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무대에서의 자유, 지휘자 성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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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1월 4일 12: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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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무대에서의 자유

지휘자 성시연

경기필을 떠나, 네덜란드에 이어 독일의 명문 악단 지휘를 앞두고 있는 지금

2017년 연말, 경기필하모닉의 포디움에서 내려와 퇴장하는 뒷모습에 보낸 뜨거운 박수가 아직 생생하다.

ⓒYongbin Park

성시연은 그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4년간 한국에서 보냈을 때 음악적 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경기필에 훌륭한 지휘자가 오셔서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적절한 시기에 일이 잘 마무리 지어졌던 것 같다. 지금은 음악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고, 다양한 오케스트라와의 교감하며 자유로워지고 있다.”

이후 종종 국내 무대 위에서 인사를 전했다. 그러던 중 작년 11월, 그가 아주 멋진 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착지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이하 RCO)의 포디움. RCO 무대에 오른 한국 지휘자는 정명훈에 이어 두 번째다. 코로나로 지휘를 맡기로 한 작곡가 탄둔(1957~)이 무대에 못 서게 되면서, 긴급히 성시연이 초청됐다. 이 설레는 소식에 더해 올해 7월, 성시연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데뷔도 앞두고 있다. 현대음악 시리즈인 ‘Musica Viva’에 진은숙(1961~)의 생황 협주곡 ‘슈’, 윤이상(1917~1995)의 ‘예악’을 비롯한 현대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다른 시작을 앞둔 그와 메일을 주고 받았다.

 

RCO 데뷔를 축하한다. 공연 중 제일 강렬하게 남은 인상은 무엇인가. 무대 문이 열리고, 발밑에 쏟아진 조명, 그 사이로 보이는 관객과 무대의 모습이 압도적이었다. 순간적으로 구름 위를 걷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높은 텐션으로 무대에서 연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가까이에서 호흡한 RCO는 어떤 악단인 것 같나. 동경하던 무대에 선 첫 리허설의 감동을 누릴 때, 단원들이 따뜻하게 호응하며 맞아주었다. 세계적인 연주 실력은 당연했고,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지휘자에 대한 교감이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며 순간순간 소통하길 원했다. 내 안에 내재한 더 많은 것을 꺼낼 수 있는 ‘악기’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업그레이드 시켜준 오케스트라다.

탄둔의 트롬본 협주곡 ‘비디오 게임 속 세 뮤즈’와 버르토크,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했다.  내가 잘 아는 곡을 지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현대음악 연주회로 기획되어 있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네덜란드 작곡가 페르바이(1959~2019)의 곡을 오프닝으로 탄둔의 작품을 전반부, 윤이상의 ‘무악’과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모음곡’을 후반부로 구상했다. 버르토크의 곡은 내 장점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곡이라 선택했고, 오케스트라 측에서도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 최대한 배려해준 것 같다. 물론 죽기 전에 RCO에서 말러를 지휘해볼 수 있다면 최고의 순간이 되겠지만,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데뷔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도 윤이상의 ‘예악’을 연주할 예정이다.  ‘예악’을 현대음악사의 명곡 중 하나로 생각한다. 현대적이고 참신한 작품이다. 유럽 관객에게 한국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더 부각하고, 깊은 호흡과 사상이 내재한 음악임을 입증하고 싶다. 윤이상, 진은숙의 곡뿐 아니라 젊고 유능한 한국 작곡가의 곡이 있다면 앞으로도 오케스트라 측에 건의할 것이다.

앞둔 공연은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나. 공연을 할수록, 기회가 있다는 것에 소중함을 느낀다. 수많은 지휘자 중 내가 선택됐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또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무심히 흘려보낸 기회가 파편이 되어 돌아오는 경험을 했다. 충분히 준비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모토다. 단원,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연주를 하고 싶다.

자유로운 두 손의 지휘자

사실 성시연의 유럽행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코로나로 취소된 공연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성시연에게 이 시간은 음악 안에서의 ‘자유’였다.

그동안 서울시향 부지휘자(2009~2013)로 커리어를 시작하며, 그는 이제 막 중력의 무게를 버티고 한 발자국을 떼어보는 걸음마를 익히고 있었다. 경기필하모닉(2014~2017)에서의 경험은 그 걸음을 단단하게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뭘 붙잡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흔들리지 않음에 자유로워진 두 손은, 이제 더 화려한 무대 위에서의 지휘봉을 쥔다.

지휘자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지금은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하는지. 초창기에는 크고 작은 목표를 세워놓고 노력했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모르겠다. 지금은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60대가 되어야 ‘지휘’라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내가 왜 지휘를 하고, 무엇을 이룩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을 떠난 유럽에서의 활동을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질문을 반대로 돌려도 될 것 같다. 지휘를 시작한 곳이 유럽이라, 오히려 경기필을 맡게 된 것이 큰 결정이었다.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한국과 해외의 거대한 문화적 차이를 직접 경험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도 쌓았다. 물론 외국 생활에서 힘든 건 외로움이다. 코로나로 인해 연주 외에는 호텔 방에 혼자 있다. 화상 통화라는 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해외 무대를 꿈꾸는 지휘자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큰 곳으로 나와 경험하라고 말하고 싶다. 지휘자는 경험·문화·언어가 모두 합쳐서 완성되는 직업이다.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과 귀를 열고, 다양한 언어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하지만, 늘 겸손하라는 것! 이유는 첫째, 음악이 내 자신보다 크고, 둘째, 이 세상에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 허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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