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지키고 기억하는 음악, 작곡가 이안 크라우스 & 지휘자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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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1월 4일 1:18 오후

FOCUS

자유를 지키고, 기억하는 음악

작곡가 이안 크라우스 & 지휘자 배종훈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교향곡이 수록된 신보(Naxos)에 관한 이야기

 

2022년은 한·미 수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지난 11월, 낙소스 레이블에서 특별한 신보가 발매됐다. 이 음반에 수록된 미국 작곡가 이안 크라우스(1956~)의 교향곡 5번 ‘평화를 향한 여정’은 서초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배종훈이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 위촉한 작품이다. 이외 ‘한국전쟁의 영웅을 위한 팡파르’를 포함해 앨범에 수록된 4곡이 초연 녹음으로 배종훈/서초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두 사람의 음악적 우정이 빛나는 이 음반은, 또한 한국과 미국 간에 선린 우호를 증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INTERVIEW

작곡가 이안 크라우스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교향곡 5번 ‘평화를 향한 여정’은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한 작품이다. 이에 대해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미국인으로서 본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전쟁을 겪고 난 이후 한국의 발전은 전 세계에 모범이 됐다. 세계에 긴장이 지속되는 오늘날 미국인들은 헌신적인 민주주의 동맹국인 한국이 있음에 감사한다. 일과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오랜 친구인 배종훈 지휘자로부터 이 곡을 위촉받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미국의 젊은이들이 대중문화를 잘 받아 들이는 반면 위대한 음악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재능 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고전과 현대를 막론하고 음악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데 감사하다. 그들과 함께하며 작곡가로서 큰 행운을 누렸다. 예를 들어, 한국의 훌륭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2020년 나의 ‘녹턴’ 앨범(Naxos)에 참여했다.

교향곡 5번 2악장(‘묵시록에 대하여’)은 암울하면서도 강렬한 힘이 지배적이다. 9·11 테러 사건의 비극을 예견한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악장에서는 어떤 장면을 의도했나? 이 곡의 관악 버전을 1990년대 말에 작곡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취약함에 대한 암울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였다.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유명한 인용문을 떠올렸다. “자유는 한 세대가 끝나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싸워서 지킨 자유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되 자손들도 우리를 본받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조국의 쇠퇴를 지켜보면서 미국이 자유로웠던 시절을 자손들에게 이야기해 주게 될 것이다.”

교향곡 5번 2악장의 쿼들리벳(잘 알려진 선율을 하나로 결합하여 연주하는 형식)에서 ‘아리랑’과 세 개의 미국 선율(‘Simple Gifts’ ‘Amazing Grace’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르’)을 혼합한 것이 인상 깊다. 두 개 이상의 전통 가락이나 가곡이 합쳐져 동시에 소리가 나는 음악적 기법인 쿼들리벳을 작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행착오를 거쳐 금관 악기로 세 가지 미국 곡을 혼합하는 방법을 찾았다. 거기에 ‘아리랑’이 가세해 현악과 종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데, 마치 항상 있었던 것처럼 힘들이지 않고 쉽게 어우러졌다. ‘아리랑’을 처음 접한 건 옛 제자인 이규림(UCLA 작곡·이론 전공 조교수)이 피아노 독주곡에 사용했을 때였다. 각 곡은 각각의 민족의식의 DNA로 짜여있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애국심과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교향곡 5번 3악장(‘밤의 해변에서’)에는 한국의 전통 북을 사용했다.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국 전통음악은 미국에서 학생들을 통해 접했다. UCLA에는 한국음악 앙상블이 있다. 2층 사무실에서 한국 무용수와 고수가 아래층 뜰에서 자주 리허설하는 걸 지켜봤다. 아주 시끄러웠다(웃음). 학생들과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에서 구경했다. 장송행진곡과 같은 종악장 피날레에서 한국의 대고(大故)를 사용한 건 한국, 과거와 현재의 역사, 그리고 한미동맹에 대한 오마주다.

배종훈이 지휘하는 서초교향악단의 세계 초연 연주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작곡가로서 지휘자와 교감한 내용이 있다면? 배종훈 지휘자는 UCLA 지휘과 대학원생이었다. 우리는 음악관 앞 계단에서 처음 만난 이후부터 수년 동안 서로 공감대를 나눠왔다. 그동안 많은 공연을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미 다음 낙소스 녹음을 계획 중이다. 솔직히 말해 배종훈 지휘자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줄 필요가 없다. 그는 내 음악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음반 녹음 현장

교향곡에 이어서 수록된 ‘한국전쟁 영웅을 위한 팡파르’는 멋진 영화음악 같기도 하고 교향곡의 코다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부산 UN 기념묘지에서 400개의 드론이 꾸미는 장관 속에서 발표됐다. 엘가(1857~1934)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를 좋아한다. 영화음악 스타일로 팡파르를 쓸 때 엘가의 이 작품을 생각했다. 물론 수천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는 곡을 쓰고 싶었다. 성가와 같은 작품은 우울하고 위협적인 주제와 부드럽고 위안을 주는 주제 사이를 오가며 각 변주가 열정적으로 진행된다. 당신이 언급했듯이 그것은 실제로 교향곡에 훌륭한 ‘코다’를 만든다. 그런 식으로 연주되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이 이번 음반을 관심 있게 들으며 당신의 이름을 되뇌게 될 것 같다. 현재 작업 중이거나 앞으로 발표 예정인 신곡을 소개해 달라. 그렇게 되길 바란다. 2022년에 윌리엄 카넨지저(클래식 기타)와 알렉산더 스트링 콰르텟이 함께하는 두 개의 기타 5중주 음반과 닐 스털버그/UCLA 필하모니아, 제임스 베이스/UCLA 챔버 싱어가 함께하는 독창자·합창단·오케스트라를 위한 서사시적인 교향곡 1번 ‘Cancion de Yerma’ 음반이 발매될 예정이다.

이안 크라우스(1956~) 미국 메릴랜드주 출생으로 기타 4중주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서사적 기타 4중주 5번을 포함한 11곡이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들에 의해 여러 번 녹음되었으며,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 위촉 작품 ‘아르메니아 레퀴엠’(2015)으로 크게 호평받았다. 현재 UCLA 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INTERVIEW

지휘자 배종훈

“음악의 힘을 믿는다”

미국 작곡가 이안 크라우스에게 한국전쟁 70주년작을 위촉한 계기는? 국가보훈처와 (사)호국문화진흥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유엔참전용사 추모 평화음악회’ 예술감독을 12년째 맡고 있다. 2010년 처음 지휘하며 해외에서 초청된 참전용사 300여 명이 베토벤 ‘합창’을 듣고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평생 보훈 문화 외교에 음악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동안 몇 번에 걸쳐 의미 있는 작품을 위촉해 연주했고, 한국전쟁 70주년이던 2020년을 맞기 몇 년 전부터 꼭 이안에게 위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안 크라우스의 작품은 우선 솔직하다. 대학교수이기에 실험적인 곡을 쓰려는 유혹도 있을 법한데, 아방가르드적인 현대음악 시대가 저물고 각자의 개성과 다양성이 인정되는 요즘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곡가다.

2019년 11월 1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크라우스의 교향곡 5번을 세계 초연하고 녹음할 당시 감회와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녹음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이안 크라우스에게 DMZ에서 남북 분단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보면 좋겠다고 권했다. DMZ에 다녀와서 ‘아리랑’을 넣기로 합의했다. ‘아리랑’을 인용한 2악장을 녹음할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왈칵 나 잠시 멈췄다. 또 다른 에피소드로 나의 절친한 동료인 트럼피터 젠스 린데만(1966~)이 팔에 깁스를 한 채로 솔로 파트를 녹음하러 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젠스는 특이한 기구로 부러진 팔을 지탱하여 무사히 연주를 마쳤다.

교향곡 5번과 달리 또 다른 수록곡 ‘한국전쟁 영웅들을 위한 팡파르’, 현악 교향곡 1번과 2번은 반포심산아트홀(서울 서초구 소재)에서 녹음되었다. 이 곡들을 해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점들은 무엇인가. 여느 팡파르보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내용이 들어있기에 그러한 장면을 매 음표에 담아서 해석하여 연주했다. 현악 교향곡 1번 ‘자유의 노래(Song of Freedom)’는 바이올린 파트가 없는 현악 오케스트라 편성(비올라·첼로·베이스)이기에 중후한 음향을 중시했고, 제목 그 자체가 유대인들의 찬송가이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소리처럼 표현하려 했다. 현악 교향곡 2번 ‘라 폴리아’는 15세기 말 포르투갈에서 전해 내려온 유명한 민요 선율로, 코렐리(1653~1713), 헨델(1685~1759)을 거쳐 오늘날까지 150여 명의 유명 작곡가들이 2천여 개 버전을 만들었다. 이안은 코렐리 버전이 원곡의 방향에 제일 가깝다고 생각해 메인 주제로 사용하여 27개의 변주곡과 마지막 코다로 마무리한다. 변주곡은 주제가 처음에 연주되는 것이 전형적인데, 드라마틱하게 시작해 ‘무슨 곡이지’하고 숨 가쁘게 달려오다 중간쯤 클라이맥스가 필요한 때 ‘라 폴리아’의 그 유명한 멜로디가 등장하는 것이 압권이다. 같은 편성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다른 음들로 양쪽에서 연주해야 하기에 밸런스가 중요하다.

음반 녹음 현장

작곡을 공부하다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빈에서 작곡 공부를 하던 중 빈 무지크페어아인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의 리허설을 무대 뒤 문 틈새로 보며 크게 감동했다. 체르하(1926~), 리게티(1923~2006) 등 동시대 작곡가 공연을 보면서 현대음악이 지휘자에 따라 얼마나 감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때부터 틈틈이 지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작곡한 곡을 직접 지휘할 수 있을 거라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다음 유학지인 미국(UCLA)에서 본격적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해 일본·유럽·미국·러시아 현지에 모두 유학했다. 작곡을 전공했기에 늘 창작곡에 관심이 많고, 언젠가는 뜻있는 작품을 남기려 한다. 지금은 편곡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서초교향악단을 만든 계기는 무엇인가? 이 악단과 하이든 전곡 녹음을 진행 중이다. 오늘날에도 하이든 교향곡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마이애미 뉴월드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오케스트라 트레이닝을 겸한 악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한국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던 2015년에 서초문화재단이 출범했고, 1년 후 재단의 상주예술단체로 시작하게 되었다. 진정한 앙상블 훈련을 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이곳에서는 실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고전음악의 정수를 완전히 섭렵해야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성장한다는 취지를 재단 측에서 받아들여서 중장기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다. 하이든은 교향곡의 형식을 확립한 인물이기에 조성감을 훈련하기에 좋다. 그래서 먼저 하이든 교향곡 107곡 전곡을 시작했고 20번을 넘겼다. 늦어도 2032년 하이든 탄생 300주년 전까지 모든 공연과 녹음을 마치고, 음반을 발매할 계획이다. 하이든을 마치면 모차르트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까지가 1차 계획이다.

앞으로 계획을 알고 싶다. 서초문화재단의 ‘화요음악회’를 통해 하이든 교향곡 전곡 시리즈를 끝까지 하며 공연과 영상, 음반으로 발매하는 것이다. 물론 이안 크라우스의 다음 작품도 연주하고 낙소스에서 음반을 낼 예정이다. 미국 UCLA 음악대학과 서초교향단악의 공동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지난 2년간 멈추었던 ‘유엔참전국 찾아가는 보훈음악회’를 올해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 참전국의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서초교향악단이 함께 평화의 하모니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더욱 용기를 내 추진해 나갈 생각이다. 음악의 힘을 믿고, 음악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라 믿기에 모두와 나누고 싶다.

배종훈(1963~) 빈 국립음대에서 작곡과 지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오페라와 음악원에서 오케스트라와 발레 지휘를 공부하였으며, 미국 UCLA에서 석·박사과정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지휘를 지도하기도 했다. 국군교향악단을 창단해 초대 음악감독을 지냈으며, 현재 서초교향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재임 중이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이안 크라우스 교향곡 5번 ‘평화를 향한 여정’ 외

Naxos 8559907

UCLA 글루크 금관 5중주/젠스 린데만(트럼펫)/마이클 딘(베이스바리톤)/배종훈(지휘)/ 서초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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