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업계의 불황은 스튜디오 녹음에서 실황 녹음으로 제작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여기에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은 앞 다퉈 자체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는 중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자로 있던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녹음 장소로 선호했던 곳은 베를린 자유대학교 근처에 있는 예수그리스도 교회다. 작지만 음향이 매우 뛰어난 건물이다. 필자는 1996년 소프라노 권해선이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삼성나이세스에서 발매한 ‘퀸 오브 모차르트’를 녹음할 때 가본 적이 있다. 런던에 있는 유명한 녹음 스튜디오 중에는 교회당을 개조한 경우가 상당하다. 린드허스트 홀에 있는 에어 스튜디오는 1884년 문을 연 1,500석짜리 교회당이었다. 이후 신도 수가 줄어들어 1978년 문을 닫았다가 1991년 레코딩 스튜디오로 재탄생했다. 런던 사우스뱅크에 있는 헨리 우드 홀은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개조하여 1975년에 문을 연 연습실 겸 녹음 스튜디오다. 1970년 런던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가 녹음 스튜디오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런던 시내 오래된 교회당을 샅샅이 뒤지다 찾은 보물이다. 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런던 심포니·런던 필하모닉은 요즘 들어 녹음을 위해 이들 스튜디오를 찾는 일이 뜸해졌다. 음반업계의 불황으로 제작비가 덜 드는 실황 녹음이 대세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6일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마리스 얀손스의 지휘로 드보르자크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텅 빈 객석을 마주한 무대에 오케스트라 단원 110명과 합창단(빈 징페라인) 150명이 다시 모였다. 이날 공연 실황은 CD에 담겨 발매될 예정인데 몇 악장을 재녹음해야 했기 때문이다. 벌써 사복으로 갈아입은 단원도 있었고, 아직 연주복 차림도 있었다. 셔츠와 멜빵바지 차림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가 무대에 등장했다. 천장과 1층 객석 뒷면, 지휘대 바로 뒤에 붉은색 벨벳 천을 내걸었다. 객석에 청중이 가득 들어찼을 때의 음향 조건과 최대한 일치하게 흡음 커튼으로 잔향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재녹음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워낙 방대한 작품인데다 푸가풍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치밀하지 못했다. 최근 국내 번역되어 출간된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에 담긴 내용이다.
이날 녹음은 같은 날 연주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과 함께 하이브리드 슈퍼 오디오 CD(SACD)로 RCO 라이브 레이블에서 두 장짜리 CD로 나왔다. RCO 라이브는 얀손스가 암스테르담에 부임한 지 2년 만인 2004년에 출범한 자체 레이블이다. 2012년에는 얀손스의 지휘로 녹음한 말러 교향곡 전집을 박스 세트로 완성했다. 얀손스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서도 BR 클래식이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지난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냈다. 공연 실황을 CD는 물론 DVD에도 담아낸다. 지난 60년간 라디오 방송을 위해 녹음해두었던 음원들도 발굴해 CD로 발매하고 있다. 로린 마젤이 지휘한 슈베르트 교향곡 전집이 대표적이다.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2009년 그라모폰 지가 미국·프랑스·독일·영국 등 주요 일간지 소속 평론가들의 투표로 선정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에서 각각 1위와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뉴욕 필하모닉·보스턴 심포니·런던 필하모닉·마린스키 오케스트라·할레 오케스트라·시카고 심포니·샌프란시스코 심포니·빈 심포니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도 앞 다퉈 자체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하고 있다(표 참조). 말하자면 일종의 독립 레이블인 셈이다.
런던 심포니의 LSO 라이브는 지금까지 100장이 넘는 음반을 냈다.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이 팔려나갔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만 해도 3만 장 가까이 팔렸다. 2006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낸 데 이어 2009년 콜린 데이비스와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2012년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말러 교향곡 전집을 냈다.
런던 심포니는 CD 제작에 따른 개런티를 미리 지급하지 않는다. 음반을 팔아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때 지휘자·독주자·단원들이 로열티를 나눠 갖는다. 2000년 LSO 라이브가 출범했을 때 영국의 ‘클래식 FM 매거진’은 음반 역사에서 1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경이로운 사건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SFS 미디어가 낸 말러의 교향곡 3번은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말러 교향곡 전집을 완성했다. 시카고 심포니의 CSO 리사운드는 2010년 그래미상에 빛나는 베르디의 ‘레퀴엠’(지휘 리카르도 무티)을 비롯해 말러 교향곡 1·2·3·6번(지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을 냈다. 정명훈의 지휘로 녹음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시판되지 않고 다운로드만 가능하다. 시카고 심포니는 자체 레이블로 매년 두 장 이상의 CD를 내기로 했다. 빈 심포니는 옛날 녹음의 재발매를 포함해 매년 네 장의 음반을 내고 있다.
교향악단이 직접 만든 자체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은 대부분이 실황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2~3회 연주하는 정기연주회를 모두 녹음한 다음 작품에 따라 연주가 좋은 날짜의 녹음을 골라 CD에 담는다. 드문 경우지만 앞서 소개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경우처럼 일부를 재녹음하기도 한다. 실황 음반에서는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팽팽한 긴장과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연주회장 객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도 장점이다.
음악적 자부심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수단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이 직접 음반을 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이치 그라모폰·EMI 클래식스·데카 등 음반사들이 유명 교향악단과 3~5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을 내던 황금기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메이저 음반사들은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생소한 레퍼토리에 도전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교향악단이 발전하려면 상주 무대에서 정기연주회를 무난히 소화해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해외 투어와 음반 녹음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청중을 찾아나서야 한다. 음반은 콘서트홀 바깥에서 청중과 만나는 통로다. 음반 녹음은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경제적 수입원이기도 하지만 오케스트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공연평을 음반의 홍보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 메이저 음반사의 거대 자본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레퍼토리를 교향악단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단원들의 음악적 자부심을 세워줄 만큼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체 레이블에서 나온 실황 음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 음반사가 아니어서 초창기에는 마케팅에 서툴렀다. 그래서 녹음과 제작은 직접 하지만 판매는 낙소스 같은 기존 음반사 유통망에 위탁하는 경우도 있다. 음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를 비롯해 보스턴 심포니 홀이나 최근 대대적인 음향 개보수 공사를 거친 시카고 심포니 홀, 런던 바비컨 센터와 로열 페스티벌 홀이라면 안심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녹음 장소의 태생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건축 음향에서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어야 실황 음반을 만들 때도 풍부하고 섬세한 음향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콘서트홀을 지을 때도 무대에서 곧바로 CD 녹음은 물론 DVD 녹화, 생중계 TV 방송이 가능하도록 마이크와 카메라 설비를 처음부터 갖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황 음반은 남부럽지 않은 음향 조건을 갖춘 콘서트홀에서 정기연주회를 치르는 오케스트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글 이장직 객원 전문기자(lully@gaeks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