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벨라 슈타인바허의 코른골트·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집

비옥한 대지의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8월 1일 12:00 오전

놀라운 충격이나 예상치 못한 파격을 기대한다면 그녀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음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정성껏 연주해내는 그 성실성에 끌릴 것이다. 그리고 점차 그 풍만하고 폭넓은 음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버릴 것이다.
사실 아라벨라 슈타인바허는 그 세대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패셔너블한 감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활의 속도를 미세하게 조절해내는 세련된 보잉이라든지, 혹은 빠르고 감각적인 비브라토로 탐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새삼 ‘바이올린 연주의 정석’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활을 사용하는 현악기 연주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만한 충실하고 풍부한 톤, 그리고 음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성실한 자세는 펄먼과 주커먼을 비롯한 20세기 중반의 유태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연상시킨다.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그 강건한 톤에서 주커먼의 보잉을 연상할 수 있으며, 2악장의 주제를 구성하는 음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작품 자체가 담고 있는 서정성을 가식 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연주에선 펄먼의 노래하듯 명랑한 스타일이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밀도 높은 톤의 풍성함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이다. 음반으로 전해지는 톤의 밀도가 이 정도라면 실제 음악회장에서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는 과연 어떠할까?
“바이올리니스트 아라벨라 슈타인바허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를 마치 황금의 바다와 같이 반짝이고 믿을 수 없이 풍성한 소리로 연주했다.” 지난 6월 샤를 뒤투아 지휘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와 협연한 슈타인바허의 연주에 대해 ‘브리스베인 타임스’는 위와 같이 적었다. ‘황금의 바다’에 비유될 정도라면, 콘서트홀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는 황금빛 반짝임마저 전해주는 모양이다. 과연 그녀의 특별한 바이올린 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독일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슈타인바허는 일찍이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 재단의 후원을 받은 연주자다. 그 때문인지 슈타인바허의 연주 스타일은 무터의 초기 연주 스타일과 많이 닮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충실한 톤과 다소 느린 템포, 그러나 음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근성이 닮았다. 하지만 바이올린 톤 자체는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오로지 그녀만의 것이다.
슈타인바허의 톤을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아마도 느리고 폭 넓은 비브라토와 현에 강하게 밀착된 보잉에서 오는 초점 있는 소리라 할 수 있으리라. 사실 느린 속도의 비브라토는 자칫 잘못하면 진부하게 들릴 수 있으며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슈타인바허의 비브라토는 그 속도는 느린 반면 매우 폭넓고 충실하기에 그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마치 대지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비옥한 땅처럼, 그녀의 바이올린 톤은 그토록 비옥하며, 그 자체로 순수하며 꾸밈이 없다.
때때로 그 꾸밈없는 순수함이 쇼송의 ‘시곡’에선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감각적인 향취를 풍겨야 할 부분에서도 슈타인바허의 연주는 다소 고지식하다 할 만큼 정직하다. 프랑스 음악의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내기에는 그녀의 연주가 지나치게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순수함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선 장점으로 작용한다. 대개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에 주목하지만, 슈타인바허는 브루흐의 작품이 독일 협주곡 특유의 탄탄한 구조와 웅장함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악장에 대한 가벼운 서주로 여겨지곤 하는 1악장에서 특히 낮은 G선의 강력한 울림으로 중후함을 표현해내는가 하면, 서정적인 2악장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톤으로 무게감을 더한다. 여기에 로런스 포스터가 지휘하는 굴베키안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가 합세하여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마치 교향곡과 같이 장엄하게 표현된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선 전 악장 가운데 특히 3악장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슈타인바허는 3악장에서 다소 느린 템포로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으로는 잘 연주하기 어려운 화음을 꽉 채워 연주한다. 3악장에서 반짝이는 기교와 날렵함을 기대한다면 이런 연주가 처음에는 다소 둔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연주를 듣는 동안 그동안 이 곡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세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슈타인바허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3악장의 한 음 한 음 충실하게 연주하며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가 아닌 브루흐의 음악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또한 오케스트라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연주 덕분에 오케스트라 저음 성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살아나면서 유명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전혀 다른 곡으로 다가온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이나 장대하게 표현해내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라벨라 슈타인바허. 그녀는 확실히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바이올리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글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


▲ 로런스 포스터(지휘)/굴베키안 오케스트라
Pentatone Classics PTC 5186 503 (DSD, Hybrid-SA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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