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신유청, 떠나도 남고, 머물러도 아픈 가족의 초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10월 7일 6: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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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신유청

떠나도 남고, 머물러도 아픈 가족의 초상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에 담긴, 떠남과 죄책감 사이에 갇힌 한 가족의 기억

매일 아침 세인트루이스의 눅눅한 구두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청년 톰 윙필드는 낡은 수첩을 꺼내 떠오르는 구절을 끄적이곤 했다.

1937년, ‘대공황’이라는 9년여의 지독한 가난이 사람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고, 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효용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랑조차 하기 힘들었던 냉혹한 시절이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또다시 전쟁의 징후가 약한 불로 피어오르던 때에, 시인을 꿈꾸던 청년에게 주어진 현실은 더없이 가혹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식과 굴레

어두운 저녁, 퇴근한 톰을 기다리는 허름한 아파트에는 화려했던 과거 시절에 사로잡힌 어머니 아만다와 한쪽 다리의 장애와 지독한 내성함 탓에 세상과 단절해 유리 인형의 세계로 숨어든 누나 로라가 산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아늑함과 숨 막히는 부양의 중압감 사이. 떠나고 싶은 마음과 남겨질 가족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톰은 조금씩 흔들린다. 훗날 퓰리처상을 두 차례 거머쥐며 20세기 미국 연극사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테네시 윌리엄스(1911~1983)는 톰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뼈아픈 유년과 누나를 향한 평생의 죄책감을 투영해,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오는 10월, 예술의전당 기획 ‘토월정통연극’ 시리즈의 포문을 열 연극 ‘유리동물원’이 무대에 오른다. 1930년대 대공황의 비극 속에서 길을 잃은 가족이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보듬는 작품으로 다시 읽어낸 이는 연출가 신유청. 지난 8일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바라본 ‘유리동물원’을 들여다봤다.

 

상징을 따라 열리는 ‘유리동물원’의 세계

중년의 퇴색한 미인 아만다는 영광스럽던 옛 기억에 얽매여, 수줍음 많고 세상과 담을 쌓은 딸 로라의 미래를 깊이 염려한다. 아만다의 유일한 열망은 로라에게 안정된 가정을 꾸려줄 ‘신사 방문객’을 찾아주는 것. 그녀의 거듭되는 압박에 못 이겨, 톰은 구두 공장 동료인 짐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평생을 장식장 속 유리 동물들과 낡은 축음기 음반 뒤에 숨어 살던 로라의 세계에 낯선 신사 짐이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침내 극은 인물들이 붙들고 있던 환상과 상실의 진짜 얼굴을 대면하게 한다.

신유청 연출가 역시 그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허망한 작전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극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테네시 윌리엄스가 지문 속에 새겨놓은 ‘시적 상징’이라는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한 집안의 이야기 뒤로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와 세계가 펼쳐졌다고 밝혔다.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지 않나요. 원작 속 상징을 읽어가다 보니 작가는 한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인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고요.”

신 연출가는 이를 “작은 모래알 하나에 우주가 있고, 꽃 한 송이를 통해 영원을 본다는 시인의 노래처럼 짧은 한 집안의 이야기 속에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인공 톰을 “떠나지도 못하고, 제대로 머물지도 못하는” 역설의 인물로 규정한다. 가족 안에 머물면 시인으로서의 삶을 잃어버리고, 가족을 떠나면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존재. 신 연출가는 당초 대본을 읽으며 톰이 토월극장의 깊은 무대를 가로질러 멋지게 떠나는 장면을 상상했으나, 원작 어디에도 톰의 명확한 퇴장 동선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결국 톰은 가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떠났을지 몰라도, 그의 기억과 정신은 영원히 세인트루이스의 그 초라한 아파트에 갇혀 있는 셈이죠.”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서로를 견디는 가족

톰의 탈출이 ‘자유’가 아닌 ‘기억에 갇힌 형벌’이라면, 누나 로라는 그 모든 상처와 욕망이 집결하는 ‘가족의 진짜 중심’이다. 신 연출가는 가정 내에 아픈 구성원이 있을 때 온 가족의 감정과 시선이 그 존재를 향해 모여든다는 직관에서 출발했다.

로라가 닦고 또 닦는 유리 동물들은 언제 깨질지 몰라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견디는 가족을 가리킨다. 과거를 붙잡는 어머니 아만다와 미래로 도피하려는 아들 톰 사이에서, 로라는 가족이 가진 불안과 상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유리동물원’을 ‘기억극’이라 명명하며 자유로운 무대 형식을 주문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변형할 때 도리어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사가 들리는 연극’을 지향하며 빈 무대를 고집해 왔던 신유청 연출이지만, 이번에는 사뭇 다른 풍경을 택했다.

“지금은 어떤 기조를 가지고 한다기보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더 충실하려 합니다.”

신 연출가는 무대미술을 맡은 박상봉 디자이너와 함께 무대를 마치 한 폭의 정교한 ‘성화(聖畵)’처럼 조각해 냈다.

“원작 대본 안에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파란색, 배반을 상징하는 노란색, 그리고 ‘수태고지’ 같은 도상학적 기호들이 계속 등장하더군요. ‘작가가 왜 의상의 색상까지 정해두었을까’라는 의문이 풀어지면서 인물들의 깊이가 한 차원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무대는 명확한 소실점을 중심으로 디자인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물화 혹은 성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 듯한 시각적·상징적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림의 끝에는 작은 빛도 남겨둔다. 신 연출가가 이번 작품에서 붙잡은 것은 비극을 지나고 난 뒤에야 보이는 희망이다.

“비참한 고난과 상처 속에서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싹은 트더라고요. 모든 것이 사라진 가운데서도 사랑이라는 싹이 피어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으로 극을 닫으려 합니다.”

 

정답 대신 ‘방황’을 허락하는 연출

원작에 대한 충실함과 연출가의 해석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그의 태도는 배우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동일하다. 이번 공연은 각 역할이 더블·트리플 캐스팅으로 구성되어 배우에 따라 같은 인물이 다른 온도와 결을 가질 가능성이 컸다. 그 역시 배우마다 캐릭터를 읽어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기꺼이 인정했다.

“해석에 대한 정확한 답은 가지고 있지만,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방황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배우마다 해석의 문이 열리는 시점도 다르니까요. 조급하게 맞추기보다, 충분히 기다려주며 그 세계를 찾아가는 연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래 알갱이 하나에서 우주를 본다”던 시인의 노래처럼, ‘유리동물원’은 한 가정의 아픔을 통해 오늘날 길을 잃은 우리 모두를 비춘다. 무대 위 환상이 깨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신 연출가가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바로 사랑과 희망이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질주하다 길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아픔에 반응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길을 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지도가 아닐까 합니다.”

청년 톰의 서글픈 회상이 스쳐간 CJ 토월극장의 어둠 속, 촛불이 꺼진 뒤 마주할 그 다정하고도 서늘한 온기가 사뭇 기다려진다.

글 유내리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신유청(1981~)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에서 수학했다. 2008년 연출가로 데뷔해 ‘그을린 사랑’ ‘녹천에는 똥이 많다’ ‘와이프’ ‘세일즈맨의 죽음’ ‘테베랜드’ ‘햄릿’ 등 고전과 동시대극을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원작에 대한 치밀한 해석과 절제된 미장센으로 인물과 이야기의 본질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그을린 사랑’으로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2020)과 이데일리 문화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상(2020)을,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와이프’로 동아연극상 연출상(2020)을 받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연극 ‘유리동물원’
10월 17일~11월 22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김성령·최정원(아만다), 장승조·권율·김경남(톰), 정운선·정새별·임세미(로라),
문유강·배훈·최정우(짐)/신유청(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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