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쇼스타코비치를 비추는 그들만의 방식
고잉홈프로젝트 ‘1925’
7월 11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고잉홈프로젝트(대표 손열음)가 올해 탄생 120주년을 맞이한 쇼스타코비치를 조명한다. 올해 시작해 내년까지 이어지는 ‘쇼스타코비치 전곡 시리즈’에는 공연마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필두로, 역사적 흐름이 얽혀있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이 한데 엮인다.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공연 ‘1925’에는 1925년 초연된 거슈윈 피아노 협주곡 F장조와 1924~1925년 사이에 쓰여 그 이듬해 초연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이 올랐다.
1부 공연의 거슈윈 협주곡에서 민첩함과 나른함이 공존하는 손열음 특유의 터치는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맞았다. 1악장에서는 타악기 주자들이 발군이었다. 2악장의 도입부에는 관악 연주자들이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며, 노곤한 맛을 한껏 살린 트럼펫과 바이올린 솔로도 인상적이었다. 3악장은 유쾌했다. 손열음은 빠른 질주 속에서도 여유로웠으며, 지휘자가 없는 특성상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주자들도 여기에서만큼은 리듬에 몸을 맡겼다. 즐겁고 만족스러운 연주였으나, 파지올리 피아노의 음색이 이 곡을 십분 살리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예기치 못했던 선물은 앙코르에서 주어졌다. 거슈윈의 작품들이 손열음과 솔로 연주자의 듀오로 연주됐는데, 뮤지컬 ‘오, 케이(Kay)!’ 중 ‘나를 지켜봐 줄 누군가’(트럼펫 드미트리 로카렌코프)를 시작으로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2중창인 ‘베스, 이제 당신은 내 여자’(바이올린 스베틀린 루세브)가 이어졌다. 앙코르의 대미는 ‘파리의 미국인’에 의한 ‘블루스’(클라리넷 조인혁)가 장식했다. 10분이 넘게 이어진 앙코르는 20세기 초 미국의 어느 재즈바에 방문이라도 한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은 보통의 관현악 작품들에 비해 솔로 악기로 연주되는 비중이 많으며, 피아노도 편성된다는 점에서 고잉홈의 특색에 잘 맞는 선곡으로 보였다. 다만, 1악장에서는 연주자들의 합과는 별개로 약간의 어수선함이 맴돌았는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2악장을 지나며 차츰 분위기가 정리됐다. 느린 3악장은 의외의 몰입감을 불러일으켰다. 강하게 응축된 소리는 열기와 서늘함을 동시에 자아내며 기묘한 질감을 직조했다. 4악장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시원한 마무리를 남겼다. 고잉홈의 ‘쇼스타코비치 전곡 시리즈’는 오는 8월 ‘The Iron Curtain(철의 장막)’(8.9)과 ‘The 9th’(8.16)으로 이어진다.
글 최성혁 기자 사진 고잉홈프로젝트/KimTaehyeon
부서지고 짓눌린 종이 사이에 끼워 넣은 예술
악독극 ‘너무 시끄러운 고독’
7월 4~19일 대학로 SH아트홀

임야비(각색·연출)/정동환(한탸), 곽소영(만챠), 김동윤(교수1 외), 최승언(교수2 외), 원빈(일론카)
“35년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커튼콜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귓가에 맴도는 음성이 있었다. 악독극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모티프를 함축하고 ‘압축’해 낸 첫 대사였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체제 아래 검열과 통제가 이루어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지하실에서 홀로 일하는 폐지 압축공 한탸(정동환 분)의 이야기를 그린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배우와 관객이 대사를 읽으며 진행되는 ‘악독극(樂讀劇)’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작을 표방하며 제작됐다.(7월 8일 관람)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의 자전적인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극은 원작의 플롯을 거의 그대로 따랐고, 글자의 음영에 따라 조절되는 내레이션의 음량, 문어체와 구어체의 혼용은 관객이 ‘읽기’라는 행위를 입체적으로 행하게끔 도왔다. 압축기가 처음 종이 더미를 짓누르는 순간 터져 나온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 금관 팡파르 구간은 절묘했고, 한탸가 책을 읽을 때마다 등장해 일종의 라이트모티프 역할을 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고, 표정과 발성의 완급 조절로 노동자와 철학가를 넘나드는 한탸를 표현한 정동환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극의 무게감을 더했다.
으레 한 사람의 독백으로 끌어가는 작품이 그렇듯, 무대는 한탸의 내면과 세계관을 형상화한 것에 가까웠다. 폐지는 무대 왼쪽 위 파이프를 통해 무대로 떨어졌고, 한탸가 자신의 고용주를 인식하는 방법 역시 마치 ‘하늘의 음성’처럼 떨어지는 목소리뿐이었다. 상호 소통 없이 그저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바깥세상은 피지배자의 현실, 검열에 의해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군중의 심리를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예수와 노자, 괴테와 횔덜린, 고흐, 렘브란트까지, 부서지고 짓눌린 종이 사이 한탸가 끼워 넣은 이들의 작품은 정권에 의해 획일화된 질서 안에서도 그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다분히 예술적인 수단이었다.
공연 전, 복도와 계단에 가득 널브러져 있던 구겨진 종이는 공연이 끝난 후 정갈하게 묶인 폐지 더미로 변해있었다. ‘35년째’ 고독한 지하실을 채우는 압축기의 굉음과 억압, 그리고 책 속 온갖 철학자들의 말을 외는 노인. 모순적인 작품의 제목을 따라 두꺼운 종이 뭉치에서 피어난 것은, ‘너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글 장지현 기자 사진 총체극단 여집합/한아름
CLASSICAL MUSIC
아지즈 쇼하키모프/서울시향 협연 이지윤
익숙한 드보르자크, 따뜻한 시벨리우스
7월 1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시향의 프로그램 노트에서는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을 생소한 곡으로 취급해 의아했다. ‘오랫동안 애를 썼고, 자신도 있었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작품’ 중 하나로 이 곡을 들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의 이 멋진 협주곡은 요한나 마르치(1924~1979)·에디트 파이네만(1937~2023)·정경화(1948~) 등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명연주를 내놓았던 명곡으로 기억한다.
아지즈 쇼하키모프(1988~)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협연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1992~) 역시 드보르자크의 명곡에서 비상하는 듯한 몸짓을 선보였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음미할 만한 뒷맛을 남겼다. 1악장 초입에서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서울시향의 전주에 이어 이지윤의 바이올린에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가득했으나, 한편으로는 느긋한 템포를 이어가면서 곡의 인상을 명확하고 오래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지윤은 몸을 숙이며 단원들을 바라볼 때가 많았는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의 악장답게 단원들의 연주에도 자신을 이입하는 듯했다. 2악장 역시 충분히 음미하는 듯한 느린 템포가 돋보였다. 라이브 공연답게 아슬아슬한 음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짜릿했다. 흥겨운 3악장에서 이지윤은 세부적인 마감이 다소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비교적 성숙한 연주로 근사하게 마무리했다. 빼어난 기교와 현대적인 오케스트라의 만남이었지만 드보르자크 협주곡 해석의 전통적인 면에서 바라봤을 때 정통성을 잇는다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낸 연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생소함보다는 익숙함 쪽에 부등호가 벌어졌다. 구석구석 다듬어 내는 쇼하키모프의 정성스러운 반주를 듣는 맛도 좋았다. 이지윤은 루이 가브리엘 기유맹(1705~1770)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유희’ 중 ‘알트로’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이자벨 파우스트의 음반으로 익숙한 이 곡에서 이지윤은 바로크 시대의 화려함과 리듬감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2부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1번에서도 쇼하키모프는 많은 것들을 요구하며 세심한 지휘를 펼쳤다. 1악장에서 임상우의 클라리넷이 고독하게 몸부림쳤다. 바이올린의 트레몰로가 강렬하게 일렁였다.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광경은 따스한 풍경으로 바뀌고 더욱 거대하게 확대되는 듯했다. 오보에와 플루트를 위시한 관악기들이 구성지게 울리고, 폭발하는 듯한 박력과 스펙터클을 객석에 전달했다. 마침, 꿉꿉한 날씨에 더욱 좋은 제습기 같은 감촉의 연주였다. 다만 호른은 여러 차례 아쉬움을 안겨줬다. 2악장은 목가적이면서 절제 없이 마음껏 바람이 불듯, 숲이 눕듯 다가왔다. 쇼하키모프는 관악과 현악의 감정 기복을 멋지게 그려냈다. 부드럽게 서빙하듯 제공하는 마무리도 좋았다. 3악장은 저음 현의 피치카토에 팀파니가 작렬했다. 춤을 추는 듯한 선율을 이어가는 쇼하키모프의 리드는 호감이 갔지만, 호른의 불명확한 연주가 여전히 귓가에 걸렸다. 하지만 총주에서 보여준 일사불란함은 역시 서울시향다웠다. 4악장은 어둠을 진득하게 표현하듯 한껏 누그러진 빛을 자애롭게 비췄다. 금관이 녹아드는 모습도 훌륭했다. 서주의 주제가 재현되는 장관에서 ‘시벨리우스 교향곡이 얼마나 따뜻한 음악인가’를 느꼈다. 쇼하키모프의 손끝에서 곡이 끝나고 10초 가까운 정적이 이어졌다. 우리 청중들의 성숙함을 입증한 순간이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서울시향
TRADITIONAL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작곡가 시리즈 V-이건용’
국악관현악이 나아갈 또 하나의 지향점
7월 2·3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기획공연 ‘작곡가 시리즈 V–이건용’은 ‘분향’(1974)에서 신작 ‘령’(2026)에 이르는 약 50년의 궤적을 국악관현악으로 조망한 보기 드문 기획이었다. 권성택의 지휘 아래 강은일을 비롯한 8명의 협연자가 참여한 이번 무대는, 작품과 연주 양면에서 동시대 국악관현악의 현재와 가능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사건’에 가까웠다.
위촉 초연작 ‘령’은 피리, 그중에서도 협연 악기로 낯선 대피리를 전면에 내세운 점에서 주목되었다. ‘상령산지곡’의 원형적 심상을 현대 관현악 속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저음 피리의 음색과 기교적 확장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향후 작곡가들에게 창작의 자극을 제공하는 성과였다. 이어진 해금 협주곡 ‘가을을 위한 도드리’는 보들레르의 시적 세계를 매개로 ‘이유 없는 슬픔’과 ‘대책 없는 약동’이라는 상반된 정서를 병치하며, 국악관현악의 미학적 지평을 심화시켰다. 강은일(2일 협연)과 노은아(3일 협연)는 서로 다른 정서적 결을 통해 동일 작품의 해석적 다층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냈다.
‘한오백년’은 25현 가야금의 시대적 요구 속에서 탄생한 변주곡으로, 확장된 음역과 기교를 통해 연주자 개별의 음악성을 시험하는 장을 마련했다. 김형섭과 이지혜의 대비되는 해석은 남녀 가야금 미학의 차이를 넘어, 동시대 가야금 연주의 스펙트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한편, 2일의 ‘분향’은 제례악 선율과 음색 중심 기법, 클러스터 실험이 결합된 초기작으로, 청년 작곡가에게 내재된 현대음향의 실험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통합시키는 그의 중용적 태도를 확인시켰다. 3일의 ‘귀’는 판소리와 국악관현악의 결합을 통해 서사성과 해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였고, 작곡가의 대본과 음악의 동시적 설계 및 유기적 결합 능력을 보여준 수작이었다. 다만 민중적 저항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후반부 전개에서 음향적 확장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대미를 장식한 ‘묵’은 ‘침묵’이라는 역설을 내면의 서사로 전환한 문제작으로, 반복과 축적, 지연된 해소의 구조 속에서 장대한 긴장을 구축한다. 특히 후반부의 음향적 고양과 장대한 서사 이후 ‘원점으로의 귀환 아닌 귀환’은 국악관현악이 도달할 수 있는 순수 기악적 서사의 롤모델처럼 평가될만한 대작임을 입증했다. 이는 민요 차용이나 장단 중심의 어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깊은 감동을 창출할 수 있음을 입증한 성과였으며, 이건용의 국악관현악 작품은 물론, 중에서도, 나아가 21세기 국악관현악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될 만했다.
또 다른 성취는 연주에 있었다. 다수의 협연자가 암보로 참여함으로써 창작곡 연주를 ‘리딩’의 차원에서 해석과 체화의 단계로 끌어올렸으며, 동일 작품을 서로 다른 연주자가 나누어 연주한 구성은 해석 비교의 밀도를 높였다. 더불어 과도한 마이크의 사용 대신 자연 음향을 적극 활용한 점은 국악관현악의 음색과 공간감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비록 이건용의 20세기 대표작으로, 국악관현악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었던 ‘만수산 드렁칡’의 부재는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번 무대는 이건용 국악관현악의 미학적 연속성과 변화를 집약적으로 제시하며 향후 방향을 가늠하게 했다. 작품·연주·음향이 긴밀히 결합된 이 음악회는 국악관현악이 지향할 하나의 모델을 분명하게 제시한 자리였다.
글 이소영(음악평론가) 사진 국립국악원
THEATER
연극 ‘오이디푸스’
강·강·강으로 휘몰아치는 운명의 파국
7월 4일~8월 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한아름(작), 서재형(연출)/최수종·양준모(오이디푸스), 서영희·임강희(이오카스테), 임병근·이형훈(코러스장) 외
올 상반기 연극계 화제작이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이었다면, 하반기는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가 화제의 중심이다. 7월 개막한 연극 ‘오이디푸스’가 끝난 후, 바로 이어 9월에는 국립극단에서 ‘안트로폴리스3: 오이디푸스’를 공연할 예정이고, 11월에는 국립창극단이 창극 ‘오이디푸스’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컴퍼니가 제작한 연극 ‘오이디푸스’는 개막 전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 연극계의 명콤비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의 신작인 데다, 오이디푸스 역으로 복귀한 배우 최수종, 그리고 박정자, 남명렬 등 연극계 원로 배우들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기대와 관심은 이른바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로 머물 우려가 큰데, ‘오이디푸스’는 보기 좋게 그 우려를 불식했다. 산해진미가 차고 넘쳤고, 여러 가지가 충만한 잔치였음을 보여주었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서 오이디푸스만큼 혹독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운명.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피하려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운명을 스스로 완성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를 구한 영웅 오이디푸스는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역병을 끝내기 위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던 그는, 진실이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끝내 범인이 자신임을 확인한 순간, 그는 피하려 했던 운명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두 눈을 찌른 채 테베를 떠난다.
오이디푸스는 주체적으로 운명에 맞서려고 했지만, 운명은 참혹하게 다가왔다. 한아름 작가는 원작의 줄기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희곡을 정리했고, 서재형 연출은 가혹하고 처참한 운명을 무대에 풀어냈다.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오이디푸스로 시작한 무대는 그 달리는 속도와 에너지가 공연 끝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완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무대는 오이디푸스가 진실에 한 발, 한 발 접근할수록 강렬하고 거칠어졌다. 애니메이션 영상을 활용해 순간순간 바뀌는 공간의 이미지, 거대한 기둥이 무대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운데, 그 안의 배우들은 차분한 움직임으로 중심을 잡으면서도 진실을 대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크고 깊은 목소리로 발화했다.
작품의 흐름이 강약의 흐름을 타기보다 강·강·강으로 점점 더 치달아지면서 관객의 몰입은 최대가 되었고,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객석으로까지 번져갔다.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를 때 무대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지는 붉은 커튼이 힘없이 떨어지며 만든 물결의 모습은 흘러내리는 핏물이자 오이디푸스를 덮어버리는 운명이었다. 평소 왕과 장군을 주로 연기했던 덕분에 최수종 배우는 운명을 마주하는 인간 오이디푸스를 선명하게 연기했다. 박정자 배우의 테이레시아스는 신비하고 매력적이었으며, 천진난만한 양치기 남명렬 배우는 운명의 장난을 보여주었다. 코러스장의 안정감은 흔들리며 뜨거워지는 오이디푸스를 더욱 강조했다. 무대 전체가 오이디푸스에게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운명이었기에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도드라졌다. 이렇게 쏟아지는 운명이라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는 질문은 늘 언제나 관객의 몫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수컴퍼니
MUSICAL
제20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성년의 딤프, K뮤지컬 전진기지를 꿈꾸다
6월 19일~7월 6일 봉산문화회관·수성아트피아 외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하 딤프)은 개막작인 뮤지컬 ‘투란도트’를 필두로 중국 ‘보옥’, 영국 ‘인투 더 우즈’ 등 12편의 공식 초청작과 5편의 창작지원작을 포함해 총 7개국의 34개 작품이라는 풍성한 무대의 성찬을 차려냈다. 무엇보다 이번 대구행이 더욱 특별했던 건, 딤프가 어느덧 성년(20주년)을 맞이한 기념비적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프리페스티벌’로 첫발을 내디뎠던 딤프는 이제 대구의 문화산업 브랜드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동대구역에 내리자마자 온몸을 감싸는 후끈한 열기는, 마치 축제의 에너지를 대변하듯 도시 곳곳에 마련된 무대로 이어졌다. 거리를 채운 뮤지컬 버스킹 ‘딤프린지’는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유쾌하게 허물었고, 백스테이지 투어 등 다채로운 부대 행사는 관객의 호기심을 영리하게 자극했다. 특히 정식 공연 외에도 올해 눈길을 끈 부대 행사는 단연 ‘뮤지컬 펍’. 대구에 모인 국내외 뮤지컬 관계자들의 네트워킹을 위해 마련된 이 공간에서는 배우와 창작진, 그리고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격식 없는 연대를 나눴다.
완벽한 4부 화성으로 빚은 유쾌한 소동극

‘바버숍페라:토니 & 더 가이즈!’(6.25~7.5,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축제에서 먼저 조우한 작품은 영국의 뮤지컬극단 바버숍페라의 창작품 ‘바버숍페라:토니 & 더 가이즈!’(봉산문화회관 가온홀)였다. 남성 4부 화음인 바버숍 음악에 코미디를 결합한 아카펠라 뮤지컬로, 2008년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열린 뮤지컬 시어터 매터스(MTM) 어워즈에서 ‘가장 유망한 신작 뮤지컬’과 ‘최우수 가사’를 수상했고, 딤프와도 인연이 꽤 깊다. 2010년 제4회 딤프에서 ‘바버쇼페라 II’를 선보여 최고남녀배우상(롭 카스텔·라라 스텁스)을 수상하며 국내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들이, 올해는 그 출발점이 된 원작을 공식 초청작으로 들고 대구를 다시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2일 관람)
작품의 배경은 런던. 바버숍 사중창 팀 ‘토니 앤 더 가이즈’는 유로비전 아마추어 합창 결승전을 앞두고 간판 멤버 토니의 하차로 해체 위기에 직면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찾은 대체자는 하필 콧대 높은 오페라 디바 안토니아. 남성 사중창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멤버들과 오페라 발성을 뽐내려는 안토니아 간의 기싸움이 극 전반을 능청스럽게 이끌어간다. 여기에 경쟁팀인 스위스 대표단의 황당한 납치 음모까지 더해지며 극은 소동극으로 치닫는다.
스토리 자체는 만화적이고 단순하다. ‘톰과 제리’를 떠오르게 만드는 클래식한 추격전과 과장된 몸짓, 연속되는 오해와 해프닝이 중심을 이뤘다. 이 때문에 코믹의 결은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과장된 유머는 영국식 코미디 익살을 잘 보여주지만, 때때로 유치하게 느껴질 여지도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탄탄한 음악적 역량이었다. 네 명의 배우는 극 내내 오직 아카펠라만으로 무대를 채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화음은 안정적이고 정교하며, 리듬과 타이밍 또한 정확했다. 발소리와 효과음까지 모두 배우들의 목소리로 구현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완성도는 상당히 높았다.
뮤지컬로 표출된 중국 고전의 힘

‘보옥’(7.3·4, 수성아트피아 대극장)
소동극이 남긴 여운을 뒤로 한 채, 이번 딤프의 폐막작이자 대상을 거머쥔 중국 뮤지컬 ‘보옥’(수성아트피아 대극장)을 만났다.(3일 관람)
중국 고전 ‘홍루몽’을 바탕으로 한 2025년 초연작으로, 전통적인 가문의 귀공자 가보옥과 그가 사랑하는 대옥, 그리고 가보옥 가문의 권력자들이 세속적인 완벽함을 이유로 보옥의 신부로 내세운 보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극은 가문의 몰락이라는 배경 속에서,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기를 강요받는 보옥의 갈등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고백하건대, 큰 자본이 투자된 대륙의 무대를 접했을 때 극 초반부부터 작품의 내적인 가치와 미학보다는 ‘자본이 빚어낸 크기’라는 유물론적 위용만이 무대를 채웠을 거라 미리 못을 박아두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극이 전개될수록 화려한 외피 속에 숨겨둔 정교하고도 깊은 미학을 드러내며 기자의 섣불렀던 짐작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무대 전면을 감싸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실제로 회전하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환상 속 천상계 ‘태허환경(太虛幻境)’, 그리고 거대한 상아색 등롱과 석조물은 무대 위에 한 폭의 아름다운 수묵화를 정교하게 펼쳐 보였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깨어 있음과 빠져듦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옥의 여정은 음악을 통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비파와 거문고의 선율 위에 중국 전통 극예술인 곤곡과 기악합주인 강남사죽의 요소를 유려하게 얹어내며 작품의 정서와 극 중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배성혁 집행위원장은 올해 대상작 ‘보옥’에 대해 “원작의 친숙함보다 동양의 고전 서사를 오늘날의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뮤지컬 무대 언어로 완성도 있게 구현해 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서사·음악·연출·미술, 배우들의 연기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적인 완성도가 대상 선정의 결정적인 이유”라며, “중국 뮤지컬이 이제 거대한 시장과 화려한 물량만을 앞세우는 단계를 넘어서, 세련된 미학과 높은 제작 역량을 갖춘 단계로 성장했다”라고 말했다.
DIMF의 스무 번째 여름이 막을 내렸다. 딤프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정조준하려고 한다. 배 위원장은 앞으로의 목표를 “세계 시장과 연결하는 K-뮤지컬 산업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 힘주어 말했다. 창작 및 재공연 지원을 확대해 완성도를 높이고, 해외 쇼케이스를 선보여 라이선스 수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다지겠다는 의지다.
장기적으로 그가 꿈꾸는 최종 지향점은 영국의 에든버러와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이다. “딤프를 보기 위해 전 세계의 관객과 관계자들이 매년 대구를 찾고, 도시 전체에서 뮤지컬을 경험하는 문화관광축제를 만들고 싶다”는 배 위원장의 다짐은 딤프의 다음 20년을 기대하게 만드는 확실한 약속이었다. 지난 20년이 가능성을 증명해 내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딤프는 K-뮤지컬의 전진기지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고 있다.
글 유내리 기자 사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