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삶의 모든 계절에 흐르는 음악처럼

©강태욱
영국 맨섬의 바다 내음을 맡으며 자란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자연은 소리였고, 음악의 정원을 채우는 풍경이었다. 그런 그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향기가 묻은 두 개의 ‘사계’를 안고 영국의 악단과 함께 돌아왔다. 그가 연주하는 계절의 노래를 따라, 작품 속에 깃든 자연과 풍경,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총괄 장지현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
INTERVIEW 한수진이라는 자연 _양경원 | RECORDS 자연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담아서 _장지현
INTERVIEW
한수진 이라는 ‘자연’
자유롭지만 향기롭게,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야기

©강태욱
눈을 뜬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툭 밀어 올리면, 세상은 내게 별걸 다 가르쳐 준다. 클래식 음악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긴 곡도 1분, 혹은 2분 안에 핵심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모든 게 다 압축되고 요약될 수 있다고 달콤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작은 노력과 비교하면, 음악회에 가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미리 표를 예매하고, 정돈된 복장으로 집에서 먼 곳으로 향한다. 두 시간여, 전혀 모르는 사람의 옆에 앉아 옛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 일은 고되다. 그 일이 의미가 있으려면 음악은 아름다워야만 한다. 지난 10월, 한수진은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ECO)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찾아 국내 여러 무대를 누볐다. 통영국제음악당(24일)에서 서울 롯데콘서트홀(30일)까지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D장조와 로시니의 현악 소나타 1번, 브리튼의 ‘단순 교향곡’이 저마다 다른 음악의 풍경을 펼쳤고, 그 끝에서 한수진의 바이올린은 비발디의 ‘사계’를 노래했다.
생생하고 매끄럽게 만들어 간 ‘사계’
10월 24일부터 30일까지,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ECO)와 함께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곡을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ECO와 녹음한 음반도 9월 발매했지요?
네. 제게 이 곡은 무척 특별한 곡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가 이 곡을 늘 틀어두셨거든요. 제 어린 시절의 ‘소리 풍경’안에는 ‘사계’가 들어있지요. 이 곡의 특별함은 음악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아요. 저는 제 음악에서 자연이 느껴지기를 늘 바라는데, ‘사계’에는 그게 잘 담겨있어요. 봄의 새소리, 여름의 천둥소리, 가을의 낮잠, 겨울의 차가운 눈을 귀로 들을 수 있죠. 비발디는 곡에 함께 적어둔 소네트로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요. 이미 핀커스 주커만(1948~), 나이젤 케네디(1956~) 등 명 바이올리니스트들과 함께 비발디 ‘사계’를 녹음한 바 있는 ECO와 작품을 녹음하는 과정에서도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이번에 저는 지휘자의 역할까지 한 셈이었는데, 악단의 수석들은 물론 모든 단원이 저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1976~)의 전담 프로듀서이기도 한 사이먼 킬른 또한 많은 경험에서 나온 조언으로 녹음 과정을 매끄럽게 만들어 주었고요.
ECO와의 녹음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나흘간의 녹음에서 어려웠던 순간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나요?
물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나흘로 예정된 녹음 일정을 듣고 킬른은 “아마 사흘째에 위기가 올 거야”라고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그날이 오니 정말 갑자기 모든 게 마음에 안 들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더군요. 그때 킬른이 “지금이 바로 처음에 말했던 그 시기랍니다. 현재 아주 좋으니, 진정하고, 리허설을 시작할 때 추구했던 그 방향으로 가면 돼요”라며 저를 잘 다독여줬어요.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연주자들의 마음까지 잘 알아주는 프로듀서와 함께한 것도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내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 음반에는 비발디 외 피아졸라의 ‘사계’도 들어있죠?
네. 피아졸라의 ‘사계’ 역시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곡입니다. 피아졸라는 바흐를 깊이 존경했고, 나디아 불랑제(1887~1979)의 제자이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탱고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면모도 갖춘 작품을 쓴 작곡가입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영향도 받았다고 해요. 굉장히 학구적인 사람이지요. 그런 피아졸라의 정체성 위에 ‘누에보 탱고’, 즉 춤을 추기 위한 반주 음악이 아닌, 무대 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예술 음악으로 재탄생한 탱고의 자유로움이 드러나게끔 연주하려 했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남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들어왔는데,
그럼에도 더 독창적으로 음악을 해석하게 되어 오히려 축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더 깊어지는 해석의 세계
지난 9월 10일 독주회(금호아트홀 연세)에서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2번과 파르티타 2번을 선보였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작품들을 연주할 때 무엇을 가장 깊이 생각하나요?
저는 바흐뿐 아니라 어떤 작곡가의 작품이든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닌, 그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의 진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거든요. 어떤 학자들은 바흐의 소나타 1번을 크리스마스, 예수의 탄생과 관련지어 이야기합니다. 음악학자 헬가 퇴네는 바흐의 파르티타 2번 중 ‘샤콘’에 숨겨진 상징과 구조에 관해 많은 연구와 주장을 하기도 했고요. 어릴 적에 가르침을 받은 펠릭스 안드리예프스키(1936~) 선생님 또한 그런 구체적인 장면을 많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소나타 2번의 푸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발걸음, 소나타 3번은 부활 이후 오순절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요. 선생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의 목소리와 예수님이 앞으로 당하실 고통을 예상하는 부분을 소나타 1번 중 ‘아다지오’에서 언급하셨는데, 이 ‘고통’을 상징하는 음이 소나타 1번뿐 아니라 바흐의 다른 무반주 작품에도 볼 수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아다지오’에서는 첫 화음의 소리를 한꺼번에 내지 않더군요.
바로크 주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기도 하고, 베이스를 좀 더 선명하게 전달하고자 선택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맨 아래 음을 먼저 하고 두 음, 두 음을 내는 방식이죠. 말하자면 첫 프레이즈의 베이스를 부각하는 것입니다. 청자의 입장에서도 이 음들을 한꺼번에 듣는 것과 베이스만 먼저 따로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첫 화음을 아주 무겁게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을 첫 프레이즈의 시작점으로 생각해요. 그 부분에 너무 힘을 주면 오히려 첫 프레이즈의 라인이 사라질 수 있기에 주의하죠.
다른 작곡가의 곡들도 다방면으로 연구하겠죠?
네. 예를 들면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이올린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을 연주하며 시작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깊은 어두움 속에서 시작되는 창조의 순간 같은 것이 느껴져요. 저는 선천적으로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남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들어왔는데, 그럼에도 더 독창적으로 음악을 해석하게 되어 오히려 축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0대 초반에는 턱관절 이상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이나 연주를 쉬어야했죠. 그렇지만 그런 모든 고난을 통해 제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제가 받은 음악이라는 선물, 또 그 선물을 나누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념을 실천하며 이어가는 인연
2009년부터 부산 가덕도의 아동양육시설 소양무지개동산(이하 무지개동산)에서 봉사를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특히 원장님께서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굳게 믿는 분이셔서, 무지개동산의 아이들은 전부 악기를 연주하게끔 하세요. 한 번은 연주와 연습을 하면서 일주일 정도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적도 있어요. 그 후에도 연주회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함께 연주하곤 했는데, 올해에는 8월 20일에 무지개동산 개관 80주년 기념 콘서트가 있어 부산시민회관에서 소양챔버오케스트라, 소양서포터즈합창단과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제가 20대일 때 처음 만난 친구들이 이제 20대가 되어 잘 자라준 모습을 보니 너무나 감사했죠. 심지어 바이올린 전공으로 독일에서 유학까지 한 학생도 있었어요. 물론 음악을 전공하는 게 아니더라도, 음악을 사랑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음악을 통한 나눔이 또 다른 현장으로도 이어졌다고요?
네. MBC가 지난여름에 중증 장애인 연주단체 ‘모두스(MODUS)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는데, 그곳에서도 단원들을 지도했어요. 2026년 1월부터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어요. 창립 20주년 기념연주회에도 참여해,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선생님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첼리스트 이정현 양과 2중주로 호흡을 맞출 예정이지요.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싶은 꿈도 가지고 있다고요?
맞아요. 이건 제가 어린 시절부터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필요성을 크게 느끼는 부분이기도 해요. 물론 한국에서도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수업 등으로 다양한 악기를 접하고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자신의 악기만 연습하고 레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악기와 상호작용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래나 합창과 관련된 교육도 더욱 강화되었으면 하고요. 또, 전공생을 포함해 음악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이 악보나 테크닉 뿐 아니라 자연에서 영감을 얻거나, 문학과 책을 통해서 시대와 작곡가, 더 넓게는 사람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의 성장 앨범

외할머니께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는 어린 한수진

방학 때마다 뉴욕 스튜디오로 불러 특별 가르침을 주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2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안나 추마첸코 교수

퍼셀 음악 학교 설립자 로즈마리 라파포트와 함께

런던왕립음악대학 시절의 스승 안드리예프스키에게는 올바른 악보해석력을 배웠다

크론베르크 실내악 페스티벌,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와 함께
지금의 한수진을 만든 스승들
인터뷰에서 펠릭스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이죠. 굉장히 학구적인 분이에요. 책도 정말 많이 읽으시고요. 어떤 시대의 악보에 적힌 기호의 뜻에 얽힌 지식도 전달해 주셨고, 작곡가나 시대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주셨죠. 예를 들어 쇼스타코비치나 차이콥스키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에는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나 사회상을 정말 생생하게 알려주셨어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셔서 1960~1970년대까지 소련에서 연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신 분이라, 그때 직접 들은 이야기나 겪으신 일들도 전해주셨어요. (필자 주: 현악 전문지 ‘스트라드’에 따르면, 예후디 메뉴인은 소련을 떠난 안드리예프스키가 이스라엘을 거쳐 스위스의 메뉴인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마치 “러시아 핵물리학자가 노하우와 정보를 전부 가져다준 격”에 비유하기도 했다) 퍼셀 음악 학교를 다녔던 시기인 10살부터 18살까지 스승이셨던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은 당시 런던왕립음악대학 교수셨기에, 매주 레슨을 멀리 런던으로 가서 받았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곡들을 쭉 적어서 그 순서대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실 정도로 제 취향도 존중해주셨어요. 선생님께 배우며 도전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역시 제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요. 선생님께서는 아흔이 훌쩍 넘으신 지금도 명예교수로서 소수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크론베르크 아카데미(국제 솔로이스트 과정)에서는 아나 추마첸코(1945~)를 사사했습니다.
추마첸코 선생님과의 인연도 참 특별해요. 제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당시 300명 정도의 학생이 선생님께 배우고 싶어 대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제 콩쿠르 영상을 보시고는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대요. ‘레슨을 한번 해주시려나 보다’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그 연이 이어져 2년 동안 레슨을 받게 되었죠. 추마첸코 선생님은 레슨 때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셨어요. 가만히 제 연주를 듣고 계시다가, “잠깐, 그 음을 좀 길게 해볼래?”하고 아주 작은 한 음이나 짧은 패시지를 바꿔주셨죠. 그러면 그 하나의 디테일로 인해서 프레이즈 전체가 확 살아나곤 했어요. 선생님께는 그런 작은 디테일의 상징성에 대해 크게 배웠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도 인연이 깊다고요?
정경화 선생님께도 고마운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저를 오페라 공연에 데려 가주시기도 했고요.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드레스와 경매에서 구한 활도 선물해 주셨어요. 그 활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옥스퍼드대에 다닐 때부터 방학 때마다 뉴욕에 있는 스튜디오에 와서 머물게 하셨어요. 어떤 날은 연습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문을 두드리시더라고요. “거기 다시 해봐.” 하시면서요. 한동안 두통이 사라지지않아 말씀드렸더니 “고기를 안 먹어서 그렇다”라며 스테이크도 직접 구워주셨고요.(웃음) 당시에 선생님께서는 손 부상 때문에 고통이 상당히 심한 상태라고 들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매일 연습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퍼셀 음악 학교 후원자 찰스 3세와 함께
음악으로 가꾼 영국식 정원
음반 작업과 공연을 함께 한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ECO)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죠.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초대 후원자를 맡았고, 1977년부터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후원을 받는 악단입니다. 영화 ‘어톤먼트’나 ‘오만과 편견’ 등 사운드트랙 녹음에도 참여했고요. 함께 하는 공연의 전반부에선 이들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K136, 로시니 현악 소나타 1번, 브리튼 ‘단순 교향곡’을 들을 수 있죠?
ECO가 굉장히 뛰어난 연주를 들려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차르트 특유의 투명하고 생명력 넘치는 사운드를 잘 표현할 것이라는 기대도 되고요. 로시니의 현악 소나타도 제가 어릴 때부터 무척 좋아했던 곡이에요. 흐린 날 들어도 이탈리아의 햇살을 한가득 느끼게 하는 곡이거든요. 로시니가 향후 써 내려갈 오페라에 대한 단서도 들어있고요. 브리튼 ‘단순 교향곡’은 작곡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는 물론, 따뜻하며 영국적인 색채가 담겨 있어 ECO와 딱 맞는 곡이죠.
‘영국적인 색채’란 무엇일까요?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요. 예를 들면 브루흐의 곡에서도 그런 영국의 분위기가 느껴져요. 브루흐가 한동안 영국에 살았잖아요. 엘가도 마찬가지고요. 영국 사람들은 자연을 매우 중시해요. 자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자국의 자연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거든요. 작은 정원 하나를 가꾸는 것도 영국인들에게는 사명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영국의 자연이 ‘영국적’이라는 표현 안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ECO의 연주를 들으시면 그런 자연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12월에는 거암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신수정과의 기획 공연이 예정되어 있죠?
그렇습니다. 공연 날인 12월 5일은 모차르트의 서거일이고, 내년은 베토벤 서거 200주년이기도 해요. 그래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두 곡과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을 연주하며 그들의 대화처럼 공연을 구상했어요. 베토벤의 소나타 10번은 2020년부터 2021년까지 피아니스트 김태형(1985~)과 함께했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 사이클 중에도 유난히 여운이 길게 남아서 ‘얼른 재회해야겠다’ 생각했던 곡이에요. 마침 신수정 선생님께서도 애정하는 곡이라고 하셔서, 이번 연주가 더 기대됩니다. 선생님과는 2023년 대한민국예술원 젊은예술가상을 받은 후 올랐던 대한민국예술원 음악회를 비롯해 여러 연주에서 함께 했어요.
요즘에는 유튜브 등에서 영상으로 음악회를 접하는 경우도 많고 음반으로도 충분히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꼭 공연장에 가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요. 제 연주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만약 음반으로 ‘사계’를 들으셨다고 해도 녹음은 1년 전에 한 것이니까 지금의 오케스트라와 저는 모두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겠죠. 또, 한국이라는 나라의 공기와 온도까지, 영국과는 모든 게 다르겠죠? 공연장에서는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라이브 버전이 탄생한다는 것 또한 매력이죠. 그리고 공연장만의 어쿠스틱(음향)이 따로 있잖아요. 그 어쿠스틱이 또 하나의 악기가 되고, 그 악기 안에서 또 다른 ‘사계’가 나올 것으로 생각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해 더욱 특별하고 즐거웠던 ‘객석’ 표지 촬영 현장 ©강태욱
흔히 프랑스식 정원과 대비되는 영국식 정원의 특징을 자연스러움과 야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다른 정원들처럼 정성을 들였지만, ‘너무 꾸민 듯하지 않은’ 담박한 멋이 핵심이다. ECO와의 ‘사계’ 녹음에서도 ‘지나치게 매끈했던’ 첫 테이크보다, 더욱 생생한 연주처럼 들리는 녹음을 선택했다는 말처럼, 한수진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자로 잰 듯한 반듯함보다, 어쩌면 장미가 흐드러진 영국식 정원 같은 자연의 음악을 전달하는 것. 매번 다른 장소, 다른 앙상블에서도 그녀가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은, 어느새 담장을 넘어 자유로이 퍼져 나가는 그 향기 때문은 아닐까.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강태욱(Workroom K)·한수진(제공)
한수진(1986~)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고, 여덟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퍼셀 음악학교·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했고,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국제 솔로이스트 과정을 거쳤다. 2001년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했고, 대한민국예술원 젊은 예술가상(클래식 음악 부문)을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 외교부 문화교류위원회 클래식 음악 분야 대표 및 전문 연주자로 활동 중이며, 1666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한다.
PERFORMANCE INFORMATION
김민/한국페스티발앙상블
11월 27일 오후 7시 서울아트센터 도암홀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협연 한수진·김민)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외(협연 한수진·이정현)
한수진 바이올린 리사이틀(피아노 신수정)
12월 5일 오후 4시 거암아트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570·378,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RELEASED ALBUMS
자연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담아서
자연과 계절에 관한 특별한 기억과 영감을 담은 한수진의 음반들
2001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이후 크론베르크 아카데미를 거쳐 전문 연주자로 거듭난 지금까지, 한수진은 수많은 음반으로 자신만의 음악적 발자취를 남겨 왔다. 교육 활동의 일환으로 참여한 프로젝트부터 한수진의 가장 개인적인 음악 이야기를 담은 음반까지, 그녀의 발걸음이 세상 곳곳에 다양하게 닿은 만큼 그간 쌓아 온 음반의 내용도 풍성하다.
한수진이 오랜 시간 담아 온 ‘자연’에 관한 특별한 기억과 영감을 담아 2026년 9월 25일 발매한 음반이다. 1725년, 안토니오 비발디는 ‘조화와 창의의 경쟁’을 출판했고, 열두 개의 협주곡 중 첫머리를 이루는 ‘사계’는 이후 서유럽 전역의 작곡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각 곡에는 비발디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소네트가 붙어 있고, 다소 투박한 시어 속에도 음악이 그리고자 한 장면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 연주자로 활동해 온 피아졸라는 1965년, 연극 ‘금발의 작은 머리칼(Melenita de oro)’의 부수음악으로 ‘여름’을 작곡했다. 이 작품에는 비발디의 ‘여름’이 부분 인용되지만, 밀도 높은 리듬과 느리고 관능적인 흐름, 현악기의 고음에서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 같은 소리와 함께 탱고의 언어로 새롭게 펼쳐진다. 1965년 처음 녹음된 이 작품은 1969년 세 곡이 더해지며 하나의 사계로 완성됐다.
이번 음반 속 피아졸라의 작품들은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1955~)가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된다. 그의 편곡은 피아졸라가 비발디에게 보내는 오마주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며,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작곡가를 하나의 음악적 대화로 엮는다.
비발디의 ‘사계’는 한수진이 영국 이주 후 보냈던 맨섬에서의 3년 반이라는 시간을 채워준 작품이기도 하다. 한수진은 ‘사계’를 “푸른 초원과 그 안의 생명들, 늘 곁에 있던 바다라는 존재와 보내던 어린 시절을 채우던 하나의 소리 풍경”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흐른 뒤, 한수진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를 접했고, ‘사계’라는 주제가 또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 이 작품에 매료되었다. 한수진은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과정을 “어린 시절의 풍경과 지금의 시선, 바깥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라 표현한다. 작품 속 도시와 바다의 정서, 그 안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한수진의 음악과 시간의 흐름을 감상할 수 있다. (※ 이 글은 음반에 수록된 해설문을 발췌·재구성)
글 카시 해밀턴(영국 음악학자) 정리 장지현 기자
The Seasons
한수진(바이올린·음악감독)/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Orchid Classics ORC100435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실황
한수진·알레나 바에바·로만 시모비치(바이올린) 외/
호세 마리아 플로렌시오 주니오르(지휘)/포즈난 필하모닉
Polskie Radio, PRCD 193
15세의 한수진에게 2위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2001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실황. 1·2차 예선과 결선 무대에서 연주한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발라드’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비에니아프스키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폴로네즈, 호세 마리아 플로렌시오 주니오르/포즈난 필하모닉이 함께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담겼다. 우연히 이 음반을 들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1948~)가 한수진에게 직접 연락을 건넸고, 이후 연주회에 초대하거나 직접 자신의 활을 선물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Romantic Inspirations
한수진(바이올린)/페이준 수(비올라)/가브리엘 아드리아노 슈바베(첼로)/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마스터스 영 솔로이스츠
Profil Medien Ph10071
2010년,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과정의 일환으로 녹음한 음반.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발매된 음반으로, 본격적으로 음악적 깊이를 쌓아 나가던 24세의 한수진과 피아니스트 안나 나레토의 호흡으로 펼쳐지는 서정적이면서도 경쾌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한수진이 녹음한 작품은 클라라 슈만(1819~1896)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 Op.22로, 슈만 부부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였던 아카데미에서 한 학번 선배이자 ‘아카데미 부모’로서 적응을 도와준 페이준 수가 슈만의 ‘3개의 로망스’와 ‘동화 그림책’, 가곡집 ‘미르텐’ Op.25 중 ‘헌정’의 비올라 편곡판으로 녹음에 함께 참여했다.
IBK 투게더
한수진·공민배·박준형(바이올린)/서진실·최예나·
최준(판소리·피아노병창) 외
뮤직앤뉴(디지털 정규 음반)
IBK기업은행과 한국메세나협회가 장애예술인 자립 지원을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 ‘IBK 투게더’를 통해 2024년 1월 2일 발매된 음반이다. 음원 녹음 과정을 중심으로 5회 이상의 일대일 멘토링이 이뤄졌고, 한수진이 멘토링에 참여한 음악가들과 직접 호흡을 맞춰 녹음한 음원이 수록됐다.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2중주 중 3악장을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해 편곡한 버전은 바이올리니스트 공민배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해 편곡된 쇼팽 녹턴 20번 c#단조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준형·피아니스트 이혜리와 함께 연주했다. 이 밖에도 국악 부문 멘티 최준·최예나와 국악밴드 억스(AUX)의 보컬 서진실이 노래하는 춘향가·심청가·적벽가의 대목을 감상할 수 있다. 크로스오버 작곡가 양방언이 편곡을 맡은 ‘함께 아리랑’을 여섯 명의 멘토·멘티가 함께 연주한 버전이 첫 곡으로 수록됐다.

‘IBK 투게더’ 뮤직비디오
안 디 무지크
한수진(바이올린)/프레디 켐프(피아노)
워너뮤직코리아 VLCD6158
2024년 4월 2일, 워너뮤직코리아를 통해 발매된 한수진의 첫 개인 음반이다. 스승인 안드리예프스키와 공부했던 작품으로, 한수진이 “인생의 동반자 같은 곡”이라고 표현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4번을 포함해 총 네 곡을 담았다. 피아니스트 프레디 켐프(1977~)와 호흡을 맞춘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로 후기 낭만주의의 우수를, 하인리히 비버(1644~1704)의 ‘묵주 소나타’ 중 파사칼리아 g단조로 17세기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특유의 화려하고 다성적인 기교를 담았다. 마지막 작품으로는 음반의 제목이기도 한 슈베르트 ‘안 디 무지크(음악에 부쳐)’를 선택해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음색으로 음반을 마무리했다.
Lamento di Maria Maddalena
한수진(바이올린)/강자연(피아노)
퍼플파인 엔터테인먼트(디지털 싱글 음반)
2024년 10월 31일, 퍼플파인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발매된 디지털 싱글 음반이다. KBS ‘아침마당’ 출연을 계기로 당시 프로그램 프로듀서였던 강지원 PD가 직접 작곡한 작품을 한수진에게 녹음 곡으로 제안하며 제작이 이루어졌다. 작·편곡가 이웅이 편곡을 맡았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적합하게 한수진이 직접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됐다. 피아니스트 강자연의 반주 위에 펼쳐지는 약 4분 40초 길이의 작품은 뉴에이지풍의 선율과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목이 환기하는 쓸쓸한 정서를 바탕으로 흐른다. 감정이 고조될수록 묵직하게 울리는 저음 현의 깊은 음색과 애절한 고음 현의 선율을 감상할 수 있다.

‘Lamento di Maria Maddalena’ 뮤직비디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