 가까운 영웅이 아니다. ‘오디세이’ 속의 그는 불안과 번민,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좌절하는 등 흠결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늘 자신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해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결국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 반성을 통해 다시 사람을 살게 만든다.

신화 속 수호신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의 도덕성과 지혜를 일깨워주는 선량한 존재로, 오기기아섬에서 영원한 삶을 약속하며 그를 붙잡아 두는 바다의 여신 칼립소는 인간의 고독과 사랑의 비극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20년의 세월을 견뎌내는 아내 페넬로페와, 연약한 소년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아들 텔레마코스의 서사가 어우러지며 ‘오디세이’는 거대한 신화를 넘어 압도적이고도 친밀한 영화적 서사시로 완성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신화를 마주하지만, 결국 가슴 깊이 울림을 남기는 것은 신의 전지전능함이 아니라 그 신화의 그늘에서 번민하고 좌절하며 끝내 살아남는 인간의 얼굴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려낸 아득한 신화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마주할 때, 픽션은 비로소 자신의 고백이 된다.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 신화를 만들다

놀란이 20년 넘게 가슴속 깊이 품어온 숙원의 프로젝트 ‘오디세이’는 “오늘날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영화적 경험의 최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감독이 던지는 가장 장엄하고도 확신에 찬 대답이다. 가상의 디스플레이와 디지털 CG 판타지가 범람하며 영상의 실재감이 희미해진 지금, 놀란은 다시 한번 압도적인 아날로그 영화의 위엄을 증명한다.

그는 높이 10.7m에 달하는 실물 트로이 목마와 실제로 거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제작된 대형 선박 세트를 실제 바다 위에 띄웠다. 여기에 그리스·이탈리아·아이슬란드·스코틀랜드의 웅장한 자연 속에서 필름을 돌리는 ‘인 카메라(In-Camera)’ 기법을 고집하며, 아득한 고대의 신화를 오늘날의 관객이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현실로 만들어냈다.

‘오디세이’는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편을 15/65mm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는 대기록을 세우며 영화적 기술의 한계를 다시 한번 경신했다. 그동안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는 거대한 크기와 거친 구동 소음 탓에 인물의 미세한 대사를 담아내야 하는 장면에서는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던 중 놀란의 오랜 동반자인 호이트 판 호이테마 촬영감독이 진동과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인 차세대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를 직접 개발했고, 전편 동시녹음이라는 불가능의 영역을 가능의 영역으로 이끌어냈다.

또한 트로이 함락 시퀀스에서는 ‘파이라헤드론’(삼각형 회로기판에 육각형 배열의 LED 셀을 촘촘히 배치한 특수 조명 장치)을 도입하여 어둠을 가르는 횃불의 생생한 붉은 질감을 정교하게 스크린에 담아냈고, 거대한 포세이돈의 분노가 몰아치는 풍랑 시퀀스에서는 화면 전체를 집어삼키는 프레임 확장을 선보였다. 91일간의 촬영 동안 사용된 210만 피트에 달하는 아이맥스 필름은 필름 영화 특유의 아날로그적 깊이감을 자아낸다.

우리의 내면을 향한 항해

어두운 암전 속에서 마주했던 거친 바다와 묵직한 청동의 잔향,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관객들의 가슴에 새겨진다. 광활한 아이맥스 프레임 안에서 수많은 시련과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외롭고도 집요한 항해. 172분 동안 펼쳐진 이 장엄한 서사시는 놀란 필모그래피의 정점이자, 영화사에 영원히 각인될 하나의 또 다른 신화가 된다.

‘오디세이’는 거대한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이야기 깊숙한 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을 스크린 위에 정교하게 되살려낸다. 영웅과 신의 역사가 아닌, 불완전하기에 눈물겹고 지독하게 집착하기에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을 찾기 위한 긴 여정. ‘오디세이’는 신화를 딛고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인간다움을 향해 항해를 시작해 보자는 놀란 감독의 제안이자 질문이다. 당신은 인간으로서 존엄한 존재인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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