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그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김세현 피아노 독주회
9월 6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작년 롱티보 콩쿠르 우승 이후 올해 첫 음반까지 발매한 피아니스트 김세현(2007~)이 발매 기념 독주회를 선보였다.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와 쇼팽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포문을 연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에서는 1악장부터 ‘음표 한 톨조차 남기지 않고 재료로 쓰겠다’라는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모든 성부에 독립적인 생동감을 부여하는 그만의 방식, 강조할 음형을 미세한 엇나감으로 드러내는 표현법이 인상적이었다. 다소 수수께끼 같은 2악장에 이어 3악장에서는 사랑스러운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4악장에서 김세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무대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었을까, 작품 속에서 충분히 노닌 결과였을까? 기자가 본지 9월호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슈베르트에 대해 “역경에 맞서기보다 잠시 피해 있으려는 모습이 너무도 인간적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슈베르트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궁금해졌다.
쇼팽의 작품으로 구성된 2부의 시작은 ‘뱃노래’로 열렸다. 김세현의 해석은 독특했다. 연주 초반에는 다소 강한 입체감에 일말의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곡이 진행될수록 그가 노를 저어가는 이야기는 점점 짙은 호기심을 자아내며 끝내 기자를 완벽히 설득했다. 이어서 그는 쇼팽 ‘12개의 연습곡’ Op.25 전곡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주선율이 부드러웠던 1번에 이어, 군데군데 자신의 붓끝을 남긴 2번, 반복되는 음형 안에서 아티큘레이션의 대비를 극대화한 3번까지는 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날카로웠던 4번, 시작과 끝의 표정을 극명하게 바꿨던 5번에 이어, 6번에서는 빠른 오른손보다 왼손의 흐름이 도드라졌다. 애수에 찬 7번은 ‘뱃노래’에서와 같은 모든 성부의 입체감이 짙은 농도로 침잠했고, 명랑한 8·9번은 분위기를 전환했다. 매 순간 확실한 이야기를 드러낸 10번에 이어,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11·12번은 쉼 없이 몰아붙였다.
공연의 백미는 앙코르에 있었다. 사실상 본 공연 ‘3부’에 가까웠던 앙코르에서 김세현은 짐을 한결 덜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연주한 작품은 그가 음반에 수록한 작품을 포함해 10곡에 이르렀고 러닝타임만 40분에 달했는데, 김세현은 한 곡을 마칠 때마다 완전히 퇴장하지 않고 문간에서 바로 몸을 돌렸다. 본 공연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장난기 많은 스무 살 청년의 모습에 관객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층 가벼워 보였던 그의 연주에는 오히려 다채로운 표정이 드러났다. 어쩌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진짜 김세현’은 그 40분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글 최성혁 기자 사진 크레디아
스스로 복을 받는 자의 춤사위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9월 10~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윤혜정(예술감독·안무)/이단비(대본)/이하느리(음악)/기무간·최태헌·박정훈(조안무·출연)/미디어아트(장철수)/의상디자인(민천홍)/김율희(판소리·작창)/서울시무용단
인간의 고통은 초월적 존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치유될 수 있을까. 서울시무용단 단장 윤혜정이 예술감독 겸 안무를 맡아 선보인 창작무용극 ‘무감서기’는 이 질문에 역동적인 움직임과 다섯 색의 화합으로 답했다. 서울굿을 이루는 여러 순서 중 막바지에는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녀의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데 이를 ‘무감서기’라고 한다. 이 대목이 전통무용과 음악, 오방색이 결합된 현대의 예술과 만나 한 인간이 내면을 성찰하는 과정으로 재탄생했다. (9월 10일 관람)
남산서울타워와 무녀를 비추는 영상으로 제1장 ‘흑(黑)의 눈물’이 시작됐다. 이어진 무대 전반에서 무용수들은 연신 손을 모아 위로 뻗는 자세를 반복했다. 하늘에 소망을 비는 이 전형적인 행위는 무용수 개개인의 염원이 모인 하나의 현대적 제의(祭儀)처럼 어우러지며, 가장 개인적인 내면의 갈등이 모이고 해소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스스로 복을 받는다’라는 무감서기의 근본적인 의미가 이 단순한 행위로부터 퍼져 나간 것이다. 이하느리(2006~)의 음악은 이 의지의 몸부림을 소리로 풀어냈다. 실로폰 풍의 전자음에 이어 등장한 무녀의 방울 소리, 가야금·꽹과리·징의 파편적인 음향, 그리고 이 소리들이 반복되며 만들어지는 긴장과 이완은 제2·3장의 ‘황(黃)-청(靑)-적(赤)’의 색상을 따라 전개되는 고통과 기억의 움직임을 쫓으며 관객의 무의식에 뚜렷한 감정적 파동과 한국적 인상을 남겼다.
소리꾼 김율희(1988~)의 무반주 독창과 기무간(1993~)의 춤으로 무대를 채운 제4장 ‘백(白)의 눈물’은 작은 요소들이 거듭되며 박진감 넘치던 이전 장과 대비되어 한 사람의 거대한 음성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선녀를 연상케 하는 구름 같은 의상을 입은 소리꾼은 “이고 지고” “그리 오래 버텼구나”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직관적인 위로의 말을 전했고, 전통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현대무용에 판소리 한 대목이 삽입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리의 흐름에 맞춰 섬세한 안무를 펼치던 무용수(기무간)가 고통을 내려놓듯 벗어놓은 옷가지는 마치 허물처럼 다른 이에게 안겨 무대에 남았고, 무용수는 다섯 개의 문 중 하나로 걸어가며 다음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다. 흩어져 있던 색상과 감정에서 ‘나’라는 존재로 시선이 옮겨지며 명확한 극적 전환점이 제시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쌓인 내적 생동감은 마침내 제5장 ‘무감서기’에서 해방의 난장으로 이어졌다. 색상별 9명의 무용수가 모여 이룬 45명의 대규모 군무는 오방색이 조각조각 한 데 모인 의상과 함께 화합과 해방의 의미를 각인케 했다. 모든 움직임이 끝난 후 다시 등장한 영상에서 오방색은 여러 색의 채소가 한데 버무려지는 ‘샐러드’의 이미지로 전환됐고, 약 60분간 펼쳐졌던 강렬한 춤의 시간은 다섯 눈물의 ‘공존’으로 승화됐다. 마치 한낮의 꿈 같기도 했던, 스스로 한을 풀며 한바탕 이루어진 춤사위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소리로부터 각인된 한국적인 미(美)와 함께 강하게 마음에 남았다.
글 장지현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팍팍한 ‘뭍’ 위에서 일깨운 ‘무탈함’의 진가
국립창극단 ‘귀토’
9월 3~6일 국립극장 해오름

고선웅(연출), 유수정·한승석(공동작창), 이태섭(무대), 지경민(안무) 외/김수인(토자)·최용석(자라)·김우정(토녀)·우지용(용왕)·정미정(토할매) 외/장태평(지휘)
마치 달항아리처럼 풍성한 추석 선물 세트를 미리 당겨 받아 한아름 팔에 안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의 창극 ‘귀토’는 판소리 ‘수궁가’ 중 토끼가 겪은 고난을 묘사한 삼재팔란(三災八亂) 대목을 중심으로 재창작된 스핀오프 작품이다.
원전 ‘수궁가’에서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고 용왕을 속인 토끼, ‘토부’가 뭍으로 돌아온 뒤부터 본극은 시작된다. 주인공은 유명 인사 토부의 아들 ‘토자’다. 용궁을 탈출하자마자 독수리의 밥이 된 아버지와 포수에게 목숨을 잃은 어머니. 천애 고아가 된 토자는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온 바닷속을 오히려 이상향으로 여겨 제 발로 수국(水國)으로 들어간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셈이다. 하지만 물이나 뭍이나, 거기나 여기나 고단하긴 매한가지다. 운 나쁘면 총 맞고 독수리 발톱에 채여 가는 서글픈 토끼 신세는, 어쩌면 날마다 삶의 삼재팔란을 견뎌내는 나와 너일 것이다. (3일 관람)
배가 갈릴 위기에 처한 토자는 간사한 꾀 대신, 자신이 육지에서 겪은 서러운 팔란살이를 진솔한 소리로 풀어놓는다.
“왜물 조총 화약 덮사슬을 얼른 넣어 반달 같은 방아쇠 내달리는 토끼 정수리 노리고 꾸르르르르 탕” 그 소리를 들은 주꾸미와 전기뱀장어, 수중 생물들이 반응한다. “천지가 바뀌는지 물의 온도도 자꼬 올라 유랑하며 떠도누나 머물 곳 없이 떠도누나, 물이나 뭍이나 거기서 거기구나.”
수국 백성들도 저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제 신세를 하나둘 털어놓으며, 서로의 고단함을 깨닫는다. 심지어 싱싱한 간을 얻기 위해 ‘하루 편히 쉬라’며 선심 쓰듯 토자를 챙기던 용왕마저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며 참회한다. “내 이제 몸의 병이 아니라, 이 병든 수국과 내 오만한 마음부터 고쳐먹겠다!”
음악과 무대의 완성도 역시 빛을 발했다. 원작 ‘수궁가’의 느린 ‘범피중류’를 속도감 넘치는 자진모리 장단으로 바투 당겨 물 앞에 선 토자의 설렘을 극대화하고, 무대 양옆에 선 소리꾼들이 무릎을 굽혔다 펴며 “푸르르르 푸우, 싸르르르 쏴아” 하고 뱉어내는 음절만으로 포말이 이는 바닷가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초연(2021년)과 재연(2022년)을 거치며 무르익은 삼연 무대에 날개를 단 것은 젊은 소리꾼들이었다. 2020년 입단동기인 김수인(토자), 김우정(토녀)은 찰떡같은 호흡으로 통통 튀는 토끼를 선보였고, 최용석(자라)은 숨겨둔 공력과 깊은 소리를 마음껏 터뜨리며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여기에 깡충거리는 토끼, 흐느적대는 주꾸미, 갸우뚱거리는 자라의 움직임을 힙하게 스케치하여 재해석한 현대무용가 지경민의 위트 넘치는 안무가 더해지며 무대의 결이 풍부해졌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은 어디에도 없다”던 고선웅 연출의 말처럼, 환란이 멈추지 않는 세상일지라도 내 발밑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견뎌내는 것. 물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사냥개와 총성이 난무하는 ‘뭍’ 위에서, 토자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건 지금 딛고 선 현실의 ‘무탈함’이 지닌 진짜 무게가 아닐까.
글 유내리 기자 사진 국립극장
CLASSICAL MUSIC
히메노/룩셈부르크필 협연 마리아 두에냐스
바이올리니스트의 신(新) 에너지!
9월 11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세계 무대에서 눈부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스페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마리아 두에냐스(2002~)의 한국 데뷔 무대가 구스타보 히메노(1976~)가 이끄는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단연 두에냐스였다. 두에냐스는 서곡 없이 시작한 연주회의 첫 순서였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협연자로 등장했고, 화려한 붉은 꽃무늬 드레스로 인해 전체의 인상이 유독 밝게 돋보이면서 청중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도입부부터 펼친 긴 프레이징과 독특한 비브라토, 강한 힘이 실린 과감한 보잉에서 두에냐스만의 독특한 해석과 개성이 돋보였고, 음악을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두에냐스는 ‘조숙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카데믹한 해석의 틀을 벗어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아르페지오와 강렬한 도약, 정열적인 어택을 통해 브람스 협주곡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두에냐스의 연주는 음반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즉흥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로웠다. 작은 음정의 흔들림이나 정제되지 않은 리듬도 작열하는 그녀의 개성과 음악적 접근법에 압도당해 하얗게 연소되어 버렸고, 음악의 에너지는 더욱 강렬하게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마치 투우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긴장감 넘치던 제시부와 변화무쌍한 발전부를 거친 뒤 등장한 카덴차 또한 대단히 놀라웠다. 두에냐스가 직접 작곡한 카덴차는 풍부한 감수성과 남다른 기운을 가진 연주자의 창조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농염하며 전례 없는 화려함을 내뿜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미켈란젤로’의 음향은 카덴차의 설득력과 매력을 더욱 높여주었다.
조콘다 데 비토(1907~1994)가 연주한 브람스 협주곡 실황 녹음에서 느낄 수 있는 라틴적인 색채와 들끓다 못해 솟구쳐 오르는 열정을 두에냐스의 연주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다만 이러한 연주 스타일은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만하다는 것도 유념할 만했다. 특히 마지막 악장으로 갈수록 초반의 집중력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 순간적인 불완전함을 보정할 수 있도록 디테일을 안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점은 두에냐스가 진정한 비르투오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부분인 듯했다. 연주가 끝난 뒤 이어진 세 곡의 앙코르는 그녀의 장점과 연주력이 오롯이 살아난 연주였고, 그녀의 내한 리사이틀을 손꼽아 기대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역시나 정열적인 히메노의 지휘하에 룩셈부르크 필하모닉은 두에냐스의 루바토와 속도를 받쳐 주며 독주자가 돋보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후반부에 연주한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에서는 지휘자가 의도한 특징적인 박자와 강세를 통해 악단 특유의 음향을 뜨겁게, 그러나 안정적인 밸런스를 견지하며 달구어냈다. 이전 내한 오케스트라들이 보여준 경탄할 만한 드보르자크 해석과 견주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투명한 음향을 지닌 이 악단의 장점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레퍼토리로 한국에서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빈체로
최수열/서울시향 협연 크리스티안 베자위덴하우트
수렴하는 건반, 발산하는 오케스트라
9월 11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첫 내한한 크리스티안 베자위덴하우트(1979~)는 본 공연 이틀 전 세종체임버홀에서 하프시코드와 포르테피아노의 매력을 농밀하게 선보였다. 서울시향과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모던 피아노로 연주했다. 1악장 도입부에서 최수열은 관의 울림이 틀에 박히지 않도록 자유롭게 풀어줬다. 현은 싱그러웠다. 크리스티안의 첫 소절은 맑았고 약동감이 느껴졌다. 루바토와 장식음이 반짝였고 오케스트라, 특히 관악기와의 호응이 눈에 띄었다.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듯 균등한 음이 연속됐고, 피아노의 움직임이 명료하게 분절됐다. 카덴차에서도 피아노는 호기심 어린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수열은 손끝으로 긴장감을 최적으로 유지했다. 2악장은 비교적 빠른 템포로 진행됐다. 오케스트라는 약음으로 최대한 자세를 낮춰 피아노를 맞이했다. 피아노의 방향은 확실했다. 맑고 단단했고, 낭만적으로 늘어지지 않았다. 간결한 피아노는 작은 종소리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3악장에선 팀파니의 타격음이 경쾌했다. 쾌속의 템포 속에서 건반은 마음껏 뛰어놀았다. 크리스티안은 손으로 악보를 넘기며 곡의 탄력을 꾸준히 유지했다. 앙코르로 모차르트 모음곡 C장조 K399 중 알르망드를 들려준 크리스티안은 올해 서울시향의 빼어난 협연자로 기억될 듯하다.
2부의 시작은 서울시향이 위촉한 이하느리(2006~)의 ‘As if…… II(스크랴빈의 정원)’ 세계 초연이었다. 4대의 플루트·클라리넷, 2대의 하프를 비롯해 무대에 연주자가 가득 찬 대편성이었다. 커다란 악보를 들고 최수열이 등장했다. 타악기와 하프의 연주는 바위가 굴러 떨어지듯 갑작스러웠다. 현과 관은 앵앵대는 소리를 냈고, 현의 피치카토 등으로 혼돈은 이뤘다. 의성어로 표현하면 ‘꽥꽥 쿵쿵’ 소리와 탁구선수의 신발소리처럼 ‘끽끽’ 소리가 감돌았고, 일부분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 관악기들의 영국풍 연주에 이어 불협화음으로 번지더니 타악기들이 맹랑하고 분방하게 발산했다. 과거 축음기를 틀어놓은 듯한 부분을 지나 강렬한 총주와 시계가 느리게 가는 듯한 악구로 끝났다. 교향곡 4번 ‘법열의 시’ 등 스크랴빈의 작품들이 인용된 이 작품 바로 뒤에 ‘법열의 시’를 연주한 서울시향의 프로그램은 효과적이었다. 목관과 하프로 시작한 미미한 울림이 전체 관현악으로 번지고 피어나면서 창대해졌다. 실제 연주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음향과 배음, 잔향의 묘미가 홀을 뒤덮었다. 끈질기게 계속될 주제를 금관이 연주할 때 귓가가 환해졌다. 악장의 바이올린이 서늘하게 빛나고 플루트와 오보에가 응답했다. 금관이 부풀어 올라 발산하며 ‘데카당스’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 트롬본이 묵직하게 나오고 금관이 불타오르듯 음향을 토해냈다. 총주와 대비되는 하프와 첼로, 바이올린의 독자적인 음향이 귀를 잡아끌었다. 호화로운 금관 앞에서 타악기의 소리가 부서질 때도 최수열은 과장 없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오르간이 가세한 총주는 몸집을 키웠고, 최후는 우주 공간으로 빨려들듯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나. 스크랴빈을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는 역시 공연장에 가야 한다. ※ 10월 15·16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얍 판 츠베덴의 모차르트 ‘주피터’, 10월 23·24일(롯데콘서트홀 외), 얍 판 츠베덴의 모차르트 ‘레퀴엠’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서울시향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바이올린 독주회
혼자라서 더욱 완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9월 13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유튜브에 ‘하델리히’를 검색해 본 이가 있다면, 그의 공식 채널에 올라온 탱고곡 ‘포르 우나 카베자’를 보았을지 모르겠다. 영화 ‘여인의 향기’ 배경음악으로도 친숙한 이 곡을 그는 자신이 편곡한 바이올린 독주로 연주한다. 당일 연주 프로그램에 탱고는 없었지만, 아우구스틴 하델리히(1984~)의 무반주 독주를 듣는 동안 문득 그 영상이 떠올랐다. 흔히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하지만, 그는 혼자서도 완전하다고 할까. 무대 위 홀로 선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하델리히. 이날 공연을 관통한 것은 바로 그 단단했던 자족성이었다.
첫 곡 텔레만(1681~1767) 바이올린 환상곡 8번부터 그 성향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억지스럽게 긴장감을 주는 부분 없이, 악기의 본래 목소리를 믿고 부드럽게 소리를 내보내며 프레이즈를 곱게 연결했다. 그러면서도 단단해야 할 곳에서는 활털로 줄을 단단히 무는 느낌으로 소리의 밀도를 꽉 채웠다.
시대는 단숨에 20세기로 건너가 미국 작곡가 콜리지 테일러 퍼킨슨(1932~2004)의 ‘루이지애나 블루스 스트럿: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케이크워크’ ‘Blue/s Forms’가 이어 연주되었다. 흥겨운 가운데에도 매끄러운 음색을 잃지 않았으며, 추구하는 음량과 박자에 최적화되도록 정밀하게 계산된 보잉을 선보였다. 테크닉·음정·화성·리듬 등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하델리히의 바이올린 위에서는 그 모든 것이 수월해 보였다.
이어 외젠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5번에서도 정교한 활 분배와 프레이징, 또렷한 스케일이 이어졌다. 이자이가 남긴 여섯 곡의 소나타는 거칠고 야성적인 쪽으로도 워낙 넓게 펼쳐져 있는 작품이기에, 이토록 실크처럼 매끄러운 음색의 소나타가 오히려 신선했다.
미국 작곡가 마크 오코너(1961~)가 2020년 메뉴인 바이올린 콩쿠르를 위해 쓴 작품 ‘메뉴인 카프리스’가 다음 순서였다. 피들과 기타, 만돌린을 두루 다뤄온 오코너는 ‘뉴 아메리칸 클래식’이라 불릴 만큼 미국의 민속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흐름을 결합해온 작곡가다. 작품은 무반주 음악의 정찬 중 상당히 강렬한 맛으로 다가왔는데, 이는 곡 안에 담긴 오코너의 위트와 지적인 유희, 그리고 마치 건반으로 스케일과 글리산도를 하는 듯 모든 음을 살리는 하델리히의 탁월한 기량이 부딪혀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활 컨트롤에 의해, 음량의 대조가 대단했던 파가니니 카프리스 19번과 16번이 순식간에 지나간 1부 50분을 마무리했다. 환호가 터진 객석에서는 악기 케이스를 곁에 둔 관객이나 턱에 바이올린 자국이 선명한 전공생들의 한숨 섞인 감탄이 간간이 들려왔다.
인터미션 후, 마지막 악장 ‘샤콘느’가 백미인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이 시작되었다. 앞선 1부에서 ‘기술적 어려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비르투오소의 면모를 보였다면, 바흐에서는 전혀 다른 주파수의 하델리히가 나타났다. 연주를 지배하던 것은 과시보다 절제였고, 기교보다 구조였다.
작곡가의 기보에 담긴 의도를 따르려는 의지와 자신이 특별히 중시하는 성부의 흐름을 확실하게 들려주려는 의지를 모두 만족시키고자 했다. 앙코르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3번 중 ‘라르고’가 연주되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빈체로
Contemporary MUSIC
과천시향 ‘콘서트시리즈5: 새로운 시대’
경계를 허물며 던진 새 질문들
9월 10일 오후 7시 30분 과천시민회관 대극장

새로운 시대를 빚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간과 공간을 겹치고 익숙한 것을 비틀며, 장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문다. 최재혁이 택한 열쇠는 ‘경계 허물기’였다.
최재혁은 으레 밝게 빛나는 무대 위 조명의 밝기를 낮추고 찰스 아이브스(1874~1954)의 ‘대답 없는 질문’의 느리고 고요한 현악의 코랄을 연주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지점, 객석 2층 난간에서 트럼펫이 질문을 던졌다. 일부 관객들은 트럼펫 연주자의 위치를 찾고자 두리번거렸으며 그로 인해 잠시 객석이 일렁였다. 어두운 조명과 예상을 깨는 트럼피터의 위치는 어쩌면 찰스 아이브스를 이용해 최재혁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작은 술렁임으로 그의 질문에 답했고, 최재혁은 지휘대에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어진 무대에서 최재혁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외르크 비트만(1973~)의 ‘콘 브리오’를 통해 익숙한 것을 비틀기를 시도했다. 작곡가는 플루트가 음정 없이 바람소리만 내는 ‘에어 사운드’ 등 낯설고 독특한 주법을 적극 활용해 음악의 익숙함을 걷어냈다. 지휘자 역시 폭발적인 총주와 갑작스런 침묵을 뒤섞어 새로운 울림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스승의 작품에서 자신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1부의 마지막 곡은 최재혁의 자작곡 ‘스트레이트 투 헤븐’의 오케스트라 버전 세계 초연이었다. 선명함보단 모호함으로 가득한 곡이다. 작품 곳곳에서 다채로운 색채의 소리가 쏟아지고, 한 자리에 머무는 법 없이 이내 성격을 달리하며 무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작곡자가 아끼는 향수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기 때문이다. 후각을 청각으로 다시 시각으로 옮겨 가는 듯 환상적인 색채감이 매력이다. 의도된 모호성은 양날의 검이었다. 맞아 떨어질 경우 해석의 여지를 넓히고 다채로운 시야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세부가 뭉개지며 음악적 흐름이 정체되었다. 오케스트라의 과감성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차라리 조금 연주가 어긋나더라도 지휘에 긴밀하게 반응했다면 훨씬 긴장감으로 가득한 무대가 됐을 것이다.
이스라엘 출신 아브너 도만(1975~)의 ‘얼어붙은 시간’은 2007년 완성된 타악기 협주곡이다. 마림바와 비브라폰을 비롯한 다양한 타악기가 전면에 등장하며, ‘인도 음악’ ‘아프리카 음악’ ‘가믈란’ ‘탱고’ 등 지정학적으로 다양한 음악의 경계가 허물어져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협연자로 무대에 오른 심선민은 시작부터 리듬을 폭발시키며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그의 연주에서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에너지의 폭발보다 그 에너지를 제어하는 능력이었다. 예컨대 모차르트의 시칠리아나에서 영감을 얻은 선율과 금속성 타악기의 울림은 전장의 총소리를 잠재우듯 고요하고 내밀하게 다가왔다. 연주 후반 드럼 스틱을 떨어뜨리는 돌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연주를 이어가는 노련함도 엿보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인과 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병원과 감옥을 구분하는 경계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경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질문이었다. 최재혁이 이날 선택한 프로그램 역시 끊임없이 경계를 흔들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굳이 하나의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질문이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밤이었다.
글 권고든(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김희영
THEATER
연극 ‘더 사운드 오브 맥베스’
소리로 재해석된 권력과 그 종말
9월 8~13일 대학로극장 쿼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맥베스’다. 세 마녀라는 신비로운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도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지만, 무엇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매우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짧은 장면이 연속으로 배치되어 속도감도 엄청나고, 특히 권력을 탐할 때와 파국을 맞을 때의 맥베스가 하는 말들은 감정이 가득 녹아든 시적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그 덕분에 ‘맥베스’는 권력을 주목하거나 논할 시기에 수많은 연출가에 의해 무대에 오른다.
이 뜨거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뜨거운 연출가와 만났다. 나이는 원로 대열에 합류했음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연출가 김아라(1956~)다. 그는 왜 지금 이 시기에 맥베스를 소환하는가? 극장과 연극의 범주를 넘어선 시도를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레 선보이는 김아라는 ‘맥베스’에도 역시 자신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의 2026 하반기 시즌 프로젝트 ‘쿼드, 연극의 질문들: 진화하는 텍스트’의 첫 작품으로, 텍스트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김아라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기획이다.
‘더 사운드 오브 맥베스’는 제목 그대로 무게중심을 소리로 옮겼다. 쿼드 극장의 객석을 4면으로 배치하고 무대 중앙에서 비켜난 자리에 피아노가 놓였다. 피아노 위에는 거대한 물체가 위태롭게 붉은 그물에 걸려 있다. 객석 가운데에 사각의 얕은 단이 놓였고 그 위에 붉은 줄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관객이 눈 둘 곳은 반대편 관객과 피아노뿐. 여기서부터 소리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강조되었다.
공연의 소리는 피아노와 배우들의 시적인 대사로 충만했다. 피아노는 단순한 배경음악이나 음향이 아니라, 맥베스의 또 다른 자아이자 내면이다. 피아노 연주와 연기를 겸하는 송용진이 맡은 ‘맥베스2’ 배역은 무대를 떠나지 않으며 연주와 함께 비밀스러운 독백을 내뱉고, 파멸하는 맥베스를 관찰하기도 한다. 또다른 ‘소리’인 배우들의 말은 원작의 대사를 다듬어 시를 듣는 듯 색다른 질감을 만들었다. 거기에 발성과 화술이 후배 배우들의 귀감이 되는 정동환(1949~)과 김성녀(1950~)가 맥베스와 그 부인을 연기하면서 소리의 층위를 겹겹이 만들어냈다.
원작을 소리에 집중해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으로도 ‘진화하는 텍스트’를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김아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소리들이 도달하는 끝점을 향해 있었다. 작품이 가리키는 말은 바로 ‘… 부질없는 인간의 헛소리’다. 공연 중간, 무대를 반으로 나누는 위치에 큰 투명 스크린이 내려와 역사 속 권력자들의 모습이 투사된다. 영구 집권을 꾀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들과 맥베스, 그리고 그의 소리를 겹쳐보니 이 모든 미사여구로 꾸며진 집착이 부질없는 헛소리라는 통찰에 도달한다. 연출가가 이 시기 맥베스를 소환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권력욕의 파멸을 다룬 텍스트를 소리 중심으로 해체하고, 그렇게 구현된 다층적인 소리도 부질없으며, 어떤 권력이든 미사여구로 꾸며지지만 결국 모두 부질없는 인간의 헛소리라는 것을 연극으로 보여준 연출가 김아라는 여전히 뜨거운 청춘이다. ※ ‘쿼드, 연극의 질문들: 진화하는 텍스트’ 시리즈_ 김광보 ‘옥상 밭 고추는 왜’(9.19~10.4), 김우옥 ‘혁명의 춤’(10.28~11.8), 이성열 ‘화염’(11.14~12.6), 한태숙 ‘서안화차’(12.16~27)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서울문화재단
셰익스피어(작), 김아라(재구성·연출), 임야비(각색)/정동환(맥베스1), 김성녀(맥베스 부인), 송용진(맥베스2), 박호빈(던컨) 외
FESTIVAL
화성특례시 남양성모성지 클래식 음악제
171년을 건너온, 주페의 ‘레퀴엠’
9월 11~13일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성당의 높은 천장 아래, 171년을 건너온 한 곡이 처음 한국의 공기를 울렸다. 제2회 화성특례시 남양성모성지 클래식 음악제의 폐막 공연에 오른 프란츠 폰 주페(1819~1895)의 ‘레퀴엠’이었다. “대곡을 올리되, 반드시 전곡을 한다”라는, 조희창 음악감독의 고집이 스며든 선곡이었다.
2025년 12월 첫발을 뗀 음악제는 페스티벌 앙상블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신박 듀오, 임동혁, 문태국의 무대를 거쳐 김선아 지휘의 바흐 ‘b단조 미사’ 전곡으로 닫혔다. 올해는 계절을 앞당겨 9월 11~13일 열렸다. 손열음의 ‘피아니스트 사전’이 문을 열고, 더블베이시스트 성미경과 피아니스트 김종윤, 페스티벌 앙상블의 ‘비발디, 빛나는 베네치아’가 뒤를 이었다. 마지막 13일에는 국립합창단과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가 주페 ‘레퀴엠’을 국내 초연했다.
주페는 우리에게 ‘경기병 서곡’과 ‘시인과 농부 서곡’으로 익숙한 작곡가다. 그는 1850년 세상을 떠난 스승이자 후원자 프란츠 포코르니를 기려 1855년 이 곡을 썼고, 그해 11월 22일 빈 피아리스트 교회에서 초연했다. 평생 극장에서 사람들의 웃음과 욕망을 음악으로 옮겼던 주페가, 이 곡에서는 죽음과 신을 바라본다.
이번 무대에서는 국립합창단 단장 겸 예술감독 민인기가 지휘하고 국립합창단과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췄다. 소프라노 박하나,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테너 김세일, 베이스 사무엘 윤이 독창진을 이뤘다. ‘레퀴엠 에테르남’의 낮은 기도에서 문이 열리고 ‘디에스 이레’에 이르니 음악의 체온이 순식간에 올랐다. 베이스가 이끄는 ‘투바 미룸’의 나팔은 심판을 알리는 신호처럼 성당의 높은 공간을 갈랐다. 격정의 순간일지라도 민인기는 서두르지 않았고, 국립합창단은 긴 잔향 속에서도 말과 발음의 윤곽을 놓치지 않았다.
작품의 골격을 이루는 성악의 짜임도 다채로웠다. ‘콘푸타티스’에서는 남성 4중창을 합창과 맞세웠고, ‘베네딕투스’에서는 네 독창자가 무반주로 노래하며 두터운 관현악의 질감을 잠시 걷어냈다. 무엇보다 주페 특유의 선율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상투스’와 ‘베네딕투스’를 지나 ‘아뉴스 데이’, 마지막 ‘리베라 메’에 이르는 동안 그 선율들은 듣는 이의 마음을 놓지 않고, 애도의 문장마저 어느새 노래로 번지는 것 같았다. 레퀴엠에 담긴 종교적인 무게와 금욕적인 엄숙함 사이에서도 부풀어 오르는 인간적인 온기에, 주페의 음악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런 그에게 극장과 성당은 생각만큼 멀리 떨어진 세계가 아니었던 듯하다.
이날 또 하나의 연주자는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이라는 공간이었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이곳에서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 소리는 잔향의 옷을 입고 오래 머물렀다. 죽음과 기억과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본래의 주소를 찾아온 듯했고, 성당의 ‘신자’로 들어온 누군가는 이 연주가 끝난 뒤 클래식 음악의 ‘관객’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가 남긴 것은 171년 된 작품 하나가 한국의 레퍼토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작품을 다시 잘 연주하는 일만큼, 아직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은 좋은 음악을 찾아 문을 열어주는 일도 음악제의 몫이다. 지난해 바흐, 올해 주페. 이 정도의 ‘고집’이라면 내년에는 어떤 작품의 문을 열지 기다려볼 만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화성시문화관광재단·박상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