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4
쳄발리스트 리처드 이가 & 오르가니스트 벤자민 리게티
관습을 벗고, 건반에 생명력을!
8월 각자의 내한을 앞둔 건반의 마술사들. 개성을 드러내고,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논하다


올여름, 단 하루의 시차를 두고 두 명의 바로크 음악 거장이 한국 땅을 밟습니다. 영국의 리처드 이가와 스위스의 벤자민 리게티. 실제로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으나, 두 사람의 개성과 태도는 기묘하게 닮아있습니다. 놀랍게도 리처드와 벤자민 모두 신발을 벗어 던지지요. 리처드는 맨발로 지휘대에 오르는 것을 즐기고, 벤자민은 오르간 슈즈도 신지 않은 채, 페달 건반 위에 짝짝이 양말만 신고 올라섭니다. (벤자민은 소유하고 있는 오르간 슈즈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과거의 먼지 쌓인 악보에 펄떡이는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격식과 관습이라는 두꺼운 밑창을 과감히 벗어버린 셈이지요. 어쩌면 이 지점이 두 사상가가 만나는 접점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들은 한국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만, 오는 8월 서울과 부천, 부산의 무대를 채울 두 남자의 음악 세계를 상상의 나래 안에서 나란히 펼쳐보았습니다.
K팝의 팬, 박제된 바로크를 깨다
리처드 이가. 그는 자신을 ‘음악 중독자’라고 칭합니다.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에는 서두에 불려진 고음악의 거장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대신, 클래식은 물론 재즈와 팝까지 고루 섭렵한 ‘음악 중독자’라는 달랑 한 줄이 전부죠. 심지어 BTS와 블랙핑크 제니의 열렬한 팬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범주 없는 취향이야말로 그를 박제된 바로크 시대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 진짜 비결일까요?
미국의 공영 라디오 NPR은 이런 리처드에게 ‘고(古)음악계의 번스타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청중을 사로잡는 소통 능력, 쳄발로 앞에 앉아 마구 몸을 흔들면서, 끊임없이 단원들과 눈빛 교환을 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시대 연주를 ‘살아있는 음악’으로 만드는 그의 재주 때문이 아닐지요.
이가는 모든 건반 악기를 다룹니다. 또한 그의 필살기인 1500년대의 몬테베르디 오페라부터 1700년대의 헨델 오라토리오 연주까지 전문 분야로 삼고 있지요.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AAA)의 음악감독으로 지휘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면, 마치 음악의 비밀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안달난 괴짜 교수의 레슨실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이번 내한 무대에서는 플루티스트 김유빈(1997~)과 함께 바흐의 여정을 떠납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24년 서울시립교향악단 리허설 무대. 서로의 음악적 언어가 확인된 리허설을 마치자마자 “언젠가 바흐를 함께 하자”는 이야기가 오갔고, 이번 내한을 통해 약속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쳄발로 앞에 앉고, 김유빈은 우드 플루트를 들고 말이지요.
고음악에서 건반 악기는 저음 선율 위에 화성을 채우는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는 독특한 대화법을 기본으로 품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가리지 않으면서 타이밍 좋게 끼어드는 센스 있는 애드리브처럼, 상대의 소리를 기민하게 받쳐줄 영리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번 무대에서 두 사람이 선보일 바흐의 오블리가토 소나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쳄발로가 뒤를 받치는 통주저음의 역할을 넘어, 어느 순간 플루트와 동등한 무게로 대화의 전면에 나서며 균형의 정점을 보여주니까요.
파트너인 김유빈과의 음악적 호흡은 어떤가?
리처드 ◎ 이번에 연주될 작품은 사실상 트리오 소나타에 가깝다. 바흐는 누구보다 건반 악기를 사랑했던 작곡가였다. 그의 오블리가토 소나타에서 쳄발로는 때로는 플루트와 동등하게, 때로는 더 적극적으로 음악을 이끌며 대화의 한 면을 담당한다. 따라서 플루트 선율은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만 전면에 나서야 하며, 두 악기 사이의 균형과 역할 분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행히 김유빈은 뛰어난 예술가다. 그는 음악이 요구하는 순간에는 쳄발로가 전면으로 나설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공간을 열어줄 줄 아는, 훌륭한 앙상블 파트너다.
바로크 작곡가들이 악보에 적어둔 것은 음악의 바탕이 되는 낮은 음과, 그 위에 어떤 화음을 쌓을지 알려주는 숫자뿐이다.
리처드 ◎ 쉽게 말하자면, 고음악의 핵심인 통주저음은 재즈 콤보에서 베이스와 피아노가 음악의 밑바탕을 깔아주는 역할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어떤 방식으로 화성을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가진다. 즉흥성은 반드시 그 중심에 자리해야 하는 핵심인 가치다.
‘지적인 찬탈’로 완성하는 오르간의 언어
리처드가 ‘뜨거운 불꽃’이라면, 스위스에서 온 벤자민은 ‘냉철한 건축가’에 가깝습니다. 로잔 고등음악원 교수 벤자민의 검소한 일상에는 불필요한 장식과 격식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넌지시 물었더니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하이킹을 즐기며, 그곳에서 동료와 로프를 묶고 함께 땀 흘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있음!”이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초반에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오르가니스트의 필수품인 오르간 ‘슈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짝짝이 양말을 신고 페달 건반 위에 오르지요. 어떤 철학이 있는지 물어보니 “인생은 양말짝을 맞추는 데 시간을 쓰기엔 너무 짧지 않나요?”라고 털어놓습니다. 이미 정리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말을 가지고 있다며 더 이상의 선물은 사양하겠다는 호소까지 덤으로요.
이 엉뚱한 완벽주의자가 이번 한국 무대에서 비발디 ‘사계’와 비제 ‘카르멘’을 오르간으로 불러냅니다. 과연 그가 생각하는 ‘오르간의 언어’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선, 편곡의 경계를 묻는 것으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칼럼(2011)
당신이 쓴 칼럼에서 오르가니스트를 향해 ‘상상력과 자유를 가진 ‘지적인 찬탈자’가 되어 용감히 연주하라‘라고 했던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찬탈이라는 건, 내한 프로그램인 ‘사계’나 ‘카르멘’ 또한 원곡을 오르간으로 데려오는 과정일 텐데,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무엇인가?
벤자민 ◎ 오르간은 여러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도록 발전해 온 악기다. 그렇기에 편곡은 오르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사실 오르간을 위해 쓰인 작품들조차도 어느 정도 편곡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훌륭한 편곡은 원곡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원곡의 악기들이 왜 그런 방식을 선택했는지 음악적 의도를 파악하고, 오르간이라는 악기의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해 내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찬탈’의 완성이다.
완벽한 고증과 재현을 위한 ‘시대 연주’를 위한 노력은 가치있지만, 정말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든다. 역사 악기를 물리적으로 완벽히 소유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의 음악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벤자민 ◎ 내게 ‘다른 시대의 오르간’은 스위스 발레르 지역의 중세 시대 오르간일 수도 있고, 어제 제작된 따끈따끈한 새 악기일 수도 있다. ‘다른 장소의 오르간’ 역시 필리핀의 대나무 오르간처럼 먼 악기일 수도 있지만, 바로 옆 동네에 있는 조금은 다른 악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작품이 탄생한 정확한 시간과 공간의 악기를 결코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시대 연주는 문자 그대로의 모방이 아니라 정신을 이해하고, 현재의 악기 위에서 이를 실현할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동의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한 바로 옆 동네 오르간에 앉았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낯설고도 새로운 악기와 친해지는 루틴은?
벤자민 ◎ 난 그 악기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실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비교해 본다. 그 이미지는 보통 해당 악기가 표방하는 시대적 양식과 제작 배경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색을 하나씩 뽑아 눌러보고 들어보며, 지금까지 내 안에 쌓인 다양한 경험과 기준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저울질한다. 그리곤 친해진 이 친구를 내 개인적인 ‘오르간 리스트’에 추가하겠지.
개인적인 ‘오르간 리스트’라니 상당히 궁금해진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난 소중한 당신의 친구들(오르간) 가운데,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아있거나 결코 잊지 못하는 악기가 있다면?
벤자민 ◎ 오르간과의 첫인상은 사람과의 첫인상과 매우 비슷한 것을 알고 있을까? 처음 만나자마자 금세 마음이 통했던 사람이 시간이 흐른 뒤 그저 평범해진 경험도 있고, 반대로 첫인상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오래 겪으며 보석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르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난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런 이유로, 죄송하지만 리스트 ‘톱 3’와 같은 목록은 영영 공개할 수가 없다!(웃음)


바흐가 오늘 우리 곁에 온다면
문득 이 두 바로크 거장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이들이 공유하는 역사주의 연주의 본질, 그리고 악기와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질까요? 두 거장에게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철저한 고증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바로크 음악이다. 빽빽한 규칙일수록, 그 안에서 연주자 개인의 독창적인 색깔과 자유를 드러내기는 더 까다로울 것 같다.
리처드 ◎ 그 경계선을 칼로 자르듯 명확히 나눌 수는 없다. 애초에 규칙과 자유는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국가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음악적 풍경이 존재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시 연주자들도 각 고유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즉흥연주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키스 재럿은 비슷한 음악적 배경을 공유하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완전히 다른 개성을 보여주지 않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흐나 헨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통주저음을 실현하는 방식에서 각자의 취향과 개성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벤자민 ◎ 내게는 역사적 고증과 연주자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기에 굳이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음악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깊이 들여다보면, 연주자의 창의성이야말로 초기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반드시 길러야 할 역사주의 연주의 핵심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바흐가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날 롯데콘서트홀에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마주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리처드 ◎ 그가 가장 놀라지 않을 대상은 오히려 악기다. 조명, 사람들의 옷차림, 공간의 냄새, 건물의 규모 등 그를 기겁하게 할 요소는 훨씬 많다.(웃음) 그 모든 충격을 견뎌내고 스타인웨이의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 그는 우리가 아는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음악을 이 현대 피아노를 위해 새로 작곡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바흐 음악의 진짜 보금자리는 쳄발로, 오르간이며 이들이 지닌 고유한 음향들이 중요한 본질을 담아낸다고 생각한다.
벤자민 ◎ 정확한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 역시 쳄발로나 바로크 오르간을 현대 피아노나 현대 오르간으로 발전해 가기 위한 ‘미완성 초안’으로 보는 진화주의적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난, 저마다 완성된 독립적인 악기들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품은 이 매력적인 악기들을 오늘날 한자리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다.
내한으로 지면 대담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리처드는 수차례 한국을 찾은 베테랑인 반면, 벤자민은 첫 내한이다. 한국에서 기대하는 순간이나 잊지 못할 사적인 아지트가 있다면 공개해달라.
리처드 ◎ 무척이나 한식을 좋아해서 어느 한식당을 가도 늘 대만족이다. 지난 방문에서는 처음으로 번데기에 도전했는데, 시원한 맥주와 곁들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별미더라.(웃음) 한국에서 즐기는 또 다른 행복은 LP 레코드 쇼핑이다. 이번에도 제니와 에스파의 최신 음반을 몇 장 사 가려고 벼르고 있다.
벤자민 ◎ 내한 공연을 위해 서울 인근의 부천과 남쪽의 바다 도시 부산으로 향한다. 다만 일정 대부분을 음악에 쏟아야 해서 미술관과 맛집을 찾아다닐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는 다음 방문 때 알아가도 충분하니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한국의 관객들을 만나 서로의 인생에서 짧거나 긴 순간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다.
글 유내리 기자 사진 목프로덕션·부천아트센터
리처드 이가(1962~) 영국 지휘자이자 쳄발리스트로, 15년간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AAM)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20년부터 필하모니아 바로크 오케스트라·합창단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AAM과 녹음한 헨델 음반으로 그라모폰·MIDEM 클래식상·에디슨상을 수상했고, 두세크의 ‘장엄 미사’ 음반으로 그라모폰 최고의 합창음반상을 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에서 오르간을 전공했으며, 암스테르담 음악원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벤자민 리게티(1982~) 스위스의 오르가니스트·작곡가다. 스위스 로잔 국립고등음악원과 파리·리옹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다. 로잔 생프랑수아 교회의 상임 오르가니스트 겸 로잔 국립고등음악원의 교수로 활동 중이다. 질버만·샤르트르·도쿄-무사시노 오르간 콩쿠르 등 명망 있는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클라베스 레이블을 통해 바흐·리스트·멘델스존 음반을 발표했으며, 디아파종 도르(2011·2013)를 수상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벤자민 리게티 오르간 독주회
8월 21·23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외
길망 오르간 소나타 1번, 비발디 ‘오르간을 위한 글로리아’(편곡 리게티) 외
김유빈&리처드 이가 듀오 리사이틀
8월 20·22·24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외
바흐 플루트 소나타 전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