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끝이기도 하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남는 가장 값진 것은 아마도 ‘추억’일 것이다. 인도의 사막에서 보았던 일몰이 떠오른다. 지평선 너머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차츰 주황색으로 변했다. 그 붉은 하늘색이 땅을 물들이고, 해는 꼴깍 넘어가고, 남은 세상은 모두 불타는 듯했다. 그리고 진보라색 여운이 남았다. 붉은 기가 천천히 사라진 하늘엔 작은 별이 떠 있었고 이윽고 깜깜해진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매일 그렇게 해가 졌다. 하루는 그렇게 열렬하게 떠나고, 다시 오고 있었다.
시작은 끝이기도 하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남는 가장 값진 것은 아마도 ‘추억’일 것이다. 인도의 사막에서 보았던 일몰이 떠오른다. 지평선 너머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차츰 주황색으로 변했다. 그 붉은 하늘색이 땅을 물들이고, 해는 꼴깍 넘어가고, 남은 세상은 모두 불타는 듯했다. 그리고 진보라색 여운이 남았다. 붉은 기가 천천히 사라진 하늘엔 작은 별이 떠 있었고 이윽고 깜깜해진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매일 그렇게 해가 졌다. 하루는 그렇게 열렬하게 떠나고, 다시 오고 있었다.
태안반도에서 느낀 고마운 마음
작년 대하축제가 있던 어느 날, 친구와 안면도에 갔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로 항구와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좁은 골목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흥정의 목소리가 왁자한 가운데 느껴지는 생선 비린내와 사람의 열기가 바로 ‘활기’ 그 자체였다.
그때 둘러본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두여해변이다. 왼쪽으로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모래 언덕 아래 광활한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물이 빠진 시간에 간 터라 물가는 저 먼 곳에 있었다. 좀 전에 느낀 활기는 그 넓은 바다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시간이 멈춘 듯, 바다와 하늘은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 여행을 하면서 매우 자주 했던 ‘우리나라가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고운 모래사장은 하얀 모래였다. 꽤 쌀쌀한 날씨에도 맨발로 걷고 싶을 만큼 보드라웠다. 어떤 섬의 모래는 산호와 조개껍데기가 부서져 만들어진다고 하던데 이곳의 모래는 원래 무엇이었을까. 오래전에 무엇이었든 지금은 아름다운 해변을 이루는 모래 한 톨이 되었다. 반쯤 부스러진 조개껍데기를 보면서 결국,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문득 2007년 12월에 일어난 기름 유출 사건이 떠올랐다. 뉴스를 도배했던 시커먼 바다를 보면서 먹먹함이 목구멍에 치밀어 올라 오열하던 기억이 난다. 기름을 뒤집어쓴 노랑부리백로와 가마우지의 사진에 가슴이 미어졌다. 며칠 후 뉴스를 보면서 다른 이유로 울었다. 전국에서 태안 바닷가로 모여든 사람들은, 12월의 추위 속에서 바위와 돌멩이가 뒤집어쓴 기름을 닦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태안 바닷가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감돌았다. 그 활기는 뜨겁고 감동적이었다. 지금 태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살아났다. 죽음의 그림자였던 시커먼 기름때는 흔적도 없고, 복원되기 어려울 것이라던 생태계는 부활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의 손길과 발길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적을 일으킨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따스함에 감사한다.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의 마지막 글을 쓰자는 마음으로 온 태안의 바다는 역시 넓고, 맑았다.
해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멈춰 섰다. 물이 빠진 축축한 모래에 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끼손톱만해서 빠르게 움직이면 가물가물해 보이는 작은 생명체는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갯벌 전체가 게들이 만들어놓은 작은 구멍과 구멍에서 파 올린 동그란 모래덩어리, 그리고 게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라도 밟을까 봐 발을 떼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어찌나 빠르게 잘 피하는지 그것도 신기했다.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니, 고 작은 것들이 멈춰서 집게발을 쳐들고 나를 보았다. 여기는 그들의 세상이었다. 가끔 인간이 모든 세상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숨이 막힌다. 게들의 세상에 들어와 이방인이 된 기분은 참으로 좋았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전부 각각의 삶을 위해 부산하고 소란하다. 우리가 서로 위협이 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남은 것은, ‘추억’
판소리는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창법을 지닌 성악이다. 목을 혹사시키다 못해 죽이고 죽여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득음이다. 득음을 위해 수많은 명창이 목에서 피를 쏟으며 독공(篤工)을 했다. 돌아가신 명창들의 소리가 하나하나 다 귀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임방울 명창(1904~1961)의 소리를 처음 들은 건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행하신가.”
먹먹하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는 때론 덤덤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이별한 임을 향한 마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소리가 끝나고 나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임방울 명창이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산호주라는 여인. 그런데 사랑에 빠지자 소리에 소홀하게 되었고, 위기를 느낀 임방울 명창은 산호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산으로 들어간다. 절에서 독공을 하던 어느 날 산호주가 찾아오지만, 야멸차게 거절하고 만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 산에서 내려온 임방울 명창은 산호주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산호주는 자신이 죽을병인 것을 알고 정인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찾아갔던 것이다. 마지막 기회였는 줄도 모르고 차갑게 돌려보냈다는 것을 깨달은 임방울 명창의 마음… 얼마나 참담하고 슬펐을까. 그 심정을 담아 글을 쓰고 만든 소리가 바로 ‘추억’이다.
이런 절절한 사연을 다 모르더라도 음악에 담긴 임방울 명창의 목소리는 가슴을 치는 소리다. 너무 늦었다는 자괴감, 외면했다는 죄책감,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슬픔, 그 모든 것을 뚫고 떠오르는 추억들… 우리 전통음악에서 성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목소리에는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거나 표현력이 좋다는 등의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진심 어린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추억’에 허망함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노래가 없었다면 비극적으로 끝난 미완의 사랑이었겠지만,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추억으로 더듬을 수 있는 사랑이 완성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노래는 분명 가슴 아프다. 하지만 굵직하고 절제된 성음은 오히려 사랑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된다. 봄에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을 봄에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임방울 명창의 ‘추억’이 바로 그런 노래다.
한승석·정재일의 ‘너는 또 그렇게’
임방울 명창은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다.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소리 자체도 우직하면서도 맛깔 난다. 멋을 부린다, 혹은 멋대로 부른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 부른 것은 그의 뛰어난 예술성과 독창성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전통예술의 원형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그 전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닐까. 이 시대의 말과 감성을 담은 먼 훗날의 전통을 만들어내는 일 말이다. ‘지금’을 살아내는 힘을 가져야 그 물줄기 속에 백 년 전의 것도, 천 년 전의 것도, 그 훨씬 이전의 것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너는 또 그렇게’가 있다. 한승석의 소리, 정재일의 피아노 연주다. 그저 판소리에 피아노 반주를 하는 방식이 아니다. 조금은 부풀어 있는 요즈음 감성을 전통의 성음으로 절제한다. 판소리에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이 노래에서는 함축적인 가사가 봄비처럼 흐른다.
너는 또 그렇게 오겠지. 어느 들판 위에서 헤매어 가는 한 이마 위에 문득 흩날리는 눈발처럼. 내가 간 뒤에도 내가 오기 전에도 바위틈을 적시며 흘러나와 고이는 샘물처럼, 너는 또 그렇게 와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겠지. (중략) 흐르고 흐르고 흘러가겠지, 흐르고 흐르고 흘러오겠지. 내가 가면은 너도 가겠지, 내가 오면은 너도 오겠지. 내가 있으면 너도 있겠고, 내가 없어도 너는 있겠지. 그래, 내가 없어도 너는 또 그렇게 오겠지. 어느 봄날 아침에 선잠에서 깨어난 처마 아래 문득 흩뿌리는 빗방울처럼. 그래 그렇게, 또 그렇게 너는.
– ‘너는 또 그렇게’ 중
연재를 마치며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의 연재를 시작할 때보다 이번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멋진 음악이 너무 많으니까. 임방울 명창의 ‘추억’과 한승석·정재일의 ‘너는 또 그렇게’는 판소리가 살아 있는 음악이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떠나서도 한없이 아름답다.
연재하며 참 행복했다.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문장을 떠올렸고, 그것을 글로 적으면서 그 공간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곳에서 들은 음악들 역시 마치 나의 일기처럼 가까워졌다. 독자 분들이 우리 음악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더욱 우리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움,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웃음, 작은 나무들과 숲과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그리고 상상 속에서 만난 옛 어른들. 떠오르는 모든 것이 귀하다.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그다음이 봄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모으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 길고 혹독할수록 봄은 더욱 찬란하다고 들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길 바란다.
많은 순간 깨달았던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강인함이 인간을 통해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를.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기를. 여러분의 겨울과 봄 사이에 때때로 우리 음악이 흐르길 바라며 연재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