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불화 3월 초 아바도가 2002년 이후 베를린 필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 소식이 알려졌다. 베를린 음악계 참새들의 입방아는 베를린 필 단원들과 지휘자 간의 갈등, 다시 말해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민주화 실패가 계약 연장 거절의 뒷사정이라는 이야기로 모아졌다. 아바도의 결정이 발표되자 한 베를린 일간지는 ‘베를린 필의 아바도 시대, 그 막을 내리다’라는 제목 하에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과연 베를린 필의 아바도 시대는 있었는가? 음악계에 전설적인 존재가 된 선배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의 무게를 극복하기 위해 8년간 여러 개혁적 시도를 벌여온 아바도에게는 불행히도 자기만의 시대가 허락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아바도의 베를린 필 시대가 4년이 남아 있건만 베를린 음악계의 관심은 그를 떠난 듯한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6월 5일 로린 마젤이 9년 만에 베를린 필 무대에 섰다. 경선 탈락 후 베를린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그가 아바도의 계약연장 거부가 발표되자 곧바로 스케줄을 조정한 것이다. 베를린 필 지휘봉을 둘러싼 베를린의 현지의 분위기는 조용한 가운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창단 500주년 맞은 빈 소년합창단 1498년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창단된 빈 소년합창단. 당시 궁정악단에 소속된 소년합창단이 활동을 시작한 지도 500년이 되었다. 현지에서 본지가 직접 만난 빈 소년합창단은 신이 선물한 천상의 화음을 아름답게 지켜나가고 있었다. 창단 500주년을 계기로 이들은 기념 음반 출시와 더불어 빈 음악축제 개막연주와 해외 연주회 등 뜻 깊은 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화려하고 다양하게 펼쳐갔다.
엘가의 ‘미완성 교향곡’ 세계 초연 1934년 에드워드 엘가는 총 141편의 스케치, 장수로는 130쪽에 달하는 교향곡 3번의 조각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분량만으로 따지면 작품을 거의 완성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998년 1월, 영국의 작곡가 앤서니 파인은 엘가가 남겨놓은 교향곡 3번의 스케치를 토대로 교향곡 3번을 완성시켰다. 엘가의 이 마지막 작품은 2월 15일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BBC심포니와 앤드루 데이비스의 연주로 세계 초연됐다. 56분에 이르는 연주가 끝나고 데이비스가 작곡가 파인의 손을 잡고 무대에 다시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힘찬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마도 그것은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작곡가인 엘가를 서거 후 64년이 지난 이날 에 다시 되살려놓은 파인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을 것이다.
갈리나 울라노바 3월 21일 타계 “겨울만 아니면 좋겠다, 겨울만 아니면…”이라며 추운 겨울에만 죽지 않았으면 하고 빌던 갈리나 울라노바는 겨울을 갓 넘긴 3월 21일 8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장례식은 그녀가 수십 년간 춤추고 가르치던 볼쇼이극장에서 3월 25일 거행됐다. 수천 명을 헤아리는 그녀의 제자들과 팬들이 몇 시간에 걸쳐 붉은 벨벳과 장례 화환으로 휘감겨진 관 속의 그녀 모습을 보려고 줄을 섰다. 볼쇼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천천히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예술인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은 영구차 위에 꽃을 올려놓고 때론 울고, 때론 박수를 치며 울리노바의 마지막을 기렸다. 20세기 전설의 퇴장을 기렸다.
헤르만 프라이 7월 23일 타계 독일 전후시대를 대표하는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뮌헨 근교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인 7월 13일 뮌헨 오페라 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독창회에서도 그의 건강은 최상으로 보였다. 그의 여전한 미성과 넘치는 활력을 확인했던 팬들은 갑작스러운 비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래는 지고의 기쁨’이라며 음악이 자신을 젊게 지켜준다고 말했던 프라이의 매력은 그 어떤 억지스러움도 없는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생전에 피셔 디스카우와 함께 독일 리트계를 찬란히 이끌었던 거장의 죽음은 곧 독일 음악사의 한 시대가 내리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