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오페라·발레 공연의 오케스트라 ‘피트’ 전격 해부
무대 아래로 내려간,또다른 음악의 공간

발레나 오페라 공연 중, 한 번쯤은 ‘이 음악은 어디에서 연주되고 있는걸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관객의 눈에 닿지 않는 무대 아래 비밀의 공간에 숨어버린 오케스트라 피트의 역사, 현대의 기술과 함께 발전한 피트의 형태, 그리고 좁은 공간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를 가까이에서 살피며 그 숨은 연주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총괄 장지현 기자

Part.1 음악사 속 피트 이야기
그들은 왜 아래로 내려갔을까 _이민희
Part.2 무대 위로 올라온 피트
‘미래형 피트’ 탐구 보고서 _장지현
Part.3 피트 속 1일 동행 취재기
피트 속에선 어떤 일이 이뤄지고 있을까? _최성혁
Part.4 피트 속의 지휘자들
낮은 곳에 우뚝 선 그들의 지휘봉 _유내리
Part.1 음악사 속 피트 이야기
그들은 왜 아래로 내려갔을까
오케스트라는 처음부터 무대 아래에 있지 않았다. 발코니와 무대 위, 객석 한가운데를 오가던 연주자들은 오페라의 발전과 함께 조금씩 무대 앞으로 모였고, 마침내 객석 아래의 ‘피트’로 내려갔다. 연주자와 가수, 지휘자와 관객의 관계가 변할 때마다 함께 모습을 바꿔온 오케스트라 피트의 역사를 르네상스에서 바그너까지 따라가 본다
글 이민희(음악학자)

에드가 드가 ‘파리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르네상스 시대가 저물면서 직업 음악가가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 음악이 주류로 떠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카펠라로 대표되는 온화하고 작은 음량의 앙상블이 선호됐다면, 17세기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의 취향은 변했다. 음악은 웅장해졌고 여러 악기가 섞인 화려한 앙상블이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악단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음악을 즐기는 청중의 비중도 늘어났다.
17세기의 오케스트라는 전례 없이 여러 악기의 조합을 실험했으며 새로운 청중과 수많은 연주자를 어떻게 현장에 배치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겨진 17세기의 많은 문헌과 도상 자료들은 당시 음악인들이 공연 현장에서 악단을 배치하는 방식에 있어 여러 아이디어를 냈던 상황을 보여준다.
홀 옆 발코니에서 무대 앞으로 이동한 17세기 연주자들
가장 눈에 띄는 배치 중 하나는 ‘발코니’의 연주자들이다. 천장이 높은 홀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돌출형 공간에 연주자들이 앉아 있고, 마치 하늘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듯 공연장 전체를 음악으로 채운다. 보통 교회에서 연주를 하거나 큰 홀에서 연회가 있을 때 이러한 발코니석 연주가 활용되었다. 연주자들이 청중과 동일한 실내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무대 위에 올라가 연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는 주로 실내악 공연에, 후자는 오케스트라 공연에 적합했다.
한편, 극과 음악이 융합된 오페라라는 신식 장르는 대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 성악가들을 필요로 했다. 이들을 한꺼번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율하는 배치 또한 필수적이었기에, 오페라 공연을 위해서는 발코니나 무대 위와는 다른 새로운 연주 공간을 찾아야 했다. 그 때문에 몇몇 건축주와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를 어디에 배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실험을 거듭했고, 간혹 무대 뒤에 오케스트라를 보이지 않게 두기도 했다. 17세기의 몇몇 영국 극장들에는 ‘음악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따로 건축해 거기에 연주자를 집어넣기도 하였다.
여러 방식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는 객석과 무대가 만나는 앞쪽 공간, 즉 ‘피트’에서 연주하는 것이 표준으로 굳어졌다. 피트는 관객이 있던 바닥과 동일한 높이였으며, 연주자들은 대부분 앉은 채로, 그리고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이나 호른, 바순 연주자 등은 서서 연주했다. 피트는 ‘난간’을 통해서 청중석과의 경계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악기 연주자들이 자리한 앞 공간과 평민 관객이 서 있거나 혹은 의자에 앉아 있었던 뒷공간이 분리되었다.
완벽한 호흡 위해 계속 바뀌어 간 배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피트 그림으로도 알려진 ‘토리노 테아트로 레지오의 내부’에는 18세기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에서 쓰였던 피트 배치의 표준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오페라 극장은 촛불로 공간을 밝혔기에 공연의 막이나 장에 따라 불을 끄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무대 위의 성악가들과 피트의 연주자들, 그리고 객석까지 동일한 조도의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난간 안쪽에는 악보가 놓인 긴 보면대가 있었고 연주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편, 이 시기의 피트 배치에서 하프시코드와 바순, 첼로, 더블베이스 등의 통주저음 악기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피트의 왼편과 오른편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두 그룹 중 객석 기준 왼편에 위치한 하프시코드 연주자는 ‘마에스트로 알 쳄발로’라 불리며 전체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의 역할을 했다.
중앙의 제1바이올린 파트는 보통 무대를 바라보고 한 줄로 앉았다. 당시의 성악가와 제1바이올린이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연주자들은 성악가의 얼굴을 보며 완벽한 호흡을 맞추기 쉬웠을 것이다. 연주자들이 하프시코드 앞에 앉은 지휘자를 보지 않아도 좋은 앙상블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이 당시 피트 배치의 장점이었다. 금관악기는 보통 피트 양옆에 있었는데, 이는 해당 악기들이 필요 없을 때 쉽게 퇴장하기 위해서였다.
두 그룹으로 쪼개진 통주저음 앙상블, 그리고 그 사이에 배치된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개입 없이 가수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작곡가들은 가수들과 기악 주자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다. 헨델이 영국 킹스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할 때도 동일한 스타일이었다. 이런 구도 아래에서 바로크 음악 특유의 즉흥적 실현을 포함하는 반주 관행인 ‘통주저음’이 제대로 꽃필 수 있었다. 대형 앙상블임에도 유연하고 민첩한 오페라 음악을 만들어내며 무대 위 성악가와 섬세하게 음악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양옆으로 분산됐던 통주저음은 하프시코드 한 대 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하프시코드의 위치도 피트 중앙 쪽으로 이동한다. 그럼에도 지휘자는 여전히 하프시코드에 앉은 채로, 지휘봉 없이 음악을 이끌었다. 이런 관행은 1820년 무렵의 로시니 오페라에서도 계속되었다.

피에트로 도메니코 올리비에로 ‘토리노 테아트로 레지오의 내부’
‘박자 젓는 사람’의 등장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앙상블이 밝은 피트에서 연주자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며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면,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륄리는 1673년 서정비극(tragédie en musique)을 본격적으로 발표하면서, 유독 화려한 무대장치와 합창, 춤의 비중이 막대한 이 장르의 특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동시에 무대의 모든 사항을 지휘하는 것이 버겁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예 ‘지휘’만을 담당하는, 별개의 인물을 뽑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박자 젓는 사람’으로서, 음악 지휘와 무대 진행을 동시에 담당하는 ‘박자 지휘자(batteur de mesure)’의 출현이다.
이후 이 지휘자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음악의 리듬을 표시했으며, 무대 중앙에 놓인 프롬프터 박스를 두드리며 무대 위 여러 장치의 등장을 지시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무대와 가장 가까운 부분, 즉 피트의 가장자리에서 무대를 보고 서 있게 되었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었고, 연주자와 객석을 바라보는 순간은 작품의 서곡을 지휘할 때뿐이었다. 륄리의 뒤를 이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의 오케스트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라모의 음악은 40여 명이 넘는 대규모 연주자들을 활용했고, 박자 지휘자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박자 지휘자의 존재에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도 많았다.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지휘자는 등 뒤의 오케스트라를 충분히 살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앙드레 그레트리(1741~1813)는 바닥을 두드리는 행위가 “모든 환상을 파괴한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정비극의 유행을 지나 오페라 코미크가 공연될 때도 프랑스 오페라 안에서 이러한 지휘 방식은 유지되었다. 1774년 글루크(1714~1787)의 파리 공연에서도 60여 명의 기악 연주자들은 박자 지휘자 주위를 부채꼴로 둘러쌌고, 관객석과 가까운 난간 쪽에는 더블베이스와 첼로, 바순 등의 저음악기가 배치되었다.
시간이 흘러 베를리오즈(1803~1869)는 변화를 시도한다. 사회적으로 여흥과 교류의 장소였던 오페라 극장은 여전히 밝았지만, 19세기의 오페라 무대는 더 많은 발레리나가 등장했고, 합창단이 무대 위를 가득 채웠으며, 무대 장치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더 현란해졌다. 이제 지휘자가 무언가를 두드리며 그 신호로 모든 것을 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를리오즈는 두꺼운 프랑스식 지휘봉을 버리고, 멘델스존이 선물한 가느다란 흰 지휘봉을 들었다. 물론 베를리오즈의 방식이 즉각적으로 모든 극장에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끝에, 지휘자는 좌우로 움직이는 동작, 그리고 시선을 총동원하여 오케스트라 전체를 이끌게 된다.

앙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코미크 ‘앙젤리크와 메도르’(1843) 공연 ©프랑스국립도서관(BnF)

19세기 파리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본 객석의 광경
마침내 무대 아래로 내려간 피트
1876년 작곡가 바그너(1813~1883)는 그의 오랜 음악적 이상향을 실현할 건축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Festspielhaus)을 개관한다. 수십 년 전부터 기획했던 것으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가 후원함으로써 1872년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거쳐 드디어 완공한 극장이었다.
축제극장은 당시 유행했던 여러 오페라 극장에 비해서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객석의 형태다. 측면 박스석과 발코니석을 없애고, 모든 관객을 ‘평등하게’ 계단식으로 배치한 1층 객석에 앉혔다. 그리고 객석의 불을 끔으로써 사교의 장 역할을 하던 기존의 밝은 음악회장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창출했다. 관객은 어두운 공간에서 불이 밝혀진 무대에만 집중하며, 바그너가 그려낸 무대 속 환상적이고도 신화적인 세계에 몰입했다.
극장의 두 번째 혁신은 오케스트라 피트를 지면 아래에 배치하고 그 윗부분을 덮개로 가린 것이다. 무대 아래에 배치된 연주자들의 합주 소리는 객석으로 직접 방사되기보다 덮개와 무대 공간에서 반사·혼합된 뒤 지휘자와 무대 위 가수, 그리고 객석의 관객에게 전달했다. 피트는 단순히 낮은 박스형 공간이 아니라 계단식 구조였다. 피트 안에서 가장 높고 객석과 가까운 곳에는 바이올린이 위치했으며, 한 계단 밑에는 비올라가, 이런 식으로 무려 다섯 계단 아래에는 트롬본·바그너 튜바·타악기 등이 놓였다.
이 구조는 공연되는 작품에 따라 몇 줄을 들어내고 다시 설치하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수정하고 변형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편성이 컸던 바그너식 오케스트레이션이 피트에 배치됨으로써 음량 및 음색이 변화한 형태로 객석에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음향 보정이나 마찬가지로, 가수의 노랫소리가 오케스트라를 뚫고 선명하게 객석에 전달되는 효과를 만들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 오페라 ‘파르지팔’(연출 슈테판 헤르하임) ©Friera
바그너가 채용한 ‘덮어 버리는’ 피트
오케스트라를 ‘덮어 버리는’ 피트 아이디어를 바그너가 최초로 제안한 것은 아니다. 이미 1600년 작곡가 카발리에리(1550~1602)는 종교적 음악극 ‘영혼과 육체의 극’을 쓰면서 작품 서문에 오케스트라를 관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무대 배경에 숨기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카발리에리의 이런 언급은 연주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인정하는 바로크 시기의 오랜 관행을 거치며 잊혀 갔고, 지휘자의 존재가 등장한 프랑스 오페라에서도 한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280여 년이 흐른 후, 압도적인 작곡가·연출가의 카리스마로 극을 다소 독단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바그너 체제가 등장하고 나서야 구현되었다. 음악을 통해 형이상학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바그너의 ‘총체예술’이라는 개념과 맞닿은 다음에야, 피트는 비밀의 공간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 것이다.
축제극장에 앉아 바그너의 음악극을 감상한 당대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개관 축제의 상영작 ‘니벨룽의 반지’ 초연을 들은 인물 중 하나였던 철학자 니체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인위적”이었다고 언급했으며, 당대 대표적인 비평가였던 한슬리크는 피트가 “오케스트라의 광채를 훼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작곡가 생상스 또한 “바이로이트에는 음악적 낭비가 많다. 많은 흥미로운 사항들이 피트에서 사라진다”고 이야기했다. 비슷한 증언이 R. 슈트라우스(1864~1949), 푸르트벵글러(1886~1954)에 의해서도 반복된다. 과거에는 노출된 오케스트라를 직접 대면했다면, 축제극장에서는 객석에서 숨죽인 채 반사판과 함께 전달되는 오케스트라의 변화된 음색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바그너를 부르는 가수들에게는 최고의 피트 형태와 극장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이 만든 이 피트를 ‘신비로운 심연(Mystischer Abgrund)’이라 불렀다. 이 공간은 음향적으로는 관객석과 연결되어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니벨룽의 반지’ 초연은 그야말로 극장의 건립과 피트의 배치, 소등 등 모든 요소를 총동원하여 총체예술이라는 새로운 공연예술의 이상을 실현한 현장이었다. 관객들은 이제 시야에 악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채로 소리를 들으며 무대 위의 서사와 노래, 연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고 때로는 뚜껑이 덮인 형태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현대의 표준으로 널리 채택되기에 이른다. 무대 위의 새로운 환상에 관객의 몰입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가수의 음량적 밸런스를 적절히 조절해 준다는 점에서 음악을 무대 위의 다른 예술적 요소들과 탁월하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오케스트라, 20세기 초 그림엽서
오늘날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피트 내부
Part.2 무대 위로 올라온 피트
‘미래형 피트’ 탐구 보고서
피트가 놓이는 요즘 무대의 다양한 방식과 변화

브레겐츠 페스티벌 무대 뒤 빈 심포니
점점 화려해지는 무대에 맞춰 피트의 형태도 변한다! 오늘날의 피트는 공연장 한 곳에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물 위에 떠 있거나 용도에 따라 모양과 높이를 바꾸고, 심지어는 무대와 멀리 떨어져 원격으로 소리를 내보내기도 한다. 현대의 무대·음향 기술과 맞물려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 중인 오케스트라 피트의 모습을 살펴보자
글 장지현 기자
브레겐츠 페스티벌 7.22~8.23
매년 7·8월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브레겐츠에서 열리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호상 무대’를 구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축제다. 6,700석 규모의 원형 극장 앞에 놓인 무대와, 연출에 활용되는 호수 수면을 포함해 약 4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야외 호상 무대 ‘제뷔네(Seebühne)’는 거대한 조형물과 조명·음향 기술을 자랑하는 축제의 랜드마크지만, 일반적으로 무대 아래(지하)에 피트를 꾸린 호상 무대와 달리 ‘제뷔네’ 아래에는 오케스트라가 없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만 해도 빈 심포니는 수상 무대의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 연주했지만, 2005년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중 물이 넘칠 위험이 있는 한 장면을 위해 무대 뒤 따로 마련된 축제극장(Fest-spielhaus)에서 공연을 올리기 시작한 것. 그 방식은 올해 개최 8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음악은 무대 양쪽의 스크린과 800개의 스피커를 통해 생중계되고, 지휘자와 성악가들은 스크린을 통해 서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입장 순서를 조율한다. ‘브레겐츠 방향성 음향 시스템(BOA, Bregenz Open Acoustic)’을 구축해 관객으로 하여금 가수가 무대 위 정확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인공적인 공간 음향을 구현한다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무대 위 성악가가 축제 극장 안의 지휘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띄운 스크린 ©ORF/Landesstudio Vorarlberg

브레겐츠 페스티벌 전경 ©kurt.hoerbst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위치한 오페라 바스티유의 메인 극장은 방음 구조물과 오케스트라 피트 음향 조정 등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거쳐 최대 130명의 연주자를 수용할 수 있는 피트를 갖췄다. 이 피트의 바닥은 작은 엘리베이터로 만들어져 있는데, 오페라·발레·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극장의 특성에 맞춰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따라 피트를 이동하거나 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피트 위에는 덮개를 씌울 수도 있다.

©Claude Lepaire

©Claude Lepaire
두바이 오페라
다운타운 두바이에 위치한 두바이 오페라는 세 가지 형태의 공간으로 무대와 피트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역동적인 무대를 연출할 수 있는 극장 모드, 전통적인 콘서트홀의 음향을 구현하는 콘서트홀 모드, 연회나 전시 등 행사를 위한 플랫 플로어 모드까지, 설계 단계의 가상 모델링을 거쳐 구현된 이동식 바닥·벽·천장 시스템을 통해 2,000석 규모의 극장이 2,000㎡ 규모의 넓은 평면형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동식 단상을 사용해 객석 바닥을 경사형에서 평형으로 변경하거나 회전식 측면 발코니를 통해 극장 모드와 콘서트 모드로 객석의 형태까지도 바꿀 수 있다.

©Dubai Opera

두바이 오페라 무대 전환 과정 영상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린버리 극장
원래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설계되었던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극장의 린버리 극장은 대규모 리모델링 프로젝트 ‘오픈 업’을 통해 공간을 재구상했다. 객석과 무대는 돌출형·정면형·횡단형·원형 무대·평면형 등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고, 가변형 오케스트라 피트와 전자음향 시스템을 적용하여 다양한 공연 형식을 구현할 수 있다.

린버리 극장, 오케스트라 피트 ©Robert Moore

린버리 극장, 플랫 스테이지 ©Robert Moore
한다 오페라 온 시드니 하버

연주자를 따라 훑어보는 2022년 ‘오페라의 유령’ 백스테이지 현장
호주 시드니의 대표적인 야외오페라 프로젝트 ‘한다 오페라 온 시드니 하버’ 또한 화려한 수상 대형 무대를 설치해 야외 공연을 진행한다. 특히, 2022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공연에서는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무대 아래에 특별하게 지어진, 일명 ‘지하 세계(Underworld)’라고 불리는 스튜디오에서 연주했다. 약 120㎡에 달하는 이 피트에서는 악기 관리에 적합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에어컨 두 대가 항상 가동되며, 지휘자는 인이어 모니터와 비디오 화면을 통해 성악가들과 소통한다.

한다 오페라 ‘오페라의 유령’(2022) ©Hamilton Lund


공연을 통해 만난 피트의 세계
뫼르비슈 호수축제의 ‘라 카지 오 폴’
보랏빛 계단 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노래하다
글 이선옥(오스트리아 통신원·코리아 리 문화예술원 대표) 사진 뫼르비슈 호수축제

뫼르비슈 호수축제 뮤지컬 ‘라 카지 오 폴’ ©Kurt Pinter
노이지들러 호수의 여름은 늘 조금 비현실적이다. 해 질 무렵까지 따뜻한 물속을 걷는 사람들, 느릿하게 수면을 가르는 오리, 습기를 머금은 공기 너머로 거대한 무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주의 이 호숫가에서 열리는 뫼르비슈 호수축제는 올해 삶을 긍정하는 무지갯빛 뮤지컬 ‘라 카지 오 폴’을 선택했다. (7월 16일 관람)
무대의 첫인상은 단연 압도적인 ‘크기’다. 무대미술가 발터 포겔바이더는 중앙에 황금빛 새장을 세우고, 그 주위를 약 1km 길이의 LED 조명이 들어간 보랏빛 쇼 계단으로 가득 채웠다. 조르주와 알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실내극적 장면에서 이 광활한 양쪽 공간이 비어 보일 때, 안드레아스 게르겐의 연출은 이 과제를 속도와 인물의 움직임으로 돌파한다. 화려한 레뷰(노래, 춤, 모놀로그 등 오락거리가 가득한 일종의 촌극) 장면에서는 300벌이 넘는 의상과 240개의 가발, 50여 명의 출연진이 만드는 압도적인 장관을 한꺼번에 밀어붙이고, 두 인물이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시선을 중앙으로 좁힌다.
그러나 이 작품이 끝내 관객의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쇼가 멈춘 뒤 드러나는 인물의 외로움과 사랑이다. 그 중심에는 예술감독이자 18년 만에 알빈·자자 역으로 돌아온 알폰스 하이더(1957~)가 있다. 그는 노래의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말과 호흡, 표정으로 인물을 설득한다. 그 정점은 ‘아이 엠 왓 아이 엠’이다. 화려한 무대가 잠시 뒤로 물러서고, 한 사람의 생애에서 길어 올린 “나는 나다”라는 문장은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처럼 들린다. 이 작품이 성소수자와 드래그 문화를 다루면서도 특정 집단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 자이베르트(1979~)가 분한 조르주는 안정적이고 매끄럽고, 티모테우스 홀베크(2000~)는 아들 장 미셸을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그리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장면을 이끈다. 알리오샤 조르제 웅구르(1999~)는 가정부 야콥의 과도한 몸짓과 정확한 타이밍을 결합해 등장마다 웃음을 만들어낸다. 보수 정치인 에두아르 딩동 역의 마티아스 슐룽(1971~)은 굳은 표정과 어색한 몸놀림으로 인물의 위선을 희극적으로 드러낸다.
톰 비터리히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이 거대한 무대를 단단히 받친다. 40인조 편성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브로드웨이 사운드는 레뷰 장면에서 힘 있게 전진하고, 대화 중심의 장면에서는 배우의 호흡 뒤로 물러난다. 뫼르비슈가 약 10년 전부터 도입해 사용중인 ‘Follow-Me’ 시스템은 이러한 소리의 균형을 이루고 관객이 발화하는 인물의 위치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일조한다. 이는 배우의 위치를 추적해 그 위치에 맞춰 음향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환기·냉방·제습 시설을 갖추고 외부와 철저히 분리된 전용 오케스트라 공간에서 연주가 이루어진다는 점도 오케스트라가 일정한 음악적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게끔 돕는다.
‘라 카지 오 폴’은 1973년 장 푸아레(1926~1992)의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와 뮤지컬로 이어지며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변화를 함께 기록해 온 작품이다. 이번 뫼르비슈 프로덕션은 그 역사를 거대한 쇼로 확장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중심에 남겨둔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객석을 향해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는 알빈의 얼굴, 그리고 다름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대신 이해의 출발점으로 바꾸는 한 편의 코미디다. 뫼르비슈의 여름은 올해도 화려하지만, 그 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었다.

©Seefestspiele Mörbisch
Part.3 피트 속 1일 동행 취재기
피트 속에선 어떤 일이 이뤄지고 있을까?
국립오페라단 ‘마술피리’ 공연의 리허설 현장으로 톺아보는 피트 안의 상황

우리가 마주하는 공연의 시작은 대개 평일 저녁이나 주말 오후이지만, 공연장은 그보다 더 이른 시간부터 공연 준비를 위해 바쁘게 돌아간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사용되는 공연일 경우 그 규모가 작지 않아 더욱 많은 준비가 뒤따른다. 과연 공연을 앞둔 오케스트라 피트의 하루는 어떻게 움직일까? 그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글·사진 최성혁 기자
공연장안전지원센터에 따르면 국내에는 적어도 1,4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공연장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중 피트가 설치된 공연장은 얼마나 될까? 이를 공식적으로 집계한 자료는 없으나, 서울 시내의 공연장만 살펴봐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CJ 토월극장·세종문화회관 대극장·LG아트센터 LG시그니처홀 등 주로 오페라·발레·뮤지컬을 수행하는 1,000석 이상 규모의 공연장들은 물론, 구로아트밸리·금나래아트홀·강북문화예술회관 강북소나무홀과 같은 600석 이하 규모 중에서도 피트가 설치된 공연장들이 존재한다.
서울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오페라 전문 공연장인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대구오페라하우스,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부터, 광주·대전·안동·의정부·제천·진천·천안·청주·화성의 예술의전당, 과천시민회관 대극장,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소극장,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당진문예의전당, 공주문예회관, 태백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2,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등 피트가 설치된 극장의 수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수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공연장의 피트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기자는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국립오페라단 ‘마술피리’(8.7)의 리허설 현장 취재를 통해 피트에서의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 공연 주체인 국립오페라단과 과천시민회관 무대 관리 측, 공연에 참여하는 연주 단체 등 다양한 관계자의 협조와 허가로 가능했던 취재였다)
#오전 10시
무대 세트와 의상 및 장비 등은 이미 전날에 반입 및 세팅이 완료된 상황. 그러나 오케스트라 피트만큼은 당일 오전에 세팅이 이뤄졌는데, 직전 리허설이 피아노 반주만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극장의 피트는 대부분 승강이 가능한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 과천시민회관에서도 마찬가지로 피트 바닥을 무대 높이까지 올린 채 세팅이 이뤄졌다.
공연 주최 측과 극장은 사전 미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무대배치도를 공유하지만, 실제 현장 세팅 과정에서는 사전에 기획한 배치도와 실제 배치에 약간의 차이가 생긴다. 현장의 음향과 연주자들의 동선 등이 추가로 고려된 결과다.
무대 관리 인력은 물론 국립오페라단 사무국 관계자, 악단 관계자 모두가 이른 시간부터 투입되어 피트 배치를 진행했다.
기획 단계에서 목관과 현악 사이에 놓일 예정이었던 첼레스타는 최종적으로 팀파니와 콘트라베이스 쪽으로 이동했다.
#오전 11시 30분
세팅이 완료된 피트의 하강 이후 그 주변으로는 펜스와 바리케이드는 물론 안전 조명까지 둘렸다. 피트는 ‘높은 단차’라는 특성으로 인해 무대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시설 중 하나에 속한다. 국내에서는 2011년 지휘자가 피트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사고가 발생한 이후로 피트 안전 관리에 대한 중요성이 크게 대두됐다. 그 이후로도 2018년에 피트 추락사가 다시 발생했으며, 2025년에도 리허설 진행 중 무용수가 추락하여 중상을 입는 사고가 이어졌다.
피트 주위에 설치된 안전장치들은 얼핏 과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최근까지 이어진 사고 사례들을 생각해 볼 때, 극장 입장에서 예민한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피트를 둘러싼 수많은 안전장치. 체인 펜스는 물론 바리케이드와 번쩍이는 안전 조명 장치들이 눈에 띈다.
#오후 12시 30분
극장의 점심시간으로 관계자들이 자리를 비운 가운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피트 입장은 12시 30분부터 진행됐다.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은 피트 출입로가 객석과 연결되는 구조인데, 높지 않은 출입 계단에서도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관계자의 출입 허가가 난 뒤부터 단원의 출입이 허용된다.
피트 내 좌석과 악기 배치가 조밀한 만큼 단원들은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다소 세심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워밍업 과정에서도 첼로·더블베이스 주자들이나 트롬본 주자들의 경우 활과 슬라이드의 부딪힘에 신경 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피트로 진입하는 계단. 낮은 단차지만 악기를 들고 이동하는 단원들에게는 언제나 사고의 우려가 존재한다.

어두운 공연장 특성상 보면대 램프의 설치로 많은 전선이 놓이는데, 연주자들이 이동할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후 1시
연주자가 모두 착석한 후, 지휘자는 리허설을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피트를 비추는 조도를 점검했다. 최초 70%로 세팅한 조명은 단원들에게 다소 어두웠던 관계로 85%로 조정되었다. 또한 지휘자는 단원들에게 보면대 램프가 뜨거우니 접촉에 주의해 달라고 당부한 뒤 비로소 리허설에 돌입했다.
무대에서는 지휘자가 정면으로 보이긴 하지만, 출연자의 위치나 무대 세트로 인해 지휘자가 시야에서 가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어느 시야에서도 지휘자가 보일 수 있도록 사이드 모니터를 설치한다.

피트에 착석하는 단원들의 모습. 무대 상단에서는 스태프들이 안전장치를 철수하고 있다.

피트의 양 끝에는 지휘자를 비추는 사이드 모니터가 설치된다.
#오후 4시 30분
리허설이 끝나자, 스태프들은 곧장 안전장치를 설치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많은 인원이 무대 위아래를 오가는 상황에 안전 관리는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무대가 모두 비워진 후에야 공연을 위한 장막이 내리고 안전장치가 걷히며 관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제 피트 속 환경에 적응을 마친 지휘자와 단원들에게 남은 몫은 본 공연에서의 연주를 잘 수행해 내는 것이다.

리허설이 끝난 직후에도 피트 안전장치의 설치는 최우선적으로 이뤄진다.

Part.4 피트 속의 지휘자들
낮은 곳에 우뚝 선 그들의 지휘봉
국립오페라단 ‘마술피리’ 공연의 리허설 현장으로 톺아보는 피트 안의 상황
오페라와 발레의 시작은 대개 무대 아래 ‘피트’에서 울려 나온다. 짙은 어둠 속 지휘자를 비추는 조명과 노란 보면대 불빛 사이, 수십 명의 연주자는 지휘자의 손끝과 무대 위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연을 떠받치는 심장인 오케스트라 피트의 풍경을 지휘자 이든과 지중배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글 유내리 기자
지휘자 이든
오페라 무대 아래에서 돋아나는 단단한 유대감

©국립오페라단
지휘자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피트는 어떤 풍경일지 궁금하다.
피트 안은 어둡다. 무대 위 조명을 방해하지 않아야 해서 불빛을 조절하기는 하지만, 지휘자를 비추는 조명 하나와 단원들의 보면대 불빛에 의존한다. 객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피트 속 단원들은 무대 위 성악가가 갑자기 타이밍을 바꾸거나 연출이 달라져도 지휘자의 신호를 보고 즉각 맞춰 연주해 낸다. 수많은 소리와 호흡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흐름이 될 때, 피트 안에는 연주자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난다. 모든 집중과 호흡이 지휘자에게 온전히 모이는 순간, 콘서트홀과는 전혀 다른 특별함이 생긴다.
극장마다 피트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고 악기 배치도 달라진다. 공간의 구조가 실제 지휘와 연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며, 최적의 음향은 어떻게 찾는가?
높이 조절이 가능한 현대식 극장과 달리, 피트가 고정된 유럽의 전통 극장에서는 포디움의 높이를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한다. 무대 위 성악가나 합창단, 무용수와 자연스럽게 눈을 맞출 수 있어야 하고, 무대 위 연주자들 역시 불편함 없이 지휘자의 팔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트의 깊이와 넓이, 무대와의 거리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음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 가는 극장에 들어서면 먼저 양 끝의 거리와 포디움에서 벽까지의 폭을 확인한다. 이 공간을 파악해야 수십 명의 단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피트의 가로 폭이 길면 양 끝 연주자의 소리가 도달하는 시간이나 단원들끼리 서로의 소리를 듣는 타이밍이 미세하게 달라지는데, 포디움에서 벽까지의 공간은 소리가 피트 안에 얼마나 울리고 갇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피트 안의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 아티스트를 동시에 이끌어야 한다. 시선과 귀를 어떻게 배분하며, 성악가로 무대에 섰던 경험은 지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악단과 무대 위 아티스트들까지 동시에 이끌어야 하기에, 비교적 무대를 더 많이 바라보며 지휘하는 편이다. 이탈리아 문화를 오랫동안 체화하고 과거 테너로 무대에 서본 경험은 성악가와 합창, 무용수의 표정과 몸짓을 깊이 읽어내고 공감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들이 멀리서도 지휘자를 보며 안심하고 편안하게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도록 계속 눈을 맞춰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사나 타이밍을 직관적으로 던져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호가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지휘할 때 팔이나 몸동작을 더 명확하고 크게 하려고 노력한다.
대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는 미리 연습한 대로 나의 제스처와 호흡을 통해 무대의 타이밍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며 맞춰간다. 또한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와 약속된 것이 아니더라도 순간의 느낌을 통해 음악을 유연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다. 무대 위 상황에 맞춰 늘임표에서 음을 더 끌거나 템포를 미세하게 조율할 때, 지휘자가 무대의 호흡을 읽고 동작을 바꾸면 피트 안의 단원들도 그 찰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연주를 맞춘다.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여러 유럽 오페라 현장을 경험했다. 극장마다 피트의 성격이 어떻게 다르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극장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극장들은 대부분 ‘말굽형’ 구조로 지어졌다. 피트는 기본적으로 극장의 크기와 디자인에 맞춰서 조성되지만, 극장 고유의 울림에 따라 피트의 크기·넓이·길이·깊이가 저마다 다르게 설계되었다.
대표적으로 ‘라 보엠’ ‘가면무도회’ 등을 지휘했었던 오르비에토의 루이지 만치넬리 극장은 600석 규모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전통 말굽형 극장인데, 아담한 크기이지만 소리가 따뜻하고 긴밀하게 모이는 특성이 있다. 반면,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했고 올해 11월 ‘리골레토’ 공연을 앞둔 남부의 대극장, 레조 칼라브리아 칠레아 극장은 1,500석 규모에 피트의 크기도 훨씬 크고 소리가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울림을 가졌다.
이처럼 소리가 잘 빠져나가도록 피트가 넓고 얕게 되어 있거나, 반대로 소리를 부드럽게 모아주기 위해 깊고 좁게 되어 있는 등 저마다 피트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지휘자는 극장마다 가진 고유의 울림을 빠르게 파악하고, 공간에 맞춰 소리의 밸런스를 조율해야 한다.

2024년 국립오페라단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피트에서 지휘하는 이든 ©국립오페라단
오페라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도 적지 않을 듯하다. 이럴 때 지휘자는 무대와 피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늘 생긴다. 성악가가 가사를 잊거나 무대 연출의 타이밍이 어긋날 때도 있고, 지휘자 모니터를 미처 보지 못해 시작 순간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유럽의 전통적인 극장에서 음악 코치들은 지휘자나 부지휘자가 없는 리허설에서 지휘를 대신하기도 하고, 무대 뒤에서 아티스트들을 살피는 ‘마에스트로 델 팔코’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무대 양옆에서 가사를 알려주는 ‘수제리토레(프롬프터)’나 조명 타이밍을 조율하는 ‘마에스트로 디 루체’의 역할까지 함께 겸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연출팀과 음악팀의 역할 구분이 다르게 정착되어 있다 보니, 지휘자가 포디움 위에서 더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휘를 하면서 무대 위 성악가들과 함께 오페라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입모양으로 부른다. 일종의 수제리토레처럼 원래 가사보다 아주 미세하게 먼저 입모양을 보여주며 다음 가사를 짚어주는 것이다. 리허설에서도 지휘자는 각 배역의 노래와 대사를 충분히 숙지하고 직접 불러가며 연습을 이끌어야 한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오페라 지휘자의 기본적인 소양으로 여기며 음악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교육 받는다.
실제로 지휘했던 공연에서도 성악가가 순간적으로 가사를 잊거나 타이밍을 놓쳤을 때, 조금 먼저 보여주는 나의 입모양을 보고 다시 템포를 찾거나 가사를 기억해 노래를 이어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지휘자가 끊임없이 무대를 바라보며 성악가와 호흡하고 있어야 돌발 상황에서도 연주자가 포디움을 보고 곧바로 다음 소리를 찾아갈 수 있다.
최근 오케스트라를 무대 위로 끌어올리거나, 기술을 활용해 피트 밖 떨어진 공간에서 연주하는 연출도 시도되고 있다.
일반적인 풀 프로덕션 오페라에서는 사실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오는 연출을 보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연출을 최소화한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나 소극장 앙상블, 혹은 피아노 반주 프로덕션일 때 주로 쓰이는 방식이다.
예외가 있다면 작곡가가 무대 위나 뒤에 특별 악단을 따로 올리도록 악보에 명시해 둔 경우다. 오페라에서는 이를 ‘반다’라고 부르는데, 무대 위에 배치하는 ‘반다 술 팔코’나 무대 뒤에 숨겨두는 ‘반다 인테르나’ 같은 식의 무대 음악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휘자가 피트 정중앙 포디움에 배치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자리가 바로 가까운 오케스트라와 멀리 있는 무대 아티스트들의 시선과 소리가 교차하는 중심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서야만 양쪽 모두와 눈을 맞출 수 있고, 성악가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균형을 조율할 수 있다. 무대 뒤나 옆에서 일하는 보조 지휘자들과 스태프들에게 제스처로 정확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페라는 무대 위 아티스트들과 피트 안의 단원들이 매 순간 실시간으로 타이밍을 맞추며 함께 만드는 라이브 공연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서 화면으로 지휘자를 보여주고 스피커로 소리를 전달한다고 해도, 같은 극장 안에서 직접 체감하는 아티스트 간의 미세한 소리 균형과 실시간 호흡은 기계만으로 대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피트는 미래에도 오페라 무대에서 항상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전통이자 기본 구조로 남을 것이다.
지휘자 지중배
말 없는 발레의 중력을 음악으로 받치는 방법

©Andreas Birkigt
처음 발레 공연의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극장 지휘자로 첫발을 내디뎠던 12~13년 전, 컨템퍼러리와 고전 발레를 연달아 맡으며 발레 음악과 만났다. 당시 늘 서던 극장 피트의 포디움이었지만, 발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오페라 이상으로 무대 위 움직임, 즉 무용수의 신체적 컨디션까지 읽으며 실시간으로 호흡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협업’이 주는 긴장감이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오페라나 심포니와 달리, 발레 피트에서는 시선 처리와 악보 활용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무용수의 큐를 기록하는 방식과 포디움에서의 실제 지휘 과정은 어떠한가?
심포니나 오페라는 단원들과 제스처와 눈빛을 통해 실시간으로 음악을 유연하게 이끌고, 무대 위 성악가에게 입 모양으로 가사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발레 피트에서 지휘자의 시선은 대부분 무용수의 신체를 향한다. 연속되는 3분 안팎의 짧은 곡들 사이에서 순서가 꼬이지 않도록 악보 전면을 미리 클립으로 집어둔 채 지휘에 임하기도 한다. 연주 중 악보나 오케스트라를 쳐다볼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기에, 전체 안무의 흐름과 타이밍을 머릿속에 완벽히 외우려 하는 편이다. 또한 무용수들에 따라서 각각 해석 차이를 반영해 도약·착지·리프트 등 기술적 동작이 이뤄지는 정박과 변박, 음의 길이감 및 아티큘레이션을 악보 위에 시각적인 부호와 메모로 기입하기도 한다.
지휘자의 자리에서는 무용수의 전신이 얼마나 보이며 사각지대는 어디에 생기나?
현대식 극장들은 오케스트라 피트의 높낮이를 엘리베이터처럼 승강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발레 공연에서는 무대 세팅 단계부터 지휘자가 직접 피트 높이 조정을 함께 진행한다. 무용수들은 무대 좌우 양 끝인 상수(Stage Left)와 하수(Stage Right)의 깊은 구석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미리 피트에 올라 무대감독과 논의하며 상수와 하수 맨 끝자리에 선 무용수의 발 위치까지 또렷하게 보일 때까지 피트의 높이를 미세하게 조율한다.
도약의 찰나를 받쳐 올리는 지휘
발레에서는 ‘박자’가 특히 엄격하다. 악보에 적힌 박자와 안무가 요구하는 박자, 그리고 실제 무용수가 편안하게 춤출 수 있는 박자가 서로 다를 때도 있을 텐데.
이 부분에서는 고전 발레의 틀을 만든 ‘마리우스 프티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티파는 차이콥스키·루트비히 민쿠스 등 음악가들과 작업하면서 고전 발레의 안무 구조와 음악의 관계를 정교하게 확립한 인물이니까. 예를 들어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콘서트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내게 박자와 해석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발레 포디움에서는 무용수의 중력·체중·회전 속도라는 물리적 조건 때문에 매우 엄격한 규칙성이 부여된다. 결국 지휘자의 역할은 고전 발레가 확립해 놓은 확고한 틀 안에서 유연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프로덕션마다 안무가가 연출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다르고, 무용수의 체형과 컨디션에 따라 최적의 템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허설 과정에서는 안무가, 무용수와 논의를 통해 타협점을 찾고, 본 공연에서는 무용수의 미세한 호흡과 속도를 포디움에서 즉각적으로 읽어내며 실시간으로 템포를 유기적으로 살려낸다. 정해진 틀 안에서 무용수가 가장 아름답게 날아오를 수 있는 박자를 찾아주는 것이 발레 지휘의 핵심이다.
같은 안무와 음악이라도 무용수가 달라지면 음악 역시 달라지는가?
무용수가 달라지면 음악도 달라진다. 드라마틱한 마임과 서사가 흐르는 대목에서 스토리를 중심에 두고 음악을 조각해 나가는데, 이때 나는 흡사 판소리의 고수처럼 무용수가 극에 몰입해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음악을 이끌기도 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대에 오케스트라를 맞춰가기도 한다. 다만, 무용수에게 맞추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음악을 듣고 직관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며, 무용수에 따라 바닥의 탄력과 미끄러움을 다르게 느끼고 극장 컨디션에 따라 신체 변화를 느끼므로 무대 리허설 때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한다.
도약의 높이, 체공 시간 등 고난도 테크닉이 요구되는 대목에서는 오케스트라와 무용수의 호흡이 더욱 정교해야 할 터다. 실제 무대에서 이를 어떻게 조율하나?
고난도 기술 장면은 가장 정교한 조율이 요구된다. 무용수가 점프를 위해 바닥을 차기 직전의 도움닫기, 공중에 머무는 체공 시간, 착지 순간은 신체 조건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회전 테크닉인 ‘푸에테’가 대표적인 예다. ‘백조의 호수’ 중 오딜의 32회전 장면에서는 무용수가 첫 턴을 돌 때의 속도를 포착한 뒤, 중심축이 무너지지 않도록 템포를 단단히 잡아 고정해 준다. 최근 지휘했던 ‘지젤’ 공연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역의 무용수 전민철 등을 비롯해 회차마다 다른 무용수들이 올라섰는데, 알브레히트가 허공에서 다리를 교차하며 20회 이상 연속 점프를 뛰는 ‘앙트르샤 시스’ 장면에서 도움닫기의 느낌과 공중에 떠서 다리를 교차하는 체공 시간이 무용수마다 제각기 달랐다. 이때 나의 역할은 무용수가 바닥을 차고 올라갈 때(동시에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정확하게 강박을 실어주어 그 힘으로 다음 도약의 탄력을 받게 해주는 것이다. 반복되는 격렬한 점프 속에서 무용수의 체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음악으로 받쳐주고 이끌어주었던 그 순간은 포디움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한 희열로 남아 있다.
함께 완성하는 피트와 무대의 동행
공연 중 동작이나 리프트 타이밍이 어긋나는 등 돌발 변수가 발생했을 때 피트에서는 어떤 판단이 내려지는가?
무대 예술의 특성상 동선이 짧아지거나 길어지고, 리프트 타이밍이 지난 공연과 다르게 바뀌는 자잘한 변수들은 늘 존재한다. 이는 라이브 공연이 지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요소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림 없이 연주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휘자가 당황하여 템포를 급격히 바꾸거나 머뭇거리면 무대 위 무용수는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음악이 기준점을 단단히 지켜주어야 무용수 역시 동요하지 않고 빠르게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용수와 지휘자가 ‘서로 맞춰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과적으로 ‘함께 간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사전에 약속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호흡 속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려 들어가듯 발레 역시 이 방식으로 완성된다.
특히 오케스트라와 연주 경험이 많은 베테랑 무용수들은 포디움의 지휘를 감각적으로 대단히 잘 읽어낸다. 서로를 잘 아는 무용수와 포디움이 만나면 무대 위에서 깊은 배려와 교감이 생긴다. 무용수는 지휘자가 던지는 예박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지휘자 역시 무용수가 공중으로 뛰어오르기 직전 도움닫기하는 타이밍을 알아차린다. 피트와 무대가 그 찰나의 순간을 서로 기다려주고 받아주는 호흡이야말로 발레 피트가 지닌 참된 매력이다.
그렇다면 발레 포디움 위에 선 지휘자와 가장 뛰어난 예술적 시너지를 발휘하는 무용수는 어떤 성향을 가진 무용수인가?
자신의 배역과 연기에 완전히 몰입해 음악의 흐름을 능동적으로 타며 무대를 주도하는 무용수를 만날 때 최고의 합이 탄생한다. 콘서트홀의 협연자가 지휘자나 오케스트라에 지나치게 맞추려 친절을 베풀다 보면 정체성을 잃고 연주가 흐트러지듯, 발레 역시 지휘자의 박자에 수동적으로 맞추려는 무용수와는 깊은 호흡을 나누기 어렵다. 자신의 무용과 서사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무용수의 에너지를 오케스트라가 실시간으로 받치고, 무대와 피트가 주도적인 에너지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완성도 높은 예술적 시너지가 일어나는 법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잠자는 숲속의 미녀’ 리허설(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