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바스티유의 정명훈, 6년간의 기록
1994년 정명훈의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직 사임은 1989년 그의 취임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직은 정치적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자리의 하나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989년 12월호, 정명훈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취임
1989년 5월, 파리오페라 이사장인 피에르 베르제는 오페라극장 건립과 더불어 한국의 정명훈을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정명훈은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계 최정상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듬해 열린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개관기념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정명훈은 오페라의 최대 난곡으로 손꼽히는 베를리오즈의 대작 ‘트로이 사람들’을 6시간 30분에 걸쳐 완벽하게 지휘했다. 정명훈은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의 박수 소리를 통해 이 공연이 이 나라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였는가를 느꼈다. 사람들이 그 중요한 책임을 내게 맡기고 그만큼 후원해준다는 것이 놀라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1994년 3월호, 바스티유 오페라단 내한 공연 성사, 해임 루머 발발
정명훈이 이끄는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7월 18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최근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하고 미테랑 대통령이 수세에 몰리자, 그의 임기 중에 취임한 정명훈은 이번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바스티유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개인 비서는 “정명훈은 바스티유의 안팎으로 신뢰를 받고 있으며, 2001년까지 임기를 연장하는 계약서에 이미 사인했다”라고 하며 소문을 일축했다.
1994년 8월호, 바스티유-정명훈 간 갈등의 전말
클뤼젤 임시극장장은 각 분야 책임자를 우파로 교체하고, 적자를 이유로 직원을 감원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 그는 정명훈에게 “2001년까지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직으로 위촉한다”라는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했다. 아울러 재계약 기간을 3년 단축하고 연봉도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삭감했다. 레퍼토리나 아티스트 선정 등에 대한 음악감독 고유 권한을 제한하는 등 사실상 퇴진 요구나 다름없는 내용의 재계약을 요구했다. 만약 정명훈이 새로 제시하는 계약에 응하지 않을 때는 이미 체결한 계약이 무효가 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정명훈 측에서는 “예술적인 이유 없이 정치적인 압력 행사에는 굴복할 수 없다”라며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4년 9월호, 정명훈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전격 해임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진 이 사건은 사건 발단 3개월 만인 1994년 9월 7일, 정명훈이 바스티유 측으로부터 9백만 프랑의 위약금을 받고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이로써 정명훈은 지난 10월 14일 ‘시몬 보카네그라’ 공연을 마지막으로 5년 동안 이끌었던 바스티유 오페라를 떠났다. 프랑스 언론은 해임의 부당성에 대해 보도했다.
클뤼젤 임시극장장 측은 정명훈이 협상 절차를 무시하고 내부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흘려 협상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정명훈 측에 보낸 해임장에는 바스티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그에 반해 정명훈은 극장 측이 제시했다는 협상 조건은 매우 굴욕적이었으며, 결국 스스로 그만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으므로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을 초대 회장으로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설립됐다. 이후 메세나 운동이 기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2004년 한국메세나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열린 제1회 민족춤제전에서 현대무용 ‘나그네’(남정호 안무)와 ‘어느 에세이’(황미숙 안무), ‘나무가 우는 밤’(김현미의 창작춤)이 공연됐다.
임원식/서울시립교향악단의 윤이상 교향곡 3번으로 제1회 윤이상음악제가 막이 올랐다. 강동석·정치용·조성진 등 역량 있는 국내 연주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객석’은 1994년 8월호에 윤이상의 특별 기고를 실어 역사적인 행사를 기록했다.