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다, 마지막 자부심을 완성시키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3월 22일 1:22 오후

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_6
아르미다

아 르 미 다

마지막 자부심을 완성시키다

위대한 작곡가들이 빠져든 아르미다 2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아르미다와 리날도’

작곡가들이 그린 열두 여인 연재
01 잔 다르크
02 엘리자베스 여왕
03 메리 스튜어트
04 줄리엣
05 아르미다 1
06 아르미다 2

아르미다의 배경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이다. 그녀는 전쟁 중 리날도를 죽이려고 했지만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마법의 힘으로 그를 납치해 마법의 성으로 데려간다. 리날도는 향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료 십자군 기사 카를로와 우발도가 그를 구출하러 와서 마법을 풀어준다. 리날도는 탈출에 성공하고 아르미다는 복수를 위해 십자군과 전투를 하지만 결국 패한다. 좌절한 아르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순간 당도한 리날도는 그녀를 제지하며 기독교로 개종해달라고 애원한다. 아르미다가 동의하는 해피엔딩으로 타소의 원작은 끝을 맺는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진 이 여인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 미술사에 즐비하듯이, 오페라 작곡가들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르미다를 다룬 작품만 해도 하이든·로시니·드보르자크 등이 쓴 50여 개의 오페라가 음악사에 기록되어 있다.
몬테베르디, 륄리, 헨델, 비발디, 욤멜리, 살리에리, 글루크, 하이든, 로시니, 드보르자크…. 음악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작곡가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아르미다’를 오페라로 만든 50여 명의 작곡가 중 겨우 일부를 나열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헨델, 비발디, 욤멜리, 글루크의 ‘아르미다’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고전을 대표하는 하이든, 벨칸토 오페라의 기둥인 로시니, 20세기의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아르미다’를 소개한다.

“사랑의 달콤한 지배 아래
본능은 언제나 항복합니다.
사랑에 복종하지 않는
그 대담한 영혼은 어디에 있나요?
이 강력한 불꽃이 느끼고자 하지 않는 것은
비참한 일이죠.
심장에 철갑을 두르고 있거나
아니면 심장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죠.
젊음은 쏜살같이 달아나고
아름다움은 그저 순간일 뿐이죠.
때가 되면 둘 다 사라진답니다.
그러니까 연인들이여,
젊음의 꽃과 같은 여러분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이 사랑의 순간을 만끽하세요.”
- 로시니 오페라 ‘아르미다’ 2막 중 아르미다의 아리아

마리아 스파르텔리 스틸
‘아르미다 정원의 장미’

하이든과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만남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1732~1809).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오페라가 기악 작품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이든이 살던 시대에는 작곡가로 인정받으려면 오페라를 써서 능력과 상품성을 입증해야 했다.
29세의 하이든은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던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악단에 부악장으로 기용됐다. 이듬해 사망한 파울 안톤의 뒤를 이어 동생인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두 형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특사로서 당시 음악의 수도인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경험했다. 음악 애호가였던 후작은 다양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관람하며 깊은 애정을 보였다. 파울 안톤은 하이든을 고용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영지인 아이젠슈타트에 오페라를 공연하는 임시 극장을 가지고 있었다. 형의 영지를 물려받은 니콜라우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야망을 실현했다.
1762년 니콜라우스는 취임하자마자 헝가리 외덴부르크 근처 습지에 있는 사냥용 오두막을 호화로운 여름궁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가문의 이름을 붙여 ‘에스테르하자’라고 불린 이 궁전은 ‘헝가리의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본관 양쪽에 완벽한 시설을 갖춘 두 개의 극장을 배치했다. 하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위한 극장, 나머지는 독일어로 공연되는 인형극 극장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는 치마로사, 파이지엘로, 피치니, 살리에리 등 당시 이름난 작곡가들의 오페라가 올려졌고, 궁정악장의 지위에 오른 하이든은 앞서 언급된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 및 편곡할 뿐만 아니라 11개의 오페라도 직접 작곡했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되었고, 또 가장 크게 성공했던 작품이 바로 ‘아르미다’(1784)이다.
에스테르하자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오페라는 하이든의 ‘아르미다’였지만, 개인의 사설극장을 위해 작곡된 작품이기에 한계도 뚜렷했다. 하이든은 분명 1760년대 빈에서 글루크가 주창한 ‘오페라 개혁’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어느 정도 동조했다. 글루크는 ‘레치타티보 세코’(하프시코드로 간단하게 반주되는 스토리 전달 중심의 레치타티보) 사용을 자제하며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오케스트라로 반주되는 기악 효과가 더해진 레치타티보)를 선호했다. 이전 오페라에서 그 흐름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던 하이든은 돌연 ‘아르미다’에서는 나폴리 바로크 오페라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랐다. 고객의 취향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고용인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나폴리와 인연을 맺은 로시니
니콜라우스가 1790년에 사망한 후 음악에 애정이 없었던 후계자는 궁정 악단을 해산시켰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자를 떠났다. 이미 유럽에 거장으로 소문난 하이든은 자유의 몸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며 재산을 얻었다. 1792년, 21세의 베토벤은 하이든을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 페사로에서는 벨칸토 오페라의 기둥이 되는 작곡가 로시니가 태어났다.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에 이미 오페라 작곡가로 두각을 나타냈던 로시니. 1815년에 전설적인 극장장 도메니코 바르바이아(1778~1841)에 의해 나폴리 극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는 매해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한 작품씩 쓰는 계약을 맺었다. 나폴리 오페라의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나폴리에는 여전히 좋은 성악가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를 넘나들었던 놀라운 목소리의 소유자, 훗날 로시니의 부인이 된 이사벨라 콜브란(1785~1845)도 있었다.
1817년 11월 11일, 나폴리에서는 로시니의 오페라 ‘아르미다’가 초연됐다. 1815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 1816년 ‘오텔로’에 이은 나폴리를 위한, 그리고 이사벨라를 위한 세 번째 오페라였다. 1816년에 산 카를로 극장에서 화재가 나서 ‘오텔로’는 부득이하게 나폴리의 다른 극장에서 공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극장장 바르바이아는 9개월 만에 극장을 재건했다. 산 카를로 극장 재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올린 오페라가 바로 ‘아르미다’이다.
이사벨라의 기량에 맞춰서 작곡된 아르미다 역은 가뜩이나 부르기 쉽지 않은 로시니의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길고 까다로운 역할로 꼽힌다. 이사벨라가 은퇴한 이후 대체할 가수가 없어서 묻힌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 역할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 중의 한 명인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1952년에 피렌체에서 부활시켰다.
대본을 쓴 지오반니 슈미트는 아르미다와 리날도, 두 연인의 관계에 집중했다. 1막에서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운명적으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을, 2막에서는 아르미다의 마법 정원에서 서로를 탐닉하는 사랑을 묘사했다. 3막에서는 마법이 풀려 구출된 리날도가 여전히 아르미다를 사랑하여 갈등하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났고, 그런 리날도를 붙잡기 위해 아르미다가 나타나 애원한다. 끝내 버림받은 아르미다는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복수를 택하고 마법의 궁전을 파괴하는 장면으로 막이 내린다.
로시니 전기 작가인 리처드 오스본은 “열정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음악”이라고 표현하며, “당시 로시니와 이사벨라의 관계가 작품에 투영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꽤 은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사벨라가 바르바이아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로시니는 오페라 ‘젤미라’를 마지막으로 이사벨라와 함께 나폴리를 떠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바르바이아는 로시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25세의 젊은 작곡가, 도니체티(1797~1848)를 나폴리에 데려온다. 바르바이아는 젊은 시절 밀라노에서 웨이터로 일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사업가가 된 인물이다. 산 카를로 극장을 인수한 후 명성을 떨치다가 라 스칼라 극장장도 겸임하기에 이른다. 그의 성공 비결에는 로시니에 이어 도니체티까지 점찍은 선구안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리날도에게 버림받은 아르미다’

니콜라스 콜롬벨
‘아르미다를 떠나는 리날도’


오페라 작곡가 드보르자크?
교향곡으로 유명한 드보르자크(1841~1904)는 사실 오페라라는 장르를 사랑했고, 적절한 소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차라리 ‘레퀴엠’이나 ‘스타바트마테르’ 같은 종교음악이 명성을 선사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오페라 ‘루살카’는 20세기에 이르러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극적인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비판받기도 했다.
오페라 ‘루살카’는 60세의 드보르자크에게 오페라 장르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보게 해줬다. 고무된 드보르자크는 바로 후속작을 준비하고자 했고, ‘루살카’를 쓴 야로슬라프 크바필에게 다음 대본을 요청했다. 하지만 크바필은 다른 연극에 매달리느라 드보르자크의 요청에 화답할 수 없었다. 이때 드보르자크는 대안으로 당대 영향력 있던 작가 야로슬라프 브르흐리츠키의 ‘아르미다’를 떠올렸다. 브르흐리츠키는 1887년에 이미 타소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을 체코어로 번역했을 정도로 이 소재에 정통했다. 그렇지만 브리흐리츠키의 ‘아르미다’ 대본은 이미 여러 작곡가에게 퇴짜를 맞은 상태였다. 그는 유연성을 발휘해 드보르자크의 구미에 맞도록 텍스트를 변경했고, ‘해방된 예루살렘’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클로린다와 탄크레디 이야기를 아르미다와 리날도에게 접목시켜서 극적 효과를 더했다.
드보르자크는 젊은 시절 오케스트라 비올라 주자로서 고전과 낭만주의의 많은 오페라를 경험했다. 브람스가 무명 드보르자크의 앞길을 열어주었지만, 사실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19세기 후반 독일어권 음악계에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갈등은 격렬했다.) 드보르자크는 바그너 ‘탄호이저’가 아르미다의 모델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으며, 바그너 오페라의 전매특허인 라이트모티브를 이전 오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사용했다.
1904년 3월 25일,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초연이 있었다. 작곡가는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 커튼콜 전에 극장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초연을 포함한 총 7회의 공연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었고, 그로부터 몇 주 후에 드보르자크는 세상을 떠났다. 이 오페라는 여전히 드물게 공연되지만 아르미다의 첫 번째 아리아 ‘내가 즐거이 가젤을 좇고 있을 때(Za štíhlou gazelou)’는 체코 출신 소프라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리아로 꼽힌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추천음반
하이든 ‘아르미다’
체칠리아 바르톨리(메조소프라노)/니콜라
우스 아르농쿠르(지휘자)/빈 콘첸투스 무
지쿠스 외
호화 출연진으로 유명한 무지크페라
인 실황녹음이다. 쟁쟁한 가수진에
지휘자 아르농쿠르까지 이름을 더했
다. 자연의 온갖 소리를 음악으로 담
아내고자 한 하이든의 노력은 3막의
마법 장면에서 아르농쿠르의 손길을
타고 빛을 발한다.

로시니 ‘아르미다’
르네 플레밍(소프라노)/리카르도 프리자(지휘)/메
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외
만능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벨칸토마저
정복했다. 환상적인 마리 침머만의 연출은
아르미다의 치명적인 마법의 세계를 풍성하
게 구현해냈다. 다만 로시니의 음악에서 느
껴지는 관능적인 면이 플레밍(아르미다)과
브라운리(리날도)의 호흡에서는 다소 부족
하다는 게 흠이다.





드보르자크 ‘아르미다’
요안나 보로프스카(소프라노)/게르트 알
브레히트(지휘)/체코 필하모닉 외
‘루살카’를 좋아하는 오페라 팬이라면
추천할 만한 음반. 폴란드 출신 소프
라노 보로프스카의 아르미다를 비롯
해 동유럽 출신 가수들의 가창이 훌
륭하다. 게르트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체코 필의 연주도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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