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윤찬 & 박종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모노드라마 ‘노베첸토’ 무대 위에 오르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진솔한 이야기

피아노 선율이 만들어낸 파도 위로 배가 서서히 움직인다. 무대 위에는 오직 한 명의 배우와 한 명의 피아니스트뿐. 배우는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여객선을 띄우고,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낸다. 평생을 바다 위에서 살았던 피아니스트의 이야기, 음악극 ‘노베첸토’가 올해 다시 관객과 만난다.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의 모놀로그 원작 희곡인 작품을 연출가 김제민이 지난해 음악극으로 각색해 국내 초연했다.
극의 배경은 1900년, 유럽 이민자들을 미국으로 실어 나르던 여객선 버지니아 호.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이민선 안에 배에서 태어나 평생 바다 위에서 살다간 피아니스트 노베첸토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했던 그를 친구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맥스가 회상하면서 음악극 ‘노베첸토’는 시작된다.
극중 화자인 맥스의 기억을 쫓아 극 속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사람이 있다. 극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오로지 연주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피아니스트, 노베첸토다. 이번 공연에서는 맥스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조판수·이건영뿐 아니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피아니스트 두 명을 통해 보다 다채로운 무대가 올려진다(12월 6~9일, The STAGE). 이번 공연을 위해 연출가 김제민은 각 연주자들과 함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음악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여기에 더블 캐스팅된 두 명의 배우를 더하면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나, 관객들은 4인 4색의 ‘노베첸토’를 만나게 된다.
피아니스트 박종화는 지난 초연 당시, 클래식 음악으로 노베첸토의 정서를 깊고도 넓게 풀어내며 관객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번에 처음으로 음악극에 참여하는 곽윤찬은 재즈의 명가 블루노트 레이블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첫 음반을 내놓은 피아니스트다. 12월 공연을 앞두고, 각자의 노베첸토를 만들어가고 있는 피아니스트 곽윤찬과 박종화를 만났다.


노베첸토는 약자의
인생을 살았어요.
그 모습이 재즈와
참 비슷해요


▲ 곽윤찬

피아니스트 곽윤찬
“약박에 악센트를 주는 재즈처럼”

곽윤찬이 피아노에 앉았다. 이윽고 연습실 공간에 재즈 선율이 울려 퍼졌다. 배우와 이리저리 합을 맞추는 가운데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연스럽게, 편하게 하세요” “제가 맞출 수 있어요”였다. 거대한 질서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로움은 그가 음악으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노베첸토’에 참여하게 된 과정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대본을 처음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는 노베첸토의 모습에서 재즈를 떠올렸다.
“노베첸토는 약자의 인생을 살았어요. 그 느낌이 재즈와 참 비슷해요. 약박에 악센트를 주는 것이 재즈의 기본이거든요. 극에선 약자인 노베첸토에게 시선이 향하면서 약박에 악센트를 주듯 강해지는 모습이 등장해요. 그 안에 기쁨을 누리는 스윙이 있죠.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노베첸토는 그대로 죽거나 배에서 내쳐질 수도 있었지만, 은인이 나타나고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됐어요. 재즈에서 장식음을 그레이스 노트라고 부르는데, 노베첸토 안에도 그레이스 노트, 은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김음도 있어요. 극에서는 약자가 남들보다 앞서면서 주목을 받고 더 높이 올라가죠. 약자 인생이 완전히 반대가 돼요. 하지만 노베첸토는 그걸 즐기거나 만족하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인생 앞에서 겸손하게 퇴장하는 모습을 보여요. 그렇게 캐릭터를 바라보니 이 작품이 재즈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베첸토’의 각 장면마다 곽윤찬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재즈곡들과 그의 앨범을 통해 소개된 곡을 중심으로 연주를 선보인다. 그의 앨범 1집에 실린 ‘피시 앤 케이크(Fish And Cake)’나 블루노트 레이블에서 발매된 3집 타이틀곡인 ‘누마스(Noomas)’, 함께 수록된 ‘비잉 낫 두잉(Being Not Doing)’ 등이 극중 배우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느낌으로 적재적소 연주된다. 각 장면에 따라 연주되는 음악들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그가 재즈의 특징으로 꼽는 즉흥성 때문이다. “누구와 함께 연주하느냐,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정해진 주제 안에서도 매번 연주가 달라져요. 심지어 무슨 곡을 할지 미리 정해도 테마만 비슷하고 세세한 부분들은 다를 때가 많죠.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마어마한 질서 안에서의 즉흥이죠.”
극의 마지막, 맥스는 노베첸토가 음악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피아노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우리는 거기 88개의 건반이 있다는 걸 알죠. 아무도 부인할 수 없어요. 무한하지 않죠. 노베첸토가 배 위에서 내릴 때 그는 무한한 건반을 발견했어요. 그 위에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은 없었어요. 그는 무한하지 않은 건반에서 행복을 연주했어요….” 맥스의 이야기가 잦아들 때쯤, 곽윤찬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자작곡 ‘누마스’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A음의 단조로 시작해 C음의 장조로 끝을 맺는 곡은 노베첸토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을지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아프고 슬퍼도 결국엔 해피엔딩. 피아노 선율에 그렇게 마음을 실어 곽윤찬은 음악을 객석으로 흘려보내는 중이다.


노베첸토도 저도
어린 시절부터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어요


▲ 박종화

피아니스트 박종화
“폭풍 후 잔잔해진 바다에 고개를 내민 희망”

배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땅을 밟아본 적 없는 노베첸토. 어딘가에 가만히 멈춰, 머무르는 순간이 없던 한 피아니스트의 인생을 바라보며 박종화는 자신의 지난 시간들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여섯 살, 음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그는 이후 미국·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독일에서 살아왔다. 항구에서 항구로, 마치 바다 위를 계속 떠다니는 배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한번 정해진 고향 ‘땅’이 있죠. 그런데 배에서 태어나 바다 위를 계속 오가는 노베첸토에겐 고향 ‘땅’이 없어요. 저도 어린 시절부터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어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잠시 머물던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 그 자체가 고향 같은 존재가 됐죠. 때문에 심리적이자 존재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 노베첸토에게 깊이 공감하게 됐어요.” 노베첸토에게 친구이자 가족,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였던 피아노가 박종화에겐 세계를 보는 창이다. 그는 연주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를 살면서 체득한 것들을 음악 가운데 녹여내고 있다.
음악극의 배경인 1900년, 노베첸토가 타고 있던 미국행 이민선 1등석에는 어떤 음악이 울려 퍼졌을까. 그들의 애환과 정서는 무엇과 닮아 있었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종화는 라흐마니노프를 떠올렸다. 러시아 혁명 이후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멜랑콜리한 정서, 재즈의 영향을 받은 흔적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야말로 ‘노베첸토’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노베첸토의 깊숙하고 내밀한 곳까지 내려갔던 심상을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에 담아 연주할 생각이다.
무대에는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리모주의 시장’을 시작으로 태풍이 휘몰아치는 장면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1악장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여행하는 ‘노베첸토’의 여정에는 쇼팽 즉흥환상곡 2번이 울려 퍼진다. 더불어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이나 홍난파 ‘고향의 봄’처럼 관객들의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있는 곡들도 함께 들려준다.
맥스의 기억 속에 선명한 노베첸토의 마지막 모습을 배경으로, 박종화가 연주하는 마지막 곡은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순간’ Op.16-5이다. 라흐마니노프가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고 굶주렸던 시기에 작곡한 이 작품은 멜랑콜리한 정서에 1번부터 4번에 다다르기까지 좌절·분노·우울의 정서가 뒤섞여 있다. 특히 4번에서는 폭풍처럼 울부짖고 몰아치는 감정이 쏟아진다. 그는 왜 이곡을 택했을까. “그 다음 등장하는 5번이 평화롭거든요. 폭풍 후의 잔잔함. 그 위에 조금씩 고개를 드는 희망의 정서가 노베첸토의 마지막과 닮아있어요. 설령 우리가 노베첸토를 만날 수 없다 해도 이 피아니스트에 관한 기억은 음악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계속 살아있을 겁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채우룡(studio rar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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